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lden Spoon Investment Portfolio RAW novel - Chapter (17)
금수저 투자백서 17화(17/231)
17. 녀석. 이제 정말 다 컸군.
자정이 지난 늦은 밤.
마호가니 원목 가구들로 고풍스럽게 꾸며진 서재 책상에 편한 복장을 한 박태홍 회장이 혼자 앉아 있었다.
얼음과 위스키를 넣은 언더락 잔을 손에 들고 느긋하게 서류를 살피고 있을 때, 서재 문을 가볍게 노크하며 가냘픈 몸매의 중년 여성이 안으로 들어왔다.
바로 박태홍 회장의 아내인 조덕례 여사였다.
50이 넘은 나이인데도 여전히 고운 미모를 간직하고 있는 조덕례 여사는 양손으로 쟁반을 들고 다가와 말을 붙였다.
“일이 많아요?”
“뭐, 이래저래 처리할게 좀 있어서.”
박태홍 회장은 서류를 내려놓고 자연스럽게 허리를 폈다.
“조금 더 있어야 할 것 같으니까 먼저 자.”
“알았어요.”
손수 안주를 준비해 온 조덕례 여사가 하얀 접시를 책상에 내려놨다.
바삭바삭한 과자 위에 햄과 치즈, 반으로 가른 과일을 올린 카나페였다.
“속에 안 좋게 안주도 없이 술을 마시면 어떡해요.”
“많이 마시는 것도 아닌데 뭘…….”
“조금이요?”
조덕례 여사가 책상 구석에 밀어둔 위스키병을 슬쩍 흘겼다.
“커흠.”
괜히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피하자 조덕례 여사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이제 당신도 건강에 신경 쓸 나이라고요.”
“어허, 잔소리 그만해. 나 아직 멀쩡하다고.”
박태홍 회장이 일부러 보란 듯이 팔에 힘을 꽉 주면서 알통을 자랑했다.
“이것 봐. 내 나이에 이런 근육 가지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 것 같아? 쓸데없는 걱정 하지 말고 얼른 들어가서 자기나 해.”
“어휴 고집불통 같으니.”
몸 튼튼한 거 하나 믿고 허세 부리는 건 젊었을 때부터 여전했다.
말을 해도 안 들어 먹을 걸 알았기에 조덕례 여사도 더 이상 귀찮게 하지 않고 대신 접시를 앞으로 밀었다.
“알았으니까 안주라도 챙겨 먹어요.”
“흥.”
박태홍 회장은 콧방귀를 뀌더니 은근 못 이기는 척하면서 손가락으로 햄치즈 카나페를 하나 집어 입에 넣었다.
“당신 정성이 갸륵해서 먹어주는 거야.”
“그럼요. 어련하겠어요.”
조덕례 여사는 서재를 나가면서도 한마디 날리는 걸 잊지 않았다.
“너무 늦게까지는 일하지 마요.”
얼른 가라는 것처럼 훠이훠이 손을 내저은 박태홍 회장은 카나페를 하나 더 집어 먹으면서 투덜거렸다.
“젊었을 때는 안 그러더니 점점 잔소리만 느는 것 같아.”
그래도 다 자길 생각해서 하는 이야기라는 걸 모르지 않았다.
당장 가져온 안주만 해도 군산댁을 시켜도 되는데 직접 만들어서 갖다주지 않았나.
짭짤한 걸 좋아하는 그의 입맛에도 맞고 예쁘게 쌓아 올린 솜씨에서도 정성을 들인 흔적이 났다.
“맛은 있구만.”
박태홍 회장은 몇 개 안 집어먹었는데 벌써 반 이상이 사라진 접시를 보면서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그때 책상 위에 놓여진 전화기에서 벨소리가 울렸다.
누군지 대충 상대를 짐작한 박태홍 회장이 재빨리 손을 뻗어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여보세요.”
[아버지. 저예요.]국제전화라 그런지 감이 멀게 들리는 석원의 목소리에 박태홍 회장이 점잖게 말을 받았다.
“거긴 이제 아침이겠구나.”
[네. 메시지를 확인하고 바로 연락드리는 거예요.]시차가 있어 밤낮이 달랐기에 길성호 실장을 시켜 기숙사 관리인한테 전화하라는 메시지를 남겼다.
“수업에 들어가야 되는 거 아니냐.”
[10시 강의라 괜찮아요.]갑자기 왜 연락을 하라고 했는지 대충 짐작됐지만 석원은 모르는 척하며 물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전화를 하라고 하신 거예요.]박태홍 회장은 책상 한쪽에 올려진 살로몬 브라더스에서 보낸 투자 내역서를 힐끗 쳐다보곤 말했다.
“녀석 다 알면서 시치미를 떼는 거냐.”
[하하. 살로몬 브라더스에서 보낸 우편물이 도착했나 보네요.]수화기를 귀에 댄 채 박태홍 회장이 괘씸하다는 듯 눈썹을 대뜸 치켜올렸다.
“그래 이 녀석아. 얼마나 놀랐는지 하마터면 심장마비가 올 뻔했다고!”
[하하, 워낙 튼튼하셔서 그럴 일은 없을 것 같은데요.]어긋나는 행동 한번 한 적 없이 말 그대로 모범생 그 자체였던 둘째 아들의 처음 보는 능청스러운 모습에 박태홍 회장은 묘한 표정을 지었다.
‘이 녀석 봐라?’
갑자기 달라진 모습이 당황스럽긴 했지만 너무 샌님 같아 은근히 걱정하던 박태홍 회장은 둘째 아들의 이런 변화가 그리 나쁘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원래 둘째 녀석이라면 말 한마디 없이 이번처럼 위험한 투자를 하려는 생각조차 안 했을 테지.’
돌이켜보면 총격 사건 이후로 성격이 많이 바뀐 것 같았다.
‘큰일을 겪고 나면 심경의 변화가 생기는 경우가 있다던데 그런 건지도 모르지.’
사고 소식을 들었을 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심장이 철렁하고 손이 떨렸다.
어쨌든 좋은 쪽으로 바뀐 것이니 다행이라고 생각한 박태홍 회장은 웃으며 말을 받았다.
“예끼 이 녀석아! 애비도 이제 이순(耳順)을 넘겼어. 네 엄마도 하도 건강 챙기라고 잔소리해서 귀에 딱지가 앉을 지경이란 말이다.”
[어머니는 원래 걱정이 많은 성격이라서 그래요. 밖에서 다른 사람들이 보면 절대 그렇게 안 볼걸요.]“입에 발린 소리를 하기는. 그런다고 내가 레버리지를 열 배나 쓴 걸 그냥 넘어갈 것 같아?”
타박하듯 말하는 박태홍 회장이었지만 그래도 싫진 않은지 입이 웃고 있었다.
[눈치채셨어요? 그래도 아직 젊다고 한 건 거짓말 아니에요.]“그래 퍽이나 고맙구나.”
미소 짓던 박태홍 회장은 이내 진지한 얼굴로 목소리를 낮췄다.
“결과가 좋아서 다행이긴 하지만 대체 무슨 생각으로 레버리지를 그렇게나 많이 쓴 거냐.”
그러자 석원 역시 웃음기를 완전히 지우고는 차분하게 대답했다.
[확신이 있었으니까요.]대답을 들은 박태홍 회장은 수화기를 귀에 댄 채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확신이라고 했냐.”
[네. 승리가 보장된 도박이라면 판돈을 최대한 키우는 것이 맞지 않겠어요.]속으로 이놈 봐라라고 생각하며 박태홍 회장이 말했다.
“그랬다가 판단이 틀렸다면 어떻게 하려고 했냐.”
그러자 석원이 머뭇거림 없이 대답했다.
[제가 결정을 잘못한 거니까 그에 따른 책임도 져야 했겠죠.]조금은 무책임하게도 느껴지는 말에 박태홍 회장이 실망한 듯 살짝 이맛살을 찌푸렸다.
“열 배 레버리지면 원금을 훌쩍 넘기는 손실이 날 수도 있었던 건데. 네가 혼자 그걸 감당할 수 있었겠냐.”
결국 문제가 생기면 부모한테 기대려고 한 것 아니냐는 질책이었다.
‘마음만 앞서고 뒷일까지는 생각하지 못한 건가.’
아직 젊으니 그럴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은근히 실망감이 번지려고 하는 찰나, 석원의 심지 곧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물론이에요.]“어떻게 말이냐?”
자신도 모르게 약간 다그치는듯한 말투가 됐지만 석원은 막힘없이 대답했다.
[손실이 원금을 넘기기 전에 포지션이 자동 청산되도록 해놨거든요.]손절 라인을 확실히 그어뒀다는 이야기에 박태홍 회장이 살짝 멈칫했다.
[저도 다 큰 성인인데 설마 제가 아버지를 믿고 책임도 못 질 일을 벌였겠어요.]생각지도 못한 의외의 모습에서 듬직함을 느낀 박태홍 회장은 언제 실망한 기색을 내보였냐는 듯 표정을 가다듬었다.
“흠. 그래도 원금은 다 잃게 되지 않겠냐.”
[아깝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투자에는 항상 위험이 따르는 법이니까 어쩔 수 없죠.]한두 푼도 아니고 무려 1억 달러가 넘는 거액이었다.
박태홍 회장 본인한테도 큰 액수인데 너무나도 담담한 태도에 말문이 막혔다.
‘허 참. 이 녀석 금전 감각이 없는 건지 아님 배짱이 두둑한 건지 도통 모르겠군.’
어찌됐던 한 가지 확실한 건 둘째 아들이 공부만 아는 샌님이 아니라 필요하다면 과감하게 모험을 할 줄도 아는 승부사 기질이 있다는 거였다.
‘회사를 이끌어가는 기업가에게 꼭 필요한 것이기도 하지.’
둘째 아들에 대한 박태홍 회장의 평가가 한 단계 더 올라갔다.
한순간에 기분이 좋아진 박태홍 회장은 손에 든 수화기를 고쳐 쥐면서 말했다.
“아무튼 결과가 좋았으니 다행이다. 내역서를 보니 수익금이 크게 불어났던데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냐?”
그러자 묻길 기다렸다는 듯 석원이 바로 대답했다.
[안 그래도 이야기를 드리려고 했는데 미국에 투자사를 하나 세우려고 해요.]“뭐?”
오늘 여러 번 놀래키는 석원의 말에 박태홍 회장이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본격적으로 투자를 해보겠다는 거냐?”
[예. 미국에 와서 넓은 세상을 보니까 돈을 벌 기회와 아이템들이 널려 있더라고요.]“이번에 파운드화에 투자했던 것처럼 말이지?”
[마침 자본도 생겼으니 머릿속으로 상상만 하던 걸 실제로 시도해보고 싶어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이번 일은 제 예측이 시장에 들어맞는지 확인해보는 테스트에 가까웠거든요.]1억 달러가 넘는 거액을 가지고 시험을 했다니 박태홍 회장은 자신도 모르게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그리고 졸업을 하면 회사에 입사시켜 일을 가르치려고 했는데 석원이 직접 투자사를 만들어 운영하겠다고 하자 적지 않게 당황스러웠다.
“그럼 한국에 돌아오지 않고 계속 미국에 남아 있겠다는 거냐?”
[그건 아직 결정하지 않았어요.]“졸업까지 아직 시간이 있으니 여유를 가지고 고민을 해 보거라. 그리고 이번에 투자한 돈은 네 것이니 어떻게 쓰던 알아서 해.”
너무 큰 거액이었기에 충분히 간섭할 수 있는데도 박태홍 회장이 마음대로 하라고 완전히 맡겨 버리자 석원이 기쁜 목소리로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실망시켜 드리지 않을게요.]“제발 그러길 바라마.”
박태홍 회장이 입가에 얇은 미소를 그렸다.
이렇게 해주는 건 석원이 그만한 결과를 냈고 뭣보다 무언가를 해보려는 확고한 의지를 보여줬기 때문이었다.
“수업에 들어가 봐야 될 테니 그만 끊어라.”
[예. 그럼 다시 연락드릴게요.]수화기를 내려놓은 박태홍 회장은 언더락 잔에 든 위스키를 한 모금 마시며 만족스럽게 중얼거렸다.
“녀석. 이제 정말 다 컸군.”
* * *
“앞서 설명했다시피 브레턴우즈 체제에 의해 달러와 금의 교환비율은 1온스에 35달러로 고정됐어요. 여기에 맞춰 모든 국가들은 이 교환비율에 따라 달러를 내고 미국에서 금을 태환할 수 있었죠.”
머리가 하얗게 샌 노교수가 칠판 앞에 서서 말을 이었다.
“이런 브레턴우즈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가장 중요한 전제조건이 있었는데 그건 바로 미국이 반드시 충분한 물량의 금을 보유하고 있어야 된다는 거죠. 이런 전제하에 회원국들은 자국 화폐를 달러의 교환 가격에 고정하고 환율을 1% 이내에서만 변동할 수 있도록 했어요. 만약 환율이 허용 범위를 넘어서 움직이면 각국 정부들이 외환시장에 개입해 환율을 안정시킬 의무가 있었습니다. 이건 곧 브레턴우즈 체제 안에서 회원국들이 달러와 연계된 관리 변동환율 제도를 선택한 것을 의미하는 겁니다.”
한참 열정적으로 강의를 이어가던 노교수는 갑자기 손목에 찬 시계를 확인하곤 말했다.
“나머지는 다음 시간에 계속하기로 하고 오늘 강의는 여기서 끝내도록 하죠.”
항상 시간을 꽉 채워서 끝내던 것과 달리 20분이나 일찍 강의를 끝내준다는 말에 학생들이 다들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으음. 다들 좋아하는 표정이 아니군요? 그냥 더 할까요?”
“아. 아니요!”
“수고하셨습니다. 교수님!”
우렁차게 대답하는 학생들의 모습에 노교수는 웃으며 교수대 위에 올려둔 책과 노트를 정리했다.
그러다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아 참. 석원 군.”
“네.”
맨 앞자리에 앉아 있던 석원이 갑자기 불린 이름을 듣고 의아한 듯 고개를 들었다.
“오늘 MIT하고 게임대회 결승을 치른다고 들었는데 맞나요?”
“아, 예.”
설마 노교수의 입에서 게임대회 이야기가 나올 줄은 몰랐던 석원이 당황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이웃한 두 학교 학생들이 서로 교류하면서 친하게 지내는 건 정말 좋은 일이죠. 거기에 딱히 승패는 관계없답니다.”
허허 웃던 노교수가 한쪽 눈을 찡긋 감으면서 유쾌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이왕이면 지는 것보단 이기는 게 더 좋겠죠. 나도 응원하고 있으니 시합 잘해요.”
그제야 강의를 왜 빨리 끝내준 건지 이유를 알게 된 석원은 어색하게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노교수가 툭툭 어깨를 두드려주고는 그대로 강의실을 나가자 석원은 자기도 모르게 일이 커져 버린 상황에 머리를 움켜쥐고 끙 소리를 냈다.
고작 게임 대회일 뿐인데 왜 교수한테까지 소문이 나 있는 거냐고!
석원이 심란해하고 있는 와중에도 같이 강의를 듣던 다른 학생들도 일어서 나가면서 가까이 다가와 응원을 던졌다.
“시합하는 곳이 모비딕이지? 보러 갈 테니까 힘내!”
“MIT 공대 너드 자식들 작살내 버려!”
“응원할게! 꼭 우승해라!”
그럴수록 부끄러워진 석원은 벌겋게 달아오르는 얼굴을 손바닥으로 가리면서 백팩을 메고 서둘러 건물 밖으로 나왔다.
“여기야!”
스쿠터를 세워두고 기다리던 로이가 양팔을 흔들면서 반겼다.
“엥 왜 얼굴이 새빨개? 혹시 감기라도 걸렸냐?”
“됐으니까 어서 출발이나 해.”
석원이 스쿠터 뒤에 걸터앉아 재촉하자 로이는 머리를 갸웃거리면서도 순순히 시동을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