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lden Mage RAW novel - Chapter (257)
제137장 탐색? 유인?
악마 신이 나타날 때면 주변에 화려한 휘광이 공간을 수놓는다. 그리고 성스러운 기세를 발산하면서 우아한 기품을 발산했다. 그것은 신만이 발산할 수 있는 품격, 신의 존재감이다.
하지만 악마 신을 볼 때마다 준성은 구린내가 진동하는 것처럼 표정을 찌푸리며 맞이하곤 했다.
“이곳에는 무슨 일이지?”
“드리고 싶은 말이 있어 찾아왔습니다.”
“우리가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언제든지 보는 사이였나?”
“저는 아니더라도 당신은 그러지 않았습니까? 이번에 한번 따라 해봤습니다, 킥!”
“두 번 그러다가 어떻게 나올지 모르겠다는 말을 해두지.”
경고를 보낸 준성은 악마 신을 데리고 응접실로 향했다. 그곳에서 차를 대접한 그는 자리에 앉기 무섭게 본 내용으로 들어갔다.
“그래서, 이곳에 온 이유는?”
“이곳의 신을 잡지 않는 이유를 듣고 싶습니다.”
“지구 신, 말인가?”
“그렇습니다. 약속을 해놓고 아무런 답변이 없으니 기다리기 지루하더군요.”
악마 신이 꺼낸 이야기는 간단했다. 지구 신을 함께 제거하기로 이야기를 했는데 준성은 나설 기미를 보이지 않고 그도 불러들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 부분이라면 간단해. 이미 한 차례 지구 신을 제거하려고 했다가 실패했으니까?”
“실패라면 저번을 말하는 겁니까?”
“올림푸스를 비울 줄 몰랐으니까. 이 세계의 신인 그가 숨으려고 든다면 절대 발견할 수 없을 거라 생각하는데, 안 그래?”
올림푸스를 파괴하고, 세계에 큰 혼란을 가져왔음에도 지구 신은 철저한 침묵으로 일관했다. 지구 신을 제거하고자 했던 준성으로서는 아쉬운 순간이었다.
“그럼 포기할 건지?”
“아니, 우리를 제거하려고 했었으니 기회가 닿으면 찾아가서 소멸시켜야겠지. 그게 우리의 미래를 위해 최선이라고 생각 했으니까.”
“아아, 멋진 계획입니다. 당장 합류하고 싶을 만큼 매력적인 계획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거 고맙군.”
준성은 다분히 의례적인 대답을 했으나, 악마 신은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래서 그를 찾는데 도움을 드리고자 합니다.”
“……네가?”
“예, 같은 신이니 숨어 있을 만한 곳을 찾기 어렵지 않습니다. 그다음은? 킥킥! 제거하는 게 모두를 위해 좋겠지요.”
“내가 찾는 건 쉽지 않다고 생각한다. 도움을 준다면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준성은 찾기 어려울지 몰라도 악마 신은 의외로 쉽게 찾아낼 수 있다, 그렇게 생각했다.
“물론입니다.”
“큰 도움이 되겠군.”
“…….”
나직이 중얼거리는 준성의 모습은 영락없는 목적을 달성한 남자의 얼굴이었지만 기이한 여유가 그의 주변에 맴돌고 있었다.
“흐음!”
눈을 가늘게 뜬 악마 신은 그런 준성의 모습을 천천히 살폈다.
특별히 이상한 점은 존재하지 않았지만 다급해야 할 그가 시종일관 흔들리지 않은 채 여유로운 모습만 보이자 머릿속이 복잡하게 헝클어졌다.
과연 무슨 생각으로 받아들인 것일까.
기이한 위화감은 대화가 끝나고 자리를 벗어날 때까지 사라지지 않았다.
“가만히 있을 거야? 그건 절대 안 돼!”
앙칼진 목소리가 대신전을 울렸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칼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방금 전 말했던 네이트의 말에 힘을 실었다.
“나도 이번만큼은 네이트와 같은 생각이야. 이대로 넘어가서는 안 돼.”
“…….”
두 대신족의 압박에 테라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침묵을 지켰다.
이에 둘은 헤스티아에게 압박을 주었지만 그녀는 아무런 행동도 보이지 않았다.
“복수를 해야 한다고 봐?”
긴 침묵 끝에 흘러나온 대답을 듣고 네이트가 외쳤다.
“당연하지! 그 녀석들의 행동은 우리의 계획을 완전히 어그러뜨리고 있어.”
“어그러뜨린다라.”
“유감이지만 네이트의 말이 맞아. 그동안 행해온 모든 걸 부정당하고 있어. 엄연히 다른 작용이 하고 있었음에도 말이야.”
네이트와 칼리가 이렇듯 열을 내는 이유는 간단했다. 얼마 전 세계 각지로 퍼져서 이제는 모든 곳의 화제가 된 드래곤의 발언 때문이었다.
전쟁에서 패배하고 숨어든 드래곤의 입장은 달라지지 않지만 지켜보는 신족의 타격은 컸다.
인간들이 더 이상 신족을 보고 경외하지 않고, 믿으려고 들지도 않으니 말이다.
이제 막 뻗어 나가야 할 믿음이 암초에 걸려 흔들리는 건 대계를 위해서도 막아야 할 짓이었다.
“헤스티아, 네 생각은 어때?”
“특별히 문제될 건 없다고 봐요.”
“말도 안 되는 소리! 지금 보이는 게 있는데 뭐가 어째?”
네이트가 날카롭게 소리치며 헤스티아를 압박했다. 온건한 그녀의 성격은 늘 전쟁에 부정적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짧은 시간 달아오른 것뿐이야.”
“전혀, 이대로 흐르면 불리해지는 건 바로 우리야.”
대놓고 헤스티아의 의견을 짓뭉개는 네이트였다. 칼리가 그 모습을 보고 안타까운 눈을 했지만 입을 열지는 않았다. 암묵적으로 네이트의 의견에 힘을 보탠 것이다.
“그럼 어떻게 하고 싶은데?”
“당장 찾아가서 제거해야지. 우선 드래곤 놈들을 처리하는 게 중요해. 찍소리도 못하는 주제에 금탑의 힘을 업었다고 기고만장한 모습은 절대 봐줄 수 없어.”
“금탑이 가만있을 것 같아?”
“상관없어. 가로막은 모든 적을 제거할 뿐이야.”
단호한 네이트의 대답이었지만 헤스티아의 고개를 젓게 만들었다. 심지어 듣고 있던 칼리마저도 나직이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그렇게 당하고도 정신을 못 차렸어?”
“닥쳐! 그래서 더더욱 가려는 거야. 다음에 붙으면 그때와 같은 굴욕은 없을 테니까.”
“그건 너만의 생각이고. 안 그래요, 테라?”
“붙어봐야 할 일이지만, 현재로서는 과거의 반복이 이뤄질 가능성이 높겠지.”
“테라!”
“하지만 너희들 모두 착각하는 게 있어.”
“…….”
테라가 입을 열자 네이트와 칼리는 입을 다물었다. 무엇을 간파했기에 자신들의 생각이 잘못되었다고 말을 하는 건지 의아했던 것이다.
“이미 차원은 하나로 합쳐졌고, 이 세계의 인간은 우리가 이뤄 놓은 문명과 접촉했어. 그것은 돌이킬 수 없는 사실이야.”
“그게 뭔 상관인데?”
“탐욕스러운 인간들이 단순히 우리에게 겁을 먹고 가만히 있을까? 설사 드래곤의 발언이 전 세계에 모두 방영되었다고 해도 그건 불가능해. 왜냐하면 이곳은 인간이 지닌 탐욕을 채울 수 있는 해방구였으니까. 설사 우리를 믿지 않더라도 시간이 흐르면 이야기는 달라져.”
테라는 자신 있었다. 인간의 본성을 꿰뚫어 보는 건 어렵지 않았고, 자기합리화의 달인인 그들이 하나로 노선을 정하면 끝까지 바꾸려고 하지 않는다는 걸. 그리고 이곳 아틀란티스는 아직 알 수 있는 다양한 것들이 넘쳐나는 장소였다.
“변화는 시작되었어. 드래곤과 힘을 합쳐 발악을 해도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갈 거야. 그때를 위해 만반의 준비를 갖춰 놓으면 돼. 반박할 말, 있어?”
“……테라의 명령에 따르겠어.”
지적할 게 없었던 네이트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 같아서는 지난번 패배를 설욕하고 싶었지만 한 번 정한 테라의 고집을 꺾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악마 신의 끈질긴 설득에 넘어간 준성은 지구 신을 제거하기 위해 나섰다.
그동안 곳곳을 누볐으나 장소를 찾을 수 없었고, 올림푸스 같은 공간도 찾아낼 수 없었기에 포기하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악마 신은 그래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탐색을 종용했고, 끈질긴 설득 끝에 준성을 움직이는 데 성공했다.
준성, 세희, 이나, 엘리엔이 나서서 지구 신이 있을 만한 공간을 탐색했고, 악마 신도 적극적으로 주변을 누비면서 찾고자 했다.
“반응은?”
“없어, 이곳도 아닌 것 같은데?”
“분명히 그렇게 말을 했는데 녀석은…….”
악마 신은 포기하지 않고 돌아다니면서 지구 신을 찾고자 했다. 이미 세희는 포기할 지경이었는데, 준성도 그 부분에 동의하는 바였다.
“올림푸스를 파괴할 때도 이미 모습을 감췄는데, 숨어버린 지구 신을 찾기 어려운 것 같은데.”
“한 번만 겪어봐도 아는데 참 별난 이유로 포기하지 않는단 말이야.”
지구 신을 제거하는 것이 준성의 최대 목표였지만 올림푸스를 파괴하면서 내심 포기하고 있었다. 이전에 보여준 모습과 달리 무척 신중한 행보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곳 지구의 의지로 태어난 만큼 그가 숨고자 하면 준성이 찾아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내심 포기한 채 준성과 세희가 도란도란 대화를 나눌 무렵, 공간 한 쪽이 완전히 일그러지는가 싶더니 악마 신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얼굴에는 짙은 환희가 서려 있었는데, 그것만 보아도 어떤 소식을 가져왔는지 알 수 있었다.
“지구 신이 있는 곳을 발견했습니다. 킥킥킥!”
“진짜?”
“지금부터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말보다 행동으로 옮기며 앞으로 나아가는 악마 신의 뒤를 따르는 준성 일행이었다.
“이곳입니다.”
“확실히 찾기 어려운 곳이야.”
악마 신이 주장하는 장소에 도착한 준성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저었다. 이곳이라면 지구 신이 있어도 이상하지 않은 것이다.
강렬한 소용돌이가 치는 호수는 그 자체만으로 공간을 왜곡하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연신 물을 흡수하며 덩치를 키워 나가고 있었는데, 공간 이동하는 것도 벅찰 듯했다.
현실과 비틀린 공간. 그리고 완전히 지워진 존재감까지. 쉬이 갈 수 있으리란 생각이 들지 않았다.
“지구 신이 있는지 어떻게 알았지?”
“신의 존재감을 지워내는 건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그는 아닌 척하지만 이곳에서 조용히 힘을 기를 계획을 세우고 있었군요.”
킥킥거리며 조소 짓는 악마 신의 모습은 누구보다 비열했다.
“이제 그를 만나고 소멸시키기만 하면 됩니다.”
“그래야지. 이곳까지 안내해 줘서 고맙다.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있는데, 지구 신을 공격하면 너도 도와주겠지?”
“제 존재를 걸고 한 맹세인데 어길까 걱정이 됩니까? 전혀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싱긋 미소 짓는 악마 신의 모습은 누구보다 믿음직한 것이었다.
신의 존재를 내걸 만큼 강력한 구속력을 지닌 약속이기에 준성도 그 부분에 대해서는 크게 의심하지 않았다.
다만 저 소용돌이치는 호수에 들어가기 전에 한 차례 확인을 해보고 싶었을 뿐.
“들어가시지요.”
한편이 되기로 한 이상, 악마 신은 철저하게 이용당하는 대상에 지나지 않았다.
“아니, 그 전에 너부터 들어가 봐.”
“예?”
“이곳이 확실하고, 지구 신을 제거할 의향이 넘쳐난다면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그러네요. 신의 육체와 상대를 향한 적대감만 있으면 먼저 들어가는 건 일도 아니죠.”
세희가 한 마디 보탰다.
“그럼 들어가지.”
태연하게 먼저 들어갈 것을 권유했지만 악마 신을 바라보는 준성의 눈이 싸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킥킥! 지금 저를 의심하는 건지?”
악마 신의 시선이 의미심장하게 바뀌었다. 준성은 어깨를 으쓱한 뒤 소용돌이 치고 있는 호수를 가리켰다.
“의심이 아니라, 저 공간이 괜찮을지 확인하기 위해서다. 신이라면 저기에 휘말려도 죽지 않겠지? 불멸의 몸일 테니까.”
“…….”
죽지 않으니까 먼저 들어가 보라는 말에 악마 신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설마하니 준성이 이런 이유를 들어 자신에게 권할 줄 몰랐던 것이다.
“알겠습니다. 그 말씀, 따르도록 하지요.”
“현명한 판단이야.”
가볍게 어깨를 으쓱해 보인 악마 신은 앞장서서 이동하기 시작했다. 준성과 세희가 그 뒤를 조용히 따르는 모양새였다.
콰콰콰콰!
거세게 휘몰아치는 모양은 당장이라도 모든 걸 집어삼킬 만큼 사나웠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공간의 비틀림마저 존재하니 진입하는 것만으로도 거부감이 물씬 느껴질 정도였다.
악마 신은 그 광경에 개의치 않고 몸을 맡겨 안으로 진입했다. 뒤따르는 준성과 세희의 몸에 절대방어가 생성되었고, 곧이어 호수 안에서 휘몰아치는 공간의 비틀림을 버텨내기 시작했다.
키잉! 키잉!
당장에라도 공간 자체가 무너질 것 같은 요란한 폭음이 울려 퍼졌지만 개의치 않고 안으로 파고들었다.
그 끝에 도달하는 순간, 절대방어를 두드리던 힘이 사라지고 자취를 감추었다.
이윽고 드러난 곳은 널찍한 풀밭이 펼쳐진 마당이었다. 주위를 둘러본 악마 신은 미간을 찌푸린 채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무래도 이거…… 늦은 것 같습니다만.”
“한 발 늦었나.”
“방금 전까지 있었습니다. 우리가 망설이는 사이, 모습을 감춘 것 같군요.”
어깨를 으쓱한 악마 신이 말했다. 그 속에는 희미한 질책이 깃들어 있기도 했다. 준성이 발 빠르게 움직였다면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았을 거란 의미였다.
“아쉽게 됐군.”
준성은 크게 아쉬워하지 않고 말했다. 무덤덤하기까지 한 그의 반응에 악마 신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다지 아쉬운 것처럼 보이지 않는군요.”
“그럼 뭘 기대한 거지?”
“킥킥! 그도 그렇습니다. 어쨌든 아쉽게 되었습니다. 이번에야말로 붙잡을 기회라 생각했는데.”
“머지않아 기회가 찾아오겠지. 그때 다시 부탁해도 되겠지?”
“물론입니다.”
세계를 지배하는 신이 여럿이어서는 곤란했다. 오로지 하나, 하나만 존재함으로써 유일할 수 있고, 강력한 권능을 손에 넣을 수 있다.
악마 신의 흔쾌한 수락에 준성은 의미심장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구 신이 이리저리 잘 빠져나가네.”
“우리의 동태를 예의주시하고 있는 것 같아. 그게 아니면 이렇게 간발의 차이로 벗어나기 어려울 테니까.”
악마 신을 보낸 뒤, 준성과 세희는 지구 신이 머문 것으로 추정되는 공간을 둘러보며 대화를 나누었다.
특별한 힘의 잔재는 느껴지지 않는 평범한 공간이었다. 그럼에도 진입하기 어려운 장치를 해놓았다는 것은 다분히 다른 이의 접근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한 의도가 깃들어 있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래도 나쁘지는 않은 것 같은데?”
“왜?”
“지구 신이 피한다는 건 자신의 불리함을 인지하고 있다는 거잖아. 이렇게 힘의 우위를 갈라놓을 수 있다면 지구 신이 함부로 행동하는 걸 막을 수 있고.”
“그렇긴 하지. 그렇긴 한데, 일찌감치 승부를 보려는 우리에게는 그리 좋지 않아.”
“그건 그러네.”
지구 신이 존재하는 한, 두고두고 후환이 될 수 있었다. 이미 준성에게 적대감을 드러냈고, 한 공간에서 살아갈 수 없다고 한 이상 충돌은 불가피했다.
“서방, 우리가 너무 몰려다녀서 그런 걸까?”
“이번에 움직인 숫자가 고작 셋이야. 지구 신이 감지할까 싶어 은밀하게 움직였는데 이마저도 알아차리면 붙잡을 방법이 없다는 게 돼. 이 정도는 되어야 확실하게 전력의 우위를 점할 수 있잖아?”
“그렇긴…… 하지.”
온전한 신의 힘을 지닌 지구 신을 홀로 소멸시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최대한 리스크를 없애고 확실한 건 여럿이서 합공을 하는 건데, 모두 강력한 힘을 지녔기에 지구 신의 이목을 끌 수밖에 없었다.
“최대한 빠르게, 결정을 내릴 틈이 없이 만나는 게 좋겠지. 다음에는 좀 더 빨리 움직이자고.”
“알았어, 서방.”
세희가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구 신에게 있어 세계는 곧 자신의 안방과 같다.
의지가 미치는 모든 공간을 그의 것으로 삼을 수 있으며, 자유자재로 이동할 수 있다는 강점을 지니고 있다.
“킥킥킥! 역시 여기에 계셨군요.”
은밀한 기류와 함께 악마 신이 모습을 드러냈다. 조용히 자리에서 있던 지구 신은 나직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에 올 줄 알았다.”
“왜 자리를 비운 겁니까?”
“그곳에서 우리의 목적을 이룰 수 없었으니까.”
“무슨 의미인지?”
“나는 김준성과 그 녀석의 여자들을 노리고 있다. 모두 만만치 않은 실력을 지니고 있지. 특히 같이 다니는 한세희는 이미 신에 버금가는 힘을 지니고 있다. 무턱대고 만나면 손해만 볼 뿐이라는 걸 너도 모르지 않을 텐데.”
“…….”
날카로운 말에 악마 신은 긍정도 부정도 표현하지 않았다. 그의 말마따나 한세희는 신의 육체를 완성하여 신이라 칭하기에 부족함이 없었으니 말이다.
“원하는 전제가 그것입니까?”
“김준성만 데리고 오면 된다. 그러면 확실하게 뜻을 이룰 수 있겠지.”
“……킥킥! 그것이 여태까지 요구한 사항 중 가장 어려운 이야기로군요.”
“그게 전제되지 않으면 부딪칠 일도 없겠지.”
지구 신의 반응은 솔직했다.
한세희를 떼어놓지 않는 한, 지구 신과 충돌할 수 없고 그것은 악마 신 본인의 계획을 어그러뜨리는 결과를 낳게 된다.
한시라도 빠르게 충돌을 일으켜야 하는 입장에서 지구 신의 요구는 어려운 것이었다.
“우리의 목적은 간단하다. 분탕질을 치는 김준성을 제거하는 것.”
“알고 있습니다.”
“그 녀석만으로도 제거하려고 하면 상당한 손해를 감수해야 한다. 그것은 사실이지. 그런 상황에서 같이 다니는 여자들이 함께하면 피해가 커질 수밖에 없다. 변수를 제거함에 있어 손해를 보는 건 너도 원치 않는 전개일 거라고 본다.”
“물론입니다. 아아, 정말 어려운 요구 조건입니다. 그것을 관철시킬 수 있도록 노력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믿어주시길.”
“서로 원하는 걸 충족시킬 수 있다면 우리의 동맹은 계속될 것이다.”
둘의 시선이 허공에 얽혔다가 떨어졌다.
김준성이라는 공통의 적을 두고 힘을 합쳤지만 목적을 이루면 언제든지 갈라설 수 있는, 느슨한 동맹 관계에 불과했다.
드래곤의 등장과 신족의 실체.
이 사실이 세계에 알려지면서 한 차례 홍역을 앓아야만 했다.
분명해진 것은 드래곤의 등장으로 가장 큰 이익을 본 건 국제 능력자 연맹과 미국이라는 점이다.
그들은 무분별하게 아틀란티스로 향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효과적으로 제어할 수 있게 되었고, 기존의 교류단을 이끄는 입장에서 상대적인 우위를 점하게 되었다.
모든 것이 순조롭고 뜻대로 진행되는 듯했다.
MP Trade로 뭉치지 못한 강대국들도 하나둘씩 활로를 모색하고자 움직였고, 미국과 독일, 중국, 일본의 외교력은 그 사이에서 빛을 발했다.
그중에서 대한민국은 예외였다. 이미 금탑이 위치하며, 국제 능력자 연맹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이상 외교는 불필요한 수단에 불과했다.
아메리카는 미국을 중심으로, 유럽은 독일이, 아시아는 중국, 일본이 나눠서 진행했다. 그리고 아프리카는 최근 금탑과 연계로 떠오르는 남수단이 구심점 역할을 해주고 있었다.
모두 금탑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고, 그들은 금탑에게 받은 호의를 기억하기에 절대적인 지지를 보내고 있었다.
이러한 관계 속에서 철저하게 외톨이로 전락한 국가가 있었다.
바로 세계에서 가장 넓은 영토를 보유한 국가, 러시아였다.
러시아는 끊임없이 유럽과 아시아를 통해 활로를 확보하고자 했다. 하지만 미국은 러시아를 경계했고, 중국도 아시아 내 입김이 커지는 걸 원하지 않았다. 독일도 그다지 친화적이지 못했다.
이렇듯 적을 두고 있으니 무엇 하나 제대로 해낼 수 있을 리 없었다.
갖가지 방법을 동원하던 그들은 드래곤 사태로 더 이상 비집고 들어갈 틈이 사라지게 되자, 대놓고 정공법을 동원하기 시작했다.
러시아 대통령, 세르게이가 간단한 통보만 한 채 전용기를 타고 대한민국으로 날아온 것이다.
그의 목적은 다름 아닌 금탑의 방문이고, 그곳에서 러시아가 난국을 타개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내고자 했다.
공항으로 마중 나온 정부 사람을 돌려보낸 세르게이는 곧장 금탑으로 향했다. 그의 주변에 커다란 덩치를 한 경호원들이 우글거렸지만 금탑 앞에서는 모두 떼어놓고 안으로 출입을 해야만 했다.
“러시아 대통령 세르게이요.”
“이렇게 찾아오실 줄 몰랐습니다.”
준성은 차분한 어조로 세르게이를 맞이했다. 그 모습에 그는 조소를 흘렸다.
“목이 마른 사람이 먼저 찾는 법이지.”
“틀린 말은 아닙니다. 현재 러시아의 상황이 그리 좋지 않다고 들었습니다.”
“그래도 최악이라는 말은 듣지 않으니 위안이 되긴 하는군.”
빈정거리듯 말하는 세르게이였다. 그에 준성은 다른 말을 하지 못한 채 헛웃음만 흘렸다.
현재 러시아의 상황은 최악이었다.
세계에서 가장 넓은 영토를 가졌다는 건 그만큼 자원을 보유하고 있다는 의미가 되지만, 몬스터가 등장하고 에너지석이 세계 시장을 제패하면서 모든 게 무너지고 말았다.
오히려 넓은 영토가 독이 되었다. 능력자의 숫자는 한정되어 있는데 지켜야 할 영토는 끝도 없이 펼쳐져 있으니 인간이 살고 있는 도시 위주로 방어하는 게 고작이었다.
어떻게든 능력자를 늘리고 몬스터의 공격을 효율적으로 막아내고자 했지만 끝없이 펼쳐진 영토 내 몬스터 필드는 악몽 그 자체였다.
“어떻게 보면 우리가 이런 상황에 처한 것도 금탑 때문이 아닌가.”
“금탑의 탓으로 만들고 싶은 겁니까?”
“그게 아니라 금탑이 일조했다는 걸 부인할 수 없지.”
이유는 간단했다.
러시아를 견제하는 미국과 적극적으로 관계를 개선했으며, 타나와 엘리엔이 몬스터 웨이브에서 유럽을 구원할 때 러시아만 그 혜택을 받을 수 없었다.
서부에 묶인 능력자는 동부로 향하는데 피로감을 호소했고, 제대로 된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모든 것이 준성의 역할로 인해 러시아는 약화되었다.
“듣고 보니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네요.”
“생각하고 자시고가 아니지. 금탑의 혜택으로 강대국의 서열이 요동치는 건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지만 한 축인 우리가 흔들리면 유럽은 물론 아시아와 미국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겠지. 뛰어난 과학기술을 보유했지만 그것을 지킬 힘이 부족한 상황이니까.”
누가 들어도 협박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대놓고 이렇게 말하는 모습에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세르게이 대통령 성격상 오랫동안 참았다가 방문한 걸 알았기에 준성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원하는 게 뭡니까?”
“러시아에 MP Trade를 설치해 줬으면 좋겠군.”
“불가능합니다.”
세르게이 대통령의 부탁을 일언지하에 거절하는 준성이었다.
“원하는 게 있으면 무엇이든 들어주겠네.”
세르게이 대통령이 말하는 바는 간단했다. 러시아가 해줄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들어주고, 대신 러시아에 MP Trade를 설치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얼핏 들으면 그럴 듯한 내용이지만 준성은 고개를 저었다.
“제 마음에 들지 않아서도 아니고 주변 상황 때문도 아닙니다. 현재 러시아의 상황이 MP Trade를 설치하기에 적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적합하지 않단 말인가?”
무시를 당한 것처럼 기분이 좋지 않자 세르게이 대통령의 표정이 팍 일그러졌다.
준성은 개의치 않고 어깨를 으쓱인 뒤 불쑥 물었다.
“러시아가 MP Trade를 설치할 수 있는 방법은 딱 하나입니다. 시베리아를 포기하면 됩니다.”
“불가능한 소리!”
“그러면 설치할 수 없습니다. 현재 시베리아가 어떤 상황인지 더 잘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만.”
“…….”
한 방 먹은 세르게이 대통령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고 말았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현재 시베리아는 러시아에서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몬스터 천국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원래 인구가 적기도 하고 환경도 적합하지 않았기에 러시아는 인구가 집중된 모스크바를 중심으로 인구 밀집 지역에 방어선을 구축했다. 극동의 블라디보스토크 같은 곳도 능력자를 결집시켜 방어에 착수했다.
그에 반해 사람이 거의 살지 않는 시베리아는 철저하게 무관심의 대상이었다. 우랄산맥 중심으로 펼쳐진 방어진으로 몬스터가 넘어오지 않게 조치를 취한 뒤, 도시 인근의 몬스터 필드 제거에 총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시베리아는 몬스터만 살아가는 천국이 되었다. 날씨가 추운 탓에 모두 드러나는 건 아니지만 현재 시베리아는 몬스터의 영토라고 봐도 무방했다.
“제가 보기에 북한과 별다를 것 없는 환경입니다. 아닙니까?”
“그건 틀린 말이 아니지만…….”
이미 포기한 시베리아에 MP Trade를 설치해 달라는 게 얼마나 무모한 이야기인지 잘 알고 있었다. 세르게이 대통령이 한숨을 푹 내쉬며 아쉬워하자, 준성이 달래듯 말했다.
“MP Trade는 어렵지만 러시아가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있습니다.”
“그게 뭔가?”
“직접 교류단을 만드는 것입니다.”
미국이 주도해서 만든 단체이기에 국제 능력자 연맹의 참여율이 저조한 러시아였다. 당연히 교류단에 행사하는 영향력은 작았다.
하지만 직접 교류단을 조직하면 이야기는 달라질 것이다.
“도와줄 수 있나?”
“제가 돕는 게 아니라 모두의 인정을 받을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그 정도면 돌파구가 되지 않겠습니까?”
“충분하지. 자네의 의견 고맙게 받아들이지.”
직접은 아니더라도 간접적으로 도와주겠다는 의미였다. 자리에서 일어나 감사를 표한 세르게이는 곧장 금탑을 떠났다. 지금부터 교류단을 만들기 위해서라도 부지런히 움직여야 했다.
러시아 대통령 세르게이와 금탑주 김준성의 만남.
거물들의 만남은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아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세계 각지로 퍼져 나가는 사실은 기존의 강대국들로 하여금 당혹감에 빠뜨렸다.
러시아가 직접 교류단을 조직하고 있으며, 이 부분을 금탑주가 도와주겠다는 내용이 있었던 것이다.
기존의 교류단을 조직한 것도 준성이고, 아직도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그런 그가 왜 이런 행동을 한 건지 이해 못 하는 사람이 많았다.
김기정은 즉각 준성에게 연락을 취해왔다.
[사람들의 말이 많습니다.]“알고 있습니다. 충분히 그런 반응이 나올 거라고 생각했고요.”
[연유를 물어봐도 되겠습니까?]“간단합니다. 고인 물은 썩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고인 물입니까?]“아직 고이지 않았지만 조만간 고일 수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길을 하나 터뒀으니 그곳을 이용하면 됩니다.”
준성의 의도가 무엇인지 알아차리는 건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섭섭한 마음을 숨기는 것은 어려웠다.
[어려운 말씀을 하는군요.]“간단하게 생각하면 됩니다. 현재 교류단은 안정적인 기반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저와 친한 곳이 주축이 되어 있지만 시간이 흐르면 자연히 연합체를 구축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더 많은 이득을 얻기 위해 치열한 다툼을 벌이겠죠.”
역사가 말해주고 있고, 그 조짐은 조금씩 드러나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외부의 적이 있으면 다릅니다. 러시아는 필사적으로 움직일 테니 좋은 자극이 될 것입니다.”
[문제는 하나만 움직이는 게 아닙니다.]러시아는 국경을 맞대고 있는 중앙아시아 국가들뿐만 아니라 동유럽 국가들에게도 입김을 넣고 있었다. 그리고 상당수 국가는 러시아에 붙을까 고민하고 있었다.
“국제 능력자 연맹이라면 잘해낼 거라고 믿습니다.”
[허어!]“좋은 상대가 될 테니까요. 의장님의 역량을 믿기에 벌인 일입니다. 이번 기회에 의장님의 역량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매번 어려운 걸 요구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해봐야겠죠. 열심히 하지요.]“그럼 행운이 따르길.”
그것으로 통신이 끝났다. 김기정에게 말해 놓았지만 당장 준성에게 직접 듣고 싶어하는 숫자의 사람은 많았다.
세계 전역에 감시망을 펼쳐 놓은 준성은 기회가 생길 때마다 신족을 제거하기 위해 나섰다.
그에 대해 파악하고 있는 신족은 충돌을 피하고자 했지만 때때로 혈기가 넘치는 신족은 도망가지 않고 정면으로 부딪치기도 했다.
“죽여 버릴 거야!”
준성의 공격에 낭패한 몰골의 엘 가벨의 눈이 분노로 이글거리며 타올랐다.
대신족조차 충돌을 꺼린다는 말을 듣기는 했지만 자신이 처음부터 권능을 발현한다면 고작 인간쯤은 쉽게 제압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 결과기 이것이었다.
권능은 산산조각 나면서 깨져 버렸고, 빠져나갈 수 있는 통로가 차단된 채 공격을 어렵게 피해내는 것이 고작이었다.
이대로 시간이 흐르면 자신에게 남은 것은 죽음밖에 없었다.
전혀 생각해 보지 않은 단어가 체감되자, 엘 가벨의 얼굴이 눈에 띄게 창백하게 창백해졌다. 눈앞의 인간 녀석은 진짜배기였다.
“때로는 이런 신족의 행태가 소멸을 불러오기도 하는 법이지.”
“으으, 네놈!”
“인간이라고 얕보고, 어떻게 해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너의 패착이다.”
신족의 숫자를 줄일수록 테라가 나서는 빈도가 늘어나고, 기회는 생겨날 것이다.
준성이 진정으로 원하는 건 신족을 꾸준히 제거함으로써 그들이 멸족의 길을 걷도록 만드는 것이다.
“끝내지.”
준성의 손을 중심으로 붉은 불꽃이 맹렬하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신언으로 시전된 이 불꽃은 영혼마저 불태워 버리는 최강의 마법이었다.
“으으…….”
이미 전의를 상실한 엘 가벨은 불꽃을 보며 신음을 흘렸다. 저것에 적중당하면 무사할 수 없을 거라고 본능적으로 느꼈던 것이다.
“그럼 이제 끝낼까.”
저항 의지를 상실한 엘 가벨을 보며 준성이 한걸음 앞으로 나설 무렵이었다.
“멈춰요!”
“넌…….”
준성의 앞을 가로막으며 나타난 존재는 다름 아닌 헤스티아였다.
동족을 구하고자 직접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이렇게 집요할 정도로 동족들을 노릴 줄 몰랐어요.”
“신족은 강한 적이지. 직접 맞상대하기 전에 숫자를 줄이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렇게 말한 이상 걸려들 리 없어요. 동족들 중 바보는 없으니까.”
“그런데 걸려든 수확물이 눈앞에 있지 않나?”
“…….”
“으으으!”
헤스티아는 할 말을 잃었고,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힌 엘 가벨은 당장에라도 달려들 것처럼 몸을 들썩였다. 하지만 준성의 실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고 있었기에 경거망동 할 수 없었다.
“제거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는데…….”
“그냥 넘어가 줄 수 없나요?”
“내게 너무 손해 보는 장사가 아닌가?”
“여태까지 제가 베푼 것을 감안하면 충분히 남는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그건 또 틀린 말이 아니군.”
준성이 전의를 드러내지 않고 몸에 힘을 풀자, 헤스티아의 얼굴에 미소가 걸렸다. 더 진행하지 않을 것임을 알아차린 것이다.
“그동안 신세 진 것을 갚는 셈 치도록 하지. 하지만 다음에 보면 이런 호의는 없을 것이다. 헤스티아에게 감사하도록.”
그 말을 끝으로 준성은 미련을 두지 않고 자리를 벗어났다. 조용히 그 광경을 지켜보던 헤스티아가 엘 가벨에게 물었다.
“몸은 괜찮고?”
“부상이 있지만…… 심각하지 않습니다.”
진정으로 위험했던 것은 준성의 도발에 자아부터 무너졌던 점이다. 그는 여태까지 보았던 인간들 중 가장 위험한 존재였다.
“잘 넘어갔으니 다행이야. 당분간 활동하지 말고 쉬도록 해.”
“예, 그런데…….”
“무슨 할 말이라도?”
“아, 아닙니다.”
고개를 저으며 얼버무렸지만 엘 가벨의 머릿속에는 의문이 가득했다.
헤스티아는 왜 김준성이라는 인간과 친할까, 그리고 무슨 거래가 있었기에 자신의 목숨을 선뜻 살려준 건가. 대체 둘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상념은 의문을 낳았고, 의심으로 변질되었다.
그것을 모르는 헤스티아는 엘 가벨을 데리고 아틀란티스로 향했다.
“아쉽지 않아요? 다 잡았던데.”
준성의 전투 과정을 지켜보던 이나가 묻자, 그는 고개를 저어보였다.
“일부러 그런 거야.”
“일부러요?”
“자세히 모르지만 대신족 중에서 동족을 아끼는 게 있다면 헤스티아일 거라 생각했어. 그 정도 수준이 되면 내가 발산하는 기세를 읽을 수 있을 테니까.”
“그건 알아요.”
그만큼 대신족의 힘이 만만치 않다는 걸 의미했다.
“헤스티아가 나타나고, 몇 마디 말로 내가 선뜻 물러났어. 방금 전까지 영혼마저 소멸시키려고 하던 내가 말이지. 그걸 본 신족은 헤스티아를 보며 고마워하면서 어떤 마음이 들까?”
그제야 이나는 준성이 허무할 정도로 손쉽게 물러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서, 설마…….”
“생각하는 그게 정답이야.”
“…….”
상상 이상의 방법에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지금 테라는 아틀란티스라는 보물을 손에 쥐고 인간이 분열하길 기다리고 있어. 러시아를 이용해서 그걸 인위적으로 조정했고. 하지만 분열은 피할 수 없는 흐름이야. 이대로라면 테라의 뜻대로 흘러가겠지. 하지만 분열은 우리만 할 수 있는 건 아니야, 스스로 완벽한 존재라고 생각하는 신족이라면 오히려 더 쉽게 분열시킬 수 있겠지.”
“성공할 수 있을까요?”
“성공 여부는 확신할 수 없어. 하지만 조만간 어떤 형태로든 모습을 드러낼 거야. 만약 내 뜻대로 되면 신족 사이에 여러 말이 나오게 될 거고, 그사이 나는 안정적으로 신을 상대할 수 있게 되겠지.”
작은 분란의 씨앗을 던져 놓은 준성의 눈은 기대감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