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lden Spoon Investment Portfolio RAW novel - Chapter (128)
금수저 투자백서 128화(128/231)
128. 땅콩을 좋아하는 여자는 별로예요.
서울 워커힐 호텔 컨벤션 센터 앞에 BMW 승용차 한 대가 미끄러지듯 다가와 멈춰 섰다.
네이비색 슈트를 입은 석원은 재빨리 다가와 운전석 문을 열어주는 호텔 직원에게 팁을 건네면서 차를 맡겼다.
“감사합니다.”
호텔 직원의 인사를 받으며 석원이 고개를 들어 위를 올려다봤다.
그러자 꾸불거리는 금발 머리에 붉은 입술 그리고 짙은 녹색 눈의 마릴린 먼로 판화와 함께 앤디 워홀 특별 전시전이라고 적힌 대형 걸개 현수막이 컨벤션 센터 입구 벽면을 가득 채운 모습이 보였다.
“앤디 워홀의 샷 세이지 블루 마릴린을 직접 볼 수 있는 기회는 흔하지 않지.”
어머니인 조덕례 여사가 급한 일이 생겨 못 가게 된 전시회 개막행사에 대신 참석해달라고 했을 때는 심드렁했지만 앤디 워홀 전시회라는 말을 듣고 마음이 바뀌었다.
미술에 대해서는 잘 몰랐지만 그래도 팝아트의 거장인 앤디 워홀만은 석원도 알고 작품을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회귀 전에는 너무 비싸서 진품을 가질 수는 없었지만 모조품을 집에 걸어놨을 정도로 마음에 들어했다.
그런 앤디 워홀의 작품 가운데서도 가장 좋아하는 마릴린 시리즈가 전시된다고 하는데 안 갈 수가 없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걸음을 옮겨 입구로 향하자 깔끔하게 정장을 갖춰 입은 안내원이 앞에 서 있다가 물었다.
“실례지만 초대장을 보여주시겠습니까?”
오늘은 귀빈들을 초청해 먼저 전시된 작품들을 보여주는 VIP 행사였기에 초대장이 없으면 입장이 불가능했다.
석원이 안주머니에서 초대장을 내밀자 안내원이 확인하곤 정중하게 다시 돌려줬다.
“들어가십시오.”
안내원을 지나쳐 전시장 내부로 들어가자 넓은 공간에 무대가 하나 설치되어 있고 앞에 의자들이 줄을 맞춰 쫙 깔려 있었다.
초대받은 귀빈은 주로 여자들이 많았는데 이미 의자의 절반 정도는 차 있는 상태였다.
석원은 초대장에 적힌 번호를 확인하곤 둘째 줄 가운데에 있는 지정석으로 가서 앉았다.
손목에 찬 시계를 보자 아직 시작하려면 10분 정도 여유가 있는 상태였다.
입구에서 받은 팸플릿을 펼쳐 보면서 행사 시작을 기다리고 있을 때 누군가 비어 있던 옆자리에 앉는 기척이 느껴졌다.
진한 향수 냄새에 무심코 고개를 돌려 옆을 쳐다보자 검은 목 폴라티에 롱스커트를 입고 에르메스 버킨백을 든 젊은 여성이 앉아 있었다.
전체적으로 도도한 인상의 미인이었으나 석원은 속으로 고개를 갸웃거리기만 했다.
‘처음보는 얼굴인데 이상하게 낯이 익네. 어디서 봤더라?’
그때 여자가 고개를 돌리면서 시선이 딱 마주쳤다.
괜한 오해를 받기 싫었던 석원이 얼른 무대 쪽으로 눈을 바로 하는데 의외로 여자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
“박석원 씨죠. 반가워요.”
“……죄송하지만 잘 기억이 안 나는데…… 절 아시나요?”
“어머. 그래도 나름 어디 가서 빠지는 얼굴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기억에 없다니 서운하네요.”
“정말 미안합니다.”
석원이 사과하자 여자가 한쪽 손으로 입을 가리며 작게 웃었다.
“죄송해요. 반응이 재밌어서 그냥 장난친 거예요.”
“네?”
“오늘 서로 처음 만나는 건데 모르는 게 당연하죠.”
아직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석원이 미간을 슬며시 좁히자 여자가 곧바로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정식으로 소개할게요. 고아현이라고 해요. 참고로 호진그룹 고갑진 회장님이 제 아버지죠.”
그러고는 얼떨떨한 표정을 한 석원을 보며 눈웃음을 지었다.
“그쪽은 대흥그룹 둘째 아드님이시죠?”
그러자 어떻게 된 일인지 대충 상황을 눈치를 챈 석원이 작게 헛웃음을 내뱉었다.
“이거 혹시 맞선을 보는 자리인 건가요?”
“맞선은 너무 고리타분해 보이니까 부모님들끼리 만드신 소개팅이라고 하죠.”
고아현이 긴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며 말했다.
“그렇군요.”
어쩐지 뜬금없이 전시회에 대신 가라고 하더니 다른 꿍꿍이가 있었던 거였다.
그리고 석원은 왜 고아현의 얼굴이 낯익었는지도 바로 알 수 있었다.
“혹시 고 회장님 장녀신가요?”
“맞아요. 지금은 코넬 대에서 호텔 경영학과를 다니고 있는데 방학 중이라 잠깐 한국에 들어온 거예요. 석원 씨는 하버드를 졸업하셨다면서요?”
“아, 네.”
석원은 예의 바르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속으론 끄으응 하고 앓는 소리를 내뱉었다.
‘하필이면 왜 많고 많은 여자들 중에서 이런 폭탄을 골랐냐고.’
고아현이 미래에 터트릴 대형 사고를 아는 입장에선 절대 엮이기 싫은 상대였다.
마음 같아선 그냥 ‘제 이상형이 아닌 것 같군요. 죄송합니다.’ 하고 당장에라도 자리를 뜨고 싶었지만 만남을 주선한 어머니의 체면도 있는 데다 호진 그룹과의 관계를 생각해서 꾹 눌러 참았다.
‘그래. 오늘 하루만 두 눈 꾹 감고 매너있게 행동하는 거야.’
일단 집에 보내놓은 뒤 ‘좋은 분이지만 저랑은 인연이 아닌 것 같다’는 식으로 거절하면 되는 일이었다.
석원이 속으로 굳게 결심하는 동안 고아현은 옆에서 계속 친근하게 말을 붙여왔다.
“무려 하버드 수석 졸업이라고 들었는데 대단하네요. 충분히 자랑할 만한 일인데 아무렇지도 않게 넘기시는 걸 보면 참 겸손하신 것 같아요.”
“하하…….”
석원이 불편한 대화에 힘들어할 때 다행스럽게도 전시회 개막식이 시작되면서 자연스럽게 고아현의 입도 다물어졌다.
내심 한숨을 내쉰 석원은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으로 고아현의 옆얼굴을 힐끔 쳐다봤다.
‘왜 이렇게 적극적인 거야. 설마 내가 마음에 든 건 아니겠지?’
문득 고아현과 팔짱을 끼고 결혼식장에 서 있는 모습을 떠올린 석원이 등 뒤로 식은땀을 흘리며 머리를 절레 흔들었다.
“미친. 생각만 해도 끔찍하네.”
“뭐라고 하셨어요?”
“아, 아닙니다.”
석원은 재빨리 개막식에 집중하는 것처럼 무대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잘생긴 얼굴로 태어난 것도 고생이구나.’
하긴 얼굴 좋지, 몸 좋지, 거기다 배경까지 든든하니 여자들 입장에선 일등 신랑감일 터였다.
석원은 회귀한 이후 처음으로 잘생긴 얼굴과 남자답게 단단한 근육이 자리한 몸으로 여자들을 홀리는 자신의 외모를 한탄했다.
그러는 사이 행사를 주관하는 ST그룹 문병권 회장의 부인인 노선화 워커힐 미술관 관장이 무대로 올라와 인사말과 함께 10분 정도 전시회 취지와 작품들에 대한 설명을 간략하게 전했다.
“오늘 여기 모여주신 분들에게 감사하다는 말씀을 전합니다. 이번 앤디 워홀 전시회는 대중 미술과 순수 예술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팝아트라는 장르를 개척한 위대한 거장의 발자취를 여러분께 선 보이고자…….”
잠시 뒤 잔잔한 클래식 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전시장 안으로 자리를 옮긴 귀빈들은 미술관 큐레이터의 설명을 들으며 전시된 앤디 워홀의 작품들을 하나씩 감상했다.
석원 역시 한 손에 팸플릿을 들고 고아현과 함께 작품들을 둘러봤다.
“보고 계신 샷 세이지 블루 마릴린은 당시 섹시 심볼이었던 마릴린 먼로가 숨진 지 2년이 되던 해인 1964년에 앤드 워홀이 제작한 ‘샷 마릴린’ 시리즈 가운데 대표적인 작품입니다. 1953년에 개봉한 영화 나이아가라의 먼로 홍보 사진을 실크스크린을 사용해 찍어낸 작품으로 먼저 얼굴을 흑백으로 찍어낸 뒤에 피부는 핑크, 머리카락은 노랑 등 여러 색을 겹쳐 찍어서 완성됐습니다.”
반원 형태로 둘러서서 벽에 걸린 작품을 감상하고 있는 귀빈들을 보며 큐레이터가 말을 이어갔다.
“이미 알고 계신 분들도 많으시겠지만 작품에 ‘샷 마릴린’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연유와 얽힌 유명한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큐레이터가 하얀 장갑을 낀 손으로 액자에 들어있는 작품을 가리켰다.
“이 작품은 이름 그대로 총에 맞을 뻔한 적이 있습니다. 각각 다른 색으로 작가가 먼로 작품 다섯 점을 완성했을 때 행위예술가였던 도로시 포드버가 작업실로 찾아와 먼로의 초상화 작품들을 겹쳐 세워 놓고는 권총을 쏴 버린 거지요.”
“어머.”
“어떻게 그런 일이…….”
에피소드를 처음 듣는 귀빈들이 놀란 표정을 짓는 가운데 큐레이터가 미소 띤 얼굴로 설명을 마저 했다.
“당시 여기 있는 샷 세이지 블루 마릴린을 비롯한 세 점은 다행스럽게도 총탄을 피했지만 안타깝게도 관통당했다가 수리한 두 점을 포함해 ‘샷 마릴린’ 시리즈라 불리고 있습니다.”
한 손에 팸플릿을 든 석원이 앞에 있는 작품을 바라보면서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포드버가 ‘쏴도 되느냐(Can I shoot you)’고 물었을 때 앤디 워홀은 사진을 찍어도 되냐고 묻는 줄 알고 그러라고 했는데 포드버가 권총을 꺼내 들고 그림을 쏴(shoot) 버렸다고 하죠.”
“그림에 대해 잘 아시나 봐요.”
고아현이 눈을 반짝이며 묻자 석원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건 아니고 앤디 워홀 작품을 좋아하다 보니 알게 된 이야기죠.”
작품에 심취해 있던 석원은 호감 가득한 고아현의 눈빛에 얼른 고개를 돌렸다.
‘정신 차리자 박석원! 까딱 잘못하면 지뢰를 밟는 거라고!’
물론 속으로 아우성을 치든 말든 겉으로는 최대한 예의를 갖춰 대했다.
“자, 그럼 다음 작품을 보러 갈까요?”
그렇게 전시회 관람을 하고 워커힐 호텔 레스토랑에서 식사까지 함께한 석원은 저녁이 되어서야 고아현과 헤어져 집으로 돌아왔다.
물론 헤어질 때 애프터 신청 같은 건 하지 않았다.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한 에스코트를 선보이면서도 이성적 호감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최대한 어필하느라 괴로운 시간이었다.
‘이렇게 했으면 마음이 없다는 걸 눈치챘겠지.’
석원은 최선을 다했다고 스스로 위안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 * *
집에 들어가자마자 조덕례 여사가 현관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그를 맞이했다.
“잘 다녀왔니?”
한눈에 봐도 결과가 어떻게 됐는지 묻고 싶은 마음이 한가득한 표정이었다.
“하아. 일부러 전시회에 대신 보내신 거죠?”
지친 얼굴로 머리를 절레 흔들자 조덕례 여사가 살짝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여자를 만나러 가라고 하면 네가 싫어할 게 뻔하잖니.”
하긴 맞선 자리라고 했으면 단칼에 거절했을 터였다.
석원은 입맛을 다신 뒤 눈살을 찌푸렸다.
“그래도 앞으로는 그러지 마세요.”
“너무 참한 아가씨라 놓치기 아까워서 그랬지.”
그 말을 들으니 어이가 없었다.
나중에 안 좋은 쪽으로 나라를 아니 전 세계를 떠들썩하게 만들 고아현에게 참한 아가씨라는 단어를 붙이는 게 맞는 건가 싶었다.
“코넬 대학교를 다닐 정도로 어릴 때부터 머리가 똑똑해서 고 회장님이 특별히 아끼는 장녀라고 하더라. 호텔 경영학과를 다니는데 졸업을 하면 항공사 산하에 있는 호텔 사업을 맡겼다가 나중에 떼어줄 거라는 이야기도 있어.”
“혼수로 가져올 호텔을 욕심내시는 거예요?”
“이왕이면 없는 것보다 낫지 않겠니.”
조덕례 여사가 욕심 많은 타입은 아니지만 그래도 며느리 될 사람의 친정이 든든하면 둘째 아들한테도 힘이 되지 않겠나 생각했다.
“전 결혼할 여자한테 그런 거 안 바래요.”
석원은 그닥 내키지 않는 얼굴로 대꾸했다.
“호텔이 갖고 싶으시면 제가 하나 사 드릴게요.”
“얘는? 내가 사업할 것도 아닌데 그런 거 갖고 있어봤자 무슨 소용이야. 다 너한테 좋으라고 한 거지.”
“신경 써 주시는 건 알겠는데 그래도 이런 만남은 싫어요.”
그러자 조덕례 여사가 은근슬쩍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아가씨가 마음에 안 들었니?”
석원은 괜히 두리뭉실하게 이야기하는 것보다 확실하게 대답하는 게 낫다는 생각에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어머. 왜 별로였는데?”
노골적으로 실망한 표정을 드러내며 조덕례 여사가 물었다.
“성격도 그렇고 여러 가지로 저랑 안 맞아요. 무엇보다 땅콩을 좋아하는 여자는 별로예요.”
“땅콩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조덕례 여사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눈을 깜빡였다.
훗날 고아현이 땅콩으로 전 세계에 이름을 알릴 거라곤 전혀 짐작도 하지 못할 테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런 게 있어요. 피곤해서 전 이만 올라갈게요.”
석원은 씁쓸하게 웃다가 혹시나 싶어 재차 쐐기를 박았다.
“전 다시 만날 생각이 없으니까 적당히 잘 말해주세요.”
그러고는 계단을 올라 이층으로 향했다.
그런 둘째 아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조덕례 여사는 미간을 모은 채 중얼거렸다.
“땅콩이라니…… 그런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댈 정도로 마음에 안 들었나.”
세상에 땅콩 좋아한다고 여자를 차다니 그런 사람이 어디 있단 말인가.
“저렇게 질색하니 어쩔 수 없네. 어휴, 오 여사한테는 뭐라고 말한담.”
그러면서 조덕례 여사는 고운 이마를 찡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