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lden Spoon Investment Portfolio RAW novel - Chapter (166)
금수저 투자백서 166화(166/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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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6월 29일.
한여름의 뜨거운 햇살이 내리쬐는 서울 도심 한복판.
건물 붕괴 우려로 영업이 중단된 이후로 흉물로 남아 있던 삼풍 백화점 주위에 바리케이트가 쳐지고 삼엄한 분위기 속에 경찰관들이 나와 주위를 통제하고 있었다.
바로 오늘이 최고급 백화점의 대명사로 불렸던 삼풍 백화점을 폭파 공법으로 철거하기로 예정된 날이었다.
만에 하나 있을지 모를 사고에 대비해 인근 주민들을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키고 주변 교통도 통제됐다.
주변 접근을 자제해 달라고 서울시와 경찰에서 부탁했지만 국내에서 잘 볼 수 없는 폭파 철거인 데다 강남을 상징하는 랜드마크 같은 삼풍 백화점이었기에 마지막 모습을 보려는 인파들이 철거 현장 주위로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삑삑!
“거기! 위험하니까. 어서 통제선 밖으로 나가세요!”
“거 되게 깐깐하게 구네. 도로 건너편에 백화점이 있는데 이 정도는 괜찮잖아.”
손자를 데리고 구경을 나온 듯한 노인의 말에 경찰관이 호루라기를 입에 문 채 손사래를 치며 외쳤다.
“그래도 안 되니까 뒤로 물러나세요!”
“에잉, 융통성도 없는 양반 같으니라고.”
중절모를 쓴 노인은 투덜거리면서 손자 손을 잡고 마지못해 노란색 통제 라인 뒤로 물러났다.
이처럼 사방에서 구경꾼들이 모이자 어디서 나타났는지 귀신같이 노점상들이 나와 음식과 물건을 팔기 시작했다.
“콜라~ 사이다 있어요.”
“시원한 부채 사세요. 부채.”
노점상들이 크게 소리를 치며 호객을 하는 가운데 구경꾼 사이에 끼어 있던 초등학교 저학년쯤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가 솜사탕 수레를 보곤 엄마 손을 흔들었다.
“엄마, 나 솜사탕 사줘!”
“단 거 많이 먹으면 이 썩어.”
“아 그래도 솜사탕 먹고 싶단 말이야. 빨리 사줘어어.”
아이가 계속 칭얼대자 엄마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솜사탕 수레로 가서 지갑을 꺼내 들었다.
“얘 고집은 진짜 누굴 닮았담. 아저씨, 솜사탕 하나에 얼마예요?”
“아이고 감사합니다. 500원만 주세요.”
“여기요.”
주인은 동전을 받아 앞치마에 챙겨 넣고는 신난 얼굴을 아이를 보며 물었다.
“어떤 걸로 줄까? 골라 봐.”
분홍색, 파란색, 흰색 등 솜사탕 색깔도 다양했다.
아이는 손으로 만지면 폭신폭신하게 푹 들어갈 것 같은 솜사탕들을 이리저리 구경하더니 이내 손가락을 쭉 뻗어 가리켰다.
“저기 흰색으로 주세요!”
“알았다.”
주인이 얼른 솜사탕을 빼서 건네주자 아이가 헤헤 웃으며 받아들었다.
그렇게 사람들로 북적이는 가운데 짙은 라이벤 선글라스를 끼고 푸른색 양복을 입은 석원이 통제선 쪽으로 다가갔다.
“정지, 정지!”
선 앞에 서 있던 젊은 의무 경찰이 한쪽 손에 든 경광봉을 들어 올려 제지하며 말했다.
“더 들어오시면 안 됩니다.”
그러자 석원이 발걸음을 멈춰 세우고는 입을 뗐다.
“관계자입니다.”
“예?”
의무 경찰이 수상쩍은 시선으로 그를 아래위로 훑어보곤 말했다.
“신분증을 보여주시겠습니까?”
석원이 안주머니에서 사원증을 꺼내려고 할 때 누군가 의무 경찰관 등 뒤에서 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본부장님 오셨습니까!”
시선을 들어서 보자 최장열 미도파 백화점 상무가 직원 한 명과 함께 황급히 걸어오고 있었다.
“미리 마중을 나와 있었어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최장열 상무가 낭패한 기색으로 고개를 숙였다.
“괜찮아요. 가뜩이나 바쁠 텐데 괜히 제가 온다고 해서 번거롭게 한 것 같아 미안하네요.”
“아닙니다.”
속으로 더욱 진땀을 흘린 최장열 상무는 석원의 표정을 살피며 얼른 손사래를 쳤다.
“폭파 예정 시간까지 20분밖에 안 남았으니까 일단 들어가시죠.”
“그러죠.”
짧게 답한 석원은 성큼 통제선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현장을 총 관리하는 최장열 상무가 직접 마중을 나와 굽실거리는 모습에 의무 경찰도 눈치껏 노란 통제선을 열어줬다.
그러고는 안쪽에 쳐진 대형 통제 천막으로 향하는 석원의 뒷모습을 보면서 중얼거렸다.
“나이도 얼마 안 되어 보이는데 저렇게 쩔쩔매는 걸 보면 회사에서 엄청 높은 사람인가 보네. 재벌 3세라도 되나?”
그렇게 신기한 걸 보듯 힐끔거린 의무 경찰은 곧 다시 통제선 안으로 슬금슬금 들어오려는 구경꾼을 보고 재빨리 호루라기를 불었다.
“아저씨! 거기 들어오시면 안 된다니까 그러네!”
“에이 구경 좀 하면 어때서 그래!”
“안 된다고요. 거참!”
사방이 와글와글 시끄러운 가운데 함께 걸어가던 최장열 상무가 옆에 있던 직원한테서 안전모를 받아 내밀었다.
“불편하시겠지만 안전을 위해 이걸 착용하셔야 됩니다.”
“아, 그럼요.”
석원은 귀찮은 기색 없이 순순히 안전모를 받아 머리에 썼다.
그런 모습을 보고 최장열 상무는 속으로 약간 안심한 표정을 지었다.
그간 소문으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전해 듣긴 했지만 직접 겪어본 적은 없어 석원이 어떤 스타일인지 잘 알지 못했는데 걱정과 달리 까탈스럽지 않고 털털한 성격이라는 걸 느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그 하나쯤은 언제든 말 한마디로 잘라 버릴 수 있는 오너 직계였기에 마음을 놓지 않고 조심스럽게 석원을 대하긴 마찬가지였다.
‘성격만 좋은 맹탕이 아니라 증권사 자체 운용 수익을 단번에 몇 배나 끌어 올린 능력자라니. 이런 스타일이 더 무서운 법이지.’
일반 직원이라도 이만한 실적을 낸다면 큰 주목을 받았을 텐데 하물며 그 주인공이 박태홍 회장의 둘째 아들이었으니 더 말할 필요가 없었다.
‘박태홍 회장이 큰아들로 일찌감치 승계 구도를 확정지어 뒀으니 관심 정도로 끝났지. 아니었다면 둘째 아들 쪽에 꽤 많은 고위 임원들이 줄을 대려고 했을 거야.’
그 정도로 석원이 보여준 능력과 성과가 놀라운 수준이었다.
대형 천막을 쳐서 만든 통제소에 들어서자 노란색 안전모를 쓰고 소방 관계자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민필기 사장이 그를 먼저 발견하곤 다가와서 반겼다.
“어서 오십시오.”
가볍게 악수를 나눈 석원이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괜히 제가 귀찮게 한 건 아닌지 모르겠네요.”
“하하, 그럴 리가 있습니까.”
민필기 사장은 크게 웃음을 터트리며 석원을 친숙하게 대했다.
그룹 후계 구도는 큰아들인 박진형 사장으로 굳어졌지만 그렇다고 석원이 맨손으로 쫓겨나는 신세가 되는 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증권 쪽에서 확실히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면서 대흥 증권을 비롯한 몇몇 계열사를 받아 그룹에서 계열 분리를 해나가게 될 거라는 예상이 지배적이었다.
그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고위 임원들도 한차례 크게 물갈이가 되면서 자리를 이동하게 될 가능성이 컸기에 민필기 사장은 미리부터 친분을 만들어두려고 더욱 살갑게 그를 대했다.
민필기 시장의 안내를 받아 통제소 안에 있던 경찰과 소방 고위 관계자들하고도 간단히 인사를 나눈 석원은 한 손으로 선글라스를 벗으며 정면에 우뚝 서 있는 삼풍 백화점 건물을 올려다봤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강남의 랜드마크이자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던 장소답게 두 개의 커다란 콘크리트 건물 사이에 연결 통로를 이어붙여 만들어진 백화점 건물은 크고 웅장한 느낌을 줬다.
넓은 벽면에는 급박하게 내려진 영업 정지와 폐쇄 조치로 인해 미처 치우지 못한 여름 정기 세일 대형 현수막이 그대로 붙어 있었다.
‘저게 무너져서 사람들을 덮쳤단 말이지.’
석원은 아득한 기분을 느끼며 눈살을 찌푸렸다.
끔찍한 초대형 참사가 발생해 온 국민들에게 지워지지 않는 슬픔과 깊은 상처를 안겨줬을 사고의 근원이 오늘 이 순간 이후 영원히 사라진다고 생각하자 깊은 안도감이 몰려들었다.
그리고 동시에 아무런 사고 없이 무사히 철거가 끝나길 마음속으로 기도했다.
그렇게 복잡한 심정으로 백화점 건물을 바라보고 있을 때 민필기 사장이 옆에서 말을 걸었다.
“저렇게 큰 건물이 눈 깜짝할 순간에 철거된다니 정말 대단하지 않습니까.”
“그렇네요. TNT로 폭발시킨다고 했었죠?”
석원도 잡념을 지우며 대답했다.
“네. 건물 전체에 천개가 넘는 구멍을 뚫고 230㎏이나 되는 TNT를 설치했습니다. 아주 어려운 고난도의 작업이라 폭약 설치에만 꼬박 사흘이 걸렸을 정도입니다.”
“조금만 실수를 해도 곧바로 대형 사고로 이어질 수 있으니 세심하게 작업할 수밖에 없겠죠.”
“맞는 말씀입니다.”
“230㎏이나 되는 TNT를 한 번에 터트리는 폭발력이 엄청날 텐데. 혹시라도 건물이 엉뚱한 방향으로 쓰러지는 일이 없도록 사전 시뮬레이션을 철저히 해봤겠죠?”
석원의 물음에 민필기 사장이 자신 있게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이번 철거를 위해 상당한 돈을 지불하고 미국 업체를 국내로 불러 직접 작업을 맡겼으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그러고 보니 현장에서 안전모를 쓰고 돌아다니는 사람들 가운데 외국인들이 적지 않게 눈에 띄었다.
“그래도 혹시 있을지 모를 사고에 대비해서 반경 500m 안에 있는 주민들을 모두 대피시켰습니다. 충격파에 유리창이 깨지는 일이 없도록 창문도 판자로 전부 막는 안전조치를 취했고요. 거기에 구급차도 10대나 대기시켜뒀지요.”
민필기 시장이 한쪽 팔을 들어서 가리키는 곳을 보자 적십자 마크가 그려진 구급차 10대가 통제가 이루어진 도로 한쪽에 나란히 세워져 있었다.
그리고 구급차 옆에서는 흰색 가운을 입은 의사와 간호사들이 역시나 철거 장면을 구경하려고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최근 연이어 터지는 대형 재난 사건 때문인지 꽤나 신경 써서 안전조치를 취한 듯한 모습에 석원이 내심 고개를 끄덕이고 있을 때 최장열 상무가 슬쩍 끼어들었다.
“폭파 예정시간이 다 됐습니다.”
그러자 민필기 사장이 소매를 걷어 손목에 찬 시계를 확인하곤 말했다.
“벌써 이렇게 됐군.”
민필기 사장은 석원에게 딱 붙어 천막 안쪽을 가리켰다.
“안쪽에 자리를 마련해 뒀으니 그리로 가시죠.”
그렇게 어깨를 나란히 하고 천막 안쪽으로 향하자 민필기 사장이 팔짱을 낀 자세로 서 있는 한 백인 중년 사내를 가리켰다.
“철거 감독을 맡은 바이겔 씨입니다.”
딱 벌어진 어깨에 검게 햇볕에 그을린 피부가 다부진 인상을 주는 사내였다.
누가 봐도 현장에서 오래 구른 티가 나는 베테랑이었기에 석원이 먼저 손을 내밀며 인사했다.
“멋진 쇼를 기대 하겠습니다.”
그러자 안전모를 머리에 쓰고 청바지에 검은색 셔츠를 입은 바이겔이 씨익 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곧 환상적인 장면을 볼 수 있을 겁니다.”
그러면서 자신 있게 성공을 장담하는 태도가 무척이나 여유가 넘쳤다.
폭파 시간이 임박해 길게 이야기를 나눌 여유가 없었기에 그 정도로 짧은 대화를 끝낸 석원은 민필기 사장과 함께 준비된 간이 의자에 앉았다.
석원이 손목에 찬 시계를 보자 12시 5분 전이었다.
잠시 뒤 시끄러운 사이렌 소리가 울리며 경고 방송이 흘러나왔다.
애애애애앵!
[5분 뒤, 건물 폭파가 있을 예정입니다. 백화점 주위에 계신 분들은 지금 즉시 안전한 구역으로 대피해 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번 알려드립니다. 곧 폭파 철거가…….]사이렌 소리와 경고 방송이 거듭해서 반복되자 구경꾼들로 시끄럽던 주위가 일순 조용해지며 주변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통제선을 지키던 경찰관들도 몸을 뒤로 돌리고는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풍기는 백화점 건물을 바라봤다.
[작업자 전원 철수 확인됐습니다.]“라저.”
무전기로 현장 작업 반장과 교신을 나눈 바이겔은 기폭 장치에 연결된 안전장치를 풀고 스위치를 누르려다가 문득 옆자리에 앉아 있는 석원을 쳐다봤다.
마침 시선을 돌리던 석원과 눈이 마주치자 바이겔이 턱으로 간이 책상 위에 설치된 기폭 스위치를 가리키며 말했다.
“직접 눌러보시겠습니까.”
“그래도 될까요?”
“하하! 그럼요. 평생 잊지 못할 아주 짜릿한 경험이 될 겁니다.”
사양하지 않고 머리를 끄덕이자 바이겔이 씩 웃으며 말했다.
“자, 여기 이 스위치를 그냥 힘껏 누르기만 하면 됩니다.”
석원은 잠시 고개를 들어 정면에 보이는 삼풍 백화점 건물을 쳐다보고는 이내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가 내뱉으며 엄지손가락으로 스위치를 꾹 눌렀다.
아주 짧은 정적이 흐른 뒤, 이내 커다란 섬광과 귀를 때리는 강한 폭음이 천지를 진동시켰다.
콰콰콰쾅! 콰앙!
정밀하게 계산되어 건물 곳곳에 설치된 TNT가 일제히 폭발하자 5층 높이의 삼풍 백화점 건물이 불과 10초도 안 되는 찰나의 순간에 마치 성난 파도에 휩쓸린 듯 거대한 먼지구름을 일으키며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
폭발 여파로 주변은 온통 뿌연 연기와 먼지로 가득 찼다.
장엄한 느낌마저 주는 광경에 구경을 나온 사람들은 전부 넋을 빼고 바라봤다.
우려와 달리 주위에 큰 피해를 주지 않고 백화점 건물만 그 자리에 주저앉으며 철거가 성공적으로 끝나자 너나할 것 없이 다들 환호하고 박수를 치며 기뻐했다.
“이야 정말 멋진데!”
“아까 그 소리 들었어? 콰과광 하던 소리!!”
“저 큰 건물을 한 번에 무너뜨리다니 대단해!”
관계자들이 모여 있던 천막 안에서도 박수와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굿!”
바이겔이 엄지손가락을 들어보이며 장난스레 윙크하자 석원도 웃으며 머리를 끄덕였다.
이내 대기하고 있던 소방차들이 주변을 뒤덮은 먼지를 가라앉히려고 급히 물을 뿌리는 걸 지켜보면서 석원은 그제야 마음 한구석에 올려져 있던 무거운 돌덩이 하나가 완전히 치워지는 홀가분함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