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lden Spoon Investment Portfolio RAW novel - Chapter (14)
금수저 투자백서 14화(14/231)
14. 역시 날 닮아서 배짱이 두둑해.
마포 대흥그룹 본사.
회사에 출근한 박태홍 회장은 재킷을 벗어 여비서에게 넘겨줬다.
그러고는 따라 들어온 길성호 비서실장을 보며 말했다.
“오늘 아침 조간신문에 실린 기사를 봤나.”
“영국 정부가 ERM에서 전격 탈퇴한 것 말씀이십니까.”
“그래.”
작게 머리를 끄덕인 박태홍 회장은 집무실 한쪽에 놓인 엔틱 소파에 앉았다.
“천하의 영국이 글로벌 헤지펀드들의 공격에 이렇게 힘없이 무릎을 꿇을 줄 누가 알았겠나.”
소파 오른편으로 간 길성호 비서실장이 엉덩이를 붙이며 말을 받았다.
“저도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고 생각은 했지만 이런 결과가 나올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아마 다들 그랬을 거야.”
실제로 월가 거물인 해밀턴이 공개적으로 파운드화를 저격하고 글로벌 헤지펀드들이 공격에 나서는 걸 보면서도 결국은 영란은행이 승리할 거라 생각하는 쪽이 대다수였다.
영국 정부와 아서 영란은행장 역시 오전까지만 해도 파운드화 절하는 물론이고 ERM 탈퇴는 절대 없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하지만 불과 하루도 되지 않아 모든 것이 뒤집히고 말았다.
재킷을 옷걸이에 걸고 온 여비서가 박태홍 회장을 보며 물었다.
“차를 준비해드릴까요?”
“어. 달달하게 커피 한 잔 타와.”
“네.”
박태홍 회장의 취향은 설탕과 프림을 듬뿍 넣은 다방 커피 스타일이었다.
선이 굵은 외모와 달리 단 걸 좋아하는 입맛을 익히 아는 여비서가 살짝 머리를 숙여 대답한 뒤 밖으로 나갔다.
박태홍 회장은 푹신한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대면서 물었다.
“지금 파운드가 얼마지?”
출근하면 물어볼 걸 알고 미리 체크해 둔 길성호 비서실장이 바로 대답했다.
“미국에 이어 아시아 외환시장에서도 하락세가 이어져 현재 파운드당 1.29 달러를 오르내리고 있습니다.”
“둘째 녀석이 파운드에 투자했을 때 가격이 얼마였었지?”
“파운드당 1.43 달러였습니다.”
“그럼 둘째가 이번 일로 얼마나 번 거야?”
“현재까지 수익률이 대략 9% 정도 되니까 당첨금을 모두 투자하셨으면 1,080만 달러의 수익이 났을 겁니다.”
“허어.”
액수를 들은 박태홍 회장은 자신도 모르게 헛웃음을 내뱉었다.
그러고는 길성호 실장을 보며 말했다.
“길 실장.”
“예.”
“지난달 미도파 백화점 순이익이 4백억 정도였었지.”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룹 주력 계열사의 월 순이익 1/5에 해당하는 거액을 불과 한 달도 안 돼서 벌어들였다니. 자넨 이게 믿겨지나?”
감탄과 놀람이 섞인 말투엔 은근히 자랑하는 기색도 섞여 있었다.
“저도 정말 대단하신 것 같습니다. 둘째 도련님이 회장님의 피를 물려받아 투자에 재능이 있으신 거겠죠.”
실제로는 레버리지를 써서 두 사람이 예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수익을 거두고 있었다.
만약 얼마를 벌었는지 알았다면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을 터였다.
“갑자기 거액을 파운드화에 투자했다고 해서 의아했었는데 이제 와서 보니 이렇게 될 걸 예상하고 베팅한 게 아닐까 싶어.”
길성호 실장 역시 내심 그런 생각을 하긴 했다.
물론 그게 아니더라도 은근히 자식 자랑을 하고 싶어 하는 듯한 박태홍 회장의 시선에 길성호 실장은 본능적으로 사회생활 스킬을 발휘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버드에서 경영학을 공부하고 계신 둘째 도련님이니 저희가 미처 알지 못한 부분을 보시고 먼저 행동하신 것 아니겠습니까.”
딱 듣고 싶은 대답이었는지 박태홍 회장이 얼굴 가득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맞아, 그렇겠지. 역시 내 아들이야! 그 녀석이 어렸을 때부터 여간 똑똑하고 머리가 잘 돌아가는 것이 아니었거든. 그 어렵다는 하버드에 들어간 것만 봐도 알잖나.”
박태홍 회장은 입가에 훈훈한 미소를 그리며 음,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녀석이 파운드에 배팅했다고 했을 때부터 뭔가 있을 줄 알았지. 아무 생각 없이 그 큰돈을 날릴 성격이 아니거든. 다 계획이 있었던 거야. 암”
조용히 이야기를 들으며 길성호 실장은 내심 어이가 없는 심정을 삼켜야만 했다.
바로 이 자리에서 손동성 미주 지사장의 보고를 듣고서 노발대발하던 모습을 똑똑히 기억하는데 대체 뭘 알고 있었다는 건가.
“아무리 확신이 있어도 그렇지 1억 달러가 넘는 거액을 한 번에 밀어 넣다니. 녀석, 역시 날 닮아서 배짱이 두둑해. 이거다 싶으면 밀어붙이는 추진력도 있다니까. 안 그런가?”
하하 웃으며 아들 자랑인지 자기 자랑인지 모를 말을 하던 박태홍 회장이 은근히 압박이 실린 시선으로 길성호 실장을 쳐다봤다.
‘어째 지난번하고 말씀이 많이 다르시지 않나.’
저도 모르게 딴지를 걸고 싶은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오랜 사회생활로 다져진 생존 본능에 입이 저절로 움직였다.
“맞습니다. 큰 도련님은 듬직하시고, 둘째 도련님은 똑똑하시니 두 분 다 회장님을 정말 많이 닮은 것 같습니다. 피는 못 속인다는 말이 괜히 있겠습니까.”
“하하, 그렇지?”
내색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맞장구를 치자 박태홍 회장도 얼굴 가득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훈훈한 분위기가 맴도는 가운데 잠시 자리를 비웠던 여비서가 커피를 가지고 들어와 박태홍 회장 앞에 내려놓고 다시 나갔다.
찻잔을 집어든 박태홍 회장은 입맛에 맞게 달짝지근한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내려놓으면서 말했다.
“이번에 보니까 둘째 녀석이 금융 쪽에 재능이 있는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나.”
그냥 묻는 말이 아닌 걸 알아차린 길성호 실장은 박태홍 회장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조금 더 지켜봐야 되겠지만, 그쪽으로 감각이 있는 건 분명해 보입니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확실히 싹수가 보여.”
박태홍 회장은 다시 몸을 뒤로 기댔다.
“조금 있으면 졸업이니 한국에 돌아오면 금융 쪽 일을 시켜봐야겠어.”
“하지만 저희 계열사 중엔 금융사가 없지 않습니까. 혹시 둘째 도련님을 다른 회사에 보내 일을 배우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아니, 그럴 순 없지.”
“그럼…….”
박태홍 회장은 사뭇 진지한 얼굴을 하더니 손을 맞잡고 묵직하게 말했다.
“이제 우리도 재계 서열 30위에 오른 중견 그룹이 됐는데 금융사 하나쯤은 가지고 있어야 되지 않겠나.”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에 길성호 실장이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금융사를 인수하시려는 겁니까?”
“그래.”
머리를 끄덕인 박태홍 회장이 담담히 말했다.
“외국인 투자 자금이 대거 들어오면서 요즘 주식 시장이 엄청난 활황이라지.”
올해 1월부터 정부가 금융시장 선진화를 추진하면서 그동안 막혀 있던 주식 시장을 부분 개방했다.
상장된 기업 총발행 주식의 10%로 제한선이 정해져 있었지만, 국내 주식 시장에 외국인 투자자금이 새롭게 유입되자 주식이 폭등하며 증시가 활황을 보였다.
“말씀대로 몇 년 안에 증시가 1,000포인트를 돌파할 거라는 예상이 많을 만큼 시장이 좋기는 합니다.”
현재 코스피가 600포인트대를 오르내리고 있으니 1,000포인트면 거의 두 배 가까이 성장한다는 거였다.
“요즘 증시 분위기를 보면 절대 과한 예측이 아닐 거야.”
길성호 실장을 보며 박태홍 회장이 말을 이었다.
“내후년에는 채권시장도 부분 개방될 거라는 이야기가 있으니 그렇게 되면 금융시장이 지금보다 서너 배는 더 커지지 않겠나. 한마디로 먹을 것이 많아진다는 거지.”
“그럴 겁니다. 외국 투자자들이 들어온다는 건 그만큼 시장이 돈이 풍부해진다는 뜻이기도 하니까요.”
길성호 실장이 맞장구를 쳤다.
“바로 그거야. 앞으로 큰돈을 벌 수 있을 판이 바로 눈앞에 있는데 그걸 두고만 보는 건 바보 멍청이지.”
“옳은 말씀이긴 합니다.”
“그리고 우리 그룹의 주력인 방직업의 수익률이 점점 떨어지고 있는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라도 백화점 말고 새로운 먹거리를 서둘러 찾아내야 될 필요가 있어.”
면방직 사업을 통해 크게 성장한 대흥그룹이었지만 대내외 환경이 바뀌면서 점차 한계에 부딪치고 있었다.
이를 탈피하기 위해 여러 회사를 인수하며 사업 다각화에 나서고 있었지만 백화점 말고는 아직 큰 성과를 못 내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금융업 진출은 새로운 돌파구가 될 수 있었다.
그룹 내부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길성호 실장 역시 고개를 끄덕여 수긍했다.
“그럼 적당한 매물이 있는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전경련의 능구렁이들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을 테니 다른 그룹에서 선수를 치기 전에 발 빠르게 움직여.”
“예.”
짧게 대답한 길성호 실장은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혼자가 된 박태홍 회장은 앞에 놓인 찻잔을 집어 들어 그새 미지근하게 식어 버린 커피를 삼켰다.
주치의가 매번 이제 건강을 챙길 나이라고 잔소리를 해댔지만 담배와 커피만은 좀처럼 줄일 수가 없었다.
“커피는 역시 달달한 맛이지.”
설탕만이라도 넣지 말라고 하는데 그럼 무슨 맛으로 커피를 마신단 말인가.
그러고 보니 둘째 그놈은 매번 새까만 사약 같은 커피만 마시던데 혀에 무슨 문제가 있는 게 틀림없었다.
“흠.”
둘째 아들의 얼굴을 떠올린 박태홍 회장은 턱을 슬슬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만약 기대하는 만큼 실력을 보여준다면 나중에 둘째 녀석에겐 증권사를 떼어주면 되겠어.”
혼잣말을 하는 박태홍 회장의 입가에 슬쩍 미소가 맺혔다.
* * *
매사추세츠주 케임브리지.
뉘엿뉘엿 석양이 지는 가운데 이제는 지정석처럼 되어 버린 야외 테이블에 앉은 석원이 아까부터 자꾸 간지러운 왼쪽 귀를 후벼팠다.
“누가 내 이야기를 하나…….”
눈살을 찌푸린 석원은 입맛을 다시면서 조금 전 사 온 월스트리트 저널을 펼쳤다.
[영국 파운드 재앙적인 폭락!18일 기준 영국 파운드화가 추락을 거듭해 파운드당 1.18달러까지 떨어졌다.
전문가들은 영국 정부의 ERM 탈퇴 결정에 따른 충격파에 한동안 이런 하락세가 계속 이어질 것으로 예상했다.
지난 16일 영국 정부는 ERM 탈퇴를 전격 선언하면서 파운드화를 1유로당 1.6달러로 고정해왔던 기존 정책을 포기했다.
파운드화 가치가 떨어지면 수입품 가격이 급등해 물가가 상승하고 수출 경쟁력이 약화될 것으로 우려되고 있다.
한편 이번 사태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해밀턴을 비롯한 글로벌 헤지펀드들은 파운드화 폭락으로 막대한 차익을 거둔 걸로 알려줬다.
이에 영국 정부는…….]
“이러다가 금방 1달러 밑으로 떨어지겠는데.”
원래 알고 있던 것보다 파운드 폭락이 훨씬 빠르고 가팔랐다.
“아무래도 내가 개입한 영향인 것 같네.”
다른 조건들은 다 똑같았는데 바뀐 건 석원의 존재 하나였으니 그럴 가능성이 컸다.
실제로 그로 인해서 해밀턴의 팬텀 펀드가 원래보다 빨리 그리고 더 많은 자금을 영란은행 공격에 쏟아부었다.
거기에 더해 석원이 올린 수익률에 주목한 살로몬 브라더스 역시 무려 100억 달러를 밀어 넣으면서 파운드화를 더욱더 아래로 끌어 내렸다.
“파운드화가 추락할수록 수익률이 커질 테니 글로벌 헤지펀드들이 악착같이 찍어 누르려고 할 거야.”
안 그래도 어려운 영국 정부 입장에서는 정말 지옥같고 이가 갈리는 상황일 터였다.
하지만 조금만 약한 모습을 보이면 득달같이 달려들어서 물어뜯는 비정한 약육강식의 세계가 바로 국제금융시장이었기에 어쩌면 당연한 결과이기도 했다.
이런 분위기라면 목표가를 조금 더 낮춰도 괜찮을 것 같았지만 그는 이내 머리를 가로저었다.
“욕심이 과하면 화를 부른다는 말처럼 원래 계획대로 가는 게 맞아.”
1센트만 낮춰 포지션을 청산해도 최소 수백만 달러의 수익을 추가로 더 거둘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감하게 포기할 수 있는 건 다른 걸로 또 다른 잭팟을 터트릴 준비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들 ERM 탈퇴로 영국 경제가 나락으로 갈 거라고 하지만 과연 그럴까.”
물가는 상승할지 몰라도 그동안 높게 고정된 환율에 어려움을 겪던 수출 기업들한테는 판매 가격이 떨어지는 효과가 있으니 오히려 호재였다.
“포지션을 청산하고 들어온 수익금을 전부 다시 영국 증시에 넣으면 얼마 안 가서 몇 배로 부풀려져 있을 거야.”
고작 몇백만 달러를 더 벌려고 파운드 청산을 미루는 것보단 조금 뒤 크게 튀어 오를 영국 주식을 미리 대량 매입해두는 것이 훨씬 현명한 일이었다.
곧 다시 터질 잭팟을 기대하며 석원이 혼자 히죽히죽 웃고 있을 때 테이블 위로 긴 그림자가 졌다.
“여기 있었네! 한참 찾았잖아.”
고개를 들자 야구 모자를 눌러쓰고 목에 헤드폰을 걸친 로이가 서 있었다.
“여긴 어쩐 일이야?”
의아한 얼굴로 석원이 상체를 바로 세웠다.
강의도 제멋대로 째면서 방에 눌러 붙어있던 녀석이 어쩐 일로 여기까지 왔나 싶었다.
“아 빠듯하네…… 야 시간 없으니까 일어나.”
다급히 손목시계를 확인한 로이가 지푸라기처럼 퍼석퍼석한 머리카락을 신경질적으로 긁더니 다시 야구모자를 고쳐 썼다.
“뭔데?”
“급하다니까. 얼른!”
로이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급하다는 말만 반복하면서 빈자리에 놔둔 석원의 백팩을 마음대로 집어 들었다.
“자자, 일어나. 시간 없어!”
한쪽 팔을 잡고 끌어당기자 저도 모르게 어어하면서 일어난 석원이 물었다.
“아니 뭣 때문에 그러냐니까?”
“가면서 말해줄 테니까 어서 서둘러!”
석원의 등을 떠민 로이는 억지로 헬멧을 푹 덮어씌우더니 스쿠터 뒤에 태우고 바로 출발했다.
부르릉-!
“야! 어디 가냐고!”
엉겁결에 납치를 당하게 된 석원이 뒤에서 마구 소리쳤다.
하지만 엔진 소리에 안 들리는 건지 아니면 그냥 무시하는 건지 몰라도 앞에 탄 로이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계속 스쿠터를 몰면서 어딘가로 급하게 달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