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lden Mage RAW novel - Chapter (52)
Chap. 4 영향을 잃은 제2왕자파
벨로세크 제국 황궁의 회의실. 그곳에는 두 명의 사람이 자리하고 있었다.
한 사람은 초로의 나이로, 전신을 붉은 로브로 감싸고 있었으며 드러난 머리와 수염은 하얗지만 은은한 붉은색을 띠고 있었다. 그의 정체는 바로 카로스만. 대륙 북부의 강자인 적탑의 탑주이자 대륙에 존재하는 8클래스 마법사 중 한 사람이다. 설사 제국의 황제라도 함부로 하지 못하는 그가 지금 자리에 앉지도 못한 채 서 있어야 했다.
그런 그의 앞에 앉아 있는 한 청년. 다리를 꼬고 책상 위에 올려놓은 그의 자세는 오만했으나 카로스만은 그것에 절대 불만의 표정을 짓지 않았다. 눈앞의 청년은 충분히 오만할 자격이 있기 때문이다.
청년의 이름은 루이아스. 알려지지 않은 마법사로서, 그 경지는 그 누구도 밟아 보지 못한 9클래스 마스터에 이른 대마법사다. 그의 실력은 대륙에 존재하는 8클래스 마법사 전원이 힘을 합해도 당해 내지 못할 정도며, 육체적 한계를 초월한 그랜드 마스터조차 루이아스에게는 형편없는 검사로 전락할 정도다. 과거 루이아스를 처음 만났을 때 그가 얼마나 강한 인물인지 알았기에 카로스만은 그가 어떤 모습을 보이건 감히 불만을 드러낼 엄두도 내지 못했다. 루이아스가 할 때 하고, 잔인할 때 얼마나 잔인해지는지 그는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한참 동안 편안하게 의자에 몸을 묻고 있던 루이아스가 입을 열었다.
“카로스만.”
“예, 마스터.”
책상 위에 올려놓은 다리를 내려놓으며 그가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지크릴이 당했다.”
“예? 그게 무슨……”
루이아스의 말에 카로스만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지크릴, 흑탑의 탑주인 그는 자신과 동급의 경지인 8클래스의 경지에 이른 마법사이기 때문이다. 물론 자신은 8클래스 마스터이고 지크릴은 8클래스 익스퍼트이다. 그 차이가 무척 크지만 흑마법사는 마법의 특성상 전투력이 한 단계 높은 경지에 이른 이와 겨루어도 밀리지 않을 정도로 강한 힘을 발휘한다.
그런데 그런 그가 당하다니? 이 세상에서 지크릴을 해 할 수 있는 인간은 대륙에서 초인이라 불리는 그랜드 마스터와 한계를 뛰어넘은 8클래스 마법사만 가능하다. 지크릴은 그중에서 최소한 중간 측에 꼽히는 강자다. 그런 그를 제거하려면 그랜드 마스터 중 순위에 꼽히는 자나, 8클래스 마법사 중 순위에 꼽히는 자가 나서야 가능하다. 하지만 그런 인물들은 모두 루이아스가 포섭하여 한 조직에 속해 있다 유일하게 포섭이 되지 않은 이라면 아일라스 제국의 아 토빌 공작뿐이다. 그러나 그런 그가 미쳤다고 금탑에 가서 지크릴을 죽일 리 없지 않은가?
카로스만의 눈에 짙은 의문이 떠오를 때 루이아스가 입을 열었다.
“멍청하게도 지크릴 녀석이 마족을 소환했어. 덕분에 그걸 눈치 챈 드래곤이 나섰고, 그로 인해 그와 그 세력이 모두 드래곤에게 소멸되었다.”
“드래곤…….”
카로스만의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지크릴이 누구에게 소멸되었는지를 들었기 때문이다. 지상 최강의 종족 드래곤이라니. 그나저나 마족을 소환하였다고 소멸 당하다니 정말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계획대로 금탑을 잘 밀어붙였으나 여러 가지 요소가 방해가 되었더군. 신검의 주인이 금탑주와 아는 사이인 듯하다.”
“신검의 주인도…….”
이번에 나타난 신검의 주인, 그의 전투력은 최소 대륙 십대 그랜드 마스터에 버금갈 것이라 할 정도니 그 실력이 대단한 것임에 틀림없다.
“해서 널 부른 것이다. 톨리안 왕국의 애송이 제1왕자가 우리와 선이 닿은 것을 기억하겠지?”
“예, 물론입니다.”
카로스만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창 후계 구도로 시끄러운 톨리안 왕국이었기에 알 만한 사람은 대부분 다 알고 있다.
맥셀 왕자는 능력이 있는 편이나 그 성격의 결함이 있다. 그런데 그런 그 가루이아스와 끈이 있다니 상당히 의외였다. 루이아스는 그런 카로스만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그 녀석이 주제도 모르고 부탁해 왔어. 금탑주를 제거해 달라고. 자신이 왕위에 오르는 데 도움을 달라고 말이야.”
“무례한 녀석입니다.”
카로스만의 얼굴이 가벼운 홍분으로 붉어졌다.
그 성격이 불같다고 알려진 그다. 여태껏 그가 얼굴이 붉어지면 그를 가로막은 모든 이들은 한 줌 재가 되어 사라졌다. 그의 화염에 소멸된 이들 중 8클래스의 경지에 든 이도 있을 정도니 그가 얼마나 강한 힘을 지니고 있는지 대충 짐작할 수 있다.
루이아스는 가볍게 흥분한 카로스만을 보며 빙긋 웃었다. 그리고 그의 말에 동의했다.
“맞아, 무례한 녀석이지.”
“그런 녀석을 가만히 놔두어서는 안 됩니다.”
“알아, 알아. 그래서 말인데…….”
루이아스의 입이 열리면서 웃는 낯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섬뜩한 이야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카로스만은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짐짓 표정을 굳히고는 그의 이야기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루이아스의 계획을 듣고 카로스만이 사라지자, 루이아스는 무표정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라아젠, 레이벨.”
그 말과 함께 두 인영이 루이아스의 뒤에 나타났다.
“부르셨습니까, 마스터.”
각각 청탑과 녹탑의 탑주이자 대륙의 정점에 군림하는 8클래스 마법사들이 루이아스에게 깊은 존경의 뜻을 나타내며 등장했다.
루이아스는 자신의 뒤에 나타난 그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때가 되었다.”
“때라시면…….”
라이젠의 눈이 빛났다.
루이아스가 말하는 때, 그것은 그가 원하는 마도 제국으로 향하는 시기를 말한다.
아니다 다를까, 루이아스는 고개를 한 차례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다. 이제 우리가 본격적인 움직임을 보일 때가 되었다. 라이젠, 그동안 생산한 나이트 골렘은 몇 기지?”
“도합 오백 기에 이릅니다. 그 중 백 기는 마스터 급의 실력을 지니고 있으며, 사백 기는 소드 익스퍼트 최상급에 해당하는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루이아스가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면 충분하지. 그럼 명령을 내리겠다.”
“하명 하십시오.”
라이젠과 레이벨이 고개를 숙였다.
“대륙 오대 제국의 합병을 시작한다. 우선 첫 목표.”
루이아스의 눈이 붉게 빛났다. 그리고 허공을 향해 손을 짚었다.
그곳에는 어느새 대륙 전도가 이미지화되어 있었다.
“데이제크 제국이다.”
금탑이 흑탑의 침공과 드래곤, 마족의 등장 등을 겪고 소동이 마무리 되어 다시 평화를 되찾았을 무렵, 베르디스는 걷잡을 수 없이 혼란에 휩싸였다.
톨리안 왕국의 중추이자 제2왕자파의 이인자인 브릴켄드 후작이 증발한 것처럼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브릴켄드 후작은 제2왕자파의 참모이기도 했지만 톨리안 왕국의 재상이기도 한 인물이다. 그의 능력은 무척 뛰어났기에 톨리안 역대 어느 재상들 보다 뛰어난 역량을 발휘했고, 레도프 국왕도 그가 제2왕자파란 인물인건 알았지만 그의 능력만큼은 절대적으로 신뢰할 정도였다.
그런데 그런 그가 돌연 사라지니 베르디스가 혼란에 휩싸일 수밖에 없다. 차라리 그가 암살을 당했다면 덜 혼란에 빠졌을 것이다. 문제는 그가 마치 온데간데없어진 것처럼 증발해 버렸다는 것이다. 머리카락 하나 남기지 않은 채 말이다.
브릴켄드 후작을 찾는 일은 제2왕자파에 국한된 것이 아닌, 레도프 국왕에 의해 대대적으로 확대되었으며, 그렇게 한 달이 지났지만 끝내 브릴켄드 후작은 찾을 수 없었다.
제2왕자파 귀족들은 제1왕자파를 의심하였다. 브릴켄드 후작은 의심할 것 없는 제2왕자파의 두뇌였다. 그런 그가 사라진다면 가장 큰 이득을 볼 수 있는 건 제1왕자파다. 강력한 권력을 지닌 그들이라면 군권을 가진 제2왕자파가 사라진 후 제1왕자인 맥셀 왕자를 왕위에 올리기 한층 수월해지기 때문이다.
물론 제3왕자파에 힘이나 세력 면으로 뒤지는 건 부인 할 수 없지만 어디까지나 중앙 정계를 장악하고 있는 건 제1왕자파였기에 제2왕자파가 사라지면 가장 유리해지는 것이 바로 그들이다. 때문에 제2왕자파는 그들을 의심했으며, 뛰어난 어쌔신을 고용하여 브릴켄드 후작을 제거했다고 조심스럽게 추측하였다.
그러나 의심을 받는 제1왕자파도 미칠 노릇이었다. 세상 사람들도 알 것은 다 안다. 이번 브릴켄드 후작의 실종에서 가장 이득을 보는 건 다름 아닌 제1왕자파 자신들이다. 때문에 그가 실종된 원인이 당연히 자신들에게 있다고 사람들은 암묵적으로 생각했으며, 아무 짓도 안 했는데 의심 받는 위치에 처하게 된 제1왕자파로서는 정말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레도프 국왕이 중심이 된 제3왕자파도 사태가 의아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바보가 아니다. 제1왕자파가 자신들이 의심 받을 짓을 할 리가 없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고, 그런 생각이 꼬리를 물고 물다 보니 어느덧 브릴켄드 후작 실종 사건은 톨리안 왕국의 제일 미스터리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제2왕자파의 두뇌 브릴첸드 후작의 실종. 그것은 삼각 구도로 정체되어 있던 톨리안 왕국의 왕권 다툼에 커다란 불씨가 되어 버렸다.
꽈앙!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나! 브릴켄드 후작이 사라지다니!”
트겐발리 공작은 있는 힘껏 탁자를 내리치며 소리쳤다.
마나가 실려 있었기에 그의 손과 부딪친 탁자는 형편없이 부서져 내렸다.
하지만 주변에 모인 제2왕자파 귀족들은 그런 것에 개의치 않았다. 그들의 속마음 또한 트겐발리 공작보다 더 했으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제2왕자파는 대부분 국경 근처에 위치한 변방의 강력 한 군권을 지닌 귀족들이다. 그들은 전략 전술에 무척 밝았지만 단점이라면 정치 감각이 부족하다는 데 있다. 물론 부족하다는 건 상대적인 제1왕자파에 비교해서 말하는 것이다. 그런 그들의 부족함을 채워 주는 존재가 바로 브릴켄드 후작이었으며, 브릴켄드 후작이라는 존재가 있음으로서 그들이 이렇게 한 파벌에 존재할 수 있고, 중앙의 권력을 쥔 제1왕자파를 압박할 수 있다. 그런데 그런 역할을 하던 그가 사라졌다. 그것은 그들 에게 있어 실로 큰 타격이 아닐 수 없었다.
브릴켄드 후작이 빠진 제2왕자파는 마나 공급이 안 되는 아티팩트요, 드래곤 하트가 없는 드래곤과도 같다. 그가 있음으로 인해서 제2왕자파가 하나로 뭉쳐 대응할 수 있었는데 그런 역할을 하던 이가 사라졌으니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다.
“브릴켄드 후작이 빠진 자리는 실로 큽니다. 그 자리를 어떻게 메웠으면 좋겠습니까, 공작님?”
조급한 나머지 변방의 실력자이자 톨리안 왕국의 후작인 유스번 후작이 트겐발리 공작에게 물음을 던졌다.
“글쎄, 뚜렷한 방법이 없군. 우리 모두 지략이 떨어지는 편은 아니나 브릴켄드 후작과 견줄 자가 없지 않나.”
그것은 모두가 인정하는 바다.
그만큼 브릴켄드 후작의 능력은 독보적이었던 것이다.
유스번 후작이 입을 열었다.
“브릴켄드 후작이 없다면 우리의 존립 자체도 힘들어 집니다. 이곳에 모인 귀족들 모두 강한 군권을 지니고 강한 자존심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자칫하면 이대로 흩어져 버릴 수 있습니다.”
장내에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제2왕자파 모든 귀족들이 유스번 후작의 말에 암묵적으로 동의한 것이다.
“그럼 어떻게 하면 좋겠나?”
절레절레.
트겐발리 공작의 물음에 유스번 후작이 고개를 저음으로써 의사를 표명했다.
그 또한 마땅한 방책이 없어 트겐발리 공작에게 물었던 것이다.
‘후우!’
트겐발리 공작은 그나마 믿을 만한 유스번 후작마저도 그렇게 나오자 남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웅성웅성.
이곳에서 가장 높은 트겐발리 공작마저도 뚜렷한 방법을 갖고 있지 않자 제2왕자파 귀족들은 서로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여태까지 자신들을 이끌어 오던 것은 브릴켄드 후작이다. 정신적 지주는 트겐발리 공작이었지만 실질적으로 그들을 이끌던 것은 그였던 것이다.
트겐발리 공작 또한 브릴켄드 후작의 부재가 이렇게 치명적일 줄 몰랐다. 평소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던 것이 막상 사라져야 그 소중함을 안다더니, 지금 자신의 꼴이 그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허허! 내가 이런 상황에 처하다니. 정말 어이가 없군.”
그는 수군거리는 귀족들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저마다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내용이 트겐발리 공작의 귀에 들어 왔다.
트겐발리 공작은 그 이야기들 중 쓸 만한 방법이 없는 지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페이슈 백작은 제2왕자파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갈 만큼 강한 군사력을 지닌 귀족이다. 또한 그는 소드 마스터에 이른 검사이기도 하며, 수많은 기사들이 그를 따르고 있다. 그는 전형적인 귀족으로 극도의 오만함을 지니고 있었으며, 자신의 힘과 군사력에 극도의 자부심을 지니고 있었다. 때문에 그는 자신보다 힘이 약한 귀족들을 무시하고 짓눌렀으며, 남들 위에 군림하는 걸 즐겼다. 그는 앞날을 걱정하는 대다수 제2왕자파 귀족들과 달리 브릴켄드 후작이 사라진 이번 일을 기회로 여겼다. 그동안 그는 자신의 영지보다 힘이 약한 브릴켄드 후작이 은연중 아니꼬웠다. 본신의 힘도, 군사력도 자신이 월등한데 제2왕자파의 이인자 자리에 위치하던 브릴켄드 후작에게 질투심을 느낀 것이다.
그런 그가 사라진 지금 이인자 자리는 공석이 되어 있다. 페이슈 백작은 이인자 자리는 바라지도 않았지만 이번 왕권 다툼에 승리하여 한층 더 강한 힘을 얻을 수 있길 갈망했기에 조금이라도 자신의 위치가 제2왕자파에서 격상되길 바랐다. 때문에 그는 평소 자신들을 따르던 귀족들과 작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의 주변에 모인 귀족들은 모두 페이슈 백작령에 접해 있는 자작가와 남작가였다.
페이슈 백작이 입을 열었다.
“이번 일은 찬스라고도 볼 수 있다. 우리가 일을 주도적으로 이끌어서 좀 더 높은 위치에 속하게 된다면 제2왕자님께서 왕위에 오르시는 날 우리에게 떨어질 것은 좀 더 많아질 것이야.”
그의 달콤한 언변에 귀족들은 침이 넘어가는 소리를 냈다.
생각만 해도 달콤한 유혹이 아닐 수 없었다.
페이슈 백작 옆에 앉아 있던 호시라드 자작은 그의 의견을 열렬히 지지하였다.
“맞습니다, 백작님. 지금 제2왕자파를 통틀어 백작님과 비견되는 귀족은 셋이고, 백작님보다 강한 세력을 지닌 귀족은 트겐발리 공작님과 유스번 후작님뿐입니다. 백작님을 비롯한 다른 백작들은 힘이 비슷하다고 하나 본신의 실력은 백작님이 월등합니다. 그러니 이번 기회를 살려 삼인자 자리를 차지하시는 겁니다.”
호시라드 자작의 말에 페이슈 백작이 미소를 지었다.
그는 칭찬에 몹시 약했다. 더군다나 그는 자신과 세력이 비슷한 백작들을 오래 전 부터 견제해 오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내심 자신이 그들 보다 실력이 부족하다고는 절대 생각하지 않았다.
페이슈 백작은 작게 헛기침을 하였다.
“험! 그건 확신할 수 없다. 하지만 끌리는 이야기로군.”
호시라드 자작이 한술 거들었다.
“애초에 제2왕자파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가시는 백작님이 아니셨습니까? 그러니 이번 기회에 삼인자 자리를 굳히십시오. 나중에 제2왕자님께서 왕위를 이어받으시고 힘을 키운다면 까짓것 이인자까지 못 오르겠습니까? 그렇게 되면 백작님은 백작이 아닌 후작이 되실 수 있을 것입니다.”
“후후후! 그래, 그렇군.”
이 정도면 완벽하게 결심을 굳힌 셈이다.
페이슈 백작에게 붙어 콩고물을 얻어먹으려는 생각을 가진 귀족들이 그를 부추겼다.
“이번 기회만큼 좋은 기회가 없습니다. 백작님께서 나서십시오.”
“그렇습니다. 제2왕자파를 이끌 분은 백작님밖에 없습니다.”
귀족들의 이구동성에 페이슈 백작이 짐짓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그들을 다독였다.
“자자, 너무 흥분하지 말고.”
그렇게 귀족들을 조용히 시킨 페이슈 백작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2왕자파에서 상당한 힘을 지닌 페이슈 백작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수군거리던 소리는 삽시간에 소멸하고 모든 시선이 그에게로 집중되었다.
귀족들의 시선을 받으며 페이슈 백작은 헛기침을 하였다.
“허험! 공작 전하. 제가 한 말씀해도 되겠습니까?”
그의 말에 트겐발리 공작의 표정이 살짝 찌푸려졌다. 트젠발리 공작은 페이슈 백작의 성격을 잘 알고 있다. 오만무도함이 극에 이르렀으며, 자신의 힘을 기르는데 혈안이 된 귀족. 이것만큼 그를 잘 표현하는 어구는 없으며, 그런 그가 의견을 낸다는 것은 결코 좋은 이야기가 아닐 것이기 분명했기 때문이다. 수많은 이야기를 듣느라 자세히 알지 못했지만 페이슈 백작은 이번 일을 기회 삼아 자신의 세력을 키우려고 함 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그의 발언을 막을 수도 없는 노릇. 제2왕자파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그를 거리낌 없이 무시하기에는 지금 제2왕자파의 사정이 급박했다.
트겐발리 공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좋은 의견이 있다면 제시해 보라.”
페이슈 백작이 고개를 숙였다.
“예, 감사합니다, 공작 전하. 우선 제가 하고 싶은 말은 브릴켄드 후작님이 사라지셔서 무척 유감이라는 것입니다. 그분이 있다면 통솔력으로 우리들을 잘 이끌어 주었겠지만 지금은 아쉽게도 그분은 현재 공석 중이십니다. 그렇다면 이참에 확실한 서열을 세워 상명하복의 체계를 확실하게 굳히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서로 간의 관계를 정립해 놓는다면 그 다음은 일을 처리함에 있어 어려움이 없을 테니 말입니다.”
“으음!”
트겐발리 공작의 얼굴이 굳었다.
페이슈 백작보다 한 수 위인 그는 그의 말을 듣고 그가 무슨 일을 계획했는지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지금 페이슈 백작은 제2왕자파 내에서 자신의 위치를 격상시키려 하는 것이다.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말이다.
트겐발리 공작이 반대하기 위해 입을 열려고 할 때, 페이슈 백작이 한 발 앞서 입을 열었다.
“당연히 우리들의 수장은 공작 전하이시고, 그 곁을 유스번 후작님이 보좌해 주십시오. 그리고 저를 믿어 주신다면 제가 다른 귀족들을 잘 다독여 제2왕자파의 힘을 한 층 더 끌어올려 보도록 하겠습니다.”
페이슈 백작의 말은 상당한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우선 제2왕자파에 페이슈 백작과 비견되는 귀족 여럿이 있었다.
제2왕자파에 속한 여섯 백작가는 모두 비슷한 힘을 지니고 있었는데, 금탑을 잘못 건드리는 바람에 세 개의 백 작가가 멸문하고 말았다. 그러나 나머지 세 백작가는 건재했다. 자신들과 비슷한 힘을 지닌 페이슈 백작이 자신들 위에 선다는 걸 용납할 리 없다.
톨리안 왕국과 인접한 혜센 왕국에 국경을 맞대고 있는 변방의 실력자 토룬 백작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페이슈 백작을 향해 말했다.
“그 말을 나는 인정할 수 없다. 페이슈 백작이 상당한 힘을 지니고 있다고 하나 나 또한 그에 비해 결코 부족하지 않은 힘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무슨 자신감이 있다고 내 위에 서려고 하는 것이지? 그럴 거면 내가 트겐발리 공작 전하와 유스번 후작님을 보좌해 귀족들을 잘 다독여 보겠다.”
토룬 백작의 말에 다른 한 인물이 일어났다.
그 또한 제2왕자파에 속한 백작이다. 풍부한 곡창 지대를 끼고 있어 풍부한 금력을 지닌 로델스 백작이었다. 로델스 백작은 풍부한 영지의 주인답지 않은 부리부리 한 눈으로 두 백작을 훑으며 말했다.
“나 또한 토룬 백작과 같은 생각이다. 둘 모두 그런 생각을 갖고 있다면 그 역할을 내게 맡겨라! 자금도 군사력도 풍부한 내가 그 역할을 맡는 것이 가장 적합하지 않겠나?”
페이슈 백작이 소리쳤다.
“그 역할을 할 자는 어딜 봐도 나밖에 없다!”
“그렇게 말하는 네가 사실 제일 부적합하다는 걸 모르나?”
토룬 백작도 지지 않고 외쳤다.
그러자 장내는 삽시간에 소란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제2왕자파에서 제일 강성한 힘을 지닌 트겐발리 공작과 그 다음 힘을 지닌 유스번 후작은 이 일에 휘말릴 필요가 없다. 하지만 그 뒤의 서열을 차지해야 할 이들의 힘이 너무 엇비슷한 게 문제였다. 그들은 모두 삼인자 자리를 노렸으며, 그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서로 싸울 태세였다.
점점 목소리가 높아지더니 이윽고 대결 모드로 접어들 기 시작했다.
페이슈 백작이 가장 먼저 검을 뽑아 들며 말했다.
“이야기가 진척이 되지 않는다면 실력을 행사할 수밖에! 겨뤄 보자! 그리고 가장 강한 이가 그 자리를 차지하는 거다!”
“기다리던 바다!”
토룬 백작이 검을 뽑았다. 그리고 뒤이어 로델스 백작도 검을 뽑아 들었다.
장내의 분위기가 삽시간에 살기로 팽팽해지기 시작했다.
보다 못한 트겐발리 공작이 나섰다. 그는 양손을 들어 부서진 탁자를 다시 한 번 내리쳤다.
쿠웅! 파사사!
트겐발리 공작의 손과 충돌한 탁자는 가루가 되어 사라졌고, 탁자와 부딪치면서 발생한 충격파는 그대로 세 백작에게 향했다. 그로 인해 살기등등하던 백작들이 행동을 멈추고는 트겐발리 공작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시선을 받은 트겐발리 공작이 소리쳤다.
“부끄럽지도 않나! 우리가 지금 장난을 하고 있나? 이번 일은 우리의 생존이 걸렸어! 그런데 그깟 서열 싸움으로 내분을 일으키려 하다니!”
트겐발리 공작의 호통에 세 백작은 아무 말도 못했다.
확실히 그의 말대로 자신들이 조금 흥분한 감이 없지 않아 있었다.
그런 그들에게 트겐발리 공작이 못을 단단히 박아 두었다.
“이인자이니 삼인자이니 그런 것은 필요 없어! 우리가 필요한 것은 지금 이 사태를 타파해 나갈 해결책이야! 오늘 이 자리를 파하겠어! 다음 소집 때 각자 이 상황을 타파할 계획을 하나씩 세워 오도록! 이만 나가 보게!”
트겐발리 공작의 축객령에 제2왕자파 귀족들이 눈치를 보더니 하나 둘 장내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유스번 후작이 트겐발리 공작에게 다가와 말했다.
“너무 심려하지 마십시오, 공작님. 다른 귀족들도 브릴켄드 후작이 사라진 것이 불안해서 그런 것일 뿐입니다.”
그러자 트겐발리 공작이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그게 아니야. 지금 저 녀석들은 브릴켄드 후작이 사라지자 그동안 억눌려 왔던 자신들의 본성을 표출하고 있을 뿐이야.”
트겐발리 공작의 말에 유스번 후작은 아무런 반박도 할 수 없었다. 말은 그렇게 하고 있지만 실은 자신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트겐발리 공작이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도대체 일이 어떻게 돌아가려는지…… 어쩌면 이들을 규합하여 크란 왕자를 민 것이 내 인생에 돌이킬 수 없는 실수가 될지도 모르겠군.”
그는 진심으로 탄식했다.
브릴켄드 후작이 없는 한 당할 수밖에 없는 걸 그는 잘 알고 있다. 제1왕자파 귀족들은 정치계에서 산전수전을 모두 겪은 능구렁이들이고, 단순한 성향이 있는 제2왕자파 귀족들은 결코 그것을 당해 낼 수 없기에…….
트겐발리 공작의 눈에 제2왕자파의 미래가 암울해 보였다. 그리고 그의 생각대로 시간이 흐를수록 제2왕자파는 영향력을 잃어 가기 시작했다.
브릴켄드 후작이 사라진 그들은 더 이상 제1왕자파도 견제할 수 없을 정도로 힙을 잃어버린 것이다. 톨리안 왕국의 왕권 다툼이 제1왕자파와 제3왕자파로 급격히 압축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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