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lden Spoon Investment Portfolio RAW novel - Chapter (160)
금수저 투자백서 160화(160/231)
160. 어쩔 수 없지. 여차하면 내가 나서는 수밖에.
다음날.
여의도 대흥 증권 본사 5층에 위치한 트레이딩 센터는 여느 때하고 다름없이 쉬지 않고 울려대는 전화벨 소리와 수화기를 붙잡고 큰 소리로 주문을 내거나 받는 트레이더들의 목소리로 시끄러웠다.
따르르릉! 따르르릉!
“백제 종금, 이만 천 원에 천이백주 매도!”
“현우 자동차 주가가 왜 이래? 뉴스가 나온게 있나 확인해봐!”
“만 천 이백원에 현우 중공업 이천주 매수.”
“브랜트유 가격 얼만지 체크해줘!”
“조금 전에 사성전자 주문 넣은 거 확인해줘!”
넓은 사무실 한편을 차지하고 있는 투자 4팀 역시 매매를 하느라 바쁘긴 마찬가지였다.
반팔 와이셔츠에 넥타이 매듭을 느슨하게 맨 정환엽 대리가 미간에 주름을 잔뜩 만든 채 CRT 모니터를 집중해서 쳐다보고 있었다.
책상에 두 대가 나란히 설치된 배불뚝이 모니터 위에서 계속 움직이는 숫자들을 뚫어질 듯 주시하던 정환엽 대리는 당이 떨어지는지 서랍 속을 더듬어 동그란 통에 들어있는 사탕을 하나 꺼냈다.
그러고는 눈을 여전히 모니터에 고정시킨 채 껍질을 까서 입에 넣고는 까득까득 소리를 내며 깨먹었다.
그러다 매수한 종목이 살짝 반등하나 싶더니 이내 힘없이 흘러내리자 인상을 쓰며 짧게 혀를 찼다.
“쯧.”
더 들고 갈지 아니면 여기서 손절할지 잠시 망설이던 정환엽 대리는 입속으로 사탕을 굴리면서 중얼거렸다.
“미련을 두면 손실만 커질 뿐이지.”
그러곤 가지고 있던 물량을 전부 매도했다.
다행히 저가 매수세가 꽤 들어와서 매도 주문을 내자 오래지 않아 전부 체결됐다.
이번 거래로 이천만 원을 넘게 잃은 정환엽 대리의 얼굴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그나마 오전에 벌어둔 것이 있어 수익률이 마이너스가 되진 않았지만 오늘 하루 헛일을 했다고 생각하자 입맛이 썼다.
“하아…… 그래도 빠르게 팔아치운 게 옳은 판단이긴 했네.”
방금 손절한 종목 주가가 계속 미끄러져 내리는 모습을 보니 조금 위안이 되었다.
그때 옆으로 다가온 최호근 팀장이 어깨를 가볍게 툭 치며 말을 걸었다.
“어때. 좀 벌었어?”
“어휴 말도 마십쇼. 방금 손절을 치면서 똔똔이 됐어요.”
정환엽 대리가 의자에 앉은 채 몸을 뒤로 기대며 손사래를 쳤다.
그러자 모니터 화면을 힐끔 살펴본 최호근 팀장이 어이구, 하는 소리를 냈다.
“진짜네?”
“오늘도 장이 별로예요. 저 말고 다른 사람들도 영 재미를 못 봤을걸요.”
정환엽 대리가 머리를 흔들며 투덜거렸다.
“야. 장이 안 좋아도 우린 돈을 벌어야되는 거 알지?”
섭섭하게 들릴 수도 있었지만 어떤 상황에서든 돈을 벌고 목표치를 달성해야 되는 것이 바로 주식 트레이더였다.
정환엽 대리 역시 잘 알고 있었기에 딱히 서운해하진 않았다.
다만 판단을 잘못해서 기껏 벌어둔 걸 까먹은 게 아쉽고 화가 날 뿐이었다.
최호근 팀장은 그런 정환엽 대리를 슬쩍 보고는 위로하듯 말했다.
“매일 벌었으면 좋겠지만 가끔 이런 날도 있는 게 세상 사는 거 아니겠어.”
“본부장님은 항상 홈런을 치시잖아요.”
“임마, 본부장님은 특별하신 거고. 뱁새가 황새 따라가다 가랑이가 찢어진다는 말도 못 들었냐.”
“제가 뱁새라는 거예요?”
“그럼 황새인 줄 알았냐.”
정환엽 대리는 반박을 못 하겠다는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그가 생각해도 석원이 시장을 보는 안목과 판단력은 정말 놀라울 정도였으니 뭐라 할 말이 없었던 거였다.
오죽했으면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겪으며 시장에서 살아남아 경력을 쌓아서 자존심이 센 팀장들도 석원의 말이라면 군말 없이 따를 정도였다.
“하긴 본부장님이 규격 외이긴 하죠.”
정환엽 대리가 한 손으로 머리를 긁적이며 순순히 수긍했다.
“괜히 마음 급하게 덤벼들다 보면 실수를 하게 되는 법이니까. 남은 시간 동안 손해 본 걸 억지로 메꾸려고 하지 말고 오늘은 적당히 이 정도에서 마무리를 지어.”
“네.”
건성으로 대답하는 모습에 최호근 팀장은 한소리 더 하려다가 그냥 그만뒀다.
어차피 정환엽 대리가 신입도 아니고 이 정도면 충분히 알아들었을 터다.
대신 최호근 팀장은 기운 내라는 듯 손바닥으로 등을 두드렸다.
“오늘 끝나고 회사 근처에 있는 오돌뼈 가게에서 소주나 한잔 하자. 어때?”
“앗. 팀장님이 사시는 겁니까?”
갑자기 의욕이 솟아난 정환엽 대리가 반짝거리는 눈으로 물었다.
“으이그. 그래, 내가 산다 사!”
“역시 팀장님뿐이라니까요.”
“정드니까 웃지 마.”
퉁명스럽게 대꾸한 최호근 팀장이 팔짱을 끼고 돌아섰다.
그래도 축 처져 있던 놈이 기운을 다시 차린 것 같아 입가에 옅은 미소를 지으며 자기 자리로 돌아가려고 할 때.
책상 앞에 앉아 있던 유석현이 뭔가를 보곤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고개를 들어 말했다.
“어! 팀장님 방금 후정 건설에 호재가 떴습니다.”
“응?”
후정 건설이라는 말에 최호근 팀장이 발걸음을 멈추고는 유석현을 봤다.
“어떤 호재야?”
“후정 건설이 종로에 지은 사옥을 130억 원에 매각한다고 합니다.”
“사옥을 팔았다고?”
“네.”
곧장 키보드를 두드려 후정 건설 주가를 확인한 정환엽 대리가 짧게 휘파람을 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약세더니 바로 반등해서 벌써 300원이나 올랐는데요.”
최호근 팀장은 얼른 몸을 돌려 정환엽 대리가 모니터에 띄워 놓은 후정 건설 주가를 보고는 탄성을 터트렸다.
“정말이네.”
[후정 건설 4,530 ▲ 300]며칠 전 회의에서 석원이 곧 호재가 있을 거라며 후정 건설 주식을 매수하라고 지시했던 걸 떠올린 최호근 팀장은 내심 감탄했다.
“이거 반등이 꽤 세게 올라오겠는데요. 이것도 본부장님이 픽한 종목이죠?”
“그래.”
“이야. 본부장님은 정말 못 당하겠네요.”
정환엽 대리가 졌다는 듯이 머리를 절레 흔들었다.
어떻게 오를 종목을 기가 막히게 쏙쏙 뽑아내는지 신기할 정도였다.
그때 홍재희가 수화기를 한쪽 손에 들고 말했다.
“팀장님! 본부장님 전화세요.”
그러자 최호근 팀장이 얼른 홍재희가 있는 자리로 가서 수화기를 건네받았다.
“네. 본부장님 전화 바꿨습니다.”
[후성 건설에 호재가 뜬 거 봤죠?]“방금 확인했습니다.”
전혀 들뜬 기색 없이 차분한 목소리로 석원이 말했다.
[주당 5천 원을 넘기면 바로 사들인 물량을 전부 매도하도록 해요.]“바닥을 찍고 더 올라갈 가능성이 큰데 그렇게 빨리 말입니까?”
[130억이 작은 액수는 아니지만 주가가 하락한 근본 원인인 후정 건설의 재무 악화를 완전히 해소해줄 정도는 아니잖아요.]날카로운 지적에 최호근 팀장은 바로 말뜻을 알아차렸다.
“일시적 반등이라는 말씀이시군요.”
[그래요. 그러니까 반등했을 때 털고 나오라는 거예요.]“알겠습니다.”
[다른 팀장들한테도 지시를 전달하고, 한꺼번에 매도하면 주가가 꺾일 수 있으니까. 적당히 물량을 잘 조절해서 순차적으로 팔도록 해요.]“그렇게 하겠습니다.”
통화를 끝낸 최호근 팀장은 한 수가 아니라 두 수, 세 수 앞을 내다보고 움직이는 석원의 모습에 다시 한번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 * *
책상 앞에 앉은 채 수화기를 내려놓은 석원은 후정 건설 주가를 띄워 놓은 모니터를 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럴 때 더 욕심을 부리거나 잘못 들어갔다가는 그대로 발목이 잡혀 버리는 거지.”
기대감에 반짝 반등했다가 실망해 매물이 다시 쏟아지면 그때는 더 아래로 추락할 가능성이 컸기에 오히려 안 좋은 신호였다.
그때 나성미가 노크를 하고 들어와 가지런히 정돈한 신문들을 책상 위에 내려놨다.
“오늘자 석간신문 초판입니다.”
“아, 고마워요.”
나성미는 살짝 고개를 숙였다가 바로 하고는 밖으로 나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으며 석원이 제일 앞에 있는 석간신문을 집어 들었다.
윤전기를 돌려 갓 인쇄한 초판이라 그런지 신문에서 잉크 냄새가 아직도 진하게 나는 것 같았다.
회귀 전이라면 인터넷으로 모든 걸 검색하거나 살펴봤겠지만 아직은 그게 활성화되어 있지 않았기에 어쩔 수 없이 뉴스나 신문 기사에 의존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석원도 이렇게 매일 신문 초판을 받아서 읽는 게 습관이 되어 버렸다.
신문을 책상 위에 펼쳐놓고 꼼꼼히 읽으며 한 장씩 넘기던 석원의 눈에 기사 하나가 들어왔다.
[삼풍백화점 폭파 철거 결정무리한 증축과 설계 변경으로 붕괴 위험에 있다는 진단을 받고 파산한 삼풍백화점을 다음 달 29일 폭파 방식으로 철거하기로 결정됐다.
1989년에 개점한 삼풍백화점은 지하 4층, 지상 5층 규모의 대규모 쇼핑 시설로 단일 매장 규모로 국내 1위의 대형 백화점이다.
강남 한복판에 위치한 최고급 백화점으로 명성이 높았지만 불법 증축과 설계 변경 등으로 인해 건물이 언제 붕괴할지 모를 정도로 위험한 상태라는 것이 밝혀지면서 시민들에게 큰 충격을 줬다.
조사 과정에서 건물 설계 변경을 위해 공무원에게 뇌물을 건네는 등 여러 가지 불법 행위를 한 것이 드러나면서 현재 경영진은 재판을 받는 중이고 백화점은 부도가 났다.
그렇게 파산한 삼풍백화점 부지를 얼마 전 낙찰 받은 대흥 그룹이 기존 건물을 폭파 방식으로 전부 철거하고 새롭게 미도파 백화점 강남점을 지을 계획이다.
불과 400m 떨어진 곳에 대단지 아파트가 있어 우려의 목소리도 있지만 서울시와 대흥 그룹은 시민들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붕괴 위험이 있는 건물의 신속한 철거가 필요해 폭파 방식을 선택했다고 밝혔다.
아울러 전문가들의 충분한 검토와 안전 대책을 수립하고 철거 작업을 진행…….]
“철거 날짜가 6월 29일이라…….”
백화점 신축을 위해 조만간 기존 건물을 철거할 거라는 건 아버지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런데 철거 날짜가 6월 29일이라는 걸 보곤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회귀 전 끔찍했던 삼풍백화점 붕괴 참사가 벌어진 날짜가 바로 6월 29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운명을 바꿔도 원래대로 돌아가려는 관성이 있다더니 이게 그런 건가.”
흉물이 되어 남아 있던 삼풍백화점 건물이 철거된다고 하니까 이제 정말 붕괴 사고가 일어날 일말의 확률마저 없어지는 거였기에 가슴이 후련해지는 느낌도 있었다.
뒤로 몸을 기댄 석원은 팔짱을 낀 자세로 신문에 실려 있는 삼풍 백화점 건물 사진을 내려다봤다.
“문제는 이제 곧 IMF가 닥쳐온다는 건데.”
신축 예정인 강남점 건축비가 인테리어 비용을 포함해 무려 2천 280억이었다.
미도파 백화점의 연간 매출액에 육박하는 엄청난 액수였다.
은행에서 대출을 받아 충당한다지만 이자가 작지 않을 건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었다.
“거기다가 부지를 낙찰받는데도 가지고 있던 현금을 다 쓰고 그걸로도 부족해서 은행 돈까지 끌어다가 넣었지.”
이렇게 되면 기껏 부실 계열사를 정리해서 아낀 돈이 몽땅 은행 대출 원금과 이자를 갚는데 다 들어가게 생겼다.
여기까지는 당장 허리띠를 졸라매서라도 어떻게든 헤쳐나갈 수 있겠지만 문제는 곧 닥칠 IMF였다.
수천억에 달하는 대출은 IMF 사태가 터지면 그룹에 엄청난 부담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아니 IMF까지 안 가더라도 당장 내년에 들어올지도 모를 적대적 인수합병을 막아내는데도 큰 걸림돌이 될 거야.”
무리한 강남점 신축으로 인해 미도파 백화점 재무 상태가 안 좋아지면 상대편이 공격하는데 좋은 빌미가 될 터였다.
거기에 더해서 적대적 인수합병을 방어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현금이 필요한데 주머니가 텅 비어 있다면 수비가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백화점 경쟁에서 도태되지 않으려면 삼풍백화점 부지를 놓칠 수도 없으니…… 정말 딜레마네.”
미간을 좁히며 한참 동안 고심한 석원은 이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쩔 수 없지. 여차하면 내가 나서는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