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lden Spoon Investment Portfolio RAW novel - Chapter (133)
금수저 투자백서 133화(133/231)
133. 거래는 서로 주고받는 거니까요.
“바쁘실 텐데 이렇게 나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강북에 위치한 최고급 일식당 동경(東京) 별실에 석원은 증권감독원 검사 1국 과장인 최복락과 마주 앉아 있었다.
중키에 날렵한 체형에다 금테 안경을 낀 최복락 과장은 경계심이 섞인 시선으로 그를 쳐다보며 물었다.
“우 교수님하곤 어떻게 아는 사이입니까?”
그러자 석원이 입가에 여유로운 미소를 띠고는 부드럽게 대답했다.
“하버드에서 유학할 때 학회 참석차 오셨던 우 교수님하고 인사를 나눌 기회가 있었습니다. 우연히 최 과장님이 우 교수님 제자인 걸 알고 이렇게 만남을 주선해 달라고 부탁드렸지요.”
“우연이라.”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만큼 최복락 과장은 순진하지 않았다.
“실례가 됐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아닙니다.”
최복락 과장이 건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상대가 뾰족하게 가시를 세운 상태인 걸 알면서도 석원은 느긋하게 따뜻한 물수건으로 손을 닦으며 입을 열었다.
“마침 오늘 싱싱한 참다랑어가 들어왔다던데 그걸로 드시겠습니까?”
“그 전에 왜 절 보자고 하셨는지 용건을 말씀해보시죠.”
“먼저 식사를 한 다음에 차근차근 이야기를 나누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만.”
“아뇨. 용건부터 듣고 싶습니다. 솔직히 오늘 만남이 그리 편한 자리는 아니니까요.”
최복락 과장이 무표정한 얼굴로 대놓고 불편함을 드러냈다.
만만치 않은 모습에 석원은 불쾌해하기는커녕 오히려 내심 미소지었다.
‘역시 독고다이라는 별명처럼 아주 까칠하네.’
한번 물면 끝까지 파헤쳐서 처벌을 내린다고 해서 붙여진 거였지만, 서울 명문대 출신들이 대부분인 증권감독원 내부에서 지방 무명 대학교를 나온 아웃사이더인 최복락 과장을 비하하는 별명이기도 했다.
“그러시다면 알겠습니다.”
석원이 고개를 돌려 눈짓하자 문 쪽에 서 있던 여종업원이 곧바로 알아채고 말했다.
“말씀 다 나누시면 불러주십시오.”
문이 탁 닫히는 소리와 함께 별실 안에 두 사람만 남게 됐다.
석원은 도자기로 만든 술병을 들어 올리며 싱긋 웃는 낯으로 말했다.
“그래도 술은 한 잔 괜찮으시겠지요?”
그러자 최복락 과장이 대답 대신 앞에 있는 잔을 집어 들었다.
술을 따라주자 이번엔 최복락 과장이 술병을 건네받아 석원의 잔을 채워줬다.
두 사람은 가볍게 잔을 부딪치고는 단숨에 술을 비웠다.
“오늘 이렇게 뵙자고 한 건 한 가지 부탁드릴 일이 있어서입니다.”
“역시.”
술을 다시 따라주면서 석원이 말하자 상대가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을 짓더니 술잔을 탁 내려놨다.
“거기까지만 하시죠. 우 교수님 체면을 봐서 아무것도 안 들은 걸로 하겠습니다.”
그러고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는 걸 보며 석원이 말했다.
“듣던 대로 성격이 상당히 급하시군요.”
“뭐라고요.”
눈썹을 찌푸리며 정색한 최복락 과장을 향해 석원이 앉으라고 느긋하게 손짓했다.
“모양 빠지게 청탁을 하러 온 건 아니니까. 안심해도 됩니다.”
그러자 최복락 과장이 콧방귀를 뀌며 퉁명스럽게 말을 내뱉었다.
“방금 부탁할 일이 있다고 한 것 같은데 내 귀가 잘못되기라도 했다는 겁니까?”
석원은 쏘아보는 시선을 여유롭게 받아넘기며 술을 홀짝였다.
“부탁이 아니라 제안 정도로 해두죠.”
“그쪽하고 말장난이나 하고 있을 만큼 한가롭지 않습니다.”
빈정거리는 투로 대꾸하자 석원이 얼굴에서 미소를 싹 지웠다.
“그건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대로 나가는 건 자유지만 그러면 크게 후회하게 될 겁니다.”
“그게 무슨…….”
석원과 눈싸움을 하듯 한참을 노려보던 최복락 과장은 이내 다시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제안이라는 게 뭔지 어디 한번 말해보십시오.”
그러자 석원이 옆에 놔둔 두툼한 서류 봉투를 집어서 테이블 위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시세 차익을 노리고 특정 회사의 주가를 조작하고 있는 작전 세력에 대한 증거 자료입니다.”
“!”
팔짱을 낀 채 어디 무슨 수작을 부리려고 하는지 들어보자는 표정을 짓고 있던 최복락 과장은 뜻밖의 이야기에 눈을 크게 떴다.
“대부분 정황 증거이긴 하지만 대충 훑어만 봐도 주가 조작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걸 단번에 알 수 있을 겁니다.”
석원은 여유롭게 술잔을 기울이며 말했다.
“조사를 시작해서 조금만 털어보면 증거가 우수수 쏟아질 테니 범죄 행위를 입증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을 겁니다.”
그러고는 앞에 있는 최복락 과장을 향해 그것 보라는 듯 눈썹을 까딱였다.
“주가 조작을 잡아내는 건 증권감독원의 중요한 업무 중 하나이니 이걸 청탁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요.”
“……이런 거라면 정식으로 제보를 하면 되지 왜 번거롭게 이러는 겁니까.”
최복락 과장이 의심에 찬 눈초리로 쳐다보며 물었다.
쉽게 신뢰할 수는 없다는 뜻인지 여전히 서류 봉투엔 손조차 대지 않은 채였다.
“내가 원하는 타이밍에 증권감독원 조사가 이루어졌으면 하니까요.”
대답을 듣자마자 최복락 과장이 미간을 좁혔다.
역시나 짐작대로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게 틀림없었다.
괜히 골치 아픈 일에 엮일 생각이 없었던 최복락 과장은 그냥 못 들은 걸로 하기로 했다.
하지만 곧바로 이어진 이야기에 생각이 달라졌다.
“얼마 전 있었던 정기 인사에서 승진이 또 누락 되셨다고 들었습니다.”
“!”
“이번 승진 대상자 중에는 최 과장님보다 연차가 낮은 후배도 포함된 걸로 아는데. 참 아쉬우시겠습니다.”
굳은 표정을 한 최복락 과장을 보며 석원이 어깨를 으쓱였다.
“실적도 중요하지만 연줄과 인맥도 승진에 중요한 영향을 끼치는 것이 현실이니 정말 안타깝네요.”
실적은 뛰어났지만 항상 학벌과 인맥에 밀려 승진이 누락되고 아웃사이더 취급을 받는 최복락 과장의 아픈 곳을 찌르는 말이었다.
“지금 과학기술처에 가 계시는 최진우 차관님을 아실 겁니다.”
자신과 달리 서울대 출신에 재무부 차관을 지낸 엘리트 관료로 청와대의 신임도 두터워 차기 재무부 장관이나 경제 부총리 후보로 거론되는 최진우 차관을 모를 수가 없었다.
“그러고 보니 두 분이 성도 같은 최 씨군요.”
“…….”
석원은 은근한 목소리로 계속 말을 이었다.
“최 차관님 같은 분이 뒤를 봐주신다면 앞으로 공직 생활을 하시는데 지금 같은 차별과 불이익은 더 이상 없을 테지요.”
그러자 최복락 과장의 얼굴에 동요의 빛이 떠올랐다.
“원하신다면 최 차관님과 좋은 인연을 맺을 수 있도록 도와드릴 수도 있습니다.”
턱에 힘을 꽉 주고 있던 최복락 과장은 테이블 위에 놓인 서류 봉투에 시선을 향했다.
“대신 이걸 원하는 대로 처리해 달라는 겁니까.”
“거래는 서로 주고받는 거니까요.”
최복락 과장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으나 그래도 여전히 망설이는 모습이었다.
“위법 행위도 아니고 증권감독원이 응당해야 될 일을 해달라는 건데 문제 될 것이 있습니까. 다만 그 시기를 조율해 달라는 것뿐입니다.”
부드럽게 회유하는 말투에 최복락 과장은 그동안 학맥과 인맥이 없어 받았던 서러움을 떠올렸다.
나쁜 일을 눈감아 달라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범죄 행위를 잡아달라는 건데 받아들이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주가 조작이 이루어지고 있는 회사 이름이 뭡니까?”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한 걸 눈치챈 석원이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보성통신입니다.”
* * *
다음날, 여의도 대흥 증권 본사 5층 트레이딩 센터는 쉬지 않고 울리는 전화벨과 큰 소리를 주문을 내는 트레이더들의 외침으로 가득한 가운데 오늘도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어젯밤 회식에서 새벽까지 달리고 출근한 정환엽 대리는 깨질듯한 머리와 울렁거리는 속을 붙잡고 책상에 엎어져 있었다.
“끄으으.”
수척한 낯으로 고개를 든 정환엽 대리는 어떻게든 정신을 차려보려고 머그잔을 집어 커피를 마셨다.
“우웩.”
하지만 쓴 커피를 한 모금 넘기는 순간 더욱 속이 메스꺼워져서 다시 책상에 힘없이 널브러졌다.
“아이고 죽겠네.”
그때 잠깐 자리를 비웠다가 돌아온 최호근 팀장이 좀비처럼 흐느적거리는 정환엽 대리를 보곤 쯧쯧 혀를 찼다.
“아직도 그러고 있냐?”
“속 쓰려서 죽겠습니다. 살려주세요.”
“그러게 누가 폭탄주를 그렇게 퍼마시래. 혼자 신나서 달리더니 꼴좋다.”
그러자 정환엽 대리는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다 죽어가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안 그래도 왜 그랬을까 후회하고 있으니까 너무 타박하지 마십쇼.”
“어휴.”
항상 촐랑대며 까불거리는 녀석이지만 시들시들해 있는 모습도 꼴 보기 싫은 건 마찬가지였다.
최호근 팀장은 더 혼을 내고 싶지만 측은한 마음이 들기도 해 결국 조금 누그러진 어조로 말을 꺼냈다.
“그렇게 속이 안 좋으면 화장실에 가서 좀 게워내고 오든가.”
“벌써 네 번이나 토하고 왔어요. 이제는 더 나올 것도 없는지 물 밖에 안 나오더라고요.”
정환엽 대리가 끙끙대면서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젠장. 오랜만에 비싼 한우에다 양주까지 먹었는데 아까워 죽겠네.”
“아직 입은 살아 있는 걸 보니 죽을 정도는 아닌 모양이지.”
“이 얼굴을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오세요?”
정환엽 대리가 불쌍한 척을 해대면서 우는 소리를 내자 최호근 팀장이 등짝을 세게 후려쳤다.
“으이그. 화상아! 그러니까 적당히 마시랬잖아!”
“으억!”
“다른 사람들은 다 멀쩡한데 너 혼자만 이 꼴이냐고. 하여튼 내가 너 때문에 늙는다 늙어!”
최호근 팀장은 손에 들고 있던 비닐봉지를 거칠게 헤집더니 갈색 드링크 병을 하나 꺼내 책상 위에 탁 올려놨다.
“오다 주웠다. 그거나 마시고 정신 차려!”
“오오.”
정환엽 대리는 숙취해소제를 무슨 성배라도 되는 것처럼 두 손으로 들어 올리더니 크게 감격해서 외쳤다.
“크으! 역시 팀장님밖에 없다니까요!”
“징그러우니까. 저리 가!”
마구 달라붙는 놈을 억지로 밀어낸 최호근 팀장은 홍재희와 유석현에게도 드링크를 하나씩 나눠줬다.
“다들 마셔.”
“안 그래도 속이 좀 부대꼈는데 감사합니다.”
“저도요. 팀장님.”
유석현에 이어 홍재희도 고개를 꾸벅 숙이며 감사 인사를 했다.
최호근 팀장은 자기 자리로 가서 앉으며 하나같이 안색이 수척해 보이는 팀원들을 쓱 둘러보았다.
물론 상태가 제일 나빠 보이는 건 정환엽 대리였지만 유석현과 홍재희도 비실대는 건 마찬가지였다.
“오늘 점심은 해장 겸해서 콩나물국밥을 먹으러 가자. 다들 어때?”
그러자 정환엽 대리가 의자에 앉은 채 몸을 빙글 돌려 물었다.
“팀장님이 쏘시는 겁니까?”
“야. 인마!”
최호근 팀장이 이마에 굵은 주름을 만들며 저저, 하고 손가락질을 했다.
“공짜 너무 밝히면 대머리가 된다는 말도 못 들었냐.”
“염려 마십쇼. 다른 건 몰라도 머리숱 하나는 아주 풍성하게 물려받았거든요.”
정환엽 대리가 자랑이라도 하듯 머리칼을 쓱 쓸어넘겼다.
지지 않고 꼬박꼬박 말대꾸를 하는 모습에 최호근 팀장은 속이 뒤집어지는 것처럼 끄으응 앓는 소리를 내뱉고는 졌다는 듯 말했다.
“그래! 내가 산다. 사!”
“헤헤헤. 콩나물국밥은 ST증권 뒤쪽에 있는 전주집이 잘 하는 거 아시죠?”
“알았다고. 그냥 네 맘대로 다 해 먹어라 이 자식아.”
그 와중에도 맛집을 골라대는 걸 보고 최호근 팀장이 이를 부득 갈았다.
“크흠. 그럼 일을 해볼까나.”
정환엽 대리는 더 까불면 뭐라도 날아올 듯한 분위기를 민감하게 감지하고는 눈치껏 의자를 돌려서 책상에 고개를 처박았다.
홍재희와 유석현은 두 사람이 투덕거리는 모습을 보면서 대놓고 크게 웃진 못하고 소리를 죽여 큭큭거리며 터져 나오는 웃음을 겨우 참았다.
“두 분도 참…….”
고개를 흔들며 최호근 팀장이 사다 준 숙취 해소 드링크를 마시던 유석현은 무심코 모니터를 보다가 뭔가를 발견하곤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손에 들고 있던 드링크를 얼른 내려놓고 모니터에 띄워진 종목 차트를 확인한 유석현은 놀란 목소리로 최호근 팀장을 불렀다.
“티, 팀장님 이것 좀 보세요!”
“뭐야? 무슨 일인데 그래.”
“천호제강 주가가 폭락하고 있어요.”
최호근 팀장이 의자에서 벌떡 몸을 일으키며 되물었다.
“그게 정말이야?”
“네.”
대답을 들은 최호근 팀장이 황급히 유석현의 자리로 달려왔다.
숙취에 늘어져 있던 정환엽 대리도 언제 그랬냐는 듯 재빨리 다가와 옆에 나란히 붙었다.
모니터를 보자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강도가 세진 않았지만, 상승세를 이어가던 천호제강 주가가 거짓말처럼 꺾여 아래로 떨어지고 있었다.
천호제강 310,000
.
.
천호제강 299,950
“정말이잖아!”
“매물이 엄청나게 쏟아지는데 이거 왜 이러죠?”
당황한 유석현의 물음에 최호근 팀장은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옆으로 돌려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다른 종목들은 어떤지 체크해 봐!”
“예.”
잽싸게 원래 자리로 돌아간 정환엽 대리가 키보드를 두드려 지수와 주요 종목들의 주가를 확인했다.
“다른 종목들은 크게 변동이 없어요.”
정환엽 대리가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대답했다.
그러자 최호근 팀장이 낮게 침음성을 내뱉으며 말했다.
“이거 아무래도 차익 매물이 나오기 시작한 것 같은데.”
그게 아니라면 아무런 악재도 없는데 이렇게 갑자기 매도 물량이 폭증하며 주가가 꺾여 내려갈 이유가 없었다.
정환엽 대리가 같은 생각인지 머리를 주억거리며 말을 보탰다.
“하긴 그동안 주가가 엄청 뛰었으니 이제 손을 털고 나올 때도 됐죠.”
“그렇긴 하지만 아무런 전조도 없이 이렇게 갑자기 무더기로 팔아 버린다고요?”
무려 10배 이상 주가가 폭등하며 끝없이 오를 것만 같았던 천호 제강이었기에 유석현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원래 주식이 그런 거야.”
정환엽 대리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하다가 문득 든 생각에 최호근 팀장을 쳐다봤다.
“근데 가지고 있던 물량을 다 팔고 딱 하루밖에 안 지났는데 이런 폭락이 벌어지다니 놀랍네요. 정말 본부장님 신기라도 있으신 거 아닙니까?”
아무리 봐도 놀라운 매도 타이밍에 정환엽 대리가 혀를 내둘렀다.
“그러고 보니 정말 대단하네요.”
“이런 일이 벌어질 거라고 미리 예측하셨다는 말 아닙니까. 대체 어떻게 그게 가능한 건지…….”
유석현과 홍재희가 입을 벌리며 감탄했다.
최호근 팀장 역시 둑이 터지듯 점점 더 늘어나는 매도 물량과 함께 가파르게 추락하는 천호제강 주가를 보고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만약 제때 팔지 않고 욕심을 부려 계속 들고 있었다면 어떻게 됐을지 생각하자 아찔한 기분마저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