Golden Mage RAW novel - Chapter (241)
제121장 더글라스의 귀환
“…….”
제시카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눈앞에 있는 남자의 행동 자체가 그녀에게 큰 부담을 주었던 것이다.
“부탁드리겠습니다, 마스터. 지금 미국은 당신의 힘을 간절히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너무 갑작스러워서. 게다가 마스터라니, 그런 표현은 가당치도 않아요.”
“아닙니다. 당신은 충분히 그만한 대우를 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미국을 위해, 그리고 A.O. 본부를 위해 끝까지 노력하지 않았습니까? 지금 미국은 몇 차례 사건으로 혼란에 휩싸여 있습니다. 마스터의 도움이 간절히 필요로 합니다.”
“나는…….”
눈앞의 중년인, 곧 출범할 미국 정부의 부통령을 맡은 아담 시몬의 부탁에 제시카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녀가 과거 A.O. 본부의 중추에 있었다고 하나, 미국을 이끄는 건 그들이었다.
먼 곳에 존재한다고 생각하던 이들이 자신에게 와서 이렇게 간절히 부탁을 하고 있으니 마음이 흔들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지금 우리는 새롭게 A.O. 본부를 개편하려고 하고, 그 중심에는 당신이 있습니다. 당신의 힘이라면 어려워진 미국의 상황을 훌륭하게 타개하리라 믿습니다.”
“그 전에 있던 A.O. 본부는 어떻게 되었죠?”
제시카는 대답을 하지 않은 채 아담 시몬의 말에 반문했다. 얼마 전에 찾아와서 부탁하던 A.O. 본부장 안데르센의 존재를 떠올렸던 것이다.
그가 자리를 지키고 있다면 자신에게 부탁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 다른 사정이 있다고 생각한 그녀의 표정이 심각해지자, 아담 시몬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현재 대대적인 개편에 들어가 있습니다. 안데르센은 전 정부와 작당 모의를 하고 개인의 영광을 위해 수작을 부렸습니다. 애초에 역량도 되지 않는 자가 본부장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그런…….”
“지금 A.O. 본부는 마스터 윤이 초석을 닦을 수 있는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정부에서 필요한 모든 지원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남은 것은 마스터 윤이 미국의 영광을 위해 역량을 발휘해주시는 것뿐입니다.”
“…….”
입을 다문 제시카는 장고에 빠져들었다. 말이 없어진 그녀를 보며 아담 시몬은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예 마음이 없다면 처음부터 단호하게 거절을 했을 터. 하지만 이렇게 생각을 해본다는 것 자체가 일말의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걸 의미했다.
“당장 결정을 내리기는 힘들어요. 내일까지 기다려 주시겠어요?”
“마스터 윤의 뜻을 존중합니다. 부디 현명한 결정을 내려주시길…….”
자리에서 일어난 아담 시몬은 정중하게 인사를 건넨 뒤 방을 벗어났다.
그 광경을 조용히 지켜보던 제시카는 자신을 감싼 불편한 공기가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아!”
“그래서 흔들려?”
“……네.”
세희에게 모든 상황을 털어놓은 제시카는 그녀의 반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평생 미국의 이익을 위해 능력자로 살아왔다. 예전보다 약해져서 온전한 모습을 보이지 못하는 조국이 자신의 능력을 필요로 한다니 당장 움직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아직 어리네.”
“무슨 말씀이시죠?”
저도 모르게 날카로운 목소리로 대답한 제시카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세희는 그에 개의치 않고 자신의 말을 이어 나갔다.
“그들이 너의 능력을 필요로 한다고 쳐. 당장 미국 A.O. 본부에는 너보다 나은 능력자가 없거나 한둘 정도가 고작일 테니까. 그런데 다짜고짜 널 데려가서 A.O. 본부장을 시켜? 네가 그걸 완벽하게 수행할 만큼 역량이 된다고 스스로 생각해?”
“…….”
적나라한 세희의 반문에 제시카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고 말았다. 자신이 생각해도 더글라스가 했던 것처럼 A.O. 본부장의 역할을 해낼 거란 확신이 없던 것이다.
“답은 간단해. 저들은 이번 선거에서 승리했고 자신들의 역량을 과시할 필요가 있어. 그러기 위해서는 예전 세계 최강의 전력을 지녔던 A.O. 본부의 재건이 필요하겠지. 그리고 당시 중요한 역할을 했던 네가 상징성을 지닐 수 있고.”
“상징성이라고요?”
“A.O. 본부를 독립시킨다고 해도 그들에 의해 본부장이 된 네가 자유롭게 행동하는 건 불가능해. 어차피 저들의 정치적인 술수에 의해 움직이는 희생양,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야.”
“그런…….”
자신을 간절하게 바라던 아담 시몬에게 그런 의도가 있었다는 사실을 듣자, 제시카는 망연한 표정을 지었다.
“실망스러울 수 있어. 당장 네가 가서 A.O. 본부를 재건하고 예전의 위용을 되찾게 만들고 싶을 테니까. 하지만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야. 아마 미국은 널 선전용으로 쓰고 우리와 친분이 있다는 걸 이용해서 MP Trade를 설치하려고 할 거야. 이보다 더 완벽한 전시행정이 어디 있겠어. 안 그래?”
“……네.”
억측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지만 세희의 말이 구구절절 옳았다.
제시카는 미국이 패권을 유지하기 위해 깨끗한 수단만 쓰지 않은 것을 잘 알고 있고, 정신계 능력자로서 많은 것을 봐왔다.
“반면 우리는 달라. 이익을 추구하기는 해도 근본적으로 인류를 위한 길을 지향하고 있어. 제시카 넌 그중에서도 내가 각별히 아끼는 마법사고. 충분한 재능이 있으니 열심히 하면 높은 수준에 도달할 거야. 그곳의 관리자가 되어 인류를 위험에서 구해내는 게 더 보람차지 않아?”
“하지만 저는 실력도 부족하고 그럴 자신도…….”
“지금 네가 배우는 속도가 다른 마법사들보다 훨씬 빠르거든? 아마 그 사람들 앞에서 이런 말을 했으면 자살하고 싶었을지도 몰라.”
“그럴 의도는 아니었어요.”
“제시카 넌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어. 그러니 흔들리지 말고 냉정하게 생각해 봐. 그래도 미국으로 떠나겠다면 순순히 보내줄게. 하지만 전후사정을 살펴보면 과연 내 말이 틀릴까?”
순간 웃으면서 자신에게 권유하던 아담 시몬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제 곧 부통령이 될 그가 자신을 원한 이유가 개인의 영달을 위해서일까? 아니면 미국의 미래를 위해서일까? 자신을 추켜세우면서 A.O. 본부장을 권유했지만 잘 찾아보면 나이가 많아 은퇴했거나 정부 산하로 들어가면서 조직을 떠난 능력자도 있다.
결국 적당히 어리면서 말을 잘 듣게 만들 수 있는, 그러면서 MP Trade 설치까지 노리고 자신을 선택한 것이다. 그 부분에 대해서 이견이 없었다.
“이곳에 남을게요.”
“정말? 후회할지도 몰라.”
“조국에 대한 마음은 있지만 진정으로 위했다면 제게 본부장의 자리를 제안하지 않았을 거예요. 잠깐 생각해 봐도 확실하게 알 수 있어요. 미처 눈치채지 못하던 부분을 일깨워 주셔서 감사해요.”
고개를 꾸벅 숙이는 제시카를 보며 세희가 미소 지은 채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세상이란 게 다 그래. 어떻게든 속여먹으려고 한다니까? 그러니 좋은 사람을 알아보는 눈을 가진 것도 축복이야. 우리는 몇 되지 않는 마법사의 재능을 지닌 널 존중해. 앞으로도 잘 부탁해.”
“네.”
짧지만 한 음절 대답에서 느껴지는 굳은 결의에 세희는 미소를 지었다.
의도적으로 상대를 험담한 것도 없지 않아 있었지만 표현상의 문제일 뿐, 숨겨져 있는 의미는 비슷했다. 그걸로 제시카를 확실하게 아군으로 만들었으니 나쁘지 않은 성과였다.
‘그나저나 머리를 영악하게 굴리네? 한 번 따끔하게 가르쳐 줘야 하나.’
자신들이 아니라 교묘하게 옆으로 파고드는 행태에 세희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준! 저 왔어요!”
해맑은 미소를 지은 이나가 준성을 향해 나비처럼 날아 벌처럼 쏘며 안겨들었다. 품속에서 느껴지는 묵직한 느낌에 미소 지은 준성은 그녀의 등을 토닥여 주며 입을 열었다.
“수고했어. 고생이 많았지?”
“아니에요. 독일 구경도 하고 사람들도 사귀면서 좋은 시간 보냈어요.”
“많은 걸 보면 생각하는 것도 트일 거야. 그러면 앞을 가로막고 있는 벽도 자연스럽게 허물어질 거고.”
“그 부분에 대해서 특별히 조급함을 갖지 않기로 마음먹었어요. 그럴수록 검이 산만해져서 제대로 위력을 발휘할 수 없거든요.”
“좋은 판단이야.”
준성과 이나는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면서 그동안 있었던 이야기를 했다. 독일의 상황에 대해서 털어놓던 이나는 준성에게 드래곤 이야기를 듣자 불같이 화를 냈다.
“그 녀석들은 어떻게 그럴 수 있어요! 인공 드래곤 하트를 준 것도 준성이고, 용언도 가르쳐 준 게 준성인데 지구 신 녀석한테 붙다니! 당장 제거해 버릴게요! 말리지 마요!”
“배신까지는 아니야. 필요에 의해 타협을 한 거지. 최악의 상황이 닥치면 우리를 돕기로 했으니 무작정 드래곤을 비난할 수 없어.”
“그래도요! 그렇게 제 구실할 수 있게 만들어 줬더니 자기 살 길만 찾아가고. 완전히 실망이에요, 실망.”
준성이 말리지 않았다면 당장 검을 들고 달려갈 기세였다. 드래곤과 함께 지낸 시간만큼 제법 정이 들었기에 상대적으로 느끼는 배신감도 컸다.
꽤 오랜 시간을 들여 흥분을 가라앉힌 이나는 준성을 보며 말했다.
“그런데요. 제가 독일에서 지내다 보니 많은 걸 느끼긴 했어요.”
“그랬어?”
“네, 준은 MP Trade로 그들의 환심을 사라고 했지만 근본적으로 좋은 사람들이 많더라고요. 함께 나아갈 수 있다는 느낌? 그만큼 괜찮았어요.”
“그게 인간의 오묘한 점이지.”
“그래서 말인데…… 이런 제안을 받았어요.”
독일의 모니카 총리는 이나에게 미하엘의 실력을 봐줄 수 없냐고 넌지시 부탁했다.
세계 10강의 자존심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부탁이지만 거기에서 이나는 한 가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기존의 인간들 실력을 끌어 올리면서 아군으로 삼고, 또다시 닥쳐 올 신족의 지배에 적극적으로 대응할 수 있을 거라고. 믿을 만한 사람들이라면 한 번쯤 해봄직한 모험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준성의 대답은 부정적이었다.
“미안하지만 불가능한 일이야. 지금 당장 좋은 감정을 가지게 된 건 독일과 우리가 MP Trade의 설치가 기반되었기 때문이야. 우리가 저들에게 힘을 부여하고, 아군이 된다면 더없이 좋지만 힘을 가진 인간은 변하기 마련이고 대부분 안 좋은 쪽으로 흘러가.”
모처럼 이나가 마음을 연 것 같아 기꺼웠지만 세상은 뜻대로 돌아가지 않는 법이다.
“……그렇겠죠?”
“미안하지만 그래. 드래곤도 그렇잖아? 사람은 그들보다 훨씬 쉽게 변해.”
“그렇죠, 하아!”
잠시나마 활활 타오르던 마음을 붙들지 못한 이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섭섭했지만 자신이 너무 앞서 나갔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이번 일로 지구 신은 기회가 생기면 확실하게 제거하기로 마음을 먹었어. 그때가 되면 이나 너도 힘을 보태줘. 해줄 수 있지?”
“물론이죠. 그런데 지구 신은 올림푸스인가 하는 곳에 있다면서요? 기회가 올까요?”
“드래곤도 그렇고 우리와 우호적인 관계에 있는 이들을 만나는 걸 보면 조만간 기회가 찾아올 것 같아. 그러니 그때를 위해 기다려 줘. 곧 움직일 때가 올 테니까.”
“……지금 준의 얼굴 무서워요.”
“그랬어? 미안.”
얼굴을 매만지며 준성은 멋쩍게 웃었다. 지구 신을 생각하면 표정 관리가 되지 않을 만큼 감정이 틀어져 있었다.
이나는 그러한 기미를 눈치채지 못한 채 전혀 다른 부분에서 감탄하고 있었다.
“그래도 잘생겼으니까 됐어요.”
“하하!”
스스로 생각해도 잘생긴 얼굴은 아니었기에 준성은 멋쩍게 웃음을 흘렸다.
‘잘생겼나?’
이런 말을 들을 때면 하게 되는 어처구니없는 생각이었다.
“여러 가지 생각을 해봤는데 아무래도 힘들 것 같아요. 죄송해요.”
제시카의 말을 듣는 순간, 아담 시몬의 표정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다방면에서 조사한 결과 그녀는 간곡한 부탁에 약한 편이고, 자신의 화술이면 충분히 설득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거절이었다. 그것이 마음에 들 리 없었다.
“한 번 더 생각해 보시는 게 어떻습니까?”
“그래도 제 대답은 같아요. 거절이에요.”
“어째서입니까? 마스터 윤은 흔들리는 미국을 바로잡아 줄 수 있는 유일한 분입니다.”
유난히 미국이라는 말을 강조하는 아담 시몬이었다. 그녀의 애국심에 대해서는 의심할 바가 없기에 그 부분을 공략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아닙니까?”
“그게 아니라 지금 저를 끌어들이려는 게 미국을 위해서인가요, 아니면 개인의 정치적인 야망을 이루기 위함인가요?”
“…….”
직설적인 말에 아담 시몬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고 말았다. 설마하니 제시카가 이렇게 직설적으로 자신의 의도를 물어볼 줄 몰랐던 것이다.
“대답해 보세요.”
“그건…….”
“제게 거짓이 통할 거라 생각하면 오산이고요.”
정신계 능력자인 제시카는 진실과 거짓을 판별할 수 있는 눈을 지니고 있다. 그녀에게 거짓으로 넘겨 버리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 자승자박이 되어 버린 그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런 의도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마스터 윤이 미국 A.O. 본부를 일으켜 세워 줄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건 사실입니다.”
“그렇군요.”
그 말이 거짓은 아니었다. 적어도 그가 미국을 위해 일하는 자임을 알아차린 제시카의 얼굴은 한결 밝아졌다.
그렇다고 결정한 바가 바뀌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제 대답은 같아요.”
“다른 방법이 없겠습니까? 미국 A.O. 본부를 재건하기 위해서는 마스터 윤과 같은 정통성을 지닌 분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끝까지 제시카를 설득하고자 했지만 그의 열변에 대답한 것은 남자의 목소리였다.
“그걸 떠나 미국의 저력은 강하지.”
“……!”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린 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 갔다. 제시카를 섭외함에 있어 이 자리에 없었으면 하는 인물이 서 있었던 것이다.
준성은 감정 한 점 담기지 않은 눈으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잘도 금탑의 인원을 빼내려고 하더군.”
“그건…….”
낭패한 표정이 역력한 아담 시몬은 제시카를 바라보았지만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눈빛을 받아냈다.
“한 가지 분명한 건 제시카는 미국 A.O. 본부로 넘어갈 생각이 없다. 현재 미국 A.O. 본부는 정치적인 희생을 강요당하는 것에 지나지 않지. 그 수렁에 제시카를 보낼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하지만 미국은 세계의 중심입니다. 그곳이 안정되는 것도 금탑에게 나쁘지 않습니다.”
“그렇긴 하지. 제시카가 미국 A.O. 본부로 가면 더 빠르게 안정되는 것도 사실일 테고. 하지만 제시카만 대안인 건 아니지.”
“다른 수가 있습니까?”
“아무래도 미국의 저력을 얕보고 있는 건 당신인 것 같군, 아담 시몬 부통령.”
“…….”
자국의 상황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사람이 된 아담 시몬의 표정이 형편없이 일그러졌다.
하지만 이어지는 준성의 말에 안정된 표정을 짓는가 싶더니 이내 미소가 피어나기 시작했다.
“더 이상 무리야.”
타나는 냉정할 정도로 단호하게 말했다. 그의 옆에 있는 악마 신 또한 동감이라는 듯 힘이 빠진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질긴 녀석들이 아닐 수 없군요. 킥킥!”
“이제 남은 방법은 하나야.”
“방법이 또 있는 겁니까?”
“이곳을 벗어나서 지구로 돌아가는 거야.”
“…….”
타나의 제안에 악마 신은 입을 다물고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에 수많은 생각이 맴돌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었다.
“그동안 쌓아온 모든 기반을 날려 버리란 겁니까?”
신족을 무너뜨리기 위해 노력하던 세월의 흔적이었다.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서 그들의 반격으로 모든 게 물거품이 되었지만 버리기에 아까운 마음이 드는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타나는 강적이었다.
“그게 목숨보다 소중하면 남아 있든가.”
“킥! 그렇군요. 그들이 아쉬워도 내 목숨보다 소중할 수는 없는 법이지요. 아암, 어떻게 신의 반열에 올라 이 수준까지 도달했는데.”
신족에게 붙잡히면 단순한 소멸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말살. 존재 자체가 말살될 때까지 그들은 강력한 공격을 끝없이 퍼부을 것이다. 신에 이어 두 번째 패배자로 전락하는 것만큼은 절대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하지만 저들의 차단은 단단합니다. 차원을 넘어갈 수 없지요.”
악마 신이 시전하는 차원 이동은 신족에 의해 봉쇄되어 있었다. 만약 그게 가능했다면 타나를 만나기 전, 지구로 도망치는 것을 선택했을 것이다.
“너는 불가능하지만 나는 가능해. 방법은 묻지 마. 어차피 가르쳐 주지 않을 거니까.”
“그것 참 아쉽군요.”
입맛을 다시는 악마 신의 모습을 가볍게 무시하고 타나가 결정을 종용했다.
“어떻게 할 거야?”
“이동하겠습니다. 아직 소멸하기에는 제 안의 욕망이 너무 많군요.”
“좋아.”
고개를 끄덕인 타나가 허공을 향해 손을 휘둘렀다. 나직한 절삭음과 함께 허공에 균열이 일어나는가 싶더니 섬뜩한 공간 균열음이 울려 퍼졌다.
키이잉! 키이잉!
“아?”
이윽고 원하던 차원 이동문이 모습을 드러내자, 악마 신의 뒷덜미를 잡은 타나가 냅다 그곳으로 던져 버렸다. 그와 동시에 차원 이동의 힘이 약해지면서 이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일단 귀찮은 짐은 하나 처리한 건가.”
악마 신을 귀찮은 짐으로 비유한 타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차원 이동을 시전한 여파 때문인지 대신족들이 곳곳에서 밀려드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짐을 내버린 이상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 그녀는 푸른빛과 함께 그대로 자리에서 자취를 감추며 사라졌다.
“이게 뭐죠, 테라?”
질문을 하는 헤스티아의 목소리는 잔뜩 경직되어 있었다. 차원 이동이 시전된 곳으로 시선을 고정하던 테라의 목소리도 딱딱하게 굳었다.
“……놓쳤다.”
“어떻게? 우리가 모든 퇴로를 완벽하게 차단하고 있었는데 차원 이동이라니. 믿을 수 없어.”
“조력자가 있었다. 우리의 포위망을 뚫고 도망갈 정도니 아마 다른 원리의 힘을 사용하는 자들이겠지.”
“그 말은…….”
“또 그 인간무리가 우리를 방해한 것 같군.”
담담하지만 그 속에 격렬한 분노가 들끓고 있었다.
악마 신의 개입은 신족의 모든 계획을 어그러뜨렸다. 세계를 지배하고자 하던 그들의 기반을 송두리째 버리게 만들었으며, 신족의 터전인 이 세계를 전쟁으로 몰아넣었다.
처음부터 기반을 다져야 할 상황에 직면하자 표정이 밝을 수 없었다.
“아무래도 방법이 없군. 모두를 모아와라.”
“무슨 말을 할 생각이죠?”
“이곳은 더 이상 무리다. 우리는 지구로 침공을 개시할 것이다.”
“왜죠? 지금 시급한 건 이곳을 안정시키는 건데…….”
당연한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임에도 헤스티아의 목소리에는 의문이 서려 있었다.
“너도 느끼고 있을 것이다, 헤스티아. 이 세상은 더 이상 버텨 낼 수 있는 여력이 사라지고 있다.
“어째서죠?”
“모두를 데려오면 그 사실을 말해 줄 것이다. 너희들도 이제 세계의 비밀에 대해서 알 자격이 생겼으니까. 아마 긴 이야기가 될 거다.”
“……알겠어요.”
다른 대신족을 부르기 위해 헤스티아가 자리를 비웠다. 혼자 남은 테라는 푸른 하늘을 바라보면서 자신이 해야 할 말을 정리했다.
처음에는 홀로 짊어지고 악역을 자처하려고 했다.
동족들이 번영을 누릴 수 있다면 이 정도 업보쯤은 자신 혼자 짊어져도 된다고 생각했기에.
하지만 세상은 잔혹했고,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았다.
뒤늦게 닥쳐 올 상황이었지만 악마 신의 개입으로 세계의 변화는 더욱 격렬해졌다.
“진실을 말해 줄 수밖에.”
이 세상은 얼마 지나지 않아 멸망한다.
숨겨 왔던 그 사실을 동족들에게 알려줄 생각이었다.
준성의 눈은 세계의 절반 이상에 퍼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계 각지에서 일어나는 공간 이동을 감지하는 것은 물론, 이동하는 힘의 양을 가늠하여 상대가 누구인지 알아맞히는 것도 가능했다.
그가 신족을 공격하기 위해 뉴욕으로 진격할 수 있었던 것도 그들 중 몇이 차원 이동을 한 것인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 전해지는 힘의 여파는 준성의 눈을 반짝이게 만들었다.
“바로 기회가 찾아올 줄 몰랐네, 서방.”
“무슨 일이에요, 준?”
상황을 간파한 세희와 다르게 이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뒤이어 온 엘리엔과 영웅이도 모르기는 마찬가지였다.
“이제 때가 됐어. 내가 저번에 지구 신을 제거할 기회가 생기면 움직이겠다는 걸 기억해?”
“물론이죠. 우유부단하기 짝이 없던 준이 단호한 결정을 내렸다고 생각해서 얼마나 기뻤는데.”
“……거슬리는 표현이 있었지만 어쨌든 지금 기회가 생겨났어. 세계 각지에 깔린 공간 이동 감지기를 기억하지? 거기에 거대한 힘의 준동이 감지됐어. 이 정도면 신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고.”
“그럼 지금 신을 잡으러 가는 거야?”
“맞아. 오늘 놓치면 두 번 다시 이런 좋은 기회는 찾아오지 않을 거야. 그래서 움직이려고 해. 도와줄 수 있지?”
“물론이죠, 당장 잡으러 가요! 우리가 힘을 합치면 제까짓 게 신이라고 해서 별수 있겠어요? 완전 간단하니 가도록 해요.”
“리엔의 생각은 어때요?”
준성의 눈이 엘리엔에게 향했다. 지구 신에게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다면 이번 전투에서 그녀를 배제할 생각이었다. 전력 누수를 느낄 수밖에 없지만 상대를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다면 전투에서 제 역할을 못할 테니 말이다.
“하겠다. 아니, 꼭 하게 해줬으면 좋겠다.”
“그러다 아무것도 못한 채 무너지면 곤란해요.”
“내가 아직도 정신적인 충격을 극복하지 못했다고 생각하나?”
“…….”
준성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엘리엔도 입을 닫고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두 시선이 허공에서 얽혀 들었고, 지구 신에 대한 두려움보다 원망이 가득한 걸 감지할 수 있었다.
이 정도 각오라면 그녀 또한 충분히 제 몫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좋아요, 가도록 하죠.”
“고맙다.”
“별말씀을. 영웅이 너도 괜찮지?”
[물론이다. 이제야 내 진면목을 보여줄 때가 되었군.]“그럼 이동하지.”
지금 대화를 나누는 순간에도 힘의 여파가 사라질 여지는 얼마든지 존재했다. 의견을 확인한 즉시, 준성은 매스 텔레포트를 시전하여 지구 신이 있는 곳으로 짐작되는 장소로 향했다.
그리고 준성의 결정이 잘못되었다는 걸 느끼는 데에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아무래도 서방이 잘못 느낀 것 같은데?”
“…….”
분명 신의 것으로 추정되는 힘의 잔향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이토록 사이하고 어두운 힘은 지구 신의 것이 아니다.
지금쯤 다른 차원에서 신족과 전쟁을 치르고 있을 악마 신의 것이었다.
지구 신이라 생각했던 힘은 악마 신의 것이었던 것이다.
완전히 헛다리를 짚은 셈이 된 준성은 미간을 찌푸렸지만 상대가 악마 신이라면 완전히 실패한 것도 아니다.
주변을 둘러보며 시선을 마주친 그는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으며 말했다.
“악마 신도 우리의 행보에 방해가 될 게 분명해. 지금 잡지 않으면 언제 잡을 수 있을지 몰라. 가자!”
선두에 선 준성이 다른 말 나올 여지도 없이 결정을 내렸다.
그것이 꿩 대신 닭임을 모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남아 있는 힘의 잔향을 좇아 준성이 빠르게 움직였다. 한순간 이나나 엘리엔, 영웅이가 놓칠 정도였지만 거기까지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
빠르게 이동한 준성의 앞에는 멈칫거리며 자리에 서 있는 악마 신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오랜만인데?”
“킥킥! 오랜만입니…… 컥!”
웃음을 흘리며 인사를 하던 악마 신의 몸이 거센 충격을 받고 뒤로 튕겨 나갔다. 참을 수 없는 고통이 전신을 타고 전해지자, 가면을 뒤집어썼던 얼굴에 균열이 일어났다.
처음부터 준비해 온 신언이 악마 신의 몸을 강타했던 것이다.
“우리가 다정하게 인사나 할 사이가 아닌 걸 잘 알고 있을 텐데.”
“크으으!”
신언은 신조차 소멸시킬 수 있는 비기 중 비기였다. 찰나의 순간 대비를 했음에도 적중한 신언은 악마 신의 내부를 뒤집어 놓았다.
“준! 이게 뭐에요?”
그때 이나를 비롯한 엘리엔과 영웅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쓰러져 있는 악마 신을 보고 멈칫했지만 태연한 준성의 태도에 빠른 속도로 안정을 되찾았다.
“대화할 준비를 한 거야. 이만 일어나지? 참을 만하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후욱! 후우! 아주 거창한 환영 인사로군요.”
“환영 인사라고 생각하니 어처구니가 없군. 더 강한 인사를 해줘야 하나.”
“킥! 사양하지요.”
호흡을 가다듬은 악마 신은 자리에 앉았다. 태연한 모습을 보이지만 신언이 준 타격이 가시지 않았다는 걸 준성은 모르지 않았다.
“왜 지구로 돌아왔지?”
“간단합니다. 신족에게 졌습니다. 저는 당신이 좀 더 막아줄 줄 알았는데, 참 아쉽게 되었군요.”
“신족들이 그렇게 허술할 리 없겠지. 타나를 만났나?”
“그게 누구인지?”
현저히 불리해진 상황에서 유용한 패로 작용할 수 있는 것을 놓칠 만큼 악마 신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어깨를 으쓱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준성은 전혀 개의치 않는 기색이었다. 오히려 피식 웃으며 말했다.
“어차피 타나를 만났는지 여부는 내게 크게 중요하지 않아. 날 한 번 물 먹였던 네가 지금 무력화된 채 내 앞에 있는 사실이 중요하지.”
“…….”
악마 신은 긍정도 부정도 표하지 않았다. 준성의 주변에 은은하게 퍼져 있는 살기가 진짜라는 걸 알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여유를 되찾았다. 만약 그가 자신을 소멸시킬 생각이라면 진즉에 움직임을 보였을 걸 모르지 않았던 것이다.
“킥! 그래서 저를 소멸시킬 생각인지?”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듯한 게 참 유감스럽군. 나는 어느 선택을 해도 상관이 없는데.”
“그래도 이렇게 남겨 둔다는 건 쓸모가 있다고 생각을 해서겠죠. 아닙니까?”
“틀린 말은 아니야.”
지구 신이 아니라 악마 신이기에 아쉬운 마음이 컸지만 그래도 차선책으로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신족이 악마 신을 상대로 승리를 했다는 것은 곧 지구로 올 거란 걸 의미했기에, 믿을 수 없지만 아군으로 삼아 놓는 것이 중요했다.
“두 가지 선택안을 주겠다. 첫 번째는 나와 협력해서 내가 하는 일에 힘을 보태는 것. 두 번째는 순순히 소멸의 길을 걷는 것이다.”
“선택의 폭이 너무 좁군요. 하나밖에 선택할 수 없지 않습니까?”
“그게 상관이 없다면 소멸을 해도 되겠지.”
“킥킥! 그럴 수 있겠습니까? 저는 신의 고고함보다 생존을 우선시합니다. 말씀하시지요. 제 힘이 닿는 한 돕도록 하겠습니다.”
신이라 보기 힘든 경박하기 그지없는 행동이었다. 믿음이 전혀 가지 않는 태도였지만 그런 악마 신의 힘도 필요했다. 그래서 준성은 악마 신을 옭아매기 위한 개목걸이를 준비해 둔 상태였다.
“신언으로 맹세해라.”
“그게 무슨 뜻입니까?”
“내게 협력할 것을 신언으로 공증하라는 뜻이다. 설마 내가 널 믿을 거라 생각한 건 아니겠지?”
“…….”
그제야 악마 신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상대가 자신을 완전히 옭아매려고 한다는 것을 눈치챈 것이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받아들일 수 없다는 말도 하면 안 됐다. 그 말을 하는 순간 상대는 자신을 소멸시키려 들 테니 말이다.
준성은 악마 신이 생각한 것보다 더 매몰차게 선택을 강요했다.
“신의 회복력은 무시할 수 없는 노릇이니 바로 결정을 해주면 좋겠군. 5초의 시간을 주겠다. 5, 4, 3, 2, 1…….”
“맹세하겠습니다. 어떤 일에 힘을 보태길 원하십니까?”
“지구 신과 신족을 상대할 때다. 너무 옭아매면 소멸을 선택할 수도 있으니 내 조건은 지구 신과 대신족을 상대할 때 힘을 보탠다고 약속하면 된다. 받아들일 건가?”
“나는 당신들의 제안을 받아들이겠습니다.”
악마 신의 신언이 발현됨에 따라 방금 전 말은 강력한 구속력을 지니게 되었다.
마법사가 마나의 맹세에 의해 언행에 영향을 받듯이, 신 또한 자신의 격을 실어서 맹세하면 심각한 제약이 가해진다. 신언으로 맹세한 이상, 악마 신은 준성의 요구를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이곳에서 지낼 곳은 있나?”
“당분간 숨어서 힘을 회복할 예정입니다. 신족들의 공격이 참 집요하더군요, 킥킥!”
“그럼 다음에 다시 보도록 하지. 그리고 타나를 만난 적이 있나?”
“이곳으로 올 수 있게 해준 것이 바로 그녀입니다.”
“그렇군.”
대답과 함께 준성은 고개를 끄덕였고, 악마 신은 공간 이동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그가 어디로 숨어들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신언의 약속은 지구 신이나 대신족을 상대함에 있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아담 시몬이 제시카를 만나고 돌아가고 몇 달 뒤, 미국의 정권이 바뀌면서 칼 리빙스턴의 취임식이 거행되었다.
뉴욕 대참사의 상처를 극복하고 다시 세계를 아우르는 미국이 될 것을 약속한 칼 리빙스턴은 자신의 정치적 첫 성과로 금탑과 협정을 맺어 MP Trade를 유치했다는 말을 전했다.
이 소식이 미국은 물론 전 세계에 퍼져 나감에 따라 큰 파장을 일으켰다.
로저 리차즈 전 대통령의 실정으로 큰 위기가 왔던 미국을 부활시키기 위한 방법으로 MP Trade의 유치밖에 없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하지만 신족 지배의 중심지가 미국이었고, A.O. 본부가 정부에게서 독립되지 않았다는 말을 들으며 사실상 무산이 되었다.
신족이 등장하면서 세계 최강의 전력을 다투던 A.O. 본부 전체를 날려 버렸기에 다시 그 전력을 갖추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릴 거라 전망했다. 자연히 몬스터를 토벌하는 데 힘이 들고, 능력자의 사망 숫자도 증가하면서 MP Trade의 유치는 불가능에 가깝다는 말이 나오게 되었다.
그런데 그 예상들을 모두 깨고 칼 리빙스턴 대통령은 MP Trade 설치 성공을 선언한 것이다. 그리고 금탑에서도 조건부로 승낙을 했다는 말이 전해지자 침체되었던 미국 경제가 활성화될 기미를 보였다.
하지만 남의 행복은 곧 자신의 불행.
대륙 국가인 미국에 MP Trade가 설치된다면 다른 국가의 순서는 그만큼 뒤로 밀려나기 마련이다.
자연히 MP Trade 유치를 위해 노력하던 타국 언론은 금탑의 행태를 비판하기 시작했다. 아직 완전한 A.O. 본부 독립도 이뤄내지 못한 미국에 MP Trade 설치는 잘못된 결정이라며 말이다.
몇몇 국가가 동시에 진행한 이 논조는 불같이 번져 가면서 세계 각국이 금탑을 공격하는 빌미가 되고 말았다.
“저도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요.”
외국 소식에 가장 민감한 이나는 준성의 결정에 우려를 표했다.
MP Trade는 금탑이 인간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한 장치였다. 마나를 독점하고, 각국이 금탑에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게 만들 수 있는 강력한 패였는데 지금은 비판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무엇을 걱정하는지 알아. 하지만 지금은 이게 필요한 때야.”
“필요하다니요? 지금 문제가 되는 건 원리원칙 때문이잖아요. 저는 준이 원리원칙을 깨면서까지 미국에 설치하려는 이유를 모르겠어요.”
“간단해. 미국은 언제든지 세계 최고로 올라설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닌 곳이야. 그곳을 확실하게 아군으로 두면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어. 미래를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해.”
“원리원칙이에요. 준도 영향을 받잖아요. 그만큼 손해를 감수할 만한 가치가 있는 건가요?”
“맞는 말이야. 원리원칙을 깨면 우리에게 손해가 크니까. 하지만 미국에 그만한 안전장치를 해뒀어. 그러니 즐거운 마음으로 지켜보면 돼.”
“모니카 총리는 유럽에서 반 금탑 분위기가 일어나고 있다고 전했어요. 금탑에서 내세운 요구조건을 들어준 국가를 무시하고 미국에게 금품을 받고 결정을 바꿨다면서요. 저는 하루라도 빠르게 일이 해결되었으면 좋겠어요.”
“사흘 내로 풀릴 거야. 그 정도면 될까?”
“모니카 총리한테 말해 볼게요. 저들이 납득할지 모르겠지만요.”
“아마 원리원칙을 어겼다는 말이 쏙 들어가게 될 거야. 기대해도 좋아.”
“…….”
자신만만한 준성의 태도에 이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것도 나쁘지 않군.’
금탑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이 세계 전역을 휩쓰는 것에 아담 시몬은 즐거운 미소를 지었다.
MP Trade를 설치함에 있어 가장 큰 공을 세운 것이 바로 자신이었다. 당장 금탑이 원하는 조건을 들어줄 수 없음에도 몇 마디의 말로 금탑주의 협력을 이끌어 내는 데 성공했다.
물론 자신이 내어주어야 하는 조건도 만만치 않았다. A.O. 본부의 완벽한 독립 보장과 금탑주가 추천하는 미국의 능력자가 본부장이 되어야 한다는 점이 말이다.
하지만 금탑이 추천한다고 해도 본부장으로 임명되는 사람은 미국의 능력자일 것이고, 대부분의 실력자들은 정부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수월하게 조종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던 제시카는 실패했지만 다른 누가 임명되더라도 차선책으로 대응할 수 있는 정도는 되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기에 아담 시몬은 준성의 제안을 흔쾌히 수락할 수 있었다.
‘앞으로 십 년. 그 안에 대통령이 되는 건 나다.’
MP Trade 설치로 칼 리빙스턴 대통령의 지지도가 전폭적으로 상승했고, 이변이 없는 한 연임에 성공해서 팔 년 동안 대통령직을 지낼 것이다.
그다음은? 칼 리빙스턴의 성공 신화를 만들어내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운 자신이 바통을 이어받을 것이다.
그때쯤이면 MP Trade로 미국 경제가 살아날 것이고, 정부의 지원 아래 능력자들을 채워 나가면서 전력이 늘어난다. 그러면 자신은 미국 대통령으로서 전무후무한 권력을 지니게 된다.
미국 대통령!
꿈과 같은 자리가 멀지 않았다는 생각에 아담 시몬의 얼굴이 흥분으로 얼룩졌다.
그러기 위해서는 오늘 소개해 준다는 미국 A.O. 본부장 후보를 잘 구워삶아야 했다.
‘어차피 나와 안면이 있는 사람이겠지만.’
아직 포섭되지 않은 마지막 퍼즐, 제이슨이 있지만 자신 옆에 있는 이상 A.O. 본부장 후보는 아니었다. 금탑에서 마련한 장소에 도착한 아담 시몬은 제이슨과 자리에 앉아 금탑주가 오길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금탑주와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아담 시몬은 멈칫했다.
자신 앞 금발의 중년인 얼굴이 어딘가 익숙했던 것이다. 온통 상처투성이였지만 잘생긴 외모를 숨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나이는 사십대 후반에서 오십대 초반. 분명 어디선가 본 얼굴인데?’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며 금발 중년인의 정체를 생각할 무렵, 답은 옆에서 바로 나왔다.
“본부장님을 뵙습니다!”
현재 미국 A.O. 본부에서 가장 큰 권력을 쥐고 있는 인물, 정보부장 제이슨이 한쪽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숙인 것이다. 강직하며 절대 타협하지 않는 그가 이런 예를 보인다는 것 자체가 믿기지 않는 광경이었다.
“제이슨이로군, 잘 지냈나.”
“예! 잘 지냈습니다. 본부장님이 이렇게 생존해 계실 줄 몰랐습니다.”
“톰슨도 살아있다. 팔 하나를 잃고 큰 부상을 입었지만 현역으로 뛸 만하지.”
“다행입니다. 안 그래도 부장님이 안 계셔서 힘에 부치던 차였습니다.
“…….”
정신없이 이야기를 주고받는 둘을 보며 아담 시몬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대체 누구기에? 본부장이라고? 본부장? 본부장이라면…….’
제이슨에게 본부장으로 불릴 만한 사람은 단 한 명밖에 없었다.
세계 최강의 능력자, 급변하는 상황 속에서 위기를 기회로 삼아 미국을 패권국으로 올려놓은 전 미국 A.O. 본부장.
더글라스 브라운, 바로 그였던 것이다.
“헉!”
상대의 정체를 알아차린 아담 시몬은 숨이 턱 막혀왔다. 죽었다고 알려진 더글라스 브라운이라면 자신은 물론이고 대통령도 감당할 수 없는 존재였다.
“이분은?”
“이번에 부통령으로 임명된 분입니다. 본부장님이 그동안 계시지 않으면서 많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어서 돌아가시지요. 미국은 본부장님의 힘이 필요합니다.”
“내가 추천할 본부장은 바로 이분이다. 예전부터 잘 이끌어 왔으니 조직을 재건하는 데 어려움이 없겠지.”
“하……하하! 좋은 판단입니다. 금탑주의 배려에 감사드리는 바입니다.”
애써 표정 관리를 하며 웃어 보였지만 자신들이 조종할 수 없는 인물의 등장은 결코 반갑지 않았다.
어느새 더글라스의 충복으로 거듭난 제이슨을 보며 아담 시몬의 머릿속은 먹구름으로 가득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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