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lden Spoon Investment Portfolio RAW novel - Chapter (137)
금수저 투자백서 137화(137/231)
137. 도쿄 대공습 (3)
1995년 4월 10일 아침.
올해로 입사 4년 차인 나성미는 한쪽 어깨에 핸드백을 메고 바쁜 걸음으로 지하철역 계단을 올라와 회사로 출근했다.
직속 상사인 석원이 나오기 전에 업무 준비를 끝내놓기 위해 평소엔 항상 출근 시간보다 30분 일찍 회사에 도착하는데 오늘은 조금 늦게 일어나는 바람에 마음이 더 급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사무실에 도착한 나성미는 벽에 있는 스위치를 올려 어두운 실내에 불을 켰다.
그러고는 손목에 찬 시계를 확인하자 8시 50분이 막 지나고 있었다.
평소보다 20분 늦긴 했지만 그래도 아직 석원이 나오기 전이었으니 이 정도면 세이프였다.
“본부장님이 출근하시기 전에 얼른 정리부터 해놔야지.”
나성미는 핸드백을 의자에 내려놓고 책상에 있는 컴퓨터 전원부터 먼저 켰다.
그리고 정장 윗도리를 벗어 책상 뒤편 옷장에 가지런히 걸어두고는 종종걸음으로 안쪽에 있는 내실로 향했다.
아무도 없을 줄 알고 대뜸 문을 연 나성미는 사무실 책상에 석원이 벌써 나와 앉아 있는 걸 보고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어머! 본부장님.”
그러자 컴퓨터 모니터를 주시하고 있던 석원이 뒤로 몸을 기대며 말했다.
“왔어요?”
“세상에. 언제부터 여기 계셨던 거예요.”
나성미가 당황한 얼굴로 그를 쳐다봤다.
커다란 창문으로 환한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지만 석원의 표정엔 약간 피곤한 기색이 느껴졌다.
“일이 있어서 일찍 출근했어요. 미안한데 커피 한 잔 가져다주겠어요.”
“네.”
나성미가 대답하고 밖으로 나가려고 하는 걸 석원이 다시 불러세웠다.
“아, 잠깐만요.”
“더 시키실 일이라도 있으세요?”
석원은 지갑에서 신용카드를 꺼내 주면서 말했다.
“회사 뒤편에 있는 일식집 알죠.”
“네.”
“투자 1팀 팀원들 전부 새벽부터 나와서 일하느라 아침도 제대로 못 먹었을 테니까. 거기서 제일 비싼 걸로 도시락을 주문해서 갖다 달라고 해요.”
“알겠습니다.”
“어차피 오늘 점심도 밖에 나가서 사 먹진 못할 테니 기왕 시키는 거 점심 메뉴도 부탁해놔요. 1팀만 챙기면 그러니까 투자팀 전원이랑 성미 씨하고 내 것도 빼놓지 말고.”
“그럼 숫자가 꽤 될 텐데요.”
“상관없어요.”
그제야 그녀는 석원이 회장 아들인 걸 뒤늦게 떠올렸다.
법인도 아니고 개인 카드라 살짝 걱정했으나 진짜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생각지도 못하게 고급 일식집 도시락을 점심으로 먹게 된 나성미는 속으로 신이 나서 되물었다.
“알겠습니다. 더 시키실 일은 없으세요?”
“없어요.”
그러자 나성미가 꾸벅 머리를 숙였다가 바로 하고는 밖으로 나갔다.
문이 닫히자 석원은 푹신한 의자에 몸을 기댄 채 컴퓨터 모니터를 쳐다봤다.
[USD/JPY : 83.09]한때 82엔마저 위태로워 보였던 환율은 일본은행이 다급히 엔을 풀고 달러를 사들이면서 겨우 다시 83엔을 회복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조지 해밀턴이 이끄는 헤지펀드들한테 기습을 당해 허둥거리는 모습을 보인 일본은행은 상황을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 힘없이 끌려다니고 있는 걸 여실히 드러냈다.
“거기에 더해 전 세계 외환 딜러들에게 오늘 뭔가 큰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암시를 확실히 줬지.”
모르긴 해도 지금쯤이면 새벽에 시드니 외환시장에서 일본은행이 헤지펀드들의 기습에 한방 크게 먹었다는 소문이 외환 딜러들 사이에 쫙 퍼졌을 터였다.
그리고 이건 전초전에 불과하고 진짜 본게임은 잠시 뒤면 열리게 될 도쿄 외환시장이라는 걸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었다.
지금쯤 과연 헤지펀드들의 파상공세를 일본은행이 막아낼 수 있을지 전 세계 외환 딜러와 투자자들이 촉각을 곤두세운 채 지켜보고 있을 터였다.
“여기서 막아낸다면 엔화를 지킬 수 있겠지만, 뒤로 밀려 버리게 되면 영란은행처럼 백기 투항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을 거야.”
물론 결과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회귀한 것으로 인해 어떤 변수가 발생할지 몰랐기에 긴장을 늦출 수는 없었다.
“혹시라도 흐름이 어긋난다면 바로 끼어들어서 결과가 바뀌는 일이 없도록 만들어야지.”
석원은 의자에 앉은 채 날카롭게 눈을 번득였다.
멕시코 투자 성공으로 다시 한번 재산을 엄청나게 불린 그였기에 가지고 있는 현금으로 싸움에 가세한다면 단번에 승부의 추를 헤지펀드 쪽으로 가져오기에 충분했다.
석원은 손목시계를 힐끔 쳐다보고는 도쿄 외환시장 시세창을 띄워놓은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이제 개장까지 20분 남았네.”
* * *
9시 25분, 도쿄 주오구 니혼바시혼고쿠초(日本橋本石町) 일본은행 본점.
외환시장 개장을 앞둔 가운데 바늘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 듯한 긴장감이 사무실 안에 감돌았다.
야마다 과장을 비롯한 수십 명의 직원들은 숨을 죽인 채 정면에 설치된 대형 상황판을 뚫어질 듯 쳐다보고 있었다.
다들 지치고 피곤했지만 오늘이 한 달 넘게 이어지고 있는 싸움의 승패를 결정짓는 중요한 날이라는 걸 다들 알고 있었기에 정신을 바짝 차리고 집중한 상태였다.
모두가 긴장감에 마른침을 삼키고 있는 와중.
차마 앉아 있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있던 야마다 과장은 초조한 얼굴로 손목에 찬 시계를 확인했다.
“시드니 쪽 상황은 어때?”
그러자 앞쪽 책상에 앉아 모니터를 쳐다보고 있던 직원이 고개를 뒤로 돌려 대답했다.
“83.09엔에서 큰 변동 없이 엔화 매수가 잦아든 분위기입니다.”
“퀀텀펀드 쪽 움직임은 있나?”
야먀다 과장의 물음에 처음 대답을 한 직원 옆에 있던 두툼한 체격의 사내가 대신 대답했다.
“1시간 전에 마지막 매수 주문을 낸 이후로 조용합니다.”
“으음.”
불과 얼마 전까지 무섭게 엔화 매수 주문을 쏟아내던 헤지펀드들의 공격이 거짓말처럼 잠잠해지자 야마다 과장은 안도보다는 불안한 마음이 짙게 들었다.
마치 거센 폭풍우가 몰아치기 전에 찾아오는 고요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걸 보고 조지 해밀턴이 물러서기로 한 건 아닐까.”
굳은 얼굴로 옆에 서 있던 마츠야마 국장이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야마다 과장은 곧장 머리를 가로저었다.
“취약점을 철저하게 노리고 기습을 가했는데 그 정도로 발을 뺄 리가 없습니다.”
“하아…… 그렇겠지.”
마츠야마 국장 역시 큰 기대를 하고 한 말은 아닌지 금방 수긍했다.
모두가 불길한 적막감에 휩싸여 있을 때 돌연 따르릉 하며 요란한 벨소리가 울렸다.
사람들의 시선이 한꺼번에 쏠리자 제일 가까이 있던 직원이 얼른 전화를 받았다.
“예.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누군지 깍듯하게 말한 직원이 마츠야마 국장한테 수화기를 내밀었다.
“카지와라 총재님이십니다.”
그러자 마츠야마 국장이 곧바로 수화기를 건네받았다.
“네. 마츠야마입니다. 예. 예. 알겠습니다.”
금방 통화를 끝낸 마츠야마 국장은 수화기를 직원한테 돌려주고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총재님께서 뭐라고 하십니까?”
야마다 과장이 조심스레 물었다.
그러자 마츠야마 국장은 무겁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방금 들은 이야기를 전했다.
“총리님께 추가로 10억 달러를 환율 방어에 더 쓸 수 있도록 승인받으셨다는군.”
“그럼 앞서 확보해둔 것까지 합쳐서 모두 21억 달러를 사용할 수 있는 거군요.”
“그렇지.”
마츠야마 국장이 작게 머리를 끄덕이고는 야마다 과장을 봤다.
“이 정도면 해밀턴과 헤지펀드 놈들의 공격을 막아낼 수 있겠지?”
무려 10억 달러나 총알을 더 쥐어준 걸 보면 내각과 카지와라 총재도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걸 느끼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이제 쓸 수 있는 자금이 두 배로 늘어났지만 야마다 과장은 경직된 표정을 좀처럼 풀지 못했다.
“최선을 다해 봐야죠.”
은근히 희망적인 대답을 바라던 마츠야마 국장이 눈썹을 찡그렸다.
“노력만 해서는 안 돼. 옥쇄의 각오로 무슨 일이 있더라도 80엔을 지켜내야 해!”
야마다 과장 역시 허세로라도 자신감을 내보이고 싶었지만 그런 여유조차 없는 게 현실이었다.
일분일초가 지날수록 불안과 긴장된 마음이 신경줄을 갉아먹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때 직원 한 명이 큰소리로 외쳤다.
“개장까지 5분 남았습니다!”
야마다 과장은 반사적으로 대형 상황판 가운데에 있는 전자시계를 쳐다봤다.
개장 시간이 점점 가까워지는 걸 보며 야마다 과장은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9:29:25] [9:29:26].
.
[9:30:00]그러다 마침내 정각 9시 30분이 되자 전 세계 외환 투자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도쿄 외환시장이 열렸다.
“장 시작됐습니다!”
직원 한 명이 떨리는 목소리로 개장을 알리는 것과 동시에 83.09엔으로 시작한 달러-엔 환율이 급격하게 요동쳤다.
“엔화 매수 주문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젠장! 83엔이 깨졌습니다.”
조용하던 실내가 크게 술렁이자 야마다 과장이 목청을 높였다.
“기세에서 밀리면 안 돼! 바로 달러를 매수해서 엔이 강세로 가는 걸 막아!”
그러자 직원들이 키보드를 두드리거나 전화로 주문을 내며 즉각 대응에 나서기 시작했다.
“200만 달러 시장가로 매수!”
“오케이. 던(done)!”
“보트(bought) 80만 달러!”
“던!”
“추가 5개 보트!”
정신없이 주문을 쏟아내며 방어에 나섰지만 엔화 환율은 떨어지기는커녕 점점 더 위로 가파르게 치솟았다.
[USD/JPY : 82.99] [USD/JPY : 82.55].
.
.
[USD/JPY : 81.99]“8. 82엔까지 깨졌습니다!”
“미친! 도대체 돈을 얼마나 쏟아붓고 있는 거야.”
마치 단번에 승부를 결정 내기라도 하려는 듯 쓰나미처럼 밀려드는 엔화 매수에 다들 경악을 금치 못하고 충격과 공포에 휩싸였다.
야마다 과장 역시 어느 정도 각오는 했지만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매수 쓰나미에 숨이 턱 하고 막히는 기분을 느꼈다.
그때 옆에 있던 마츠야마 국장이 목에 핏대를 세우며 외쳤다.
“빌어먹을! 당장 달러를 닥치는 대로 다 사들여!”
“안 됩니다. 그러다가 보유한 자금이 다 소진되어 버리면 속수무책으로 당하게 되고 말 겁니다!”
야마다 과장이 급하게 만류했다.
하지만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를 정도로 흥분한 마츠야마 국장은 눈을 크게 부라렸다.
“나도 알아! 하지만 머뭇거리다가 80엔이 뚫리면 그때는 상황이 걷잡을 수 없게 돼!”
틀린 말이 아니었기에 야마다 과장도 대꾸하지 못하고 멈칫했다.
그 틈에 마츠야마 국장은 고개를 돌려 직원들을 독촉했다.
“뭣들하고 있어! 어서 달러를 매수해!”
“아, 예!”
“알겠습니다!”
눈치를 보고 있던 직원들은 마츠야마 국장의 시퍼런 서슬에 서둘러 매수 주문을 냈다.
“이런…….”
야마다 과장도 어쩔 수 없이 마츠야마 국장의 지시에 따라 직원들을 지휘했다.
마츠야마 국장의 대응이 잘못된 건 아니다.
하지만 이렇게 해서 헤지펀드들의 공격을 막아낼 수 있을지 야마다 과장의 불안은 더욱 짙어졌다.
* * *
[USD/JPY : 81.97] [USD/JPY : 82.01]가파르게 튀어 오르며 초강세를 보이던 엔화가 갑자기 브레이크가 잡히는 모습에 모니터로 시세를 지켜보던 석원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머리를 끄덕였다.
“그래. 이대로 끝난다면 너무 싱겁지.”
뒤가 없이 서로 마주보고 똑바로 달려드는 치킨게임이 시작된 만큼 이제 관건은 어느 쪽이 끝까지 밀어붙이는 배짱과 자금을 가지고 있냐는 거였다.
“1천 2백억 달러가 넘는 외환보유고를 가지고 있는 일본이지만 환율 방어에 그걸 다 쓸 수 있는 건 아니지.”
만약 그랬다가는 엔화 강세가 문제가 아니라 자칫 멕시코처럼 외환 위기로 사태가 번질 수 있었다.
“많아봤자 2~300억 달러. 최대로 잡아도 500억 달러가 한계일 거야.”
조지 해밀턴이 이끄는 퀀텀 펀드와 헤지펀드들 역시 쓸 수 있는 자금에 한계가 있었다.
“하지만 승부의 추가 해밀턴 쪽으로 기울어지면 지금까지 눈치를 보고 있던 투자자와 금융기관들이 헤지(hedge)를 위해 엔화 매수에 가담하게 될 테지. 그렇게 되면 일본은행으로서는 더 이상 감당할 방법이 없을 거야.”
문제는 거기까지 해밀턴과 헤지펀드들이 엔화 환율을 밀어 올릴 수 있느냐 하는 거였다.
흥미진진하게 환율이 쉴새 없이 움직이는 걸 보고 있을 때 책상 위에 놔둔 휴대폰 벨이 울렸다.
투자 1팀 김정식 팀장의 전화였다.
[본부장님! 82엔에서 힘겨루기를 하는 중인데 어떻게 할까요?]다급한 목소리였지만 석원은 느긋하게 대답했다.
“더 오를 거니까 80엔까지 계속 홀딩하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