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lden Spoon Investment Portfolio RAW novel - Chapter (107)
금수저 투자백서 107화(107/231)
107. 역시 본부장님이세요!
화창한 평일 오후.
햇볕이 따스하게 내리쬐는 가운데 골프장 클럽 하우스 출입구 쪽에서 큰 목소리가 들리며 한 무리가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바로 동해그룹 우용갑 회장의 장남인 우호근과 친구들이었다.
평일 오후라 그런지 클럽 하우스 내부는 사람이 거의 없이 한적했다.
세 사람은 익숙한 발걸음으로 하우스 안에서도 제일 전망이 좋은 통유리창 바로 옆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야 이게 무슨 봄 날씨야! 하늘만 맑지 아직 추워서 손가락이 굳어 버렸잖아. 오늘 볼 나가는 것도 완전 엉망이었고.”
짙은 감색 폴로셔츠에 흰색 바지를 입은 사내가 투덜거리자 여당 중진 의원의 아들인 전건우가 옆자리에 있다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OB를 세 번이나 냈으면 날씨 탓이 아니라 실력이 모자란 거지.”
“진짜라니까!”
“핑계 대지 말고 사나이답게 인정해.”
“와, 씨 억울해서 못 살겠네. 야, 내 실력 몰라?”
처음 말을 꺼낸 사내가 억울하다는 듯 가슴을 퍽퍽 쳐댔다.
유들유들한 인상을 풍기는 사내의 이름은 유석찬으로 명동 사채 시장 큰손의 아들이었다.
여기다 우호근까지 포함한 이 셋은 패거리를 만들어 서로 친하게 어울리면서 함께 유흥을 즐기는 사이였다.
“주문하시겠어요?”
왁자지껄하게 떠들어대는 일행 사이로 깔끔한 유니폼을 입은 여직원이 메뉴판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어차피 자기 집처럼 자주 드나드는 곳이라 우호근은 메뉴판을 쳐다보지도 않고 바로 말했다.
“난 우거지 해장국.”
“나도 어제 술을 마셔서 해장을 좀 해야되겠어.”
“하여간 둘 다 빌빌거리긴. 귀찮으니까 그냥 메뉴 통일하련다.”
전건우가 다른 둘을 향해 이죽거리며 여직원에게 눈길을 돌렸다.
“들었지? 같은 걸로 세 개 갖다줘.”
“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여직원은 아무도 들춰보지 않은 메뉴판을 거둬서 돌아섰다.
스커트를 입은 여직원의 엉덩이를 게슴츠레한 눈으로 쳐다보던 전건우가 입꼬리를 씩 치켜올렸다.
“몸매가 꽤 잘 빠졌는데.”
“왜. 작업이라도 걸려고?”
유석찬이 물컵을 들어 한 모금 마시면서 물었다.
“작업이라고 할 것도 없지. 저런 년은 슬쩍 말만 붙여도 바로 넘어와.”
“아서라. 여기 영감들도 자주 오는 곳이잖아. 괜히 잘못 건드렸다가 소문이라도 나면 귀찮아져.”
우호근이 슬쩍 말리는 척을 하자 숙취 때문에 속 쓰린 표정을 하고 있던 유석찬이 빈정거리며 대꾸했다.
“뭐야. 아버지 회사에 들어가더니 벌써 평판이라도 신경 쓰는 거야?”
“영감들한테 잔소리 듣기 싫어서 그런다 새끼야.”
우호근이 인상을 찡그리고 대꾸했다.
“그리고 조만간 있을 개각 때 전 의원님이 국무위원으로 들어갈 수도 있다는 이야기가 들리던데. 그럼 넌 더 몸을 사려야 되지 않겠어.”
“아, 뭐 그렇지.”
전건우가 쩝 입맛을 다셨다.
“안 그래도 우리 꼰대가 얌전히 안 있으면 외국으로 보내버린다고 협박을 하더라.”
“거 참 애도 아니고 너무하신 거 아니냐.”
뚱한 표정으로 유석찬이 말하자 전건우가 어깨를 으쓱였다.
“어쩌겠어. 지금처럼 떨어지는 떡고물이라도 받아먹으려면 바짝 엎드려야지.”
그렇게 일행 셋이 시시덕거리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어디 한 번 먹어볼까.”
유석찬이 먼저 국물을 한 숟가락 떠서 마셔보고는 눈썹을 까딱였다.
“음, 나쁘지 않네.”
“여기 음식 맛이 그럭저럭 괜찮긴 해.”
“야, 배고프다 얼른 먹자.”
우호근과 전건우도 막 공을 치고 와서 허기가 진 상태였기에 숟가락을 들고 밥을 먹기 시작했다.
“오늘 퍼팅은 잘 들어갔는데 드라이버가 영 별로더라.”
“나도 그래. 아직 날씨가 쌀쌀해서 제 실력이 안 나오는 것 같으니까. 다음에는 좀 따뜻한 곳에 가서 라운딩을 돌자고.”
“이 새끼 또 날씨 타령하는 거 봐라.”
“응 지랄하지 말고. 야 그럼 필리핀에 한번 갈까? 클락이 그렇게 좋다던데.”
유석찬의 말에 전건우가 눈을 반짝였다.
“나도 들었어. 골프도 골프지만 밤에 놀기에도 최고라며.”
“하여간 이 자식은 머릿속에 온통 여자 생각밖에 없지.”
“이거 달린 놈이면 당연한 거 아니냐.”
뻔뻔한 얼굴로 대꾸하는 전건우의 코앞에 중지를 들이민 유석찬이 고개를 돌려 우호근을 쳐다봤다.
“호근이 넌 어때.”
“필리핀? 뭐 나쁘지 않지.”
우호근이 냅킨으로 입 주변을 닦으면서 말했다.
“좋아. 그럼 다들 가는 걸로 알고 추진한다.”
그러자 전건우가 신이 난 얼굴로 중간에 끼어들었다.
“그러면 여자들은 내가 조달할게.”
“난 전에 봤던 모델들이 괜찮더라.”
“흐흐흐. 알았어.”
식사가 대충 끝나자 디저트로 나온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내려놓은 우호근이 슬쩍 주위를 둘러보고는 입을 뗐다.
“목돈을 땡길 아이템이 하나 있는데 낄 생각이 있어?”
그러자 히히덕거리던 유석찬과 전건우가 눈에서 이채를 띠며 쳐다봤다.
“좋은 건수라도 있는 거야?”
“뭔데 말해 봐.”
두 사람이 관심을 보이자 우호근이 뒤로 몸을 기대며 말했다.
“낄지 말지 그것부터 말해.”
“그렇게 말하는 걸 보니까 사이즈가 꽤 큰 건인가 봐?”
유석찬이 테이블에 의자를 바짝 당겨 앉으며 호기심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계획대로 일이 진행되면 각자 최소 50억씩은 챙길 수 있을 거야.”
휘익!
유석찬이 짧게 휘파람을 불었다.
“이야, 나쁘지 않은데.”
“50억? 야 그거 진짜 확실한 건이야?”
전건우도 노골적으로 욕심을 드러내며 관심을 보였다.
이때 도곡동 주공 아파트 13평 가격이 1억 8천만 원 정도였기에 50억이라면 이들 패거리한테도 꽤 큰돈이었기 때문이었다.
“어떤 일인데?”
유석찬의 물음에 우호근이 팔짱을 낀 채 말했다.
“같이 할 거야?”
“당연하지! 이런 일에 빠질 순 없잖아.”
“뭐 나쁘지 않네. 나도 콜.”
전건우가 대뜸 양손을 비비면서 대답하자 유석현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돈이 생기는 일인데 당연히 안 빠지고 끼어들거라 예상했던 우호근은 내심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보성 통신이라고 들어봤어.”
“처음 듣는 이름인데 뭐하는 곳이야?”
머리를 갸웃거리는 전건우와 달리 명동 사채시장 큰손의 아들답게 유석찬이 눈에서 이채를 띠며 말을 받았다.
“전자사전하고 라디오를 만드는 회사 아냐?”
우호근이 입가에 옅은 미소를 지으며 작게 머리를 끄덕였다.
“맞아. 역시 알고 있었네.”
“재작년에 흡수합병 이슈로 주가가 한번 크게 튀어 올랐던 회사잖아.”
뭔가를 떠올린 유석찬이 눈을 가늘게 뜨며 앞에 있는 우호근을 봤다.
“작전을 걸려는 거야?”
“그래.”
찻잔을 집어 입으로 가져가던 우호근은 어느새 커피가 미지근하게 식어 있자 그냥 내려놨다.
“중국에 지은 공장이 올해부터 본격 가동돼서 고부가제품인 데크메커니즘 대량 양산이 시작되고, 대규모 수출 계약을 맺어 영업실적이 크게 올라갈 거라는 이야기가 곧 여의도에 돌기 시작할 거야.”
“그게 다 사실이야?”
전건우가 묻자 우호근이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원래 증권가에서 떠도는 소문이라는 게 다 그런 거 아니겠어.”
“그렇지.”
주가를 띄우기 위해 꾸며낸 거짓말이라는 걸 단번에 알아챈 유석찬이 비슷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아아, 하긴 회사에서 공시를 낸 것도 아니고 말 그대로 소문이니깐.”
뒤늦게 눈치를 챈 전건우도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
우호근이 의자 등받이에 비스듬하게 몸을 기대앉은 채 말했다.
“거기다가 차명계좌를 돌려서 살짝 펌프질을 해주면 개미들이 알아서 달라붙어서 주가를 올려줄 거야.”
“그렇게 기껏 주가를 띄워 놨는데 대주주가 먼저 팔고 날라 버리면 우리도 물을 먹는 거잖아.”
날카로운 유석찬의 지적에 우호근이 느긋하게 대답했다.
“벌써 단도리를 다 쳐놨으니까 그건 걱정 안 해도 돼.”
그러자 벌써부터 떨어지는 돈을 챙길 생각에 전건우가 들뜬 얼굴로 물었다.
“주가는 얼마나 띄울 건데?”
“못해도 다섯 배는 먹어야 되지 않겠어.”
우호근이 손가락을 쫙 펼치는 걸 보고 전건우가 흐흐 웃으며 말했다.
“캬 대박이네. 하긴 기왕 하는 건데 그 정도는 먹어야지!”
설레발을 떠는 전건우와 달리 사채 시장 큰손의 아들답게 돈 관련해선 머리가 잘 돌아가는 유석찬이 차분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럼 우리가 준비해야 되는 총알은 얼마야?”
이게 제일 중요한 부분이었다.
우호근이 약간 가라앉은 음성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면서 입을 열었다.
“각자 10억씩, 이번 달 안까지 다 마련해야 돼.”
“그 정도는 가능할 것 같네. 넌 어때?”
먼저 대답한 유석찬이 고개를 돌려 전건우를 봤다.
“쳇, 너희들하고 달리 우리 꼰대는 집안 재산을 죽을 때 다 싸 들고 갈 생각인지 손에 꽉 쥐고 안 내놓는단 말이야.”
“그래서 못하겠다고?”
“야야 사람 말은 끝까지 들어.”
버럭 신경질을 낸 전건우가 머리를 벅벅 긁어댔다.
“어쩔 수 없지. 우리 여사님한테 아쉬운 소리를 할 수밖에.”
둘 다 작전에 끼어드는 게 확실해지자 우호근이 짐짓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알아서 잘 하겠지만 작업을 마무리할 때까지 이건 절대 비밀이야.”
“물론이지.”
“확실히 입을 닫고 있을 테니까 염려하지 마.”
유석찬에 이어 전건우도 한쪽 손으로 입에 자크를 채우는 시늉을 하며 장난스레 대꾸했다.
“흐흐흐, 이걸로 주머니를 두둑하게 채우면 한동안 꼰대 눈치는 안 봐도 되겠네.”
* * *
“이건 이대로 진행하도록 해요.”
“네. 알겠습니다.”
소파 상석에 자리한 석원은 서류철을 최호근 팀장한테 돌려주며 말했다.
“아. 그리고 다음 주부터 보름 정도 미국 출장을 갈 예정이니까. 그렇게 알고 보고할 일이 있으면 전화로 하도록 해요.”
“그러겠습니다.”
팀장 시절부터 미국에 장기 출장을 자주 갔었기에 최호근 팀장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그럼 오늘 회식에는 참석하시는 겁니까?”
서류철을 무릎 위에 올린 최호근 팀장이 슬쩍 눈치를 보며 묻자 석원이 아, 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 부서 전체 회식이 잡혀 있었죠.”
“예. 원래 화요일에 하려고 했는데 아시다시피 일본에서 대지진이 나는 바람에 오늘로 미뤘지 않습니까.”
지진은 일본에서 났지만 한국을 비롯한 전 세계 증시에 여파가 미쳐 크게 출렁였기에 한가롭게 회식이나 하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바쁘시면 회식은 다음으로 미룰까요?”
“아니에요. 전체 회식을 하는데 내가 빠지면 안 되죠. 회식 장소는 정했어요?”
“근처에 자주 가는 삼겹살 가게가 있어서 거기로 예약할 생각입니다.”
“청원 식당을 말하는 거예요?”
“어 알고 계십니까?”
거긴 근처 증권사 직원들이 저렴한 맛에 삽겹살과 소주를 먹으러 가는 곳이었다.
항상 스테이크에 와인을 곁들여 먹을 것 같은 석원과는 잘 어울리지 않는 이미지였기에 최호근 팀장이 놀란 얼굴로 묻자 석원이 가볍게 고개를 내저었다.
“직접 가보진 않았는데 직원들이 종종 들르는 곳이라고 해서 이름만 들어봤죠.”
“그렇군요. 어쨌든 거기가 단체석도 많고 익숙해서 회식 장소로는 괜찮다고 생각했습니다만.”
“흠.”
석원은 한쪽 손으로 턱을 매만지며 잠시 생각했다.
“매번 가는 삼겹살 가게 말고 이번에는 다른 곳에서 회식을 하는 건 어때요?”
“예?”
최호근 팀장이 의아한 얼굴로 되물었다.
“장소는 내가 예약해 놓을 테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요.”
“아, 예. 알겠습니다.”
최호근 팀장은 얼떨결에 대답하면서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그날 오후.
장이 마감된 후에 서둘러 업무를 정리하고 회식 장소로 온 트레이딩 부서 직원들은 낯선 건물 앞에 서서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회식 장소가 여기 맞지?”
송종근 과장이 팔꿈치로 최호근 팀장을 툭 치며 말했다.
“어. 미스 나가 가르쳐 준 주소는 여기가 맞아.”
안주머니에서 주소와 함께 약도가 그려진 쪽지를 꺼낸 최호근 팀장이 보라는 듯이 흔들어댔다.
“봐봐, 맞지?”
“맞긴 한데…….아무리 봐도 회식을 할 만한 데가 없잖아.”
주위에서 이야기를 듣던 다른 직원들도 같이 머리를 주억거렸다.
그때 정환엽 대리가 한쪽 팔을 들어 건물 앞에 세워진 커다란 볼링핀 모양의 조형물을 가리켰다.
“여기 볼링장인데요? 설마 여기서 회식을 하는 건 아니겠죠.”
“미쳤냐. 저기서 무슨 회식을 한다는 거야.”
송종근 과장이 눈을 흘기자 정환엽 대리도 머쓱한 듯 물러섰다.
“아니 그래도 들어갈 데가 볼링장밖에 없는데…….”
그렇게 직원들이 길 잃은 양떼처럼 어디로 가야될지 몰라 서성이고 있을 때,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다들 안 들어가고 뭐하고 있어요?”
고개를 돌리자 석원이 비서인 나성미와 함께 걸어오고 있었다.
그걸 본 직원들이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가 조금씩 눈치를 보며 슬슬 자세를 바로 했다.
“날도 추운데 어서들 들어갑시다.”
“저, 여긴 볼링장인데 예약하신 가게가 어디인지…….”
최호근 팀장이 조심스럽게 나서서 물었다.
뒤에 있는 다른 직원들도 영문을 몰라하는 표정으로 석원만 바라보며 서 있었다.
“여기가 맞아요.”
“네?”
그러자 최호근 팀장을 비롯한 직원들이 다들 눈을 크게 뜨고 당황해했다.
“보, 볼링장을 예약하셨다고요?”
혹시 잘못 들었나 싶어 송종근 과장이 되물었지만 석원의 대답은 똑같았다.
“그래요. 술만 마시는 것보단 이렇게 함께 볼링도 치면서 직원들끼리 단합을 다지는 것도 좋지 않을까 해서요.”
그러자 석원과 눈이 마주친 송종근 과장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 네. 맞습니다.”
실수가 아니라 정말로 회식 장소로 볼링장을 예약했다는 걸 알아차린 직원들은 서로를 돌아보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볼링은 오랜만에 치는데 실력이 나오려나 모르겠네요.”
“다 같이 운동을 하는 것도 괜찮죠.”
“그래요.”
석원은 그런 일행들을 쳐다보고는 앞장서서 걸음을 옮겼다.
“자, 그럼 들어가죠.”
그러자 송종근 과장이 직원들 틈에 섞여서 뒤를 따르다가 최호근 팀장의 옆에 붙어 속삭였다.
“볼링장에서 회식을 하다니 이런 경우는 또 처음 겪어보네.”
“그러게.”
간만의 회식에 잔뜩 기대하고 있던 정환엽 대리가 아쉬움 가득한 얼굴로 끼어들었다.
“미국 유학을 다녀오셨다니 아메리칸 스타일인가 보죠.”
“그럴듯해.”
“미국 사람들이 볼링을 좋아해? 그런 소린 처음 듣는데.”
“요즘 유행인가보지.”
“그런가…….”
팀장과 과장이 번갈아 가면서 고개를 끄덕거리고 있는 가운데 정환엽 대리가 축 처져선 한숨을 내쉬었다.
“본부장님이 회식 장소를 직접 잡으셨다고 하길래 지난번처럼 한우 맛을 보나 했는데. 난데없이 땀이나 빼게 생겼네요.”
그러자 최호근 팀장이 정환엽 대리를 냅다 째려보면서 핀잔을 주었다.
“볼링을 하는데 뭔 땀이 난다고 그래.”
“무거운 볼링공이 레일을 정확하게 타고 가도록 던지는 게 얼마나 힘들고 심력을 소비하는 건데요.”
“누가 보면 볼링 국가 대표인 줄 알겠다 이 자식아.”
최호근 팀장이 정환엽 대리의 등짝을 손바닥으로 철썩 내리쳤다.
“헛소리하지 말고 어서 들어가기나 해.”
“아오. 알았다고요.”
한우가 아니라서 잔뜩 실망한 정환엽 대리는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 안으로 사라졌다.
처음엔 다른 직원들도 약간 어색해했지만 막상 각 팀별로 편을 나눠서 게임을 시작하자 어느새 승부욕이 발동했는지.
다들 집중한 얼굴로 볼을 던지고 응원을 하면서 볼링을 즐겼다.
쿵! 데구르르르르. 꽝! 와르르륵!
정환엽 대리가 엉성한 자세로 던진 공이 일렬로 늘어서 있던 볼링핀들을 한 번에 다 쓰러뜨리며 스트라이크를 기록했다.
그러자 자리에 앉아 있던 4팀 팀원들이 일제히 양팔을 위로 번쩍 들어 올리며 환호성을 내질렀다.
“나이스!”
“바로 그거지!”
“정 대리님 멋져요!”
기세등등하게 돌아선 정환엽 대리가 팀원들을 향해 손가락으로 브이자를 그렸다.
“하하 다들 봤어? 이 정도는 껌이지!”
반면 상대팀인 송종근 과장은 모래 씹은 듯한 표정을 했다.
“저렇게 던지는데 스트라이크가 나오냐. 이거 사기 아냐?”
“이게 뭐예요. 내리 두 판을 다 졌어요.”
1팀 여사원인 신명희가 잔뜩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거기다 1팀 팀장인 김정식도 자존심이 상한 얼굴로 송종근 과장을 타박했다.
“어이 송 과장! 대학 다닐 때 볼링 좀 쳤다며. 근데 실력이 왜 이래!”
“그게…… 볼링을 안 친지 몇 년이나 돼서 예전 실력이 안 나오는 것 같습니다.”
“아까는 자기가 나서기만 하면 스트라이크가 뻥뻥 터질 것처럼 말하더니. 에잇, 정말 실망이야.”
“죄송합니다.”
김정식 팀장이 두 번이나 공을 도랑에 빠뜨리지만 않았어도 내리 두 판을 지진 않았을 거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억지로 꾹 눌러 참았다.
반대로 연달아 스트라이크를 쳐서 어깨가 한껏 올라간 정환엽 대리가 수건으로 볼링공을 닦고 있는 석원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런데 여긴 시설은 좋은데 장사는 잘 안 되나 봅니다.”
“그러게요. 손님이 저희들 밖에 없네요.”
홍재희가 그 말을 듣고 새삼스럽게 주변을 둘러봤다.
“오늘 하루 전세를 내서 그런 거예요.”
석원이 볼링공에 손가락을 끼워 넣고 들어 올리면서 대수롭지 않은 말투로 대꾸했다.
“여길 전부 빌리셨다고요?”
“그래요.”
석원은 짧게 대답해주고는 공을 던지기 위해 앞으로 걸어나갔다.
“와. 역시 재벌 3세 클라스네.”
“그러게요. 설마 볼링장을 다 전세 내셨을 줄이야.”
덩치처럼 묵묵한 플레이로 꾸준하게 점수를 내고 있던 유석현이 덩달아 맞장구를 쳤다.
놀란 얼굴로 머리를 끄덕이는 홍재희처럼 다른 직원들 역시 벌린 입을 다물 줄 몰라했다.
던진 볼링공이 아깝게 핀을 다 쓰러뜨리지 못하자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돌아온 석원이 직원들을 향해 말했다.
“그나저나 다들 출출하지 않아요?”
그러자 정환엽 대리가 번쩍 손을 들고 외쳤다.
“배고픕니다. 본부장님! 안 그래도 저녁도 안 먹고 운동을 했더니 허기가 져서 죽을 것 같습니다!”
“하하. 마침 음식이 도착했으니까 먹으면서 하죠.”
식당으로 자리를 옮기는 게 아니라 음식이 왔다는 말에 다들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석원이 쳐다보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하얀 유니폼을 입은 일단의 사람들이 출입구로 카트를 줄줄이 밀면서 들어오더니 뒤편 공간에 테이블을 깔고 음식을 세팅하기 시작했다.
“설마 저 사람들도 본부장님이 부르신 겁니까?”
눈이 동그래진 정환엽 대리가 물었다.
“회식인데 배부르게 먹어야 되지 않겠어요. 워커힐 호텔 음식이 맛이 괜찮아서 출장 뷔페를 시켰어요.”
“오오!”
정환엽 대리가 자기도 모르게 엄지손가락을 척 치켜들었고 여직원들은 호텔 출장뷔페라는 말에 꺅 소리를 내며 환호했다.
“역시 본부장님이세요!”
다들 기뻐하는 모습에 석원이 살짝 미소를 지었다.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오늘 하루는 여길 다 전세 냈으니까 마음껏 먹고 마시도록 해요.”
“본부장님! 회식이니까 물론 술도 있는 거겠죠?”
“당연하죠. 소주하고 맥주는 물론이고 시바스 리갈도 한 박스 가져오라고 했으니까 양껏 마셔요.”
그러자 정환엽 대리를 비롯한 남자 직원들의 눈이 일제히 번쩍 빛났다.
“헉 시바스 리갈을 한 박스나!”
“오늘 소주 말고 양주 먹는 날이구나!”
“우오오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