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lden Spoon Investment Portfolio RAW novel - Chapter (124)
금수저 투자백서 124화(124/231)
124. 아무거나 덥석 입안에 넣으면 탈이 나는 법이지
자정이 훌쩍 넘은 늦은 시간이었지만 도쿄 중심부에 위치한 일본 은행 국제부 사무실은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주요국 대비 엔화 환율을 보여주는 커다란 전광판이 한쪽 벽에 설치된 가운데 십여 명이 넘는 직원들이 전화를 받거나 컴퓨터 앞에 앉아 바쁘게 일하고 있었다.
보름 넘게 이어지고 있는 비상근무에 다들 초췌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손을 멈추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대지진 이후 엔화가 가파르게 치솟으며 만들어진 엔고 상황이 해소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하루에도 2~3엔씩 폭등하면서 더욱더 심해지고 있었기에 한시라도 긴장을 풀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 가운데 국제부 조사과 과장인 야마다 신노스케가 컴퓨터 모니터 두 개를 붙인 책상에 앉아 심각한 얼굴로 달러-엔 환율을 지켜봤다.
중키에 살집이 있는 체격인 야마다 과장은 벌써 며칠째 집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사무실에서 자리를 지키는 중이었다.
면도를 못 한 얼굴엔 턱수염이 거뭇거뭇 자라 있는 데다 붉게 충혈된 눈에는 피곤함이 가득했다.
한 손엔 반쯤 타들어 간 담배가 들려 있었는데 얼마나 피워댄 건지 책상 위에 놓인 재떨이에 담배꽁초가 흘러넘칠 정도였다.
야마다 과장은 담배를 쥔 손으로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모니터를 노려봤다.
모니터에 띄워진 달러-엔 환율은 오늘도 꺾이지 않고 강세를 보이고 있었다.
내각과 일본 은행이 첫 번째 방어선으로 그어났던 95엔은 이미 깨진 지 오래였다.
그러자 급히 두 번째로 설정한 저지선인 90엔대 마저 며칠 버티지 못하고 언제 뚫려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아슬아슬한 상태였다.
“젠장.”
초 단위로 정신없이 오르내리는 환율을 보며 야마다 과장은 나직이 욕설을 내뱉었다.
그러고는 갑갑한지 한 손을 들어 넥타이 매듭을 느슨하게 풀었다.
이렇게 상황이 악화될 때까지 내각과 일본 은행도 그냥 손을 놓고 가만히 지켜보기만 하진 않았다.
환율이 강하게 튀어 오르는 순간마다 아까운 외환 보유고를 헐어서 시장에 달러를 매도하고 엔을 사들이며 적극적으로 환율을 방어했다.
하지만 결과는 보다시피 시원치 않았다.
아니 오히려 환율 방어를 하면 할수록 엔고가 수그러들지 않고 더욱 상승 압력이 거세지는 느낌이었다.
“이게 다 빌어먹을 하이에나 떼 같은 헤지펀드 놈들 때문이야.”
고베 대지진이 발생하자 국외로 나가 있던 자금들이 다시 일본으로 돌아오면서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엔화 강세 현상이 벌어졌다.
그러자 기회를 포착한 헤지펀드들이 야마다 과장의 말대로 하이에나 떼처럼 달려들어 무더기로 달러를 팔고 엔화를 사들여 엔화 초강세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이렇게 일본을 공격하는 헤지펀드들의 선봉에는 영란은행을 굴복시켰던 조지 해밀턴과 퀀텀 펀드가 있었다.
이런 공격에 상대가 뭘 노리는지 알면서도 일본 은행은 눈물을 머금고 가지고 있는 달러를 헐값에 팔아 헤지펀드들의 주머니를 채워 줄 수밖에 없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일본의 외환보유고가 한여름 뙤약볕 아래 놔둔 아이스크림처럼 조금씩 녹아내리고 있었다.
“하아.”
너무나도 무력한 상황에 한숨을 내쉰 야마다 과장은 거의 다 타들어 간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서 껐다.
그러고는 책상 위에 놔둔 담뱃갑을 찾아 새로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물고 불을 붙이려 할 때 누군가 다가오며 말했다.
“야마다, 상황이 좀 어떤가?”
고개를 돌려 쳐다보자 국제부 국장인 마츠야마 나오였다.
야마다 과장과 달리 마츠야마 국장은 깡마른 체격에 금테 안경을 쓰고 날카로운 인상을 풍기는 사내였다.
황급히 입에서 담배를 빼고 일어난 야마다 과장은 책상 옆에 선 마츠야마 국장을 보며 대답했다.
“좋지 않습니다.”
역시나 얼굴에 피곤함이 가득한 마츠야마 국장이 조금 쉰 목소리로 물었다.
“지금 환율이 얼마지?”
“90.8엔입니다.”
대답을 들은 마츠야마 국장이 눈썹을 찌푸렸다.
“오후까지만 해도 91엔대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그새 또 올랐군.”
은근히 질책처럼 들리는 말에 야마다 과장은 억울한 기분을 느꼈다.
자신뿐만 아니라 부하직원들 모두 며칠째 퇴근도 제대로 못 하고 밤새 환율 방어에 매달리고 있었기에 그나마 90엔대를 지켜내고 있는 거였다.
그런데 격려는 못 해줄망정 오히려 나무라고 있었으니 서운하고 화가 날 수밖에 없었다.
야마다 과장은 한순간 일그러질뻔한 표정을 재빨리 감추고 말했다.
“최대한 막고 있습니다만 퀀텀 펀드를 비롯한 헤지펀드들의 공격이 워낙 거세다 보니까 뒤로 밀리고 말았습니다. 죄송합니다.”
머리를 숙이는 야마다 과장을 보며 마츠야마 국장이 짜증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고작 헤지펀드들의 장난질에 우리 일본 은행이 힘없이 휘둘리다니. 정말 한심스럽구만.”
마츠야마 국장의 한숨 소리에 이를 꽉 깨문 야마다 과장은 머리를 바로 하며 대답했다.
“알고 계시겠지만 이번 사태의 배후에는 퀀텀펀드와 조지 해밀턴이 있습니다. 콧대 높은 영란은행을 굴복시켜 항복을 받아낸 인물인 만큼 결코 만만하게 생각해서는 안 될 겁니다.”
그러고는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는 마츠야마 국장을 향해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거기다 다른 헤지펀드들까지 깃발을 든 조지 헤밀턴을 따라 엔을 공격하고 있어 싸움이 더욱 쉽지 않습니다.”
이야기를 들은 마츠야마 국장이 마뜩잖은 기색으로 혀를 찼다.
“그래서 자넨 이 싸움에서 우리가 질 거라는 건가?”
“아, 아닙니다!”
야마다 과장이 얼른 머리를 가로저으며 대답했으나 이미 마츠야마 국장의 눈꼬리는 한껏 치켜올라간 채였다.
“놈이 영란은행으로부터 항복을 받아낸 건 나도 알고 있어. 그걸로 마치 대단한 업적이라도 세운 것처럼 떠들어대지만 결국에는 비열한 방법으로 약점을 공격해 영국한테서 돈을 뜯어낸 투기꾼에 불과할 뿐이야!”
마츠야마 국장은 신경질적으로 목소리를 높이면서 조지 헤밀턴을 서슴없이 폄하했다.
1명을 죽이면 살인자지만 100명을 죽이면 영웅이라는 말처럼, 설사 투기를 했더라도 영란은행을 무릎 꿇렸다면 그건 분명 엄청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야마다 과장은 생각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고 가만히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우린 일본이야. 이빨 빠진 늙은 사자로 전락한 영국하곤 다르다고.”
“…….”
“제깟 놈들이 아무리 레버리지를 끌어다 쓴다고 해도 돈이 화수분처럼 나오지 않는 이상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지.”
마츠야마 국장이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반면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외환을 가진 국가가 바로 우리 일본이네. 그런데 겁도 없이 이렇게 덤벼들다니 영란은행을 한 번 이겼다고 오만방자해진 것 같은데 상대를 잘못 골랐지.”
이내 마츠야마 국장은 가만히 듣고 있는 야마다 국장을 손가락 끝으로 가리켰다.
“놈들이 90엔을 깨뜨리려고 하면 즉시 개입해서 저지선을 지켜내도록 해. 이건 총재님이 직접 내리신 지시야.”
“……알겠습니다.”
지난 며칠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이야기였기에 야마다 국장은 마지못해 대답했다.
‘외환 보유고가 많다지만 환율을 방어하는데 그걸 다 써 버릴 수는 없는 거잖아.’
멕시코처럼 국가 부도 사태에 몰리지 않으려면 일정액 이상은 환율 방어에 사용할 수 없었다.
그건 곧 헤지펀드들과 마찬가지로 일본 은행 역시 쓸수 있는 총알에 한계가 있다는 뜻이었다.
‘조지 해밀턴과 헤지펀드들도 그걸 아니까 이렇게 공격을 해오는 걸 테지.’
야마다 과장을 더욱 두렵게 만드는 건 환율이 올라갈수록 조지 해밀턴에 동조해 엔화 공격에 가담하는 세력들이 늘어가고 있다는 거였다.
그로 인해 일본 은행의 환율 방어는 시간이 갈수록 힘들어지고 있었다.
이처럼 마음이 복잡할 때 직원 한 명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다급한 얼굴로 달려왔다.
“런던과 뉴욕 외환시장에서 동시에 대량의 엔 매수 주문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갑작스런 소식에 야마다 과장과 마츠야마 국장이 동시에 화들짝 놀라 눈을 크게 부릅떴다.
“규모가 얼마나 돼?”
먼저 정신을 차린 야마다 국장이 재빨리 묻자 직원이 곧바로 대답했다.
“양쪽을 합쳐 16억 달러가 넘습니다.”
이야기를 들으며 야마다 과장이 책상에 설치된 컴퓨터로 현재 환율을 확인했다.
그러자 대규모로 쏟아진 매수 주문에 달러-엔 환율이 치솟아 90엔이 깨지기 직전인 것을 볼 수 있었다.
옆에 서서 모니터에 띄워진 환율을 확인한 마츠야마 국장은 단숨에 굳은 표정으로 야마다 국장을 다그쳤다.
“당장 손을 쓰지 않고 뭘 하나!”
그러자 심각한 얼굴을 한 야마다 과장이 책상에서 뛰쳐 나와 큰 소리로 직원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90엔이 무너지지 않도록 막아야 돼! 즉시 달러를 매도해서 엔을 거둬들여!”
“예!”
직원들은 일제히 긴장된 모습으로 전화 수화기를 집어 들거나 컴퓨터 키보드를 맹렬하게 두들기며 대응에 나섰다.
그걸 본 야마다 과장은 다시 제 자리로 돌아와 모니터에 띄워둔 달러-엔 환율 변화를 주시했다.
[USD/JPY : 90.2] [USD/JPY : 90.1].
.
.
[USD/JPY : 90.2] [USD/JPY : 90.4]주먹을 꽉 움켜쥔 채 마른 침을 삼키며 90엔이 깨지기 일보 직전인 환율을 노려보던 야마다 과장은 바로 코앞에서 상승세가 꺾여 떨어지자 참았던 숨을 내뱉었다.
“막아낸 건가?”
옆에 있던 마츠야마 국장이 다급히 물었다.
“일단은 그런 것 같습니다만 언제 또 치고 들어올지 모르니 아직 안심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때도 이번처럼 공격을 막아낼 수 있을지는 몰랐다.
야마다 과장은 점점 자신감이 없어지는 걸 느끼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
* * *
아직 이른 아침이었지만 서울 시내는 출근하는 차들로 도로가 꽉 막힌 채 답답한 교통 체증을 이루고 있었다.
느릿느릿 거북이처럼 움직이는 차량들 가운데 석원이 탄 BMW 승용차도 섞여 있었다.
조끼가 있는 쓰리피스 네이비 정장을 갖춰 입은 석원은 운전석에 앉은 채 한 손으로 휴대폰을 들고 뉴욕에 있는 랜든과 통화를 하는 중이었다.
[밤새 외환시장에서 일본 은행과 헤지펀드들의 싸움이 아주 치열하게 벌어졌습니다.]“나도 봤어요. 결국 달러당 90엔이 깨졌더군요.”
[예. 일본 은행이 10억 달러가 넘는 달러를 내다 팔며 서로 밀고 밀리는 힘겨루기를 하다가 결국 90엔이 돌파되고 말았습니다. 과정을 전부 다 지켜보는데 얼마나 흥미진진하던지 슈퍼볼 결승전 저리가라 할 정도로 긴장감 있고 스릴이 넘치더군요.]랜든의 이야기에 그는 피식 미소를 지었다.
구경하는 건 재밌을지 몰라도 밤새 혈전을 치른 일본 은행과 헤지펀드들은 순간순간이 피를 말리는 시간이었을 터였다.
물론 이쪽도 엔화 롱에 거액을 베팅한 상태였기에 환율 움직임에 민감했다.
하지만 평균 매수단가가 104엔인 만큼 상황을 조금은 여유롭게 지켜볼 수 있었다.
“2차 저지선이었던 90엔이 깨져 버렸으니 일본 은행이 크게 당황하고 있겠네요.”
[그럴 겁니다. 더군다나 지난 보름 동안 100억 달러가 넘는 외환 보유고를 쏟아부었는데도 이런 결과가 나왔으니. 충격이 상당할 겁니다.]아마 모르긴 해도 지금쯤 일본 은행뿐만 아니라 내각 전체가 비상이 걸려 급히 대책을 논의하고 있을 터였다.
‘초반에 전력을 다해 환율이 뛰는 걸 잡았다면 모를까. 이미 분위기가 넘어갔는데 이걸 다시 뒤집기는 쉽지 않지.’
더군다나 상대는 약점을 보인 사냥감을 절대 놓치지 않는 헤지펀드들이었다.
“만만치 않은 상대로 여겨졌던 일본 은행이 밀리는 모습을 보였으니. 조지 해밀턴과 헤지펀드들의 기세가 더욱 살아났겠네요.”
[그렇지 않아도 어제 벌인 싸움의 결과를 보고 월가에서는 검은 수요일이 다시 재현되는 것 아니냐는 기대감이 퍼지고 있습니다.]검은 수요일(Black Wednesday)은 조지 해밀턴이 다른 헤지펀드들과 영국 파운드화를 공격해 영란은행의 무릎을 꿇리며 엄청난 수익을 거둔 사건을 말했다.
“그런 말이 나왔다는 건 곧 더 많은 헤지펀드와 세력들이 엔화 공격에 가담할 거라는 뜻이네요.”
[먹음직스러운 만찬이 차려져 있는 걸 알게 됐는데 그걸 그냥 지나칠 월가가 아니지 않습니까. 오늘을 기점으로 일본 은행에 대한 공격이 더욱 거세질 겁니다.]석원 역시 같은 생각이었기에 작게 머리를 끄덕였다.
“지난번에 내가 말한 옵션은 설계가 다 끝났어요?”
[안 그래도 보고를 드리려고 했는데 나중에 문제가 될 소지가 없는지 법률 검토까지 모두 마무리 지었습니다.]“약정환율은 90엔으로 했겠죠?”
[네. 변동 구간도 말씀하신 대로 78엔에서 100엔까지 잡았습니다.]석원은 이야기를 듣고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수고했어요.”
[그런데 변동 구간을 너무 넓게 설정한 것 같아 조금 걱정스럽습니다.]랜든의 조심스럽게 우려를 나타내자 석원이 알겠다는 듯 물었다.
“우리가 손해를 볼 것 같아서 그래요?”
[환율이 100엔을 넘기지 않고 변동 구간 안에서 움직인다면 저희한테는 이득 될 것이 없지 않습니까.]“랜든이 이렇게 걱정하는 걸 보니 상품이 제대로 만들어진 것 같네요.”
석원은 오히려 싱글거리며 미소를 지었다.
“누가 봐도 자신들한테 유리하게 보여야 조지 해밀턴이 판 녹아웃 옵션으로 한번 크게 데인 일본 기업들이 흥미를 보이지 않겠어요.”
[그건 그렇습니다만…….]“계약 기간 안에 틀림없이 녹인(Knock-In) 옵션이 발동하게 될 테니 날 믿어요.”
석원의 자신 있는 목소리에 랜든도 더 이상 묻지 않고 수긍했다.
[그렇게 말씀하시니 믿는 수밖에 없군요. 알겠습니다.]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한 앞차를 보며 석원이 말했다.
“엔화가 강세로 가며 환율 변동이 심해지면 우리가 만든 상품에 관심을 가지는 곳들이 생겨날 테니까. 준비가 마무리되면 바로 제안서를 뿌리도록 해요.”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통화를 끝내고 휴대폰을 내려놓은 석원은 입가에 짙은 미소를 그렸다.
“먹음직스러워 보인다고 아무거나 덥석 입안에 넣으면 탈이 나는 법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