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lden Mage RAW novel - Chapter (82)
3. 블리어드 제국과의 동맹
엘은 당초 예정을 변경해야 했다. 아토빌 공작과 동맹을 맺으러 온 자리에서 한 차례 큰 싸움을 벌여 모두의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리 크지 않지만 엘 역시 약간의 내상을 입었고, 아이넨스는 상당한 외상을, 그리고 엘리엔은 상당한 무리를 하여 마나 홀에 약간의 타격을 받은 상태였다. 아이넨스 같은 경우 치료 마법으로 외상이 깔끔하게 나았다. 하지만 완전히 회복되는 시간이 10여 일 정도가 필요했기에 엘은 부득이하게 아토빌 공작가에서 10일가량 머물렀다. 그 후 엘 일행은 아토빌 공작가를 벗어났다. 아토빌 공작은 떠나는 엘을 저택 밖으로까지 나와 배웅 하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처음에는 이용만 하려던 엘이 지금은 그에게 반드시 필요한 인물이 되었기 때문이다. 엘은 그에게 말했다. 그가 어떤 야망을 가지고 있건 그것은 자신이 신경 쓸 게 아니라고. 단지 자신을 도와달라는 게 전부였고, 후일 평화가 찾아오면 그가 자신의 야망에 한 힘 보태 주겠다고 말했다.
아토빌 공작은 이미 사태가 자신 혼자서 해결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음을 깨닫고 있었기에 그런 엘의 제안이 내심 반가웠다. 그래서 신중히 생각하는 척하며 제의를 수락했다 그랬으니 그로서는 엘을 처음과 달리 중하게 여길 수밖에 없었다.
“상처는 괜찮으신가요?”
아토빌 공작가를 벗어난 엘은 아이넨스를 보며 염려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오러에 당한 상처다. 오러에 당하면 상처가 쉽사리 낫지 않는다는 걸 알기에 깔끔하게 나은 외상에 우려를 표하는 것이다. 엘의 물음에 아이넨스가 빙긋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직접적인 타격은 모두 피해 상처가 크지 않았지, 그나저나 너는 마나가 역류했는데 어떻게 그렇게 멀쩡할 수 있는 거지?“
아이넨스가 도리어 엘에게 궁금증을 표현했다. 마나 역류를 당한 마법사는 십중팔구 폐인이 되거나 죽음을 당한다. 그런데 엘은 내상은커녕 어디 불편한 구석도 보이지 않았다. 그의 물음에 엘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사실 마나 역류가 왜 심각했지만 다행히 마나를 통제 할 수 있었어요. 그래서 별다른 상처를 입은 게 아니고요”
“그렇군. 이십 대에 8클래스에 올랐으니 마나를 특별하게 통제하는 다른 방법이 있겠지.”
아이넨스는 고개를 고덕이고는 달리 입을 열지 않았다. 그들의 다음 목표는 블리어드 제국이었다. 엘은 엘리엔을 바라보며 말했다.
“몸은 괜찮나요?”
엘리엔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난 따로 상처를 입은 게 아니니까.”
치열하게 벌어진 싸움에서 그녀는 가장 손쉬운 상대를 만났다고 할 수 있다. 데리오머의 실력이 제아무리 높다고 해도 엘리엔보다 한두 수 뒤지는 실력이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그는 방어만 할 것을 명령 받아 엘리엔은 공격을 그리 염려하지 않은 채 공격만 퍼부을 수 있었다. 공격을 당하지 않았으니 다칠 리가 없는 것이다. 엘리엔이 따로 상처 입은 것이 없다고 하자 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다음 목적지는 다름 아닌 블리어드 제국이거든요. 블리어드 제국은 제가 개인적으로 원한을 가진 곳이기도 해요.”
“……”
“물론 그곳에서도 저를 달갑지 않게 생각하겠죠. 제가 제국의 유일한 8클래스 마법사인 게이런즈를 죽였으니까요. 하지만 시국이 급해요.”
“어째서?“
엘리엔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엘은 자신이 판단한 상황을 설명하였다.
“루이아스가 본격적인 마각을 드러내 세 제국을 통합 한 이상 그들에게도 손이 뻗쳤을 가능성이 높아요. 제아무리 제국이라도 그들의 세력에 비하면 극히 미미하죠. 그 점을 파고들어 과거의 원한을 잊고 손을 잡아야 해요.”
“……”
“그 과정에서 다소 충돌이 벌어질지도 몰라요. 그래서 가급적 몸 상태가 최적일 때 가는 게 좋거든요.”
아이넨스와 엘리엔이 동시에 대답했다.
“난 문제없어.”
“나 또한.”
둘 모두 남에게 절대 폐를 끼치기 싫어하는 인물이다. 이미 극에 오른 실력자였으니 그들에게는 하늘같은 자존심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자존심을 어찌 엘이 모르랴. 엘 또한 자신의 실력에 대한 자존심이 존재했기에 그들의 그런 반응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둘 모두 괜찮다는 말에 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곧장 블리어드 제국으로 가도 되겠네요. 황도인 캐퍼밀은 마법을 사용하지 못하는 곳이에요. 잘 부탁드릴게요.”
“그래, 우리만큼 든든한 호위는 없겠지. 안 그렇습니까?“
아이넨스의 물음에 엘리엔은 고개를 끄덕였다.
“대륙 최고의 호위지.”
“그렇고말고요.”
엘은 웃음을 지었다.
***
블리어드 제국은 최근 무척 어수선했다. 왜냐하면 수백여 기의 골렘이 등장하여 한차례 황성을 침공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황성에는 블리어드 제국의 수호신 클라이언 공작이 존재한다. 그랜드 마스터인 클라이언 공작과 블리어드 기사단의 활약으로 골렘들을 모두 제거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 성공을 얻어 내기 위해 버려야 했던 것이 너무도 많았다. 50명 전원 마스터로 이루어진 블리어드 기사단의 기사들 중 무려 10명이 골렘들과의 격전으로 목숨을 잃었기 때문이다. 그뿐만이 아니라 다른 20명은 심한 중상을 입었으며, 남은 20명은 자잘한 경상을 입었다. 그러나 그것도 엄연히 중상자들에 비해 경상인 것으로 결코 만만치 않은 상처들이었다. 단숨에 블리어드 기사단의 전력 절반이 깎여 나간 셈이다. 더군다나 상대는 인간도 아닌 골렘이다. 당장 적들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이상 그들은 불안감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겠는가? 엄청난 피해를 입었음에도 적이 누구인지 모르는 상황.
혼란이 아닌 불안감에 빠진 것만 해도 능히 대단하다고 할 수 있다. 그 일로 인해 캐퍼밀의 단속은 엄청나게 강화되었다. 캐퍼밀을 드나드는 이들은 하나하나 병사들의 검증을 받 아야 했다. 마법 결계도 풀렸다. 그리고 황탑의 마법사들과 아인하트 후작가 마법사들이 대대로 황도 곳곳에 퍼지며 탐색을 하며 수상하다 싶은 자들은 모조리 감옥으로 끌고 갔다. 하지만 적의 정체는 드러나지 않았고, 시간이 지날수록 초조한 감정이 제국 전체를 뒤덮기 시작했다. 그때, 캐퍼밀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 엘 일행이었다. 엘은 어수선한 캐퍼밀의 분위기에 피식 웃음을 지었다.
“이미 한 차례 푸닥거린 것 같은데요? 안 그러면 이렇게 경계를 취하지 않을 텐데 말이죠.”
“그렇군. 보아하니 황궁만 건드린 것 같은데.”
아일라스 제국에서 벌어진 상황과 하등 다를바 없는 상황이었다. 단지 다른 점이라면 아토빌 공작을 제거하기 위해 이쪽 에 전력을 집중했다는 점이다.
“그래도 골렘들의 힘은 마스터급 혹은 마스터에 근접한 실력이에요. 분명 만만치 않은 피해를 입었을 거예요.”
엘은 안경을 만지작거렸다. 언제부턴가 그는 안경을 계속 쓰고 있는 습관을 들이게 되었다. 안경을 쓰고 있으면 특유의 집중력이 올라가는 게 엘의 장점이다. 이렇게 안경을 만지니 그는 상황이 단번에 이해가 갔다.
“아마 그들로서도 단번에 아일라스 제국에 전력을 집중하고 싶었을 테죠. 더군다나 블리어드 제국의 황도인 캐퍼밀은 마법사에게 무력한 곳. 아마 그랜드 마스터 여럿을 보내서 이곳을 점령해야 했을 텐데 얼마 전 카시아스 왕국에서 일이 벌어진 것이죠.”
린은 카시아스 왕국에서 매직 메탈의 판매권 때문에 2명의 그랜드 마스터에게 습격을 당했다. 바로 벨로세크 제국의 그랜드 마스터인 그레시오스 공작과 트루먼 공작이 그들이다. 엘리엔에 의해 그레시오스 공작이 부상을 입지 않았더라면 그들의 검은 블리어드 제국에게 향했을 것이다. 본의 아니게 엘은 간접적으로 제국을 도운 꼴이 된 셈이다. 엘은 루이아스가 노림 직했던 것들을 떠올려 보았다.
“아마 그는 블리어드 제국에게 씻을 수 없는 불안감을 심어 주려 했던 것 같네요. 정체를 알 수 없는 적이 제국을 노리고 있다. 그러니 계속 불안해 하라! 이런 의도가 아닐까요?”
“그럴듯하군. 정체를 알 수 없는 적이 자신을 노린다면 쓸데없이 심력 소모를 할 수 있지. 어차피 그들에게 골렘은 주 전력이 아닐 테니.”
아토빌 공작에게 듣길, 그들은 수십 명의 소드 마스터들을 예사로 동원할 수 있다고 한다. 물론 제국을 장악했다면 그 정도는 일도 아닐 것이다. 대륙 최강의 제국인 벨로세크 제국 같은 경우 전원 소드 마스터로 이루어진 기사단이 무려 셋이나 존재했기 때문이다. 만약 벨로세크 제국을 온전하게 장악했다면 그들은 무려 수백에 이르는 소드 마스터들을 보유하고 있는 셈이다. 거기에 다른 두 제국의 소드 마스터들에 그들이 독자적으로 기른 세력들을 합한다면 골렘들은 장난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이야기를 하면서 그들은 캐퍼밀 안으로 들어섰다. 당연히 정상적인 방법이 아닌, 몰래 안으로 들어선 것이다. 캐퍼밀 안으로 들어선 그들은 경계심을 끌어올렸다. 여기서부터는 마법을 사용할 수 없는 안티 매직 존 (Anti magic zone)이다. 8클래스 마법사는 물론 9클래스 마법사도 상당한 제약을 받게 되는 곳이 바로 이곳 캐퍼밀이다.
“응?”
캐퍼밀 안으로 들어선 엘은 순간 고개를 갸웃했다. 전에 캐퍼밀에서 느꼈던 마나의 반발이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다. 캐퍼밀은 마법사들이 의도적으로 마나를 헝클어 놓았다. 때문에 그것을 풀기 위해서는 몇 배의 노력을 필요로 했다. 그것을 중첩에 중첩을 거듭하니 설사 8클래스 마법사라도 마법을 사용할 수 없는 환경이 조성된 것이다. 그런데 지금 그것들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설마?’
캐퍼밀에는 무척 많은 숫자의 마법사가 존재한다. 게이 런즈가 죽었지만 황탑의 세력이 여전히 건재했고, 아인하트 후작가의 마법사들도 다수 존재했기 때문이다. 알카이드 황제는 그들을 활용하기 위해 캐퍼밀에 가해진 마나의 흐름을 수복한 것일지도 모른다. 엘의 안색이 일그러졌다.
‘멍청한! 적의 세력도 모르면서 함부로 이런 결정을 내리다니.’
적들의 세력 중 초인의 숫자는 그랜드 마스터 반, 8클래스 마법사 반이라고 할 수 있다. 블리어드 제국이 심열을 기울인다면 그들이 막아야 할 존재는 그랜드 마스터 다섯이 전부다. 마법사는 캐퍼밀에서 힘을 전혀 쓸 수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마나의 흐름을 복귀시킴으로써 그들은 마법사들에게 힘을 부여한 셈이 되었다. 만약 엘이 이곳을 방문 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단시일 내에 루이아스에게 복속되는 결과를 가지고 왔을지도 모른다. 엘은 혹시나 싶어 마법을 전개해 보았다.
“아이스 미사일.”
그의 전개어가 흘러나오기 무섭게 수십 개의 아이스 미사일이 생겨났다.
“이건?“
아이넨스와 엘리엔이 놀란 눈으로 엘을 바라보았다. 마법을 사용할 수 없는 캐퍼밀에서 마법을 전개했으니 놀란 것이다. 엘은 굳은 표정으로 그들에게 말했다.
“미지의 적에게 공격을 받은 나머지 마법사들을 써먹기 위해 마법 방해를 풀어 버린 것 같아요. 가서 경고를 해 줘야겠네요.”
말과 함에 엘은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그런 그의 뒤를 아이넨스와 엘리엔이 따랐다.
***
아인하트 후작가는 적들의 침공을 받음에 따라 무척 활발한 움직임을 보였다. 금탑주가 공식적인 첫 등장을 보이면서 아인하트 후작 가는 그 체면을 구겼다. 자타가 공인하던 7클래스 최강의 마법사인 아인하트 후작이 그의 아들인 글레톤과 협공을 하고도 외려 패하는 사태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그것도 단 한 사람, 새파랗게 어린 나이의 마법사에게 패했다는 사실이 그들에게 극도의 침울함을 가져다주었던 것이다. 그 일이 왜 큰 충격이었기에 아인하트 후작은 한때 귀족파의 수장이었던 자리를 내버린 채 무기한 칩거에 들어갔다. 아인하트 후작을 난장판으로 만들어 버린 청년은 얼마 후 금탑이란 마탑을 세워 모습을 드러냈고, 신탁 거부를 통해 성국과 맞서 싸워 나갔다.
그 후 성국과 몇 차례나 접전을 벌였고, 다이어드 공작과 게이런즈가 포함된 토벌대를 패배시키기도 했다. 거기에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았지만 흑탑주와도 접전을 벌였다. 그리고 놀라운 사실이 대륙을 강타했다 바로 금탑주가 적탑주 카로스만을 이김으로써 8클래스의 경지에 들어섰던 것이다. 이십 대 초반의 나이에 8클래스에 다다르다니! 믿기 힘든 소식은 블리어드 제국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금탑과 블리어드 제국간의 관계는 결코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니, 단지 그렇게 말하기 어렵다. 관점을 달리하면 금탑과 블리어드 제국의 관계는 그야말로 최악이라 할 수 있으니 말이다. 더군다나 금탑추의 나이가 고작 이십 초반인 것을 감안할 때 차기 대륙의 주도권은 그에게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것 때문인지 아인하트 후작가는 그 분위기가 더욱 침울해졌다. 블리어드 제국에서 그와 가장 밀접한 원한을 맺은 곳이 그곳이었기 때문이다. 금탑주가 8클래스의 경지에 오르자 아인하트 후작가의 힘이 되어 주던 주변 세력이 점차 떠나갔다. 행여 아인하트 후작가와 밀접한 관련을 맺어 금탑과 원한 살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아인하트 후작가의 덩치는 몇 년 전에 비해 절반도 되지 않았다. 저택 가득 차 있던 손님들이 모두 떠났기 때문이다. 충성심 높은 부하들이 있었지만 모두 떠나 버린 빈 공 간을 매우기는 어려운 법. 최근 소란을 맞아 아인하트 후 작가가 분주하게 움직이기는 했지만 비어 버린 허탈감을 매우기란 어려워 보였다.
그런 아인하트 후작가에 접근하는 세 인영이 있었다. 좌측에는 30대로 보이는 사내가 자리하고 있었는데, 검을 매고 가벼운 갑옷 차림을 한 그는 마치 한 자루의 보검을 보는 듯 날카로운 예기를 흘려보내고 있었다. 우측에는 눈부신 아름다운 미녀가 자리하고 있었다. 통상적으로 보기 힘든 독특한 갑옷 차림에 살랑대는 녹색 머리, 빛나는 눈동자는 빠져나을 수 없는 아름다움을 내뿜고 있었다. 과거 블리어드 제국의 제1미녀라 불렸던 실피르도 저 여인에 비해 엄연히 한 수 떨어지는 느낌이 들 정도였으니 여인이 외모는 눈부신 것임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중앙에 위치한 자, 금색 로브를 두른 청년은 안경을 쓴 채 무척 이지적이면서도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아인하트 후작가 정문을 지키는 병사들은 저런 복장을 한 청년을 잘 알고 있다.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저 청년의 등장으로 오늘날 아 인하트 후작가의 영향력이 땅에 떨어질 대로 떨어졌거늘. 그들은 정 가운데에 위치한 엘을 보고는 엘리엔의 아름다움에 감탄할 틈도 없이 두 눈을 부릅떠야 했다.
“저, 저……”
“뭐냐?”
병사들이 놀라움을 표하자 근처에 대기하던 재빨리 다가왔다. 황궁을 침범한 의문의 범인들로 인해 그들의 신경은 날카로울 대로 날카로운 상태였다.
“아니?“
엘에게 시선을 옮긴 기사들은 그를 보며 놀라움에 빠져 들었다. 어찌 잊을 수 있으랴. 골든 나이트의 검에 단번에 무력화 되던 자신들아 아니던가? 그것을 수족처럼 부리던 저 청년을 잊으려야 잊을 수 없었다. 그들도 병사와 마찬가지로 놀라 버렸다. 한 기사가 소리쳤다.
“금탑주!”
“……!”
기사의 외침에 아직까지 엘의 정체를 깨닫지 못하던 이들의 표정에 놀라움이 서렸다. 금탑주 엘리미스. 당대 8클래스 마법사 중 1명이자 20대 초반의 나이에 그 경지에 올라 하나의 신화라 불려도 부족함이 없는 존재. 그런 존재가 이곳을 방문했다니 놀라울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몇 년 전 살기 짙은 전투를 한 차례 벌이지 않았던가. 기사들은 재빨리 경계심을 끌어올리며 언제라도 검을 뽑을 듯한 자세를 취했다. 그렇지만 그들은 직감하고 있었다. 소드 익스퍼트에 불과한 자신들로는 결코 금탑주의 발걸음을 막을 수 없다는 걸 말이다. 그러나 그들은 아인하트 후작가에 대한 충성심이 상당 했기에 결코 물러설 기세가 아니었다. 엘이 점점 접근하자 기세를 뿜던 그들은 돌연 몸을 움찔했다. 갑자기 엘이 손을 들어 올리자 그들이 피워 올리던 기세가 씻은 듯 사라졌기 때문이다.
마나 장악력. 엘은 그들에게 8클래스 마법사만이 펼칠 수 있는 고절한 수법을 펼쳐 그들의 기세를 무력화시킨 것이다. 최고조로 끌어올렸던 기세가 단번에 제압당하자 기사들의 눈이 암울하게 젖어 갔다.
‘너무 강하다! 대항조차 할 수 없어.’
금탑주가 이곳에 왔다면 결코 좋은 목적이 아닐 가능성이 농후했다. 어쩌면 그가 골렘들의 배후일 수도 있는 것이다. 기사들의 눈이 암울하게 젖어 들자, 주변에 포진되어 있던 병사들이 무기를 든 채 경계의 태세를 취했다. 그때, 엘의 입이 열렸다.
“나쁜 의미로 온 게 아니다. 아인하트 후작을 만나고자 왔으니 그에게 내가 왔음을 알려라.”
엘의 태도는 여유로우면서 당당했다. 어디까지나 블리어드 제국을 위해, 그리고 자신을 위해 이곳을 찾았다. 이미 전에 있던 일로 아인하트 후작가에 있던 앙금을 모두 털어 버린 엘로서는 굳이 소란을 일으킬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저, 정말입니까?“
기사가 비틀거리며 엘에게 물었다.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아는 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나는 블리어드 제국을 습격한 이들의 정체를 알기에 그것을 아인하트 후작과 이야기하고자 찾아온 것뿐이다. 그러니 어서 소식을 알려라. 아인하트 후작가에 위해를 가하려는 생각은 추호도 없음을 알리는 바이다.”
“아, 알겠습니다. 금탑주님의 말씀을 믿겠습니다.”
행여 엘의 말이 바뀔까 그것을 강조한 기사는 재빨리 몸을 돌려 저택 안으로 스며들었다. 그리고 잠시 후, 기사는 허겁지겁 달려왔다.
“모시랍니다.”
엘이 고개를 끄덕이며 발걸음을 옮겼다. 어느새 저택 입구에 나타난 수많은 병사들과 기사, 마법사들은 좌우로 갈라져 길을 만들었다. 수많은 이들이 떠났음에도 여전히 아인하트 후작가에 남아 있는 자들은 많았다. 엘은 그들을 스쳐 지나가며 나직이 미소를 지었다.
“극한의 상황에 처했음에도 이 정도 숫자의 수하들에게 충성을 받다니, 역시 보통이 아니구나,”
그렇게 엘은 기사의 안내에 아인하트 후작이 머물고 있는 응접실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
“오랜만입니다.”
응접실로 안내된 엘은 아인하트 후작을 보며 인사를 건넸다. 그동안 겪은 고생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는지 아인하트 후작은 무척 초췌한 안색을 하고 있었다. 보기 좋던 전체적인 풍모의 노인이 몇 년도 채 안 되어 깡말라 버린 노인이 되어 버린 것이다. 엘은 불현 듯 아인하트 후작에 대한 동정심이 치밀었지만 그것은 인과응보에 지나지 않았다. 먼저 일을 벌였으니 벌을 받는 것이라 생각하며 아인하트 후작에 대한 동정심을 떨쳐 버렸다 ·
“오랜만이구려, 이곳에 앉으시오.”
아인하트 후작은 엘을 바라보며 힘없는 목소리로 자리를 권했다. 엘은 그런 아인하트 후작의 권유에 따라 자리에 앉았고, 아이넨스와 엘리엔이 각각 양옆에 자리했다. 아인하트 후작은 힘없는 눈동자로 엘을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그래, 무엇 때문에 이곳을 찾은 것이오? 복수를 하고자 왔다면 우리는 금탑주 그대를 감당할 자신이 전혀 없소이다. 아니, 감당을 못한다고 할 수 있겠지.”
그는 모든 것에 미련을 버린 상태인 듯했다. 전에 보았던 그는 권력욕에 모든 것이 잠식당한 존재였다. 권력을 위해 가족도 희생물로 삼을 수 있었으며, 오로지 가문의 영광을 위하는 그런 인물 말이다. 그런데 지금 그는 미련은 물론 자신에 대한 원한마저도 털어 버린 듯했다. 아니, 모든 것을 포기한 것일지도. 엘이 아인하트 후작을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내가 이곳을 찾은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황제에게 경고를 하기 위함입니다.”
“경고? 도대체 무엇을?“
아인하트 후작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곧이어 그의 표정이 미약하게 일그러졌다. 엘이 직접 찾아와 경고를 하는 것이라면 결코 좋은 의도가 아닐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 아인하트 후작의 반응에 엘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닙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지금 블리어드 제국이 큰 위험에 처해 있다는 것입니다.”
“큰 위험이라니……“
아직도 의아한 표정을 짓는 아인하트 후작에게 엘은 그가 깜짝 놀랄 만한 사실을 언급했다.
“얼마 전 블리어드 제국의 황궁을 습격한 무리라면 말이 되려나요?“
아인하트 후작의 눈이 크게 뜨였다.
“뭐, 뭣이…… 그게 사실이오?“
놀라움이 컸는지 아인하트 후작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제국은 지금 황궁을 습격한 무리들을 찾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상태였다. 오죽하면 캐퍼밀에 가해진 마나의 흐름을 본래대로 돌려 마법사들을 전력으로 삼으려고까지 하겠는가. 놀란 아인하트 후작에게 엘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만약 예전의 일 때문에 마음이 그랬다면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예전 일은 이제 잊었으니까요. 제가 원하는 것은 후작님이 황제에게 전갈을 보내 저와 만남을 주 선해 주시는 것뿐입니다. 아시다시피 저와 황제는 사이가 좋지 않으니까요.”
“……”
엘의 말에 아인하트 후작이 말을 잃었다. 그의 말은 무척 많은 것을 시사한다. 한때 클라이언 공작가와 쌍벽을 이루던 아인하트 후작가는 금탑주와의 악연으로 그 세력이 급격히 약화되었다. 하지만 엘이 공식적으로 아인하트 후작가와의 악연을 철회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다시 한 번 도약의 기회를 잡을 수 있는 것이다. 더군다나 게이런즈까지 사라진 마당에 8클래스에 근접한 아인하트 후작은 블리어드 제국 최고의 마법사다. 황탑의 마법사들까지 흡수할 수 있기에 예전보다 더욱 강한 세력을 지닐 수 있는 기회를 얻은 셈이다. 그러나 아인하트 후작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미 그는 한없이 높은 곳에서 바닥까지 추락한 경험이 있다. 이 경험을 통해 그는 권력이란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 깨달은 상태다. 그가 힘없는 어조로 말했다.
“난 권력이 얼마나 쓸모없는 것인지 이미 느낀 상태라오. 다 부질없는 것이지. 지금 내가 느끼는 것은 실피르에 대한 미안함. 그리고 나로 인해 손해 볼 나의 후손들이라오. 후우! 지금 생각하면 한때 내 고집으로 피해를 본 그들에게 미안할 따름이오.”
“……”
이번에는 엘이 할 말을 잃었다. 그리고 아인하트 후작의 말의 진위 여부를 가리려는 듯, 그를 천천히 바라보았다. 그는 아인하트 후작의 말이 사실인지에 대해 파악할 의무가 있다. 왜냐하면 아인하트 후작가는 엄밀히 말해 그의 외가이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실피르는 아인하트 후작가에 대한 그리움을 완전히 떨쳐 버리지 못하고 있다. 내색하지는 않지만 이미 엘은 그것을 다 알고 있다. 그랬기에 엘은 아인하트 후작이 반성하는 기색만 있다면 어느 정도 관계를 개선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 정도로 반성하고 있을 줄이야. 아니, 지금 같은 상태라면 아예 새사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엘이 힐끗 엘리엔에게 시선을 옮겼다. 진실을 꿰뚫어보는 엘리엔의 앞에서 거짓을 말할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런 그녀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면 아인하트 후작의 말이 진실일 가능성이 농후했다. 비록 자신의 아버지를 죽이는 데 일조하고 실피르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었다. 하지만 그래도 자신의 피가 절반은 이어져 있는 가족이었으니 묵은 원한은 청산해 두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 엘은 아인하트 후작이 진심으로 반성하고 있음을 느끼고는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일이 쉽게 해결되니 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그는 아인하트 후작을 향해 입을 열었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할아버지. 황제와 만날 수 있게 주선해 주세요.”
“……!”
엘의 말에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짓는 아인하트 후작. 이윽고 그의 표정이 한결 풀어지기 시작했다. 엘이 자신을 용서했음을 깨달은 것이다. 그가 용서했다는 걸 느끼자 마음 속 무거웠던 짐 하나가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아인하트 후작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물론, 해 주고말고. 나를, 그리고 가문을 용서해 줘서 고맙다, 엘.”
이렇게 포기하면 편한 것을. 절로 안도감이 드는 아인하트 후작이었다.
***
비록 아인하트 후작가의 영향력이 줄었다지만 그 위세는 여전했다. 제국에 몇 되지 않는 그를 막을 존재는 몇 없을 뿐더러 금탑주가 아인하트 후작가에 방문했다는 말은 실로 많은 억측을 낳았기 때문이다. 아인하트 후작가와 금탑주의 원한은 이미 제국은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 또한 알고 있는 사실이다. 더군다나 금탑은 황가와도 원한을 맺고 있어 몇몇 귀족 은 이번 황궁 침공이 금탑주가 벌인 일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어쨌든 제국 귀족들은 이번에도 사단이 일어날 것이라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금탑주가 아인하트 후작가에 들른 이유가 결코 호의적이지 않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의 예상은 멋지게 빗나갔다. 금탑주는 아인하트 후작가를 용서한 것이다. 더불어 그는 아인하트 후작가를 자신의 외가로 인정하였다. 이것은 실로 엄청난 일이어서, 극도로 침체되어 있던 아인하트 후작가의 위명이 단숨에 높아지는 계기가 되었다. 그 전력 자체만으로도 제국 최상위 가문으로 부족함이 없는데 금탑과 혈연으로 맺어져 있으니 오죽하겠는가. 수많은 귀족들이 아인하트 후작을 찾았지만 그는 일절 다른 귀족들을 만나지 않았다. 이미 그는 권력이 얼마나부질없는 것인지 인지한 상태였다. 저렇게 아부하려고 오는 이들도 자신이 힘이 없을 때는 전부 등을 돌릴 자였으니 말이다.
하루가 지나자 아인하트 후작은 황궁으로 입궁을 하였다. 큰 근심을 털어 버려서인지 초췌했던 그의 안색은 혈기를 띠고 있었다. 황궁으로 입궁한 그는 곧장 알카이드 황제와 대면하였다. 알카이드가 황제의 자리에 오르고 처음 대면하는 자리였다. 아인하트 후작은 알카이드 황제에게 엘이 말했던 것을 고했다.
“금탑주는 황궁을 침공한 자들이 누구인지 안다고 했습니다.”
“뭣이?“
알카이드 황제는 아인하트 후작의 말에 표정이 급변했다. 사실 그는 황궁을 침공한 골렘들의 배후에 엘이 있다고 생각했다. 블리어드 제국에 딱히 원한을 가질 만한 존재는 엘밖에 없거니와 골렘에 관한 마법적 지식은 대륙에서 엘을 따를 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단지 걸리는 점이라면 엘이 언제 그만큼의 골렘을 만들었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가 생각하기에 그 정도 골렘들을 만들려면 엄청난 양의 물자가 금탑으로 흘러가야 했기 때문이다. 물론 금탑에 흘러간 물자가 만만치 않지만 수백여 기에 이르는 골렘들을 제작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런데 설마하니 다른 배후가 있었을 줄이야. 금탑이 배후일 거라 생각하던 알카이드 황제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아인하트 후작이 고했다.
“금탑주는 폐하와 대면하여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어쩌시겠습니까?“
“흐음!”
아인하트 후작의 말에 알카이드 황제가 생각에 잠기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삼 일 후 황궁에 들라하라.”
금탑주가 캐퍼밀에 왔다는 소식을 들은 시점에서 그는 마나의 흐름을 바꾸어 버렸다. 이렇게 한다면 금탑주는 전혀 힘을 쓸 수 없을 터. 경계해야 하는 것은 골든 나이트뿐이니 그것은 클라이언 공작과 블리어드 기사단으로도 충분히 견제가 가능했다.
“알겠습니다, 폐하.”
알카이드 황제의 대답을 들은 아인하트 후작이 물러났다. 3일이란 시간은 왜 길었다. 그동안 아인하트 후작가를 찾은 귀족들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았다. 그들의 목적은 모두 같았다. 바로 아인하트 후작과 관계를 공고히 하고 어떻게든 금탑주와 인연을 맺기 위함이 다. 금탑주가 제국의 8클래스 마법사인 게이런즈를 죽였지만 그것은 이쪽에서 먼저 공격해 갔다는 걸 모르는 이가 없었다. 더군다나 패자는 빨리 잊히기 마련이어서 그들의 뇌리에 게이런즈는 이미 죽은 자이자 패자였다. 죽은 자와의 의리보다 당장의 이익이 더 중요하지 않겠는가. 그런 면에서 금탑주와의 친분은 앞날이 보장되는 최고의 대인관계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엘은 물론 아인하트 후작 또한 아무 귀족도 만나지 않았다. 이미 아인하트 후작은 결심을 굳힌 상태였다. 바로 후작의 작위를 아들인 글레톤에게 물려주고 본인은 이루지 못한 마법의 경지를 이루려는 속셈이었던 것이다.
엘은 그런 아인하트 후작의 변화를 무척 반겼다. 그가 보기에 욕심을 버린 아인하트 후작은 이미 8클래스 경지에 근접해 가고 있었다. 소드 마스터로 치면 최상급에 다다른 존재가 바로 아인 하트 후작이다. 수련에 매진하여 8클래스의 모리를 깨달았을 때, 그는 새로운 경지에 올라설 것이다 글레톤 또한 아버지 아인하트 후작 못지않게 후회한 상태였다. 처음 엘에게 패하고 그는 극심한 자괴감에 빠졌다. 이어서 영향력을 잃어 가는 가문을 보며 권력의 무상함을 깨달았다. 그와 같은 변화를 엘은 무척 반겼으며, 글레톤과의 묵은 관계도 청산할 수 있었다. 엘이 글레톤을 외삼촌이라 부르자 글레톤은 든든한 조카가 생겼다고 웃었다. 3일이 지나고, 엘은 아이넨스, 엘리엔과 함께 황궁으로 입궁했다. 엘이 황궁 안으로 들어서자 대기에 흐르던 마나가 급격한 어그러짐을 보였다.
‘마나를 비틀었구나.’
이 정도 비틀림이라면 마법을 전개할 엄두도 내지 못할 것이다. 자신의 힘이 봉인 당했지만 엘은 태평했다. 그에게는 든든한 지원군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이넨스와 엘리엔. 그들이라면 제국 최고의 기사인 클라이언 공작에게 뒤떨어지지 않는다. 거기에 골든 나이트까지 있으니 뭣하면 황궁을 쑥대밭 으로 만드는 건 일도 아니다. 황궁에 들어선 지 10여 분이 지났을 무렵, 일단의 무리가 엘을 가로막았다. 엘의 앞을 가로막는 선두에는 화려한 갑주를 차려 입은 중년의 기사가 서 있었다. 바로 클라이언 공작이었다. 그리고 주변에 포진해 있는 기사들은 블리어드 기사단이었다. 저번 접전에서 10명이 죽는 사태가 발생했기에 주변에 서 있는 기사들의 숫자는 40명에 불과했다. 더군다나 절반은 상당한 부상을 입어 요양을 필요로 하고 있는 상태. 그렇지만 그들의 눈빛은 형형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엘이 먼저 클라이언 공작을 알아보았다.
“오랜만에 뵙네요, 클라이언 공작님.”
“음, 그렇군. 그런데 그대가 이곳에 무슨 연유로 온 것 이오?“
클라이언 공작의 태도는 차가웠다. 하지만 과거처럼 하대는 하지 못했다. 지금 엘의 위치는 클라이언 공작 본인과 대등한 위치에 섰기 때문이다. 8클래스의 경지는 그로서도 쉽사리 볼 수 없는 지고한 경지. 비록 마법을 사용하지 못한다지만 어떤 꿍꿍이인지 몰랐기에 그는 엘을 경계했다. 엘이 어떤 이유로 황궁에 들렸는지 몰랐기에 이런 태도를 보이는 것이다.
“저는 황궁에 아주 유익한 정보를, 그리고 제의를 하기 위해 온 것이에요. 자, 그럼 새로운 황제 폐하께 안내를 부탁드리지요.”
“……좋소 단, 허튼 짓 하지 말기 바라오.”
“그러려고 온 게 아니니까요.”
“모두 길을 열어라.”
엘의 답을 들은 기사들이 길을 비켜섰다. 클라이언 공작의 시선이 엘에게 향했다.
“안내를 하도록 하지. 나를 따라오시오.”
그 말과 함께 클라이언 공작이 발걸음을 옮겼다. 엘은 그런 클라이언 공작의 뒤를 따랐다. 약 5분여를 더 걷자 황제가 머무는 거대한 대전이 모습을 드러냈다. 클라이언 공작은 대전 앞에 경계를 서고 있는 기사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폐하를 찾아온 손님이시다. 페하께 고하라.”
처척!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인 기사 하나가 대전 안으로 들어섰다. 잠시 후, 대전 밖으로 나온 기사가 클라이언 공작에게 입을 열었다.
“모시랍니다.”
“대전 문을 열어라.”
클라이언 공작의 말에 따라 거대한 대전 문이 열렸고, 블리어드 기사단이 대전 안으로 스며들 듯 빠르게 대전 안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각각 좌우로 포진 되어 경계의 자세를 취했다. 클라이언 공작이 선두로 들어가 황상에 앉아 있는 알카이드 황제에게 고개를 숙였다. “손님을 모셔 왔습니다, 폐하.”
그 말에 알카이드 황제가 시선을 들어 뒤이어 들어오는 엘을 향해 시선을 주었다. 그리고는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수고하셨소, 공작. 손님들은 이리 오시오.”
알카이드 황제의 말을 들은 클라이언 공작은 그와 약 5m 정도 떨어진 거리에 자리했다. 행여 황제에게 위해를 가할까 경호를 한 것이다.
“……”
엘은 알카이드 황제에게 시선을 주었다. 황제의 자리에 오른 그는 전보다 더욱 깊은 눈을 하고 있었다. 디벨 상단의 정보요원들이 판단하길, 알카이드 황제는 인간적인 면은 어떨지 몰라도 황제의 자질에 있어서는 이보다 더 적합한 이는 없다고 판단했다. 한 사람의 인간으로 판단하는 것보다 하나의 황제가 되기 위해 만들어진 것과 다름없는 알카이드 황제는 분명 능력이 뛰어난 황제임은 분명했다. 한동안 알카이드 황제를 바라보던 엘은 고개를 살짝 숙여 보였다.
“이렇게 다시 만나 뵙게 되어 뭐라 말하기 어려운 심정 입니다. 알카이드 황제 폐하.”
엘의 어조가 결코 고울 리 없다. 왜냐하면 알카이드 황제는 엘을 제거하기 위해 황탑주 게이런즈를 파견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엘의 곱지 않은 어조를 느꼈지만 알카이드 황제는 한 점 내색도 하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과거는 과거인 법이고 현재는 현재인 법이지. 금탑주 그대가 나를 찾은 이유는 무언가 할 말이 있어서 온 것일 터. 난 그것을 알고 싶다.”
얼굴 표정 하나 변하지 않는 알카이드 황제의 행동에 엘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무척 무례한 행동이었기에 순간 블리어드 기사단이 짙은 살기를 뿜어냈다. 순식간에 대전 안에 농도 짙은 살기가 가득 차기 했다. 그 순간 엘의 좌측에 위치해 있던 아이넨스가 손을 휘둘렀다. 단순한 손놀림이었지만 그 속에는 어마어마한 마나가 내포되어 있었다.
사락.
손을 한 차례 휘두름으로써 살기 짙던 삽시간에 평소대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
가볍게 펼친 아이넨스의 한 수에 클라이언 공작이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대전의 공기가
잔뜩 방금 전 아이넨스가 펼친 한 수는 그랜드 마스터가 아니라면 펼칠 수 없는 한 수였기 때문이다. 40명에 이르는 소드 마스터의 살기를 단 번에 흩어버릴 수 있다면 그것은 그랜드 마스터일 것이 분명했다. 그러한 사실은 알카이드 황제 또한 알고 있었기에 그는 삽시간에 기사들의 살기를 무력화시킨 아이넨스에게 시선이 향했다. 엘은 그런 그들에게 아이넨스의 소개를 하였다.
“이분을 소개해야겠군요. 이분은 당대 신검을 계승하신 신검의 주인, 아이넨스 님이십니다. 현재 특별한 이유로 잠시 저와 함께하고 있지요, 참고로 아이넨스님도 그랜드 마스터의 경지에 오르신 상태입니다.”
“……”
아이넨스의 소개에 대전의 모든 이들이 두 눈을 부릅떴다. 그만큼 그의 정체는 그들에게 충격적이었기 때문이다. 신검은 검을 휘두르는 모든 존재들에게 전설이나 다름없다. 신화 속에서나 전해지는 신검의 힘은 누구도 범접치 못할 엄청난 힘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당장 신검의 주인이라는 사실만으로도 경악스러운데 본신의 실력 또한 그랜드 마스터라니. 이 정도라면 클라이언 공작보다 최소 한 수는 뛰어나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의 놀라움이 채 가시기도 전에 엘은 엘리엔을 소개 하였다. 가뜩이나 아이넨스의 정체가 범상치 않자 그들은 엘리엔의 정체도 범상치 않을 것임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하기야 저 정도로 아름다운 미녀가 여태껏 소문이 나지 않았으니 그 정체는 신비에 감싸져 있을 게 분명했다.
“이분의 이름은 엘리엔. 엘프 숲에서 나오신 당대 엘프 신검의 수호검주이십니다. 이분 또한 그랜드 마스터의 경지에 이르셨지요.”
더 놀랄 것도 없다. 신검의 주인이 모습을 드러낸 마당에 엘프라니, 더군다나 엘프의 신검이라면 양대 신물 중 하나인 네이처 소드가 분명했다. 신검의 주인이 2명이라, 이 정도면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최강의 세력임이 분명했다. 거기에 골든 나이트까지 더해진다면? 블리어드 제국의 황가는 그야말로 위기에 처한 것과 다름없는 것이다. 알카이드 황제의 안색이 미미하게 일그러졌다.
‘제기랄.’
사실 그는 엘에게 흉수의 정체를 전해 들은 뒤 인정사정없이 그를 협박 혹은 제거하여 골든 나이트를 취하려고 하였다. 그에게는 결코 엘과 손을 잡을 생각이 없었거니와 아직 실릭르를 잊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그런 생각도 엘리엔을 보면서 한 차례 흔들렸다. 저토록 아름다운 여인은 태어나 한 번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맹세코 여태까지 실피르보다 아름다운 여인을 본 적이 없다고 생각하는 그로서는 그보다 아름다운 엘리엔의 등 장이 큰 혼란을 주었다. 거기에 이어진 엘의 소개는 그의 그런 생각을 말끔하게 걷히게 하였다. 신검의 주인에 그랜드 마스터의 경지까지. 누구도 얕볼 수 없는 존재였고, 당장 엘이 마음만 달리 먹는다면 자신의 목숨은 엘에 의해 좌우될 가능성이 농후 했다. 잡아먹을 수 있는 초식동물인 줄 알고 손을 뻗었더니 오히려 자신을 잡아먹을 맹수였던 것이다.
‘실수했어. 이미 저 녀석은 모든 상황을 예상하고 저들 을 데리고 온 것이야.’
살기를 내뿜던 블리어드 기사단은 물론이고 클라이언 공작조차 몸을 움찔했다. 초인 셋에 힘을 봉인 당했지만 황궁 밖으로 나가면 8클래스 마법을 발휘할 수 있는 엘의 존재는 그들이 지닌 힘을 월등히 능가하고 있었다.
싱긋.
주도권을 잡은 엘은 웃음을 지었다. 그가 아이넨스와 엘리엔을 함께 데리고 이렇게 방문한 의도가 제대로 먹혀 들어가는 시점이었다. 완벽하게 기선을 제압한 엘이 입을 열었다. “별다른 의도는 없으니 그리 경계할 필요는 없어요. 저는 누구와 달라서 사소한 일에 마음을 두지 않거든요.”
엘은 알카이드 황제를 보며 씨익 웃음을 지었다. 노골적인 표현이었지만 알카이드 황제는 함부로 경거망동 하지 못했다. 주도권을 쥐고 있는 건 엘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속내는 달랐다.
‘빌어먹을 자식. 기회만 있다면 반드시 씹어 버리겠다!’
속내와는 다르게 표정을 담담하게 하며 말했다.
“그대가 이곳 황궁을 침공한 세력에 대해 알고 있다 들었다. 그것에 대해 말해 주었으면 한다.”
엘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알려드리지요. 자고로 적의 적은 공동의 적이니까요. 황궁을 습격한 세력은 벨로세크 제국을 중심으로……“
그렇게 서두를 꺼낸 엘은 자세한 설명을 읖조리기 시작했다. 9클래스 마법사인 루이아스와 그를 따르는 열 명의 초인. 그리고 벨로세크 제국을 중심으로 한 추측할 수 없는 소드 마스터와 세 제국의 광활한 영토까지. 어느 하나 놀랍지 않은 사실이 없었고, 이야기를 듣는 내내 알카이드 황제는 물론 클라이언 공작 또한 경악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렇게 되어 아토빌 공작님에게도 동맹 승낙을 받고 이제 블리어드 제국으로 온 것입니다.”
아토빌 공작을 제거하기 위해 무려 6명의 초인까지 동원, 신검을 다루는 최상위 그랜드 마스터 셋이 합공을 하고도 루이아스를 못 이겼다는 말로 엘의 말은 끝을 맺었다.
“……”
엘의 말을 모두 들은 이들은 한동안 아무런 말도 못했다. 정말 놀랍기 그지없는 말이다. 세상에 자신들이 모르는 사이에 그런 일이 벌어졌다니 더군다나 알카이드 황제는 흑탑주 지크릴이 그들의 조직에 속해 있던 존재란 말에 가슴이 서늘해지는 걸 느꼈다. 아마 9클래스 마법사란 존재는 각 제국에 다양한 방법으로 첩자들을 심어 놓았을 것이다. 그중 블리어드 제국에 심어 놓은 첩자 중 가장 비중 높은 자가 지크릴이었을 확률이 높았다. 만약 그가 죽지 않았더라면 블리어드 제국 또한 그들의 수중에 넘어갔을 확률이 높았다. 자신을 황제의 자리로 올려 주는 데 가장 지대한 공을 세운 지크릴이 사라짐으로써 블리어드 제국이 무사할 수 있었다니, 절로 식은땀이 흐르는 알카이드 황제였다. 그러던 알카이드 황제가 돌연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느긋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분명 위험한 세력이긴 하지만 적의 적이란 공식은 그 쪽에서만 성립되는 게 아니야. 이쪽에서도 통용되지. 내가 저쪽 세력과 손을 잡는다는 것도 염두에 두어야 하지 않겠나?“
“……”
알카이드 황제의 말에 모두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설마하니 황궁을 습격한 적하고 손을 잡겠다는 말을 하다니. 미쳐도 단단히 미친 게 아닐 수 없다. 위협적인 말을 들었음에도 엘은 태평했다. 엘은 알카이드 황제의 말이 그냥 해 본 것임을 간파한 상태였다.
“과연 그들의 습성을 알고서 그런 말을 할 수 있을까요? 그들은 오로지 실력 위주로 신분의 높낮이를 결정합니다. 기존의 귀족 출신들이 투항한다고 해도 그들이 인정할 리 없죠. 뭐, 그래도 제국의 황제가 알아서 항복 한다면 어느 정도 보장이 되겠지만 그런 어리석은 짓은 하 지 않을 거라 생각합니다.”
반박할 거리가 존재하지 않았다. 엘의 말이 대충 추측성 말이긴 했으나 어느 정도 사실일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무력으로 충분히 차지가 가능한데 투항한다고 해서 뭘 봐 주겠는가. 알카이드 황제는 자신의 실수를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 내가 실수했음을 인정하지. 그래, 원하는 게 무엇이지?”
“제국을 전복하려 하고 황궁에 대놓고 침공한다는 것은 그들이 야망을 본격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곳에서 동맹을 맺은 뒤 곧장 백탑주 유클레이를 비롯하여 서부 왕국의 초인들과 동맹을 맺을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이쪽의 초인은 무려 열셋! 저쪽은 9클래스 마법사 한 명에 초인 아홉이니 어느 정도 펑펑한 구도가 만들어질 것입니다. 기회를 보아 적들을 하나씩 제거하고, 마침내 루이아스를 제거했을 때 모든 일은 끝날 것입니다.”
엘의 계획은 루이아스의 야망에 맞서 적들의 초인을 하나씩 줄인다는 것에 있다. 물론 그것이 쉽지 않겠지만 현재로서는 이것이 최선이기에 알카이드 황제는 순순히 납득했다.
“좋아, 그 이야기는 옳다. 나 또한 찬성하도록 하지. 클라이언 공작, 경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클라이언 공작이 기사의 예를 취하며 말했다.
“대륙의 평화에 제가 도움이 된다면 기쁠 따름입니다. 황명을 내려 주신다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래, 그럼 그 문제는 클라이언 공작에게 일임하지. 부디 금탑주를 도와 대륙의 평화를 찾는데 일조하라.”
“예, 폐하!”
클라이언 공작이 고개를 깊게 숙였다. 엘이 그 모습을 보며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좋아, 블리어드 제국도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어. 이제 조금만 더 노력하면 돼.’
엘의 안색이 밝아졌다. 이제 그와 직간접적으로 맺어진 초인의 숫자는 무려 8명. 앞으로 5명만 더 끌어들인다면 루이아스에 비해 떨어지지 않는 세력을 구축할 수 있을 것이다.
‘얼마 남지 않았어. 분발하자.’
그들만 있다면 루이아스와도 능히 자웅을 겨룰 수 있을 것이다. 블리어드 제국을 벗어나는 엘의 안색은 밝았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