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lden Mage RAW novel - Chapter (5)
4. 천재 마법사, 엘
엘이 살고 있는 마을은 룬크라는 곳으로 도시까지는 걸어서 약 3일 정도 걸린다.
약 100여 가구가 살고 있는 룬크 마을은 리세토라는 차가 주요 수입원이었다. 대륙 동부에서 나는 리세토는 그 향과 맛이 좋아 비싼 축에 속하는 차였다. 하지만 마을에서 도시로 나가는 것이 극히 드물어 리세토를 판매하는 게 여의치 않았다.
도시로 향하는 길에서 빈번히 몬스터가 출몰하기 때문이다.
정기적으로 상단이 들르기는 하지만 대륙에 풀리는 리세토 가격에 비해 터무니없이 낮은 가격이었다. 그렇지만 어쩌랴, 상단이 없다면 도시로 나갈 때 목숨을 걸고 나가야 하는데.
그것이 3년 전까지 룬크가 앓고 있던 가장 큰 고민거리였다. 그 3년 전에 고민을 단번에 해결해 줄 사람이 나타났으니, 바로 실피르였다..
강력한 파이어 볼을 구사할 줄 아는 그녀는 이곳에 들르는 상단보다 비싼 값에 차를 팔아 주겠다고 하였다.
그 말에 마을 사람들은 흔쾌히 허락을 하였고. 벌이의 30%를 그녀에게 주기로 합의를 하였다. 그리고 리세토를 구매하는 상단에게 그 사실을 말하니, 매년 리세토를 구입하기 위해 용병들을 고용하고 해야 했던 상단 측에서는 환영을 하며 기꺼이 제값을 치르겠다고 하였다. 그녀가 도시에 나가 리세토를 파는 값은 마을 사람들이 받는 금액의 두 배에 달했고 또한 수고로움까지 겸해 주는 실정이었으니, 그녀가 30%를 가지는 것에 대해 아무도 불만을 품지 않았다.
두 장정이 힘겹게 지고 가야 가능한 무게를 실피르는 마법 아티팩트를 사용하여 가지고 나가기 때문이다 시골에 사는 마을 사람들은 마법 아티팩트가 얼마나 비싼지 알고 있다. 제일 못한 것도 족히 수백 골드가 나간다는 것을…….
오늘은 실피르가 한 달에 한 번씩 도시로 나가는 날이다.
마을 사람들은 재배한 리세토를 특유의 가공법으로 상하지 않게 말린 뒤에 실피르에게 건네주었다. 리세토를 받은 실피르는 떠날 준비를 모두 마친 뒤 엘의 방으로 들어섰다.
“엘리, 엄마 들어간다?”
방에 들어선 실피르는 엘의 모습을 보고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머?”
그녀는 평소와 다른 엘의 모습을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엘이 여행을 떠날 듯한 차림새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평상시 옷차림과 다를 바가 없었으나 실피르가 미리 익숙해져야 한다면서 특제로 제작해 준 어린이용 로브를 두르고 있었다.
푸른색 로브가 엘의 모습과 어우러져 멋드러진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엘은 엄마의 눈을 보며 웃었다.
“서고에 있는 책 다 봤어요! 이번에는 엄마 따라갈래요”
“그럴까?”
애교가 가득 담긴 엘의 목소리에 실피르는 순간 엘이 너무 귀여워 긍정적인 대답을 하였다. 그것도 잠시, 자신이 뭘 한 건지 깨달은 실피르는 황급히 입을 막고 고개를 저었다.
“아, 안 돼, 아직 엘리가 여행을 하기에는 너무 어려.”
그에 엘이 볼을 부풀렸다.
“우우! 방금 된다고 했잖아요.”
뾰로통한 표정을 짓는 엘의 모습이 그렇게 귀여울 수가 없었다.
하지만 도시로 가는 길에 자칫 몬스터를 만나기라도 하면‥‥‥.
실피르는 걱정이 앞섰다. 아직 어린 엘에게 몬스터의 모습은 어떤 영향을 끼칠지 모르는 일이다.
그녀는 짐짓 무서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안 된다면 안 되는 거예요. 만약 길을 가다가 무서운 오크를 만나면 엘을 잡아먹으려고 할지도 모른단 말야.”
‘이 정도면 되겠지?’
실피르는 슬쩍 엘의 반응을 살폈다.
하지만 껍데기만 일곱 살인 엘은 이미 2클래스 마스터에 이르렀다. 게다가 5클래스 마법 수식까지 모두 알고 있는데 그런 몬스터를 두려워할 리가 없다.
속으로는 자신을 떼어 놓기 위해 노력하는 실피르를 향해 감사의 웃음을 지으면서 겉으로는 짐짓 무서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두려움에 가득 찬 눈을 하면서도 엘은 실피르에게 말했다.
“무, 무서운 몬스터를 만나도 상관없어요. 왜냐하면 엄마가 지켜 줄 거니까요.”
해맑은 빛을 담은 푸른 눈동자가 격렬하게 떨리면서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듯하다. 그러나 그 눈동자 이면에는 엄마에 대한 굳건한 믿음이 있었다.
그 눈빛을 받은 실피르는 마음이 뭉클해지는 것을 느꼈다. 어린아이의 고집을 어찌 이기겠는가. 게다가 이렇게 귀여운 부탁을 어느 부모가 이겨 넘길 수 있을까.
엘의 공격에 완벽하게 넘어간 실피르가 조그마한 엘의 몸을 껴안았다.
그리고 감격에 찬 어조로 말했다.
“그래. 엘리! 이 엄마가 몬스터로부터 널 지켜 줄 테니까 이 엄마만 믿으렴.”
엘은 그런 실피르의 모습에 마음속이 뭉클해지는 걸 느끼며 앙증맞은 손으로 엄마를 안으려 애썼다.
“응, 나도 엄마를 믿어.”
그렇게 엘의 여행이 결정되었다.
잠시 후, 엘의 여벌옷을 챙긴 실피르는 작은 가방을 엘 에게 건넸다.
“여기에 엘리가 입을 옷이 있으니 꼭 매고 있어야 한다?”
엘은 가방을 받아들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 그럼 가 볼까?”
실피르는 그런 엘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밖으로 나섰다. 키가 작아 다리도 짧았지만 단전호흡으로 착실히 체내의 마나를 불려 나가는 엘의 신체는 또래 아이들보다 더 튼튼했다.
“엘리, 힘들지 않니?”
마을을 벗어나 한 시간 정도쯤 걸었을까. 실피르가 얼굴 가득 걱정을 품고 엘에게 물었다. 그녀의 걱정에 엘은 빙긋 웃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직 안 힘들어요, 엄마. 저 이래 뵈도 운동 많이 했어요.”
그러면서 막대기 같은 팔을 구부려 근육을 자랑하려는 그의 모습에 실피르는 손으로 입을 갖다 대며 웃었다.
“우리 엘리가 꽤 튼튼한가 보구나?”
엘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요. 미래의 대마법사는 몸도 마음도 튼튼해야 해요. 그러니 어렸을 때부터 열심히 운동을 해야 하고요!”
“그래, 우리 엘리의 말이 맞아.”
엘의 말에 실피르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릴 때부터 마법사가 되기 위해 영재 교육을 받은 아이들이 대부분 중요시하는 것은 수식을 외우는 것과 마나를 느끼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엘의 말처럼 몸을 튼튼히 하는 것을 최우선해야 한다. 마법사의 특성상 클래스가 높아질수록 신체적 능력이 매우 떨어져 일반인과 비슷, 혹은 그보다 떨어지기 때문이다. 후에 체력을 기르고자 마음을 먹으면 일반인보다 수십 배는 더 힘든 노력을 해야 제대로 된 몸을 갖출 수 있다.
그런데 엘이 말한 것은 어렸을 때부터 꾸준한 체력을 길러 놓으면 나중에는 고생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마법사 학회에서 발표했던 주장과 동일했다.
실피르는 문득 이상하단 느낌을 받았다
‘어떻게 ‥‥‥?’
그러한 사실을 엘이 설마 알고 있단 말인가?
아니, 그럴 리가 없다. 우연이 분명하다.
실피르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맺혔다.
“우리 엘리가 매우 똑똑하네. 지금부터 열심히 운동을 하면 나중에 고생할 필요가 없으니 열심히 운동해야 한다?”
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엄마!”
둘은 부지런히 길을 걸었다. 엘은 스스로 말한 것처럼 그동안 운동을 열심히 했는지 실피르의 걸음을 무리없이 뒤따르고 있었다.
그렇게 몇 시간을 꼬박 걷다 보니 실피르는 허기를 느꼈다. 그녀가 엘을 보며 말했다.
“엘리, 배 많이 고프지? 조금 더 가면 쉴 만한 공간이 나오니까 힘들더라도 따라오렴.”
엘은 그다지 힘들진 않았지만 짐짓 땀을 닦는 척, 호흡이 거칠어진 척 대답했다.
잠시 후 실피르와 엘은 널찍한 쉼터에 도착했다 .그간 실피르가 도시를 오가면서 만들어 두었던 쉼터였다.
그녀는 어깨에 멘 가방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여기 앉으렴.”
하지만 엘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엘은 떨리는 눈으로 손을 들어 한쪽을 가리켰다. “엄마, 저기 뭐가 있어.”
엘의 모습이 심상치 않은 것을 본 실피르가 고개를 돌렸다.
“뭐가 있다고‥‥‥ 응?”
실피르는 엘이 가리킨 방향에서 어슬렁어슬렁 걸어오는 것을 보고 두 눈을 크게 떴다.
그것은 다름 아닌 오크였다. 주변을 순찰하던 세 마리의 오크가 인간 냄새를 맡고 이곳에 온 것이다.
“이런!”
오크를 본 실피르는 재빨리 뒤로 물러나며 엘을 보호하는 자세를 취했다. 그리고 염려가 잔뜩 담긴 눈으로 엘을 바라보았다.
무척 흉악하게 생긴 몬스터가 바로 오크였다. 어린아이가 보면 오금이 저려 오줌을 지릴 정도로 흉측했다.
물론 이것은 평범한 어린아이에게 해당하는 소리다.
실피르의 염려 어린 시선을 느끼지 못한 듯 엘은 멍하니 오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아차 싶어 눈가를 파르르 떨기 시작했다.
일견하기에는 그 모습이 오크를 무척 무서워하는 듯한 형태로 보였다. 실피르 또한 엘이 오크를 보고 무척 두려워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엘은 오크를 보고 전혀 흉악하거나 무섭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차라리 저글링이 더 징그럽지.’
그렇게 생각했을 때, 오크 중 하나가 위협적인 표정을 지으며 글레이브를 치켜들었다. 그리고 들창코를 벌름이며 말했다.
“인간! 살아 돌아갈 생각 따윈 집어 쳐라, 취 익!”
“취 익 ! 취 익 !”
뒤에 서 있던 오크 두 마리도 매섭게 글레이브를 붕붕 휘둘렀다.
‘아, 안 돼! 엘이…….’
실피르는 오크들이 자신이 아닌 엘을 향해 한껏 위협을 하자 속이 탔다.
하지만 엘은 평범한 아이가 아니다. 엘은 태연히 실피르에게 시선을 주었다.
‘무섭다고 하면 안 되겠어. 엄마가 염려하시니 말이야.’
실피르가 자신을 걱정하는 걸 모를 엘이 아니다. 엘은 실피르에게서 시선을 떼고 오크를 가리켰다.
표정은 어느새 호기심이 가득 담긴 어린아이의 표정으로 바뀌어 있었다
“엄마, 이게 오크야? 사람들이 말하는 것보다 훨씬 귀여워. 두 발로 걸어 다니고 이빨이 뾰족하고‥‥‥ 또 그리고 손에 들고 있는 무기를 빼면 그냥 돼지잖아. 초록 돼지야.”
“뭐, 뭐라고? 초록 돼지? 풋!”
엘의 폭탄 발언에 순간 실피르는 어이가 없어 저도 모르게 웃음을 지었다.
세 오크는 자신들의 위협이 먹히지 않고 도리어 이상한 소리를 듣자 얼빠진 표정이었다. 이윽고 정신을 차린 오크가 코를 벌름이며 글레이브를 휘둘렀다
“취 익! 감히 위대한 전사인 나 툴란을 모욕하다니, 너희들 모두 죽인다.”
그 뒤에 오크들도 정신을 차리고 위협적으로 글레이브를 휘둘렀다.
“취 익! 죽인다!” 그리고 서서히 거리를 좁히며 접근하였다.
그러자 배꼽을 잡고 웃고 있던 실피르가 손을 들었다.
“푸푸풋! 그만! 풋!”
가까스로 웃음을 참은 실피르가 정신을 집중하여 마법을 캐스팅하였다.
그러자 지름 1m에 달하는 붉은 구가 생겼다.
3클래스 공격 마법 파이어 볼이었다.
“파이어 볼(Fireball)!”
화르륵!
순간 주변 공기를 후끈 달아올랐다.
파이어 볼의 영향이었다.
마법을 본 오크들은 아연실색하며 뒤로 물러났다. 오크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다름 아닌 마법이었다.
“취 익! 마법이다. 취 익! 그것도 제일 무서운 불 마법이다. 취이 익 !”
뒤뚱뒤뚱 뒤로 물러난 오크들을 보며 실피르는 다시 한 번 웃었다.
“초록 돼지‥‥‥ 풋!”
오크들은 실피르가 자신들을 보고 웃는 것임을 깨달았다. 그들은 살기 어린 눈으로 글레이브를 위협적으로 휘두르며 외쳤다.
“취익! 비웃지, 취익! 마라!”
그런 오크들의 모습에 실피르는 코웃음을 쳤다.
“흥! 통구이가 되고 싶은가 보네?”
오크들이 기겁하며 더 뒤로 물러났다.
“취 익 ! 취 익 !”
한동안 실피르를 말없이 노려보던 오크들.
“엄마, 돼지들 계속 보기 징그러워.”
엘의 한마디에 실피르가 파이어 볼을 스윽 오크들에게 날릴 듯한 모션을 취했다.
오크들은 기겁하며 도망쳤다.
“후우!” 파이어 볼을 캔슬한 실피르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엘이 실피르에게 다가갔다. 실피르가 엘을 바라보자 엘은 실피르에게 엄지손가락을 내밀었다.
“엄마 멋져!”
그 말에 실피르는 절로 미소가 맺혔다. 그녀는 그 말을 다시 듣고 싶어 못 들은 척하였다
“으응? 뭐라고 했니? 못 들었는데…….”
엘이 빙긋 웃으며 다시 말해 주었다.
“엄마가 마법 시전하는 모습이 너무 멋졌어요. 마치 대 마법사 같았어요, 헤헤!”
아들의 칭찬에 실피르는 웃음을 지었다.
“호호! 엘리가 칭찬해 주니 엄마가 너무 기쁜데?”
그리고 모자는 집에서 싼 도시락을 펼치고 때늦은 식사를 했다.
실피르가 엘에게 물었다. 처음 오크를 봤을 때 그 반응을 생각하면 다시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런데 엘리, 오크가 무섭지 않았니?”
그녀의 말에 엘이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돼지가 두 발로 걸어 다니고 무기를 들고 다니는 게 매우 웃겼어요. 엄마가 왜 무섭다고 한지 모르겠어요. 제가 보기에는 초록 돼지였는데‥‥‥ ”
“초록 돼지‥‥‥ 푸풋!”
엘의 재미있는 표현에 웃음을 가까스로 참아 낸 실피르가 말했다.
짐짓 엄한 표정이었다
“오크가 무섭지 않다고 해서 모든 몬스터가 안 무서운 건 아니란다. 오크보다 더 무서운 트롤이라는 몬스터는 우리 마을에 있는 목책보다 크고, 숲의 제왕이라 불리는 오우거는 그 트롤보다 두 배나 크지.”
실피르의 설명에 엘이 두 눈을 반짝였다.
몬스터 중 돈으로 거래가 가능한 두 몬스터가 거론된 것이다.
트롤의 가죽은 무척 질기고 따뜻해서 외투.재료로 사용하면 꽤 비싼 값을 받을 수 있다. 또한 트롤의 피를 즉석에서 받아 내 밀봉하면 그것도 큰돈이 된다.
오우거의 가죽은 트롤보다 더 비싸다. 검과 화살에도 끄떡없는 가죽은 트롤 가죽보다 몇 배는 비싸며 오우거의 힘줄이나 손톱, 발톱 등도 상당한 돈이 된다. 그리고 오우 거의 피도 마법사의 실험 재료로 사용되기에 꽤 높은 가격에 거래된다.
“물론 이곳에서 볼 수 있는 몬스터는 아니지만‥‥‥ 그런 몬스터는 기사들도 함부로 상대하지 못하니까, 엘리도 주의하렴?”
어쩌면 두 몬스터를 만날 수 있을 거라 기대하던 엘은 실피르의 말에 실망하고 말았다
“네…… 엄마.”
실망했지만 엘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짐을 꾸린 실피르는 엘을 바라보며 말했다.
“여기서 다음 쉼터에 도착하려면 어두워질 때까지 쉬 지 않고 걸어야 한단다.”
엘이 빙그레 웃으며 대꾸했다.
“제 몸은 튼튼하니까 걱정 마세요!”
여기까지 잘 따라온 것을 봤기에 실피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우리 아들. 그럼 믿을게? 자, 출발하자.”
“네.”
두 모자는 다시 길을 재촉했다 가는 길에 다행히 더 이상 몬스터를 만나지 않았다.
그리고 룬크 마을을 떠난 지 정확히 3일째 되는 날, 실 피르와 엘은 도시 반자크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엘과 실피르는 도시 반자크에 들어갔다. 룬크 마을에 이사 오기까지 4년 동안 카시아스 왕국 수도에 살아 별로 감흥이 없었지만 반응이 없으면 이상할 것 같아 엘은 짐짓 감탄사를 흘렸다.
“엄마, 도시가 매우 크네요.”
“그렇지? 이곳이 바로 엄마가 자주 가는 도시란다.”
반자크는 무척 큰 도시다.
카시아스 왕국 최동부에 위치하여 국경 전선 역할을 하고 있는 군사 도시이면서 마법이 상주하여 마법이 발달한 마법 도시이기도 하다.
도시 안으로 들어선 실피르는 엘을 이끌고 여관으로 향했다.
조그마한 엘이 마법사 로브를 쓴 모습에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었지만 전생에서도 수많은 시선을 받아 온 엘에게 이 정도는 문제도 아니었다.
2인실 방 하나를 잡은 모자는 여관 방 안으로 들어갔다.
“여기가 며칠 동안 지낼 방이란다.”
엘은 어린아이의 그것처럼 침대로 조르르 달려갔다. 그리고 몸을 눕혀 침대의 푹신푹신함을 느끼며 말했다.
“방이 크네요? 침대도 푹신푹신하고요.”
사실 집과 다를 바가 전혀 없었지만 실피르는 엘이 모처럼 밖으로 나와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것이라 생각했다.
앞으로 가끔 엘을 데리고 나와야겠다고 마음먹으며 실피르는 웃음을 지었다.
“호호! 집도 크잖니. 밖이라서 들떴구나, 우리 엘리?”
‘후, 정말 어린아이 흉내는 힘들어.’
엘은 이번에도 실피르를 잘 속여 넘겼다는 생각에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매번 어린아이 보여야 할 때마다 긴장되고 가슴이 떨려 왔다.
그렇게 실피르와 엘은 가지고 짐을 모두 풀고 숙소에서 식사를 하였다.
그 후 엘에게 무척 난감한 난관이 봉착했는데 다름 아닌 목욕물이 데워졌다는 말이 들려온 것이다.
실피르는 혹 외부인이 들어올 것을 생각해 창문과 문을 모두 잠근 뒤 꼼꼼하게 확인까지 하였다. 그리고 옷을 벗으면서 엘에게 말했다.
“엘리, 얼른 옷 벗으렴. 오랜만에 엄마와 목욕하자꾸나.”
제아무리 똑똑한 엘이라도 여기까진 생각하지 못했다.
집이었다면 엘이 직접 물을 데워 목욕을 할 수 있었으나 이곳은 여관. 목욕물을 데우는 데에도 돈이 들기에 실피르의 시점에서는 당연히 같이 하는 게 옳았다.
더군다나 엄마와 아들이 아닌가.
엄마와 어린 아들이 같이 목욕을 하는 이고 부끄러운 일이 아니었다.
엘은 뒤로 주춤 물러났다.
그리고 실픽르에게 싱긋 웃으며 말했다.
“저, 저는 됐어요. 마을을 떠나기 전에 목욕을 했는걸요. 그러니 엄마 혼자 목욕하세요.”
실피르가 고개를 저었다. 당치도 않다는 뜻이다.
“그래도 목욕을 한 지 삼 일이나 지났잖니. 엄가 꼼꼼하게 씻겨 줄 테니 안심하렴, 엘리.” 그 말이 더 무서웠다.
목욕을 안 하려고 핑계를 댔는데 도리어 실피르의 의지에 불을 살라 버렸으니 엘로서는 무척 난감한 노릇이었다.
엘이 어떻게 하면 이 자리를 회피할까 고민하며 미적거리자 실피르가 엘에게 말했다.
“옷을 벗기 힘든 거니? 엄마가 벗겨 줄까?”
엘은 화들짝 놀라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니오! 제, 제가 벗을게요.”
실피르는 픽 웃으면서 실피르는 옷을 벗기 시작했다.
엘도 이 상황을 어떻게 타개할지 고민하면서 느릿느릿 옷을 벗었다. 괜히 실피르가 벗겨 준다고 할까 봐 일단 벗는 시늉을 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핑계를 대야 하지? 엄마의 태도를 보아하니 쉽게 넘기긴 힘들 것 같아. 어떤 방법을 사용해야‥‥’
상념에 빠져 있는 엘의 귓가에 실피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유, 엘리! 언제 까지 옷을 벗고 있을 거니? 너무 느리잖아.”
그 말에 엘이 실피르에게 시선을 돌리며 대답했다.
‘네, 벗을게‥‥‥ 헉 !”
실피르에게 시선을 돌린 엘이 헛바람을 집어삼켰다.
그의 눈에 비친 실피르는 옷을 모두 벗은 채 속옷만 입고 있었기 때문이다.
‘피, 피가‥‥‥.’
얼굴에 피가 쏠림을 느낀 엘은 재빨리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고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가라앉히기 위해 노력 했다.
상대는 다름 아닌 자신을 낳아 준 엄마다. 엄마를 보고 그런 현상을 보이는 건 말도 안 된다. 하지만 다른 여자도 아니고 다름 아닌 실피르다.
너무나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여인이었던 것이다.
허리까지 찰랑이며 빛에 반사되어 눈이 부시게 하는 탐스러운 금발과 블루 다이아몬드를 연상시키는 눈동자, 그리고 붉은 입술은 너무나도 매력적이었다.
백설같이 새하얀 피부는 마치 인형을 연상시키는 듯했으며, 나올 곳이 나오고 들어갈 곳이 들어간 그녀는 그 누가 보아도 최고의 미녀라 극찬할 것이다.
누가 그녀를 감히 일곱 살 아이가 딸린 유부녀로 보겠는가.
실피르는 엘을 보며 뚱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내가 벗겨 줄 테니까 가만히 있으렴.”
“아, 안‥‥‥ 웁!”
엘은 안 된다고 말하며 도망치려 했지만 어디까지나 어린아이의 몸. 완력에서 실피르를 당할 재간이 없었다.
실피르의 손에 붙잡힌 그는 옷이 하나하나 벗겨지며 점차 알몸이 되어 갔다.
마침내 엘을 알몸으로 만든 실피르는 만족한 웃음을 지었다.
“진작 이랬음 됐잖아? 자, 그럼 들어가자, 엘리.”
엘은 실피르의 손에 붙잡혀 질질 끌려갔다.
끌려가는 엘은 절망스럽게 한마디를 내뱉었다.
“전생 십구 년, 현생 칠 년‥‥‥ 이십육 년간 지켜 오던 내 순결이‥‥‥‥.”
엘은, 의외로 순정파였다.
순결을 잃은(?) 엘은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목욕을 마친 뒤 옷을 차려입었다. 마을 사람들에게 받은 리세토를 상단에 팔기 위함이다.
여관에서 약 10분 정도 걸어서 도착한 곳은 별로 크지 않은 3층 건물이었다.
실피르가 건물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곳이 바로 디벨 상단이 있는 곳이란다.. 이곳 상단주님에게 엄마가 많은 도움을 받고 있어.”
실피르의 말에 엘의 눈이 반짝였다
‘상단이라…… 나중에 대륙 제일 부자 마법사가 되려면 내 물건을 팔아 줄 상단이 필요하겠지.”
그 사이 엘은 실피르와 함께 상단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실피르와 비슷한 나이의 여인이 실피르를 맞이했다.
“어서 오세요.”
“리세토를 팔러 왔어요.”
실피르가 싱긋 웃으며 대꾸했다. 그러자 여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안내했다.
“그렇지 않아도 상단주께서 실피르님이 언제 오실지 기다리고 계셨어요. 자, 드세요,”
“아…… 네, 고마워요. 어? 왜 그러세요?”
막 방으로 들어서던 실피르는 여인이 엘을 가리키는 걸 보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 아이는‥‥‥ ”
“제 아들이에요.”
“네?”
여인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도 그럴 것이 실피르의 외모를 보아 엘 정도 나이의 아들이 있을 거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기 때문이다.
디벨 상단의 중요한 고객 중 한 사람인 실피르의 나이를 그녀가 모를 리 없다. 실피르의 나이가 올해 스물세 살‥‥‥ 결혼을 한 유부녀인 건 알았지만 설마하니 일곱 살이나 되는 아들이 있을 줄은 몰랐다.
그렇다는 것은 실피르가 열일곱의 나이에 아이를 낳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인은 놀라면서 한편으로는 애를 낳고도 이렇게 아름다운 용모를 유지하고 있는 실피르에게 부러움을 느꼈다.
그리고 그녀는 실피르를 똑같이 닮은 엘에게 부드러운 웃음을 지으며 손을 뻗었다.
“너희 엄마는 상단주님과 이야기를 해야 한단다. 잠시 나와 같이 있지 않겠니?”
그 말에 엘은 당치도 않다는 듯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리고 실피르의 옷자락을 꼭 쥐며 같이 있고 싶다는 눈망울을 하였다.
속으로는 코웃음을 쳤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미래의 유일한 돈 유통의 길이 될 지도 모르는 사람을 만나는 자린데, 그 기회를 날릴 수는 없지.’
그리고 실피르를 향해 한껏 애처로운 목소리를 냈다.
목소리는 울먹거리며 말이다.
“난‥‥ 엄마랑 떨어지기 싫은데‥‥‥ 안 돼?”
이어진 촉촉한 눈망울은 실피르의 마음을 그대로 자극했다.
실피르가 고개를 끄덕이며 엘을 안았다.
“안 될 리가 없지. 우리 엘은 언제까지나 엄마랑 함께인걸?”
그리고 여인을 보며 말했다.
“같이 들어가겠어요. 그래도 괜찮겠죠?”
여인은 겸연쩍은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 였다.
“들어가자, 엘리.”
“응!”
엘이 실피르의 손을 잡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방 안에는 상단주의 이미지와는 조금 거리가 먼 학자풍의 30대 초반의 사내가 차를 한 모금 마시더니 실피르를 반겼다.
“어서 오십시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실피르 님.”
실피르도 빙긋 웃으며 인사했다.
“오랜만이에요, 디벨 님.”
“그쪽은?”
디벨이 옆에 있는 엘을 가리키며 묻자 실피르는 엘을 안아 들며 말했다.
“제 아들이에요.”
“그렇습니까? 아, 혹시 나이에 비해 제법 똘똘하다던 그‥‥‥?”
디벨이 놀라움을 담으며 말하자 실피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 .아들이지만 조금 뛰어나답니다, 호호!”
“제가 봐도 뛰어나 보이는군요. 실피르 님께서 정말 대단한 아들을 두신 것 같습니다 ”
“안녕하세요?”
엘이 디벨에게 인사했다. 그러면서 그를 유심히 살피고 있었다.
‘일단 풍기는 기운이나 기질은 괜찮은 거 같아. 하지만 사람의 속은 함부로 속단할 수 있는 게 아니니 좀 더 살펴보자.’
디벨은 허리를 낮춰 엘과 눈을 마주했다.
“반가워요, 저는 디벨이라고 합니다.”
사람과 사람은 눈을 마주칠 때 그 성향을 알 수 있다고 한다.
엘은 디벨의 눈에서 한 점 흐트러짐 없는 깨끗함을 읽을 수 있었다.
상인으로서나 인간으로서나 그의 인품이 괜찮다는 걸 의미했다.
‘허 !’
반면 디벨은 엘의 눈동자에 은은히 서린 빛을 보고는 놀랐다. 엘의 눈은 보통 그 또래 아이들이 지닐 수 있는 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마치 감정을 당하는 듯한 느낌이랄까?
상하가 분명히 구분되고 엘이 자신의 어떤 면을 살피고 감정을 내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눈빛 교환이 끝나고 디벨은 허리를 폈다.
그리고 실피르에게 말했다.
“정말 대단하신 아들을 두셨군요.”
뛰어난 아들에서 대단한 아들로 바뀌었다. 그만큼 엘을 인정했다는 이야기다.
실피르는 그 말에 다시 한 번 웃음을 지었다.
잠시 인사치레를 하고 두 사람은 마주 앉았다.
실피르가 리세토를 내놓자 디벨은 리세토를 찬찬히 살펴보며 말했다.
“이번 리세토는 무척 상태가 좋군요. 저번 달보다 오 골드는 더 쳐줄 수 있겠어요.”
“그런가요? 저는 잘 모르겠는데…….”
그 말에 디벨은 웃음을 지었다.
“전문가가 아니시니 그러실 수도 있습니다. 그럼, 오 골드를 더 쳐서 백사십 골드를 드리겠습니다.”
디벨이 돈주머니를 내밀자 실피르가 그것을 받아 들며 인사했다.
“고마워요.”
“당치도 않은 말씀을. 리세토를 저희 상단에서 구입하게 되어 날이 갈수록 상단이 커지고 있습니다. 오히려 이득을 보는 건 저희니 실피르 님이 너무 고마워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서로가 이익을 보는 거라 생각하면 편하겠네요.”
“호호! 고마워요. 디벨 님 덕분에 마을 사람들의 생활도 더 나아졌답니다.”
“그렇다니 저도 기쁘군요.”
“그럼 다음 달에 또 올게요. 그때까지 상단 잘 꾸리시구요.”
실피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엘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순간 엘과 디벨의 눈이 얽혔다. 엘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떠올랐고, 디벨의 눈동자는 급격히 떨렸다.
엘이 디벨에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리고 실피르와 함께 밖으로 나섰다.
“후우!”
그들이 밖으로 나서자 디벨은 의자에 몸을 기대며 한숨 을 내쉬었다.
그는 방금 전 엘의 눈빛을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그런 눈빛이라니 ‥‥‥ 미래에 크게 될 녀석이다. ”
인간으로서, 상단주로서 다져진 그의 감각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엘이라는 아이는 장차 크게 될 것이라고 말이다.
밖으로 나선 엘은 실피르가 어디론가 걸음을 옮기자 실피르의 옷깃을 잡아당기며 물었다. “이번엔 어디 가?”
리세토의 값을 5골드나 더 후하게 받은 실피르는 기분이 무척 좋았기에 엘의 물음에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응, 반자크에 있는 마탑에 간단다. 그곳에선 마법서도 팔고 각종 마법 재료도 팔고 있지. 우리집에 있는 마법서도 전부 마탑에서 산 거란다.”
“우웅!”
그 말에 궁금증을 느낀 엘은 ‘나 궁금한 게 있습니다.’ 라는 포스를 팍팍 풍기는 표정과 행동을 취했다.
그런 엘의 모습을 그냥 지켜볼 리가 없는 실피르. 당연히 엘을 향해 물었다.
“뭐 궁금한 게 있니?”
“응! 책에서 봤는데 마법서는 굉장히 비싼 거라고 들었는데…….”
“아! 그거 말하는 거구나.”
실피르가 손을 짝 치며 엘을 보았다. 그리고 그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으며 말했다.
“우리 엘리, 예리하기도 하지. 과거에는 마법서가 무척 비쌌지만 지금은 마법서 필사본이 무척 많기에 그 값이 매우 싸졌단다. 그래서 과거와 달리 지금은 마나와 수식을 이해하지 못해 마법을 사용 못하는 것이지 마법서가 없어서 마법을 못 사용하는 것이 아니란다.”
그 말에 엘은 다른 몇 가지 궁금증이 생기는 걸 느끼며 실피르에게 물었다.
“그러면 마법서는 몇 클래스까지 파는데?”
“이곳 반자크에서는 9클래스 마법서까지 팔지. 현재 나와 있는 마법서는 10클래스까지 총정리가 되어 있는데‥‥‥ 대륙에서 가장 경지가 높은 마법사는 9클래스 마스터밖에 없단다. 그것을 뛰어넘는 10클래스는 말 그대로 역사상 오른 이가 없다고 전해지고 말이야.”
“그렇구나, 9클래스 마스터가 최고구나,”
‘9클래스라‥‥‥‥’
엘은 집에 있는 마법서 내용을 떠올려 보았다.
현재 룬크 마을에 위치한 집에 있는 마법서는 7클래스 내용까지 존재한다. 이론적으로는 5클래스 마스터의 수식까지 손쉽게 이해한 엘이었으나 6클래스부터는 여러 가지 수식이 복합적으로 섞여 있기에 5클래스보다 몇 배 는 어려웠다.
하지만 그것뿐, 엘이 본격적으로 공부만 한다면 6클래스 수식도 익히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전생에 학교 공부만으로 수능에서 수리 영역 1등급을 받아냈던 그가 아니던가.
문제가 되는 것은 체내에 축적된 마나였다.
마나를 체내에 받아들임으로써 고 클래스에 해당하는 마법을 발현해야 하는데 아직 덜 자란 몸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마나의 양이 정해져 있던 것이다.
엘은 실피르에게 말했다.
“엄마, 그럼 우리 8클래스 마법서랑 9클래스 마법서 사 자.”
실피르의 눈동자가 동그랗게 뜨였다.
“그건 왜?”
“으응, 아무래도 다 갖추는 게 멋질 것 같아서. 헤헤!”
귀엽게 웃는 엘의 모습에 실피르는 피식 웃었다.
두 마법서는 무척 비쌌지만 이번에 받는 돈과 모은 돈을 합하면 충분히 구입할 여건이 되었다
“그러자, 그럼.”
“와아! 엄마 고마워요!”
실피르의 승낙에 엘은 빙긋 웃으며 고마움을 표했다. 그러다 엘은 돌연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고 무척 궁금해 하는 어조로 물었다. 이번 질문은 지극히 아이들이 할 만한 질문이었다. “그런데 엄마. 그랜드 마스터가 세, 아니면 9클래스 대 마법사가 세?”
이 질문은 육탄전에 능한 레드 드래곤과 마법 능력이 강한 골드 드래곤 중 누가 더 강하다는 질문과 비슷한 것 이었다.
“음‥‥ 글쎄?”
잠시 고민하던 실피르는 결론을 내린 듯 엘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내 생각에는 둘이 겪어 온 경험의 차에 따라 승부가 갈릴 것 같아.”
“경험? 싸움 경험?”
“그래. 듣기로는 그랜드 마스터와 9클래스 대마법사는 거리의 구분이 모호해지는, 말 그대로 최강의 경지라 할 수 있거든. 누가 더 많이 경험을 쌓고 누가 더 임기응변에 능한가에 따라 결과가 나타나겠지”
결국 싸워 봐야 안다는 것이다.
하지만 능력이 비슷하다는 말에 엘은 궁금증을 풀 수 있었다.
그는 9클래스 대마법사를 거론하면서 순간 먼 곳을 바라보는 실피르의 눈동자를 보다 다짐하듯 중얼거렸다.
‘다시 마을로 돌아가면‥‥ 엄마에게 단전호흡을 가르쳐 드릴게요. 그리고 수식을 풀어서 더 쉽게 마법을 익히 게 해 드릴게요.’
엘은 그동안 자신이 엄마에게 너무 무심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고차원 클래스로 접근하는 열망은 자신만 가지고 있는 게 아니거늘‥‥‥ 실피르도 더 높은 경지를 갈망하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더구나 애초에 자신이 고차원 클래스 마법사가 되려는 이유도 실피르를 위한 게 아니던가.
엘은 그것을 늦게 눈치 챈 자신을 자책하면서 실피르에게 고개를 기댔다. 이럴 때만큼은 전생의 나이를 잊고 누구보다 자상한 엄마인 실피르에게 기대고 싶었다.
하지만 실피르로서는 평소와 다른 엘의 모습에 의아할 뿐이었다.
“왜 그러니, 엘리?”
“헤헤! 좋아해요, 엄마.”
그러면서 편하게 실피르에게 기대는 엘. 그 모습에 실피르도 엘을 꼬옥 안았다.
“나도 엘리를 그 누구보다 좋아한단다.”
훈훈한 모자의 정을 다시 한 번 확인한 그들은 반자크에 우뚝 선 마탑에 들어섰다.
실피르는 마탑 소속 마법사는 아니지만 마탑에서 의뢰한 일을 수행하고 있다. 마나석에 룬어를 새기는 일 등을 말이다.
“어서 오세요, 실피르 마법사님.”
“저도 반가워요.”
실피르가 마탑에 들어서자 마법사들이 실피르를 보며 인사를 건넸다.
실력을 무척 존중하는 마탑에서 스물세 살의 나이에 3클래스 마스터에 이른 실피르는 무척 뛰어난 수재라 할 수 있다. 물론 실피르는 남들이 모르는 사이에 4클래스 익스퍼트에 든 상태였지만 남에게 자신의 실력을 알리는 성격이 아니었기에 외부에는 3클래스 마스터로 알려져 있었다.
“부탑주님을 뵈러 왔어요.”
그 말에 마법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않아도 부탑주님께서 실피르 님이 오실 거라 하시며 기다리시더군요. 얼른 드시죠.” 실피르는 쓴웃음을 지으며 마법사의 안내에 따라 부탑주의 집무실로 들어갔다.
뒤에서 엘이 쫄랑쫄랑 그녀를 따르고 있었다.
이윽고 집무실 앞에 도착하고, 집무실까지 안내한 마법사가 집무실 안을 향해 말을 걸었다. “부탑주님, 실피르 님이 오셨습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대답이 들려왔다.
“어서 들어오라 하시게.”
“들어가시지요.”
실피르가 고개를 끄덕 이며 집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중년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서 오시게! 우리 실피르 양.”
부탑주라 불린 인물은 양팔을 한껏 벌리며 실피르를 맞이했다.
그는 50대 중반의 외모에 반쯤 벗겨진 대머리를 하고 있었다.
살이 몹시 쪄 걷는다면 뒤뚱뒤뚱 걸을 것 같았고, 얼굴에 기름이 줄줄 흐르는 것이 전형적인 돼지 중년인이었다.
그 옆에는 열두 살 정도로 보이는 아이가 서 있었는데 부탑주와 비슷한 얼굴에 무척 오만하고 싸가지 없어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부탑주의 얼굴 한편에는 숨기지 못할 음심이 서려 있었는데, 그것은 실피르에게 향하고 있었다.
그런 부탑주의 모습에 엘은 순간 발끈했다.
‘저 변태 같은 놈이!’
그래도 경거망동해서는 안 된다. 저 부탑주가 자신의 엄마를 음심에 가득 찬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지만 그는 명색이 마탑의 부탑주.
자칫 행동 하나 실수만 해도 치명적인 칼날이 되어서 돌아을 것이다.
하지만 엘의 걱정과는 달리 함부로 하지 못하는 것은 부탑주도 마찬가지였다.
평소 성격이 사근사근하고 마음씨 좋은 실피르는 사실 마탑의 소속이 아닐 뿐이지 마탑 소속 마법사들에게 두터운 신망을 얻고 있었다.
그런 실피르를 함부로 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하는 꼬락서니는 형편없어도 5클래스 마스터에 든 부탑주는 고 클래스 마법사의 면모를 보이며 실피르에게 말을 걸었다.
“그래, 마나석에 룬어를 모두 새기셨소?”
“네, 모두 새겼습니다.”
그 말과 함께 실피르는 룬어가 새걱진 마나석을 꺼내 들었다.
마나석에 룬어를 새기는 것은 무척 까다로운 작업으로, 상당한 집중력과 세밀한 세공을 요하는 작업이다.
웬만한 실력자가 아니고서는 엄두도 못 내는 일이었기에 이 방면에 상당히 알려진 실피르가 이 일을 맡게 된 것이다.
“흠!”
부탑주 베클록은 실피르가 꺼낸 마나석을 천천히 살폈다. 기름기가 번들거리는 얼굴에 땀을 흘리면서까지 확인한 그는 만족의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꽤 좋구려. 틀린 글자 하나 없이 룬어가 잘 새겨져 있고. 갈수록 실력이 느는 것 같소, 실피르 양.”
“감사합니다, 부탑주님.”
실피르는 송구하다는 말과 함께 고개를 숙였다. 말을 하면서도 노골적인 시선을 보내는 베클록의 시선을 감당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이 일은 이걸로 끝내도록 하고‥‥‥ 아, 옆에 있는 건 아들인가?”
베클록이 엘을 가리키며 묻자 실피르가 약간 밝아진 모습으로 대답했다.
“예, 제 아들입니다 ”
“허! 이거야, 실피르 양을 그대로 닮아 무척 잘생겼구려.”
아들에 대한 칭찬이 기뻤는지 집무실에 들어서고 실피르의 표정에 처음 변화가 생겼다.
“감사합니다.”
“그러고 보니 내 아들을 소개하지 않았군. 이 아이는 내 셋째 아들인 게드릭이라고 하외다.” 베클록의 소개에 옆에 있던 게드릭이 실피르에게 고개를 까딱 숙였다.
생긴 대로 오만하고 싸가지 없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어쩌랴. 상대는 다름 아닌 부탑주의 아들인데.
부탑주에게 밉보이면 실피르로서는 당장 생활에 큰 차질이 빚어질 것이 분명한 일.
실피르는 화사한 웃음을 지으며 인사했다.
“반가워요, 실피르라고 해요.”
하지만 게드릭의 표정은 더 이상하게 변했다. 실피르에게 무언가 상당한 불만이 있음이 분명했다.
그것을 눈치 챈 베클록이 먼저 선수를 쳤다.
그는 게드릭을 가리키며 웃었다.
“내 아들은 이제 열두 살인데 이번에 1클래스를 마스터 했다오. 허허 !”
“대단하네요. 열두 살의 나이에 1클래스 마스터에 오르다니 ‥‥‥‥.”
그 말에 실피르는 놀랐다. 열두 살의 나이에 1클래스를 마스터했다면 천재 축에 속한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정도 성취라면 20대에 들어서기 전에 3클래스를 마스터할 수도 있다.
현존하는 9클래스 마스터 대마법사가 열다섯의 나이에 3클래스 마스터에 올랐으니 그 능력이 얼마나 뛰어난지 단적으로 알 수 있었다.
실피르가 놀라자 베클록이 느물느물한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은근한 눈빛으로 실피르를 보며 엘을 가리켰다.
“그대가 나한테 온다면 내가 저 아이를 게드릭과 버금가는 성취를 얻게 해 줄수 있다오. 아, 너무 정색하지 마시오. 농담이니까 말이오, 농담, 아하하!”
웃음을 터뜨리는 베클록을 보며 실피르는 붉은 입술을 꼬옥 깨물었다. 농담이라고 얼버무리며 웃지만 베클록의 말이 진심을 담고 있음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실피르의 모습이 흔들리고 있는 거라 느낀 걸까?
이 기회를 잘 이용하면 아들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실피르가 자신에게 올 것이라 생각했다. 베클록은 게드릭을 보며 말했다.
“게드릭, 에너지 볼트를 시전해 보아라.”
에너지 볼트는 1클래스 마법 중 라이트와 함께 가장 기초적인 마법으로, 마나 속성 그대로를 활용한 마법이다. 하지만 살상력이 없는 마법으로, 말 그대로 기초 마법이다.
베클록의 말에 게드릭은 불만 어린 표정을 짓다가 할 수 없었는지 캐스팅을 하였다.
그리고 양손을 가슴 앞부분에 놓으며 외쳤다.
“에너지 볼트(Energy volt).”
그 외침과 함께 백열의 구가 생겨났다. 1클래스 익스퍼트가 아닌 1클래스 마스터가 생성한 에너지 볼트임이 분명했다.
“정말이구나‥‥‥‥‥.”
4클래스 익스퍼트인 그녀가 아무릴지도 않게 시전할 수 있는 에너지 볼트였지만 고작 열두 살에 불과한 게드릭이 시전한 것은 그 의미가 남달랐다.
“흐흐!”
실피르가 놀란 모습을 느긋하게 감상하며 베클록은 낮게 웃었다.
이 정도 능력을 보였으니 자신에게 안기지 않고는 못 배길 것이다. 더군다나 그녀는 아들을 무척 사랑하지 않는가.
그 모습을 엘은 모두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속셈을 알아차린 엘은 속으로 이를 갈았다.
‘빌어먹을! 너 따위가 감히‥‥‥!’
그러면서 엘의 시선이 실피르와 마법을 시전한 게드릭을 향했다. 몹시 놀라워하는 그녀의 표정에서 엘은 순간 울컥하는 감정을 느꼈다.
저런 시선은 본래 자신이 느꼈어야 하는 것이었는데 말이다.
엘은 순간 고민했다.
‘능력을 드러낼까? 아, 젠장, 열 살쯤에 드러내려고 했는데‥‥‥‥’
하지만 이대로 있다면 상황이 어떻게 변할지 몰랐다.
실피르 그녀 스스로는 꿈쩍하지 않겠지만 그녀의 아킬레스건과도 같은 존재가 바로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이런 일도 자신 때문에 일어났다고 생각하자 엘은 마음을 굳힐 수 있었다.
‘그래, 능력을 조금만 드러내자. 조금 귀찮아지겠지만 엄마에게 나에 대한 기대를 단번에 충족시켜 드릴 수 있어.’
그렇게 마음을 정하자 이상하게 격렬하게 두근거리던 가슴이 일순간 평온해졌다.
엘은 자신만만하게 웃음을 지었다.
그를 보던 게드릭의 표정에 의아함이 서릴 때, 엘은 한 발짝 앞으로 나서며 지극히 순수하고 천진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에너지 볼트? 이거 나도 시전할 수 있는데?”
잔잔한 수면 위에 거대한 파동을 일으키는 한마디였다.
“뭐? 그 말이 사실이니?”
그 말에 게드릭을 바라보던 실피르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엘에게 시선을 옮겼다.
하지만 그녀의 눈에 어린 것은 ‘불신’ 이라는 감정이었다.
생각을 해 보라.
열두 살에 에너지 볼트를 시전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천재라 극찬을 받는 게 현재 대륙의 판세다.
지금 게드릭이 1클래스 마스터의 능력을 펼치는 것도 능히 천재라 불려도 모자람이 없는데 갑자기 일곱살인 엘이 나서서 자기도 할 수 있다고 한다면?
당연히 그 누구도 믿지 않을 것이다.
눈에 불신을 떠올리던 실피르는 잠시 후, 무언가 떠오른 듯 안쓰러운 표정으로 엘을 바라보았다. 엘이 그녀를 위해 할 수 있다고 나선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그녀는 눈가 가득 미안함을 담은 채 엘을 바라보았다. 이게 다 자신 탓으로만 여겨졌다.
“엘리, 엄마가 미안해. 하지만 거짓말을 할 필요는 없잖니. 응? 우리 착한 엘리는 거짓말 안 하지?”
너무나 미어지는 듯한 그녀의 말은 엘의 가슴을 순간 철렁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말에 베클록의 눈가에 ‘그럼 그렇지.’라는 표정이 떠올랐고, 게드릭은 거의 경멸에 가까운 눈으로 엘을 바라보았다.
엘은 그 모습에 더 이상 고민할 필요를 못 느꼈다. 내심 고민하고 갈등하던 그는 실피르가 평소 자신에게 미안함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한 아이의 엄마로서 아들을 남부럽지 않게 키우고 싶은 것은 당연한 사실‥‥‥.
이 게드릭이라는 천재 마법사의 등장으로 그동안 엘에게 제대로 신경 쓰지 못했던 미안한 마음이 터져 버린 것이다.
엘은 한 발자국 더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실피르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그가 실피르를 바라보는 눈은 평소 순진무구하고 해맑던 엘의 눈이 아니었다. 굳은 결의가 번뜩이며, 푸르스름한 현기가 은은히 감돌고 있는 눈이었다.
엘이 실피르를 향해 말했다.
“엄마, 저는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에요. 절 보세요. 그리고 엄마의 아들이 얼마나 훌륭하게 자랐는지 봐 주세요”
“으응‥‥‥‥.”
마치 홀린 듯이 실피르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녀가 스스로의 행동을 자각했을 때 그녀는 경악 어린 표정으로 엘을 바라보아야 했다.
가슴 앞에 놓인 엘의 양손 사이에 마나가 휘몰아치는 걸 느낀 것이다.
아니, 그것은 마나가 휘몰아치는 것이 아니다.
너무나 빠르게 마나가 허공에 배열되고 있었기에 마나가 마치 자유분방하게 휘몰아치는 것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심지어 5클래스 마스터인 베클록조차 경악 어린 눈동자로 엘을 바라보고 있었다.
고작 일곱 살에 불과한 꼬맹이가!
마나의 마자도 제대로 몰라야 할 꼬맹이의 양손에 엄청난 속도로 마나가 배열되고 있던 것이다.
이윽고 엘의 작은 입술에서 여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 입에서 흘러나온 내용은 그들이 허풍이라 치부했던 마법의 시전이었다.
“에너지 볼트.”
그러자 엘의 앞에 에너지 볼트가 생성되었다.
새하얀 빛을 발하며 백열을 지니고 있는 구. 1클래스에 진입해야 사용할 수 있는 에너지 볼트였다.
그것을 본 베클록과 실피르는 입을 떡 벌렸다.
1클래스 마스터인 게드릭은 느끼지 못했지만 엘보다 더 높은 클래스에 이른 그들은 엘의 마법이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마, 말도 안 돼!”
베클록이 손을 덜덜 떨며 엘 앞에 생성된 에너지 볼트를 가리켰다.
이것은 정말 말이 될 수가 없었다.
실피르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멍하니 풀린 기색으로 엘 앞에 생성된 에너지 볼트를 바라보고 있었다.
“미, 믿을 수 없어.”
실피르는 지금 이것이 현실인지 꿈인지조차 의심하고 있었다.
어찌 그러지 않을 수 있겠는가.
엘 앞에 생성된 에너지 볼트. 그것은 게드릭이 시전한 에너지 볼트보다 무려 두 배 이상의 크기를 지니고 있었다.
어디 그것뿐이겠는가. 에너지 볼트를 캐스팅하던 시간도 게드릭의 절반도 되지 않았다.
그것도 에너지 볼트가 단순히 덩치가 큰 게 아닌, 거의 3클래스 파이어 볼과 맞먹는 어마어마한 위력을 내포하고 있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지금 이 순간은 엘이 1클래스 마스터라는 건 둘째로 칠 수 있을 정도다. 방금 전 엘이 마나를 배열하던 것은 기존의 마법 체계와는 완전히 달랐으며, 그 속도가 훨씬 빨랐고 마나의 호응 또한 월등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캐스팅 시간은 절반으로 줄어들었고, 마나 호응이 더욱 커져 본래 마법의 위력보다 몇 배 이상 강한 마법을 시전하게 되었다.
대륙 마법계에 알려지면 발칵 뒤집어질 어마어마한 일이 지금 일어난 것이다.
엘을 제외한 세 사람 모두 경악에 빠져 있었다.
게드릭도 엘이 펼친 마법의 진가를 알지는 못했지만 그의 마법이 자신의 마법보다 더 강하다는 것은 느낄 수 있었다.
싱긋.
엘은 실피르를 바라보며 웃음을 지었다. 그의 눈은 다시 예전과 같은 순수하고 해맑은 빛을 담고 있었다.
그리고 엘은 실피르를 향해 말했다.
“엄마의 아들은 훌륭하게 자랐어요. 그러니 남에게 굽힐 필요도, 이유도 없어요. 저를 믿으세요. 저는 이 세상 하나뿐인 엄마의 아들이니까요. 엄마가 원한다면 세상의 모든 부를, 엄마가 원한다면 세상의 모든 마법을 익히게 해 드리겠어요.”
이 순간 엘의 말은 그 어떠한 말보다 더 진실 되고 자랑스럽게 들려왔다.
이 순간만큼은 자신의 아들이 그 무엇보다 자랑스럽고 믿음직스러웠다.
“…….”
생전 처음 겪는 기이하고 환상적인 상황에 집무실은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그러한 침묵도 잠시, 우당탕! 하는 소리와 함께 집무실의 문이 벌컥 열렸다.
그리고 꼬질꼬질한 모습의 70대 초반의 노인이 들어왔다.
노인은 지저분한 행색과 달리 두 눈은 강렬한 안광을 뿜어내고 있었다.
노인은 베클록을 보며 말했다.
“누구냐! 방금 마법을 시전한 게 누구냐!”
그 외침에 베클록의 시선이 순간 엘에게 향했다.
그러자 노인의 시선도 엘에게 향했다.
노인의 시선을 받은 엘은 순간 노인이 지닌 힘을 느끼고는 몸을 흠칫 떨었다.
엘이 특별히 남의 힘을 감지하는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다. 단전호흡으로 다져진 기감으로 하여금 노인의 주변에 포진된 마나의 흐름을 느끼게 해 주었고, 노인의 체내에 웅크리고 있는 마나의 양의 전체적인 윤곽이 느껴졌다.
‘엄청난 마나다. 책에서 읽은 내용과 내 기감에 의한 정보를 합쳐 보면 저 노인은 7클래스 마법사다. 함부로 추측하지 못할 정도로 높은 마법사야.’
엘이 노인에 대해 평가를 내리고 있을 때, 노인도 엘을 바라보고 있었다.
노인은 엘의 눈동자를 보고 말했다.
“특이한 놈이구나. 나이에 맞지 않는 눈을 가지고 있어.”
흠칫.
엘의 마음이 순간 철렁했으나 그것을 알아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엘은 짐짓 해맑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제가 나이에 맞지 않는 눈을 가졌다니요.”
그 모습이 너무 자연스럽고 나이에 걸맞아 순간 노인은 고개를 갸웃했다.
잠시 엘을 보며 고개를 갸웃하던 노인은 베클록에게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다시 물었다.
“이놈아! 방금 묻지 않았더냐. 조금 전 여기서 마법을 시전한 게 누구냐?”
반자크 마탑의 부탑주인 베클록에게 이놈아 저놈아 할 수 있는 이는 단 한 명뿐.
바로 이곳 마탑의 탑주.
성격이 무척 시원시원하고 호탕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괴팍하기도 한 탑주였기에 베클록은 재빨리 대답했다.
“저 꼬마가 시전했습니다.”
“뭐라?”
그 말에 마탑주, 브리온은 잠시 엘을 살폈다. 그러더니 이내 화가 난 얼굴로 베클록을 바라보며 고함을 질렀다.
“이놈아,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일곱 살 정도로 보이는 꼬맹이가, 뭐? 마법을 시전했다고?차라리 이곳에 10 클래스 마법사가 왔다는 게 더 설득력 있겠다!”
브리온을 보며 베클록은 기겁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브리온에게 외치듯 말했다.
“제가 탑주님께 거짓말할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게드릭의 마법 시전을 보였고, 그 후에 저 꼬맹이가 마법을 시전했단 말입니다”
마치 죄인이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는 듯한 베클록의 외침에 브리온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리고 실피르에게 시선을 옮겼다.
“저놈 말이 사실이냐? 실피르, 이 아이가 방금 마법을 시전했어?”
브리온의 말에 실피르가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마, 맞아요. 하, 하지만 저도 갑작스러워서‥‥‥‥.”
실피르도 얼떨떨한 반응을 보이자 브리온은 엘을 보며 생각에 빠졌다.
“근데 넌 누구냐?”
“아, 아‥‥‥ 제 아들이에요.”
“그래? ‥‥‥흐음!”
돌연 브리온은 실피르와 엘의 팔을 덥석 잡았다.
“어‥‥‥? 왜 그러세요?”
“에?”
둘의 반응을 신경 쓰지 않은 채 브리온은 노인답지 않은 완력으로 둘을 이끌었다.
“잠시 이리로 와라. 할 이야기가 있다.”
둘의 의사도 묻지 않은 채 브리온은 양손에 힘을 주고 모자를 어딘가로 이끌었다.
베클록은 완전히 사라진 브리온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제기랄! 다 잡은 물고기였거늘, 어디서 그런 놈이 나타나서‥‥‥.”
실피르를 가지는 데 실패하여 낙담하는 베클록과는 달리 게드릭의 두 눈은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엘이라는 존재로 하늘을 찌르던 그의 자존심에 금이 간 것이다.
게드릭은 엘이 사라진 곳을 보며 각오를 되새겼다.
‘다음에는 내가 더 뛰어난 마법사가 되어 있을 것이다. 난 지지 않는다. ‘
마탑의 가장 꼭대기 층인 탑주의 집무실까지 두 사람을 끌고 온 브리온은 두 사람의 손을 놓으며 말했다.
“앉아라.”
그 말에 실피르는 머뭇거리다 소파에 앉았다. 뒤이어 엘도 자리에 앉았다.
“옛날 일이다.”
두 사람을 향해 등을 보이고 선 브리온이 뜬금없이 전혀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실피르와 엘이 어떤 표정을 짓건 브리온은 자신의 말을 계속하였다.
“나는 마법을 익힐 때 다른 동기들 중에서도 손에 꼽히는 인재였지. 하지만 나는 그것에 만족하지 않았다. 아무리 마법사들 중에서 발군이라고 하나 재빠른 몸놀림을 발휘하는 기사들에게 마법사는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던 것이다.”
브리온이 몸을 천천히 돌렸다. 새하얀 백발과 수염을 가진 그의 눈은 흡사 젊은이의 그것처럼 열기를 내뿜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연구했다. 어떻게 하면 마법사가 캐스팅 하는 시간을 더 줄일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더 마법을 강하게 시전할 수 있을까 말이다. 그리고 오늘 그 가능성을 발견하게 되었다.”
브리온의 시선에 엘에게 향했다.
엘의 모습이 너무나 자연스러워 느끼지 못했지만 지금은 느낄 수 있었다. 그는 벽을 넘은 자, 7클래스를 마스터 한 대마법사였기 때문이다.
아무리 엘이 능력을 숨기고 있다고 해도 몸속에 자리 잡은 마나는 지울 수 없는 법이다. 브리온은 그 마나를 꿰뚫어 보았고, 베클록의 말이 사실임을 알 수 있었다.
저 천진무구한 눈동자 속에 숨겨져 있는 눈을 알아챈 것이다.
브리온은 실피르를 슬쩍 바라보았다. 실피르도 갑작스러운 상황에 무척 혼란스러운 듯했다. 그녀는 여태껏 엘이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지조차 모르고 있었다.
마냥 귀엽고 자신을 따르던 아들이 갑자기 놀라운 마법을 시전하고 그 마법에 엄청난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니‥‥‥.
아들이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어서 응당 기뻐해야겠지만 사람의 마음이란 묘해서 그동안 능력을 감추고 있었다는 것에 실망감을 느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엘이 이대로 멀리 사라질 것 같아 두렵기도 했다.
혼란스러운 그녀의 마음을 이해한 것일까? 아니면 엘과 둘이 있고 싶은 것일까?
브리온은 실피르를 보며 말했다.
“여기서 기다려라. 나는 엘과 이야기를 하고 올 테니.”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던 실피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브리온은 엘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좀 전과 다른 한 설레 임이 담긴 어조였다.
“나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을 것이다. 그렇지?”
그 말에 엘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이내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이에 걸맞은 모습이었다.
“할아버지가 제게 할 말씀이 있으신 거 같아요. 늙은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 주지 않으면 나쁜 사람이라고 했으니까 이야기를 들어 줘야지요.”
그 말에 브리온은 한 방 얻어맞았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허허허! 내가 한 방 먹었구나. 그래, 이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어 줘야 한단다. 혼자 이야기하기에는 너무 외로우니 말이야.”
브리온이 손을 뻗었다. 그러자 엘이 그 행동의 의미를 파악한 듯 브리온의 손을 잡았다.
“엘리‥‥‥‥.”
뒤에서 실피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과는 다른,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음을 느꼈다.
엘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맺혔다.
좀 더 실피르와 정상적인 생활을 하고 싶었거늘‥‥‥‥.
한순간 울컥한 감정을 억누르지 못한 것과 마탑의 전력을 너무 낮게 본 그의 실책이었다. 엘은 실피르에게 최대한 밝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걱정 말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탑주 할아버지가 제게 나쁜 짓을 하는 게 아니니까요. 그리고 저는 여전히 엄마의 아들인 엘이에요. 엄마의 하나뿐인 아들 엘이에요.”
그 말에 실피르의 표정이 밝아졌다. 생각해 보니 고민 할 사항이 아닌 것이다.
고민할 것 없다. 엘은 그녀의 아들이다. 자랑스러운 그녀의 아들. 그 아들이 당장 어디로 간 것도 아닌데 염려해서 무엇 하겠는가.
아니, 오히려 그런 아들의 성장을 기뻐해 줘야 하지 않겠는가.
빙긋.
본래 미소를 되찾은 실피르는 엘에게 방긋 웃어 주었다.
“그래, 그래야 내 아들 엘리지. 엄마는 우리 아들을 믿는단다.”
엘의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요.”
엘은 브리온에게 눈짓을 하였다. 브리온은 고개를 끄덕 이더니 시동어를 외웠다. 단둘이 이야기할 공간으로 가기 위함이다.
“매스 텔레포트(Mas Teleport).”
스파앗-!
새하얀 빛이 브리온과 엘을 감싸더니 그대로 사라졌다.
파앗!
새하얀 빛이 폭사되며 두 명의 신형이 나타났다. 70대 노인의 브리온과 일곱 살 꼬맹이 엘이었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몇 평 남짓한 조그마한 공간이었다. 탁자에 두 개의 의자만 덩그러니 놓여 있는 곳이었다.
브리온은 의자를 빼고 앉으며 엘에게 말했다.
“앉아라.”
그 말에 엘은 짧은 다리를 놀려 힘겹게 의자를 뺀 뒤 의 자에 앉았다.
“‥‥‥.“
둘 사이에 침묵이 감돌았다. 엘은 정말 일곱 살 아이처럼 멀뚱멀뚱한 표정으로 브리온을 바라보고 있었고, 브리온은 그런 엘의 모습에 자신이 착각한 게 아닌지 고민하고 있었다.
하지만 고민도 잠시, 브리온은 자신이 본 엘의 눈을 기억하고 있었기에 입을 열었다.
“내가 한 말을 들었을 것이다. 너는 어떻게 생각하지?”
“‥‥‥.”
엘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브리온을 바라볼 뿐.
그 순간 브리온의 눈이 번뜩였다. 엘의 눈에서 전혀 다른 성질의 빛이 흘러나온 걸 본 것이다.
엘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에게 뭘 바라시는 거죠, 탑주 할아버지?”
엘의 눈에서는 영롱한 푸른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엘은 지금 전신에 축적된 마나를 움직이고 있었다. 눈앞의 마탑주가 바라고 있는 것이 자신의 지구 수학 공식과 단전호흡인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처음 강하게 나가기로 했다. 지금 급한 건 상대 쪽이지 자신이 급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전생에 악신 저그라 불렸던 그의 플레이 방식은 알게 모르게 그의 성격에 녹아 있었다. 초반에 위협적인 러쉬를 하듯 저돌적이면서도 순간순간마다 어느 정도 회피할 줄 아는 유연함이 있었기 때문이다.
엘은 지금 이 상황을 마치 한 판의 게임처럼 가정하고 그대로 브리온을 대하고 있었다.
“허허! 그렇게 말하니 말을 하기 뭐하구나.“
그런 엘의 생각이 먹힌 듯, 브리온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조금 난색을 표했다. 차마 엘에게 캐스팅 시간을 줄인 것과 마나 호응을 높이는 방법을 묻기가 난감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대가 아직 어린아이라는 점을 생각하여 브리온은 솔직하게 말했다.
어린아이에게는 거짓이 통하지 않는 법.
“그렇게 말하니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마. 마탑 꼭대기 집무실에 있던 나는 부탑주 놈의 집무실에서 기이한 마나의 흐름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비록 1클래스에 불과한 마법이었으나 기존의 1클래스 마법보다 마나 호응이 월등하고 캐스팅 시간이 더 짧더구나.”
“‥‥‥.“
브리온의 말을 들은 엘은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브리온의 말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고민되었던 것이다.
지금 엘이 지니고 있는 것은 무척 대단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지구의 수학 공식과 단전호흡이 결합되면 마법사의 수준이 무시무시하게 올라갈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같이 힘이 없는 상태에서 이러한 것은 무척 위험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자칫 비밀이 새어 나가기라도 하면 실피르와 엘은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질 수 있었다.
한참 고민하던 엘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솔직하게 말하기로 하였다. 물론 90퍼센트의 진실과 10퍼센트의 거짓이 섞여 있었다.
“그 방법을 알고 있어요.”
브리온의 눈이 번뜩였다.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확답을 듣는 것과 안 듣는 것은 상당한 차이가 존재한다.
“그래 내게 알려 줄 수 있겠느냐?”
그 말에 엘은 코웃음을 쳤다. 지금까지 순순히 대답한 것은 유연한 대처의 필요성을 느껴 그런 것이지만 자신만의 비법을 알려 주는 건 달랐다.
자신을 만만하게 보는 적에게 강한 타격을 줘야 정신을 차리는 것이다.
엘은 짐짓 표정을 찌푸리며 나름대로 매서운 목소리를 냈다.
“절 바보로 아시는 거예요? 무엇보다 마법을 빠르게 캐스팅할 수 있고 마나 호응을 높일 수 있는 게 얼마나 큰 비전인데요. 제가 아무리 어려도 그 정도 세상물정은 알고 있어요, 탑주 할아버지, 설사 알려 주더라고 그걸 날로 꿀꺽하시려는 건 아닐 테죠? 7클래스 마스터인 마탑의 탑주께서 도둑처럼 말이죠.”
일곱 살 아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강렬하면서도 할 말이 없게 만드는 말이었다.
“커 험 !”
졸지에 도둑놈이 되어 버린 브리온은 헛기침을 했다.
그 자신이 생각해도 너무 속 보였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것도 잠시, 브리온은 본래 안색을 되찾고는 말했다.
“그래, 그럼 얼마만큼의 대가를 원하느냐? 정당한 대가를 준다면 되겠지? 어떠냐, 일만 골드를 주겠다.”
1만 골드면 평생 아니, 까마득한 후손까지 펑펑 써도 다 쓸 수 있을지 의문이 드는 거금이었다. 하지만 엘에게는 당장 거금이 필요 없었다. 그리고 그 금액에 팔 생각도 없었다.
엘은 빙긋 웃었다. 당치도 않은 소리다. 지금 엘이 알고 있는 비법을 공개한다면 억만 골드를 제시한다고 해도 얻으려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강하게 나갔으니 이번에는 유연하게 우회를 해야 한다.
엘은 맑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캐스팅 속도를 줄이는 건 어느 정도 알려 드릴 수 있지만 마나 호응은 마법에 입문했을 때부터 익혀야 해요. 그게 아니면 익힐 수 없거든요. 그리고 이건 가르쳐주신 분께서 비밀로 하시라고 하셨고요. 아, 물어보셔도 대답은 못해 드려요. 죄송해요.”
사전에 질문을 막아 버리는 엘이었다.
‘물론 캐스팅 속도도 이리저리 비꼬아서 드릴 거지만 말이죠. 일명 다운 그레이드(Down Grade)라고 해야 하나?’
“그러냐‥‥‥.”
그 말에 브리온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러다 다시 밝은 표정을 지었다.
이 정도만 해도 큰 성과다. 만약 상대가 일반 마법사였으면 알려 주기라도 했겠는가? 캐스팅 속도를 줄이는 것만 해도 엄청나게 획기적이었는데 말이다.
브리온은 납득했다. 마나 호응을 높이는 건 충분히 가문의 비전서에 속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랬기에 캐스팅 속도를 줄일 수 있는 방법을 얻는 것만으로도 만족했다.
호기심이 반짝이는 눈으로 입을 열었다
“그래, 그거라도 상관없다 일만 골드로 그걸 사도록 하마.”
그 말에 엘은 고개를 저었다. 그나 실피르의 입장에서는 당장 큰돈인 일만 골드는 필요하지 않았다.
엘은 조금 이르지만 자신이 구상하던 것들을 해야 할 때라고 느꼈다.
본래 그것을 하기 위해서는 본인이 준비를 갖춰야 하지만 브리온의 도움이 있다면 손쉽게 해결될 것 같았다.
엘은 브리온을 나쁘게 보지 않았다.
비록 그의 비법을 탐내기는 했지만 강제적으로 뺏을 수 있었음에도 그는 끝까지 엘의 설득하여 얻어 내려 했기 때문이다.
조금 괘씸하기도 했지만 엘 또한 온전하게 수식을 넘길 생각이 없었기에 그러려니 하였다. 이참에 엘은 브리온의 도움을 톡톡히 얻어 낼 생각을 하며 입을 열었다.
“그런 거금은 필요 없어요. 제가 원하는 건‥‥‥ 음‥‥‥ 8 클래스 마법서랑 9클래스 마법서, 그리고‥‥ 마나석예요.”
“마나석? 그건 왜 필요로 하느냐?”
브리온이 궁금한 표정을 짓자 엘은 빙긋 웃었다. 그리고 적당히 말하였다.
필요한 건 말했지만 어디에 쓸지는 말하지 않았다.
“제가 마법진을 그리는 것을 공부하고 있어서요. 그걸 공부하고 마나석에 인챈트하는 법을 익히려고요. 그리고 엄마도 마법산데 마나석 몇 개쯤은 필요하지 않겠어요?”
그 말에 브리온은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했다. 마법사에게 마나석 몇 개쯤은 필요한 것이었다
“호오! 그것까지 생각하다니 대단하구나. 좋다, 마나석이 한 개당 백 골드 정도 하니 인심 더 써서 마나석 백 개 와 마법서를 주마.”
“고마워요, 탑주 할아버지.”
브리온이 사람 좋은 웃음을 흘렸다.
“흐흐, 고맙기는 내가 고맙지. 그런데 욘석아. 일곱 살밖에 되지 않은 것이 왜 그렇게 상대하기가 힘든 거냐? 무슨 대마법사를 앞에 두고 상대하는 것 같으니, 이거야 원.”
그 말에 엘은 웃음을 흘렸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부분 이었다.
“이야기가 잘된 거 같으니 엄마에게 돌려보내 주세요.”
브리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마. 요 애늙은이 녀석. 굳이 계약서 같은 건 안 써도 되겠지?”
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아 참, 정리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몇 달 안 될 거예요. 세 달 정도? 아마 탑주 할아버지가 그걸 보시면 나머지는 어느 정도 알게 되실 거예요.”
“그래, 나 정도면 기본적인 지식만 있어도 충분하다, 커험!”
그 말을 끝으로 브리온은 실피르에게 엘을 데려다 주었다.
그리고 선금이라며 8클래스 마법서와 9클래스 마법서, 마나석 30개를 주었다.
실피르는 엄청난 소득에 놀랐지만 다 엘과의 거래에 의해 얻은 거라 하여 무사히 받아들일 수 있었다.
엘은 브리온과 헤어지기 전 이 사실을 외부로 퍼뜨리지 말아 달라고 말했다.
그 말에 브리온도 동의했다. 그리고 엘이 천재라는 사실 역시 소문이 퍼지지 않도록 베클록으로부터 입막음 해 주었다.
베클록으로도 브리온의 말을 들은 것이, 엘이 천재 마 법사로 소문나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일은 그렇게 하여 잘 해결되었고, 일곱 살이란 나이에 1클래스 이상을 마스터한 엘은 브리온과 베클록의 마음속에 남게 되었다.
엘은 실피르의 손을 잡고 룬크 마을로 돌아가며 앞으로의 일정에 대해 정리했다.
‘애초에 세웠던 계획에 비해 몇 년은 빨라졌지만 나쁘지는 않아. 이대로 가야겠다.’
반자크 마탑의 사건으로 인해 세상은 천재 아니, 괴물 마법사의 등장을 몇 년 일찍 맛봐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