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lden Mage RAW novel - Chapter (90)
11. 마도 제국의 선언 part. 1
‘좋아, 축사를 했으니 이 정도로 되겠지.’
짧은 축사를 한 엘은 곧장 텔레포트 주문을 외워 연회장을 벗어났다. 비록 축사를 짧게 하긴 했지만 그 속에는 레도프 국왕이 원하던 것이 모두 들어 있었다. 우선 즐겁게라는 말은 결코 먼 사이에서 쓸 수 없는 말이었다. 가까운 사이만이 즐겁게 즐길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런 말을 여러 번 반복했으니 귀족들은 금탑이 왕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음을 알았을 터. 그렇다면 별 다른 행동을 보이지 않을 것이다.
‘이 정도면 충분하지. 후후!’
그랬기에 짧은 축사를 하고 엘이 마음 놓고 몸을 뻘 수 있었던 것이다.
‘하기야 걱정이 되긴 하겠지.’
속으로 웃는 한편 엘은 레도프 국왕의 마음을 충분히 헤아릴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의 생각대로 금탑과 왕국 간에 아무런 연결 고리도 없다. 그들로서는 자신들의 필요성이 떨어지면 금탑이 언제든지 떠날 것이라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엘은 그랬기에 레도프 국왕의 제안을 승낙한 것이다. 그의 고민을 알았기 때문일까? 하지만 엘은 톨리안 왕국을 떠날 마음이 절대 없었다.
‘아직 로웰린 누나에게 사촌 관계인 것을 밝히지도 않았고, 이곳에 벌여 놓은 각종 사업들도 많은데 갈 수 없지. 무엇보다 이곳이 정이 들었고 말이야.’
텔레포트를 하던 순간 엘은 에리스 공주와 잠깐이나마 시선을 마주칠 수 있었다. 그가 본 그녀의 눈은 무언가 슬픈 빛을 띠고 있었다. 무언가 강제적인 것이 작용한 듯한 모습. 엘은 그런 에리스 공주의 모습에 과거 자신이 그녀를 도와주겠다고 한 던 말을 떠올릴 수 있었다.
‘여러 가지로 바쁘다 보니 그것을 깜빡 잊었나 보군. 이참에 잘 도와줘야겠어.’
그렇게 마음먹으며 왕궁 한편에 모습을 드러낸 엘은 곧장 복장을 바꿔 입기 시작했다. 같은 사람이지만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이게 하는 것은 엘의 특기와도 같았다. 전생에서도 안경 하나로 전혀 다른 사람의 모습이 되지 않았던가. 엘은 우선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와 같은 안경을 벗고, 이마를 가리고 있는 앞머리를 적당히 넘겼다. 마법으로 처리된 무스 같은 것이 있었기에 엘은 이마를 확 터놓은 얼굴이 되었다. 게다가 안경을 쓰지 않아 지적 인 이미를 풍기던 것이 단번에 준수한 이미지를 풍기기 시작했다. 마무리로 귀족가 자제나 입을 법한 귀한 옷감의 파티복을 챙겨 입었다. 혼자 입는 옷이 아니어서 입는 데 무척 고생을 했지만 그 정도는 엘에게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았다.
“좋아, 다 됐어.”
파티에 참석하기 위한 복장을 다 챙겨 입은 엘이 매직 미러로 자신의 모습을 확인했다. 매직 미러에는 이지적인 청년과는 전혀 다른 이미지의 청년이 자리하고 있었다. 멋들어진 파티복에 깔끔하게 처리된 머리 스타일은 일반 귀족 자제들과 차별을 이루면서 무척 준수한 느낌을 주었다.
“이 정도면 나도 무척 괜찮은 인물인데? 하하하!” 나쁘게 보면 여자나 흘리고 다니는 제비와 같은 느낌이었으니 좋은 게 좋은 거라, 엘은 좋게 생각하며 넘어갔다. 분장을 마친 엘은 곧장 파티장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사실 평범하게 파티를 즐겨 보는 것도 엘이 소망한 것들 중 하나다. 그도 그럴 것이 국가적 차원으로 여는 파티는 무척 호화스럽다. 국가에서 연주를 잘하기로 유명한 악사들을 초빙하여 음악을 연주하게 하고, 맛깔 나는 음식과 고급스러운 술, 그리고 아름다운 레이디는 파티에서 가장 매력적인 요소로 작용했다. 더군다나 이번 파티에서는 유난히 아름다운 귀족가 영애들이 많았다. 바로 금탑주와 대면시켜 어떻게든 금탑주와 엮어 보려는 귀족들이 자신의 딸들을 예쁘게 치장시켜 데려왔기 때문이다.
‘세레나와 카이나에게 미안하지만 춤만 추는 것은 괜찮지 않겠어? 음, 아니다. 역시 미안하네. 그냥 다음에 세레나와 카이나랑 같이 춤을 추는 게 낫겠군.’
파티에 참석한 엘은 레이디와 춤을 추는 것도 목표로 삼았으나 세레나와 카이나를 배신하는 행위 같아 차마 그것을 하지 못했다.
‘음식과 술이나 즐기지. 이런 흥겨운 분위기에서는 분위기가 곧 반찬이니 말이야.’
연회장 안으로 들어선 엘은 아까 전 보았던 화려함을 다시 보고는 입가에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흥겨운 분위기에 저도 모르게 동화되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쌓여 있던 부담감과 고민들이 날아가 버리는 기분이었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그저 즐기는 자리, 이 파티장이 그러했다.
‘이래서 귀족들이 파티에 참석하는 거로군.’
불과 몇 년 전에 주최된 파티에서는 정치적 이유가 합쳐져 흥겹지 못했지만 오늘의 파티는 반란이 진압되고 그것을 축하하기 위한 자리다. 당연히 내전으로 지친 귀족 들이 파티를 즐기려고 하니, 절로 분위기가 즐기는 분위기로 기우는 것이다.
“음, 좋군. 확실히 맛있어. 왕실 주방장들은 음식을 잘 하는가 보군. 술도 향긋하니 맛있고.”
엘은 연회장 이곳저곳을 누비며 음식과 술을 마음껏 들었다. 처음 보는 엘의 모습에 귀족들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으나 이내 신경을 껐다. 무척 준수하긴 했지만 자신들이 모를 정도면 어디 시골 남작가 자제나 될 법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 그들의 생각은 오히려 엘에게 도움을 주었다. 덕분에 엘은 연회장 곳곳을 다니며 여러 가지 음식을 맛볼 수 있었고, 술 또한 마음껏 마실 수 있었다.
“후우! 역시 파티가 좋단 말이야. 이참에 나도 파티나 여러 곳 다녀 볼까……“
적당히 알콜이 들어가니 기분이 좋아지는 걸 느끼며 엘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런 즐거움도 한 사람을 마주함으로써 깨지게 되었다. 갑자기 한쪽에서 큰 목소리가 들려온 것이다.
“아앗! 너는!”
“응?“
엘은 절로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향해 시선이 향했다. 그곳에는 두 사람이 서 있었다. 30대 중반으로 보이는 귀족과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사내가 말이다.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엘이 보기에 사내의 얼굴이 어딘가 눈에 익었다.
‘해독.’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로 해독 주문을 외운 엘은 알콜이 완전히 해소된 것을 느끼며 말짱한 정신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그중 20대의 사내가 화가 잔뜩 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엘은 그 사내의 정체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아, 어제 그 건달……“
“다, 닥쳐라!”
엘이 자신을 가리키며 건달이라 말하자 사내가 당황한 듯 소리쳐 엘의 말을 막았다. 그런 사내의 외침에 30대 중반의 귀족이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무슨 일이냐, 펄스.”
“형님, 이자입니다. 어제 저를 그 지경으로 만들었던 자가요.”
펄스라 불린 사내의 말에 귀족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 너를 그렇게 만든 이가 바로 이 사람이군.”
귀족은 그렇게 말하고는 엘의 위아래를 훑었다. 그리고 신중한 목소리로 자기소개를 하였
다.
“나는 롤프 자작이라 하오.”
상대가 소개를 했는데 자신은 소개를 하지 않을 수 없는 노릇. 엘은 자기소개를 하였다.
“저는 엘이라고 합니다.”
엘의 태도에 롤프 자즉의 눈썹이 꿈틀거리더니 대번에 태도가 바뀌었다.
“엘? 귀족이 아닌가?“
“일단 작위는 없습니다만……“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하는 엘의 태도에 롤프 자작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걸렸다.
“그런가. 작위가 없군. 어느 가문 출신이지?“
롤프 자작이라는 자는 무척 치밀한 자인 듯했다. 작위를 갖고 있지 않은 것을 확인했으면서 가문까지 확인하려는 걸 보니 말이다. 엘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소속된 가문도 없습니다만.”
“그럼 평민이로군. 너 같은 평민이 어떻게 이곳에 온 거지?“
분위기는 삽시간에 싸늘해졌다. 모든 귀족들의 시선이 롤프 자작과 엘에게 향했다. 그들의 표정은 다양했다. 웅성거리는 자와 대놓고 경멸 어린 표정을 짓는 자, 그리고 아무 상관없다는 듯 방관적인 태도를 취하는 사람 등 말이다. 딱히 반응을 보이지 않은 것이지 대부분 롤프 자작의 편인 것이 분명했다. 롤프 자작은 차가운 미소를 머금은 채 엘에게 말을 이어 나갔다.
“너는 어제 나의 사촌 동생을 부상입히는 중한 죄를 저질렀다. 내 사촌 동생이 비록 작위는 없으나 귀족은 귀족. 귀족에게 상처를 입힌 자는 어떻게 되는지 아나?”
“모릅니다만……”
정말 몰라서 물은 것이지만 롤프 자작에게는 비꼬는 것처럼 들렸나 보다. 한차레 눈썹을 꿈틀거린 롤프 자작이 다시 냉정을 되찾고 차가운 어조로 말했다.
“바로 즉결 처형이다. 하찮은 평민이 귀족을 건드렸다는 것은 그만큼 중죄이기 때문이지.”
롤프 자작의 말에 대부분 동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귀족들. 그들 모두가 제3왕자파에 속한 귀족들이었다. 그들은 전혀 승리하지 못할 권력 투쟁에서 승리하자 극도로 오만해진 상태였다. 지방의 백작, 자작, 남작에 불과 한 자신들에게 과거 떵떵거리던 백작 이상의 귀족들이 함부로 기를 못 펴니 당연하지 않겠는가. 몇몇 귀족들은 롤프 자작보다 더 심한 말을 하였다.
“그냥 죽이지는 않지. 사지를 찢어 죽이거나, 온갖 고문을 가한 뒤 마법으로 치료를 하여 정신적으로 죽게 만들지.”
“고귀한 피를 다치게 한 죄는 그만큼 큰 법이지.”
귀족들이 모두 자신의 편을 들어 주자 롤프 자작의 얼굴에는 더욱 자신감이 서렸다. 그는 오만한 어조로 말했다.
“보통 귀족들은 그렇게 처벌을 하지만 나는 비교적 관대한 편이다. 편안하게 죽고 싶다면 그렇게 죽여 줄 수도 있지.”
씰룩.
엘의 입가에 파르르 경련이 일어났다. 롤프 자작은 그것이 엘이 겁을 먹은 것 때문에 그런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그의 생각과 판이하게 다른 것이었다. 엘은 내심 충격을 받았다. 설마하니 귀족들이 평민을 이렇게 심하게 대할 줄 몰랐던 것이다. 그는 스스로 자신이 착한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지킬 건 지키는 사람이었다. 사람에게는 존중을 해 주었고, 그에 걸맞은 대우를 해 주었다. 하지만 이게 무엇인가. 귀족이란 작자들은 귀족이 아닌 인간들을 인간으로 치지도 않지 않는가. 귀족들은 예상보다 인간들을 더욱 하찮게 여기고 있던 것이다. 롤프 자작의 어조로 인해 엘은 좋았던 기분이 급속도로 가라앉는 걸 느꼈다. 현실을 마주하다 보니 역시 세상은 힘이 좌우한다는 것을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엘이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생각에 잠겨 있자 롤프 자작은 엘이 심각한 두려움에 차마 말을 하지 못하는 것이라 판단했다. 그리고 엘에게 결정을 독촉했다.
“자, 정해라. 어떻게 죽고 싶은가.”
“보자 보자 하니 못하는 말이 없군요. 롤프 자작.”
차갑게 웃음을 짓고 있던 롤프 자작은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웃음을 지워 나갔다. 그리고 돌아간 그의 시야에는 언제 나타났는지 로웰린이 자리하고 있었다. 로웰런은 차가운 눈으로 롤프 자작을 훑었다. 그녀의 시선에 롤프 자작은 저도 모르게 몸에 오한이 감도는 걸 느꼈다. 로웰린이 여전히 차가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내가 비록 귀족이지만 오늘같이 귀족을 망신시키는 건 처음 보는군요. 비록 이분이 어떤 일을 벌인지 모르겠지만, 또 어떠한 일이 벌어졌는지 어떤 이유로 일이 발생 했는지 전혀 모르지만 단순히 평민이라는 이유로 막말을 하고 죽음을 논하는 걸 보면서 같은 귀족인 내가 다 부끄러워지는군요.”
정면으로 받은 면박이었기에 롤프 자작은 속으로 이를 갈았다.
‘이런 빌어먹을 년이!’
롤프 자작뿐만 아니라 파티장에 모인 대부분의 귀족들 또한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비록 로웰린이 제3왕자파의 수장이지만 제3왕자파 족들은 대부분 로웰린을 불쾌하게 여기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에게 막대한 이윤을 가져다줄 제1왕자파의 이권들을 모두 레도프 국왕에게 넘겼기 때문이다. 만약 로웰린이 평범한 귀족이었다면 그녀의 가문은 진작 풍비박산 났을 것이다. 하지만 귀족들은 감히 그녀에게 경거망동할 수 없었다. 그녀의 뒤에 있는 거대한 존재. 바로 금탑 때문이다. 제국에서도 한 수 접어주는 금탑은 이미 톨리안 왕국의 국력보다 더욱 강한 힘을 지니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그가 로웰린의 뒤에 있는데 어떤 귀족이 감히 로웰린에게 대들 수 있겠는가. 그것은 롤프 자작 또한 마찬가지였기에 그는 속으로 분기를 씹어 삼킬 뿐,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성급했습니다.”
“성급한 걸 알았으니 다행이군요.”
날카로운 눈으로 쏘아본 로웰린이 이번에는 엘에게 시선을 주었다.
“아, 아버지?“
엘을 본 로웰린의 몸이 순간 움찔했다. 얼핏 본 엘의 모습이 그녀의 아버지와 무척 닮았기 때문이다. 하긴 그럴 수도 있다. 로웰린의 아버지는 엘에게 있어 작은 아버지였으니 말이다. 로웰린은 자신의 착각이었음을 깨닫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내게 설명을 해 줄 수 있나요? 그럼 제가 가급적 공평하게 판단을 해 드리겠습니다.”
“……”
엘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한동안 로웰린을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입을 열었다.
“백작님께서는 다른 귀족들과는 다르시군요. 귀족답지 않다고 해야 할까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시나요?”
“……!”
엘의 말에 연회장은 한차례 술렁였다. 이미 평민이라고 암묵적으로 인정한 엘이었다. 그런 그가 최고위 귀족 중 하나인 로웰린에게 그런 말을 하다니! 충격적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로웰린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로웰린은 한동안 엘을 응시하더니 말했다.
“제가 귀족답지 않다고요?”
“그렇습니다. 다른 귀족들은 모두 고압적인 자세로 자신들이 마냥 우수하다고만 역설하던데 말이죠.”
“그건 아니에요. 저 같은 귀족도 있으니 말이죠.”
“아, 그림 말을 정정하겠습니다. 대부분의 귀족들은 이죠.”
엘의 말에 로웰린은 살짝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가 아시는 분 중에 귀족이 아니면서 무척 놀라운 능력을 지니신 분이 있어요. 맨손으로 지금은 그 누구도 무시하지 못할 세력을 일구셨고, 모든 사람들은 그분을 우러러보죠.”
‘내 이야기다!’
엘의 눈이 반짝였다.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로웰린은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저는 그분을 보면서 평민과 귀족의 차이점을 잘 모르겠더군요. 그분 또한 직위는 제국의 공작에 밀릴 것은 없지만 엄연한 신분은 평민이거든요.”
탑주란것은 작위가 아니었기에 엄연히 말하면 평민이다. 로웰린의 말이 맞았다.
“그분을 보면서 저는 평민들 중에서도 무척 능력이 뛰어난 이들도 많다는 것을 느꼈죠. 아마 당신도 제가 느끼길, 결코 범상치 않은 분일 것이 분명해요. 그렇지 않은가요?”
“……”
엘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로웰린의 말에 무언가 알 수 없는 쑥스러움을 느꼈기 때문이다.
“자, 그럼 제게 설명을 해 주실 수 있나요? 무슨 일로 이런 사태가 일어난 것이죠?“
로웰린이 엘을 재촉할 때, 한 여인이 바람처럼 나타났다.
“그만하세요, 루비어스 백작님.”
“아, 공주님을 뵙습니다.”
로웰린의 고개가 숙여졌다. 하지만 에리스 공주는 그런 로웰린의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하며 엘에게 시선을 주었다. 엘 또한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 조용히 에리스 공주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을 보는 순간 엘은 그녀가 자신의 정체를 모두 알고 있음을 깨달았다. 에리스 공주는 엘에게 조용히 물었다.
“도저히 감내하기 힘든 모욕을 받고도 참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제가 참으면 일을 조용히 넘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엘의 태도는 당당했다. 에리스 공주 또한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 계속해서 물었단.
“모든 사태를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는데 참았던 이유는 무엇인가요?”
“힘으로 해결하는 것은 능사가 아니며, 힘으로 남을 억누르는 것은 무뢰배나 하는 짓이기 때문입니다.”
“힘으로 해결하지도 않고 마냥 참는다면 일은 해결되지 않아요. 과연 그게 좋은 방법이라 할 수 있을까요?”
“하지만 누구도 피해를 보지 않는 방법입니다. 이것이 최선이고 단지 즐기기 위한 자리에서 누구도 피해 보는 것을 원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에리스 공주는 입을 닫고 한동안 엘을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한참 후에 조용히 입을 열었다.
“처음 보았을 때도 느꼈지만 당신은 무척 현명하신 분이군요. 힘이 있으되 그것을 남용하지 않고, 모든 사태를 가장 이상적으로 해결하시려는 태도. 정말 힘을 가진 분의 올바른 태도라 생각합니다.”
“과찬이십니다.”
엘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사락.
그런 엘에게 에리스 공주가 조용히 다가갔다. 알 수 없는 문답에 귀족들은 모두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에리스 공주와 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은 로웰린 또한 다르지 않았다. 한 걸음 한 걸음, 엘에게 다가간 에리스 공주는 새하얗고 섬세한 손을 들어 엘의 손을 잡았다. 에리스 공주는 경건하다 할 수 있는 태도로 조용히 엘의 손에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나직하지만 또 편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대륙에 존재하는 대마법사 중 한 분이신 위대한 금탑 주이시여. 가이아 여신의 축복을 받은 저 에리스가 당신의 영원한 반려가 되고자 합니다. 부디 부족한 저를 받아 주시옵소서,”
“……”
에리스 공주의 말에 연회장에는 싸늘한 침묵이 찾아왔다. 우선 에리스 공주의 말을 들은 롤프 자작과 펄스는 경악으로 입이 떡 벌어져 있었다. 왜냐하면 자신이 다그치던 청년이 금탑주라는 점 때문이다. 로웰린 또한 마찬가지다. 설마하니 자신이 구해 주려고 하던 사람이 엘이었을 줄이야. 사람이 이렇게 달라질 수 있다는 걸 오늘에서야 알았다. 귀족들 또한 경악했다. 설마하니 자신들이 몰아붙이던 이가 금탑주였을 줄 몰랐던 것이다. 더구나 금탑주에게 그런 말을 내뱉다니, 귀족들의 얼굴이 새하얗게 탈색되었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공통적인 점에 경악하고 있었다. 바로 도도하고 아름답기로 이름 높은 에리스 공주가 금 탑주에게 청혼을 했기 때문이다. 귀족계에서 여인이 청혼을 거절당하면 평생 결혼을 할 수 없는 몸이 된다. 그것을 에리스 공주 또한 분명히 알고 있을 것이 분명 한데 청혼이라니…… 금탑주에게 이미 장래를 약속한 여인이 있다는 걸 모르는 이는 없었다. 모두의 시선이 엘과 에리스 공주에게 집중되었다. 한참의 침묵이 흐르고, 한동안 넋이 나간 듯한 표정을 짓고 있던 엘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나는……”
(골든 메이지 10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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