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lden Spoon Investment Portfolio RAW novel - Chapter (176)
금수저 투자백서 176화(176/231)
176. 무슨 생각으로 구찌를 인수하신 건지 듣고 싶습니다.
며칠 뒤, 이탈리아 피렌체(Firenze).
영화 “냉정과 열정 사이에서”에 나왔던 회전목마로 유명한 레푸블리카 광장(Piazza della Repubblica) 한 모퉁이 카페 야외 테이블에 훤칠한 키의 동양인 사내 한 명이 선글라스를 끼고 앉아 있었다.
바로 미국에서 일을 끝내고 제이콥 톰슨을 만나기 위해 전용기를 타고 이탈리아로 날아온 석원이었다.
린넨 재킷 안에 흰색 셔츠를 받쳐 입은 석원은 유럽에서도 옷을 잘 입기로 유명한 이탈리아 남자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모습이었다.
오히려 선글라스로 얼굴의 반을 가렸는데도 눈에 확 띄는 외모와 큰 키 때문에 주변 테이블에 앉은 여자들이 힐끔힐끔 훔쳐볼 정도였다.
“주문하신 카푸치노입니다.”
깔끔하게 옷을 차려입은 종업원이 쟁반에 따뜻한 카푸치노를 가져와 석원 앞에 내려놨다.
그러고는 바로 옆 테이블에 조용히 혼자 앉아 있는 경호원 보커스한테도 커피를 가져다줬다.
석원이 찻잔을 들어 향을 맡아보자 커피 원두와 우유의 고소한 향이 느껴졌다.
카푸치노를 한 모금 마신 석원은 아주 진하고 깊은 맛에 작게 머리를 끄덕였다.
“역시 200년이 넘는 전통을 가진 가게라서 그런지 맛이 다르네.”
무려 1733년부터 이 광장에서 카페 영업을 했다고 하니 피렌체가 왜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도시 전체가 지정될 수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어딜 둘러봐도 보이는 고풍스러운 건물과 회전목마 그리고 광장 한쪽에서 바이올린 연주를 하는 거리의 악사까지 영화의 한 장면이 따로 없었다.
뉴욕처럼 하늘 높이 솟은 마천루들이 빽빽하게 들어찬 대도시도 나쁘지 않았지만 여유와 낭만이 흐르고 유유자적 편하게 쉴 수 있는 이런 분위기가 더 마음에 들었다.
파리하고는 또 다른 피렌체의 매력을 느끼면서 석원은 오랜만에 긴장을 풀고 정말 관광이라도 온 듯 지금 이 순간을 즐겼다.
그렇게 여유롭게 카푸치노를 마시며 회전목마를 타는 아이들과 광장을 오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을 때 무언가가 그의 시선을 끌었다.
“저건…….”
선글라스를 쓴 석원이 미간을 팍 찡그렸다.
관광객인지 혼자 카메라를 들고 광장 주변 모습을 찍고 있던 금발 미녀의 곁으로 딱 봐도 수상해 보이는 사내 둘이 어슬렁거리며 다가가는 모습이 보였다.
먼저 한 놈이 길을 물어보는 척하면서 관광용 지도를 여자한테 보여주며 시선을 끌었다.
그사이 다른 사내가 슬쩍 뒤로 가서는 손가락 사이에 숨긴 면도칼로 등에 메고 있는 가방을 찢어 지갑을 훔치려고 했다.
그걸 본 석원은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빠른 걸음으로 여자에게 다가갔다.
“많이 기다렸지?”
손짓을 섞어가며 영어로 레푸블리카 광장에서 몇백 미터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한 두오모 대성당으로 가는 길을 알려주던 여자가 순간 황당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다.
하지만 석원은 대뜸 여자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는 자연스럽게 품 안으로 잡아끌면서 말했다.
“저기 자리를 잡아뒀으니까. 어서 가자.”
“네? 아니. 저기요.”
여자가 뭐라고 말을 하려고 했지만 석원의 강한 힘에 어어 하면서 끌려 왔다.
막 지갑을 꺼내려던 찰나에 방해를 받은 소매치기들이 인상을 쓰면서 쳐다보다가 바로 뒤따라 온 보커스가 위압적인 눈빛으로 노려보자 기세에 눌려 곧장 꼬리를 내리고 사람들 사이로 사라졌다.
“저기요! 사람을 잘못 본 것 같다니까요!”
뒤늦게 정신을 차린 여자가 어깨를 잡은 팔을 홱 뿌리쳤다.
“도대체 뭐예요?”
석원은 발걸음을 멈추고 소매치기들이 없어진 걸 확인했다.
그러고는 선글라스를 벗어 손에 들고는 턱짓을 하며 말했다.
“가방을 확인해봐요.”
“내 가방이 왜요. 설마 소매치기라도 당했을까 봐…… 어?”
백팩을 풀어 살펴보던 여자가 면도칼로 옆이 길게 찢어져 있는 걸 발견하고는 눈을 크게 떴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조금 전에 길을 물어봤던 놈들이 한 짓이에요.”
그러자 여자가 놀란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다.
“한 놈이 앞에서 시선을 끌고 다른 놈이 칼로 가방을 찢어서 여권과 지갑을 훔쳐가는 흔한 수법이죠. 유럽엔 관광객을 노린 소매치기들이 득실득실하니까 항상 조심해야 돼요.”
“아!”
그제야 석원이 자신을 도와준 걸 알아차린 여자는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줄도 모르고 정말 죄송해요.”
정면에서 제대로 보니 모델처럼 날씬한 몸매에 아주 예쁜 미녀였다.
작은 얼굴에 이목구비가 꽉 들어차 있었고, 특히 보석을 박아 넣은 듯 새파란 눈동자가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석원은 딱히 여자의 얼굴에 신경 쓰지 않은 채 무심한 투로 물었다.
“소지품은 그대로 있어요?”
여자는 다급히 가방을 열어서 확인해보더니 지갑과 여권이 있는 걸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네, 무사히 잘 있네요.”
“그럼 됐어요.”
선글라스를 다시 낀 석원이 몸을 돌려서 가려고 하자 여자가 황급히 입을 열었다.
“저기요!”
발걸음을 멈춘 석원이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왜 그러죠?”
“저기…… 하마터면 큰일을 당할 뻔한 걸 도와주셨는데 제가 식사라도 대접할게요.”
“괜찮습니다.”
석원은 약간의 망설임도 없이 바로 제안을 거절했다.
그대로 걸음을 옮기자 건장한 체격의 보커스가 그림자처럼 뒤에 붙어서 함께 광장을 떠났다.
뒤에 홀로 우두커니 남겨진 여자는 당황한 얼굴을 한 채 사람들 사이로 멀어지는 석원을 바라보다가 이내 이마를 한껏 찡그렸다.
“뭐야. 기껏 보답을 하겠다는데 그냥 가버리다니.”
게다가 고민도 하지 않고 바로 돌아서는 모습이 매정할 정도로 쌀쌀맞았다.
살면서 남자한테 이런 취급을 당한 적이 거의 없던 그녀는 부끄러운 마음에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아이. 정말!”
힐끔 뒤를 돌아본 보커스는 작게 헛기침을 하곤 앞서 걸어가는 석원에게 말을 걸었다.
“보스. 저 정도면 상당한 미인인데 조금 아쉽지 않으십니까.”
“딱히 관심 없어요. 그리고 저녁에 약속이 있잖아요.”
“그럼 연락처라도 받아두시지요.”
“뭐 인연이 있다면 또 만나게 되겠죠.”
확실히 과묵한 보커스가 아쉽다는 듯 이야기를 꺼낼 정도로 남자라면 저절로 눈이 갈 만큼 몸매도 좋고 예쁜 미녀이긴 했다.
하지만 애초에 딴생각을 가지고 도와준 것이 아닌데다가 무엇보다 중요한 미팅이 있었기에 석원은 그냥 흘러 지나가는 인연이라고 여기곤 머릿속에서 지워 버렸다.
그리고 때마침 도착한 롤스로이스를 타고는 호텔로 돌아갔다.
* * *
그날 저녁.
일부러 구찌에서 만든 슈트와 구두를 신은 석원은 랜든과 함께 라틴어로 행운, 운명을 뜻하는 포르투나(Fottuna)라는 이름의 고급 레스토랑에 도착했다.
입구로 들어서자 카운터에 있던 여종업원이 이탈리아어로 일행을 향해 물었다.
“어서 오십시오. 예약을 하셨습니까?”
그러자 랜든이 영어로 나서서 대꾸했다.
“알렉산더 빈드만씨를 만나러 왔습니다만.”
“아, 잠깐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미리 전달받은 것이 있는지 여종업원이 어색한 영어로 대답했다.
그러고는 안쪽으로 서둘러 가더니 이내 슈트를 깔끔하게 차려입은 지배인을 데려왔다.
머리에 흰 새치가 나기 시작한 중년의 지배인은 두 사람을 보며 정중하게 이탈리아 억양이 섞인 영어로 말했다.
“빈드만 씨께서 손님들이 오시면 바로 안내해 달라는 말씀이 있으셨습니다. 이쪽으로 절 따라오시죠.”
지배인은 미소 띤 얼굴로 두 사람을 안쪽에 있는 테이블로 안내했다.
레스토랑은 그렇게 넓지 않은 크기에 테이블도 여섯 개밖에 되지 않았다.
대신 테이블 사이 간격이 넓어서 프라이버시를 침해당하지 않고 식사를 하며 대화를 나눌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미쉐린 쓰리스타를 받은 곳이라고 해서 레스토랑이 클 줄 알았는데 생각보단 작군요.”
앞서가는 지배인을 따라 걸음을 옮기면서 랜든이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반쯤 차 있는 테이블에 앉아 있는 손님들은 대체적으로 연령대가 높았으며 하나같이 비싸 보이는 옷차림에 최고급 와인을 마시면서 음식을 즐기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조명이 어둡게 세팅되어 있는 가운데 테이블 주변에만 은은한 불빛이 비치고 있었고 사용되는 식기들도 모두 고급스러운 것이 확실히 소수의 손님을 위한 레스토랑이라는 분위기가 풍겼다.
비교적 조용하면서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피할 수 있는 안쪽 테이블이 일행의 자리였다.
제이콥 톰슨과 같이 앉아 있던 알렉산더 빈드만이 바레인에서 만났던 랜든을 먼저 알아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능숙한 영어로 인사를 건넸다.
“여기서 다시 보게 되어 반갑습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랜든도 상대가 내민 손을 맞잡고 웃으며 말했다.
“이분은…….”
빈드만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옆으로 향했다.
“아, 소개가 늦었군요. 저희 펀드 오너이신 박석원 대표님이십니다.”
아무리 많이 봐도 이제 서른 초반쯤으로 보이는 석원이 월가에서도 손에 꼽히는 엘도라도 펀드의 주인이라고 하자 빈드만이 놀란 시선으로 그를 쳐다봤다.
즐겨 입는 검은색 슈트에 흰색 행커치프로 포인트를 준 제이콥 톰슨 역시 의외라는 표정이었다.
33세인 자신도 디자이너 업계에서 메인 역할을 하기에는 너무 젊다는 이야기를 듣는데 나이가 비슷해 보이는 석원이 수십억 달러의 돈을 굴리는 월가 펀드의 실소유자라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크흠.”
랜든이 헛기침으로 침묵을 깨트리자 퍼뜩 정신을 차린 빈드만이 사과했다.
“이런, 제가 결례를 범했군요. 생각했던 것보다 많이 젊으셔서 놀랐습니다.”
“이해합니다. 대부분 비슷한 반응이거든요.”
석원은 태연하게 대꾸하며 한쪽 손을 내밀었다.
“박석원이라고 합니다.”
“구찌 경영을 맡고 있는 알렉산더 빈드만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그러고는 빈드만이 자연스럽게 옆에 있는 제이콥 톰슨을 소개했다.
“이 친구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인 제이콥 톰슨입니다.”
한때 모델을 했을 만큼 큰 키에 비율이 좋은 톰슨이 석원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말했다.
“제이콤 톰슨입니다.”
석원도 미소를 지은 채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했다.
“명성은 많이 들었습니다. 특히 봄 패션쇼에서 선보인 작품들이 상당히 인상적이더군요.”
그러자 톰슨이 눈을 반짝이고는 도발적인 질문을 던졌다.
“구체적으로 어떤 부분이 좋았는지 말씀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무례해 보일 수도 있는 행동이었지만 그냥 빈말로 한 칭찬인지, 아니면 정말로 구찌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는 건지 알 수 있었기에 빈드만도 흥미로운 눈빛으로 석원을 쳐다봤다.
“중후한 귀족 같은 구찌 스타일이 이 시대에는 다소 진부하고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데. 전에 없던 세련된 섹시함이 가미되면서 새로운 매력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석원은 당황하는 기색 하나 없이 태연히 대답했다.
자신이 구찌 브랜드에 집어넣고 싶었던 걸 마치 속마음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듯 콕 찍어서 이야기하자 톰슨은 내심 깜짝 놀랐다.
잔뜩 품고 있던 경계심이 조금 무뎌짐과 동시에 석원에 대한 호감도 생겨났다.
빈드만 역시 단순히 구찌를 돈으로 보지 않고 브랜드에 대해 제대로 알고 이해를 하고 있다는 걸 느끼고는 작게 머리를 끄덕였다.
그러곤 처음보다 한결 부드러워진 태도로 사람들을 향해 말했다.
“대충 인사는 다 나눈 것 같으니 이제 그만 자리에 앉도록 합시다.”
“그러죠.”
석원이 대답하자 이내 네 사람은 서로 마주 보며 테이블에 자리했다.
“주문은 뭘로 하시겠습니까?”
대기하고 있던 지배인이 직접 메뉴판을 건네면서 물었다.
석원은 메뉴판을 훑다가 와인 리스트에서 잠시 시선을 멈췄다.
“첫 번째 와인은 페라리 리제르바가 괜찮은 것 같은데 어떻습니까.”
이탈리아에서도 유명한 전통 와이너리에서 만든 스푸만테였다.
“훌륭하신 선택입니다.”
빈드만이 호감 어린 얼굴로 말했다.
기포가 강한 이탈리아 스파클링 와인을 스푸만테(Spumante)라고 불렀다.
와인에 대해 잘 모르면 쉽게 할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 와인은 오르넬라이아가 좋겠군요.”
적당한 가격에 독특한 매력을 가진 와인들을 딱딱 골라서 주문하자 지배인의 얼굴에도 호의가 섞였다.
“마침 좋은 빈티지의 와인이 들어와 있는데 그걸로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그러자 빈드만이 메뉴판을 덮으며 말했다.
“식사는 간단하게 파이브 코스로 하시죠.”
“그렇게 할까요?”
“여기 비둘기 요리가 일품이니 후회하시지 않을 겁니다.”
“그럼 바로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지배인이 메뉴판을 걷어서 자리를 떠났다.
잠시 뒤 종업원이 와서 식사 전에 입맛을 돋우는 아뮤즈 부쉬를 일행 앞에 내려놨다.
라즈베리를 곁들인 굴요리였는데 작은 숟가락으로 한 입 먹어본 석원이 만족한 듯 머리를 끄덕였다.
“맛있군요.”
때마침 소믈리에가 주문한 페라리 리제르바를 가져와 한 잔씩 따라줬다.
“앞으로 서로 좋은 인연이 되길 바라며 건배를 하죠.”
석원이 그렇게 말하자 세 사람도 와인 잔을 따라서 들어 올리며 가볍게 부딪쳤다.
한 모금 마신 석원은 특유의 톡 쏘면서 시원 달콤한 맛에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역시 미식의 나라라 그런지 낮에 마신 커피도 그렇고 거의 모든 음식이 맛있어서 만족스러웠다.
“먼저 피렌체까지 먼 길을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톰슨이 그런 석원을 보며 말을 걸었다.
“앞으로 함께 일을 해야 되는 사이인데 안면을 트고 대화도 나눠 보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어요.”
“그렇게 생각해주시니 저도 편하게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그러세요.”
자세를 고쳐 앉은 톰슨은 사뭇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생각으로 구찌를 인수하신 건지 듣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