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lden Spoon Investment Portfolio RAW novel - Chapter (180)
금수저 투자백서 180화(180/231)
180. 대표님께도 이번에 도움을 준 걸 꼭 말씀드리겠소이다.
며칠 뒤, 서울 종로.
인사동에서 낙원 상가 방향으로 검은색 승용차 한 대가 헤드라이트 불빛을 밝히며 천천히 달려오다가 높은 담장으로 둘러싸인 커다란 기와집 앞에 멈춰 섰다.
조수석에서 내린 보좌관이 뒷좌석 차문을 열어주자 50대쯤 되어 보이는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바로 민평당 김재춘 전 대표의 측근이자 동교동계 중진인 우춘일 의원이었다.
커다란 솟을대문 기와지붕 아래 “오진암(梧珍庵)”이라는 현판이 큼지막하게 걸려 있는 걸 잠시 바라보고 있을 때.
삐걱대는 경첩 소리를 내며 대문이 양쪽으로 활짝 열리더니 중년의 지배인이 종업원 두 명과 함께 나와 꾸벅 허리를 숙였다.
“어서 오십시오. 의원님.”
예전부터 요정 정치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많은 고위 관료와 정치인 그리고 기업가들이 밀실에서 은밀한 만남을 가져 국가의 중요한 일들을 논의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었다.
당장 이곳 오진암만 해도 1972년 당시 중앙정보부장과 북한의 실세였던 제2 부수상이 만나 역사적인 7.4 남북 공동성명에 대해 논의했던 것으로 유명했다.
당연히 동교동계 중진으로 오랫동안 정치 중심에 있었던 우춘일 의원 역시 소위 3대 요정이라 불리던 곳들을 자주 드나들었었다.
마중을 나온 오진암 지배인과도 여러 번 봐서 안면이 있는 우춘일 의원이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받았다.
“잘 있었나.”
“네. 일행분이 별채에서 기다리고 계시니 절 따라오시죠.”
먼저 앞장서는 지배인을 따라 우춘일 의원이 담장 안으로 성큼 걸음을 옮겼다.
수백 년 된 오동나무가 무성한 가지를 자랑하며 서 있는 정원을 가로질러 별채로 향한 우춘일 의원은 지배인이 열어준 미닫이문을 지나 널찍한 방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던 젊은 사내가 몸을 일으켜 우춘일 의원을 맞이했다.
“의정 활동을 하시느라 바쁘실 텐데 이렇게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정중히 말을 건네는 젊은 사내는 바로 석원이었다.
희끗희끗하게 센 머리에 짙은 눈썹이 인상적인 우춘일 의원은 석원을 잠시 가만히 관찰하듯 쳐다보고는 이내 한쪽 손을 내밀었다.
“우춘일이오.”
석원은 공손하면서도 비굴함이 느껴지지 않는 당당한 태도로 그의 손을 맞잡고 악수했다.
“박석원입니다.”
그런 모습에 우춘일 의원은 내심 제법 강단이 있는 사내라고 생각하며 자리를 가리켰다.
“일단 앉읍시다.”
“그러시죠.”
두 사람은 널찍한 교자상을 가운데 두고 마주 보며 바닥에 깔린 방석 위에 앉았다.
“요리를 올릴까요?”
“그러지.”
지배인이 한쪽에 무릎을 꿇고 묻자 우춘일 의원이 금방 대답했다.
옆으로 고개를 돌려서 쳐다보자 석원도 작게 머리를 끄덕였다.
“금방 준비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러자 지배인은 그대로 몸을 일으켜서 밖으로 나갔다.
얼마 있지 않아 곱게 한복을 차려입은 여종업원 두 명이 안으로 들어와 적당히 안주 몇 개를 올려놓고는 옆에 앉아 술잔을 채워줬다.
여종업원 둘 다 20대 초반 정도로 젊을 뿐만 아니라 웬만한 탤런트 못지않은 미녀들이었다.
“자, 한잔합시다.”
우춘일 의원이 술잔을 들어 앞으로 내밀었다.
“예.”
석원도 대답하며 가볍게 술잔을 부딪치고는 단번에 잔을 비웠다.
그러고는 도자기로 만든 새하얀 술 주전자를 집어 들면서 석원이 웃음을 띤 얼굴로 말했다.
“제가 한잔 따라드리겠습니다.”
“허허, 고맙소.”
우춘일 의원이 내민 빈 잔에 석원이 술을 채워주자 한 모금 마시고 잔을 내려놨다.
“박 본부장도 받으시오.”
술 주전자를 건네받은 우춘일 의원이 양손으로 내민 석원의 잔에 술을 따라줬다.
“대흥그룹 차남이 아주 똑똑하고 훤칠한 미남이라 정재계 안주인들이 너나할 것 없이 다 사윗감으로 눈독을 들인다더니 그럴 만도 하군. 이렇게 직접 보니 소문이 오히려 축소된 감이 있는 것 같소.”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석원이 겸손하게 대꾸했다.
“지금은 대흥 증권에 들어가 경영 수업을 받고 있다고 들었소만.”
“그렇습니다.”
“이렇게 믿음직한 아들이 둘이나 있으니 박 회장이 아주 든든할 것 같군.”
석원은 말없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때 노크 소리와 함께 미닫이문이 양쪽으로 열리더니 흰셔츠에 나비 넥타이를 한 남자 종업원들이 요리를 가져와 교자상 위에 하나씩 내려놨다.
신선로를 비롯해 노릇노릇하게 구워서 윤기가 좔좔 흐르는 고기 산적에 보리 굴비 등 서른 개가 넘는 고급 요리들이 전통 놋그릇과 도자기에 담겨 교자상에 한가득 차려졌다.
“조용히 나눌 이야기가 있으니까 너희들은 잠깐 나가 있도록 해.”
상차림을 잠시 지켜보던 우춘일 의원이 조용히 입을 열어 말했다.
“네.”
여종업원들이 빈 술잔을 채워주고는 몸을 일으켜 조용히 자리를 비켜줬다.
미닫이문이 닫히자 우춘일 의원이 앞에 놓인 술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고 내려놓으면서 약간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대흥 그룹과의 소통은 항상 길 실장을 통해 해왔는데 갑자기 박 본부장이 연락을 해와서 솔직히 조금 놀랐소.”
“그러셨을 겁니다.”
우춘일 의원이 그를 향해 똑바로 시선을 던졌다.
“날 보자고 한 용건이 뭐요?”
괜히 서론을 길게 끌면서 눈치 싸움을 벌이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먼저 오늘 뵙자고 한 건 제 아버지나 그룹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일입니다.”
이야기를 들은 우춘일 의원이 굵은 눈썹을 찌푸렸다.
당연히 박태홍 회장의 전언을 전달하러 온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고 하니 그럴 만도 했다.
우춘일 의원이 살짝 불쾌한 기색을 드러내며 물었다.
“그럼 뭣 때문에 날 만나자고 한 거요.”
석원은 자세를 바로 하고는 사뭇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창당 준비로 요즘 많이 바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
대권 도전에 두 번이나 실패하자 정계를 은퇴하고 영국으로 떠났던 김재춘 전 대표는 돌연 복귀를 선언하고는 짧은 유학을 끝내고 귀국해 국내 정치판에 큰 파란을 일으켰다.
당연히 친정인 민평당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다들 생각했지만, 김재춘 전 대표는 그런 예상을 깨버리고 신당 창당을 선언해 다시 한번 사람들을 충격에 빠뜨렸다.
“지난 지방 선거에서의 앙금도 있고 현재 당권을 쥐고 있는 최용찬 의원이 김재춘 전 대표님의 복귀를 그다지 반기지 않을 테니. 한 울타리 안에서 서로 불협화음을 일으키는 것보단 차라리 따로 나와 처음부터 새로 시작하는 게 더 나을 겁니다.”
김재춘 전 대표가 은퇴를 번복하고 정계 복귀를 선언하자 가뜩이나 당내 주류인 동교동계와 주도권 다툼을 벌이던 최용찬 대표는 조바심을 느꼈다.
그 때문인지 동교동계와 큰 충돌을 감수하면서 지난 6월에 치러진 전국동시지방 선거에 자신의 사람들을 대거 공천하는 강수를 뒀다.
‘성과가 좋았다면 당내 주도권을 확실히 움켜 줄 수 있었겠지만, 결과적으로 최악의 수가 되고 말았지.’
김재춘 전 대표의 입김이 들어간 후보들은 대부분 당선된 것에 반해 최용찬 대표가 공천한 인물들은 대거 낙선해 버리고 만 거였다.
이로 인해 최용찬 대표의 리더쉽이 크게 훼손됐을 뿐만 아니라 동교동계와 관계 역시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되어 버리고 말았다.
그 결과가 신당 창당이었고 새시대 민족회의라는 당명까지 이미 공개됐을 정도로 알만한 사람들은 모두 김재춘 전 대표와 동교동계의 탈당을 기정사실로 여기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것과는 별개로, 석원이 뜬금없이 신당 이야기를 꺼내자 우춘일 의원의 눈에 경계심이 떠올랐다.
석원은 태연하게 미소를 지은 채 옆에 놔둔 가방을 슬쩍 우춘일 의원 앞으로 밀었다.
“새로 당을 만드시려면 이것저것 필요하신 게 많으실 것 같아. 약소하지만 조금 준비해 왔습니다.”
“……!”
눈을 크게 뜬 우춘일 의원은 가방을 가져와 잠금장치를 풀고 내용물을 확인했다.
가방 안에는 만 원권 현금 뭉치들과 함께 천만 원짜리 무기명 예금증서 다발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이건.”
우춘일 의원이 고개를 들자 석원이 웃음을 띤 얼굴로 부드럽게 말했다.
“50억입니다. 얼마 안 되지만 하시는 일에 도움이 되셨으면 합니다.”
“이 돈을 지금 우리한테 주겠다는 거요.”
“그렇습니다.”
미심쩍은 듯 눈을 가늘게 뜬 우춘일 의원이 가방을 다시 닫고는 물었다.
“50억이라면 적지 않은 돈인데 원하는 것이 뭐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자 우춘일 의원이 미간을 좁혔다.
“그걸 지금 날 보고 믿으라는 건가?”
“믿든 아니든 그게 사실이니까요.”
석원은 의심에 찬 시선으로 쳐다보는 우춘일 의원을 마주 보면서 말했다.
“정말로 원하는 것이 있었다면 새시대 민족회의가 아니라 여당에 돈가방을 건네는 게 더 확실하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우춘일 의원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머리를 끄덕였다.
“하긴 그것도 그렇군.”
동교동계를 비롯해 뜻을 같이하기로 한 민평당 의원들이 전부 신당으로 옮겨 온다고 해도 숫자가 53~4석 안팎 불과했다.
기존 민평당을 밀어내고 단번에 제 1야당 지위를 차지할 수는 있겠지만 그래봤자 국회 의석 과반수 이상을 가진 여당에 비교하면 한참 열세였다.
한마디로 줄을 대봤자 이득을 볼 게 별로 없다는 뜻이었다.
오히려 야당과 가깝게 지내는 모습을 보이면 청와대와 여당에 찍혀 불이익을 당하기 쉽상이었다.
더군다나 군사정권 이후 수십 년간 단 한 번도 정권교체가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기업가들이 야당 정치인들을 꺼려할 수밖에 없었다.
‘6.25 이후 최대 국난이라고 불린 IMF사태가 없었다면 아마 김재춘 전 대표가 대통령에 당선되기 쉽지 않았을 거야.’
이러다 보니 새시대 민족회의를 비롯한 야당들은 항상 주머니 사정이 쪼들릴 수밖에 없었다.
‘원래 어려울 때 도움을 준 사람이 가장 고마운 법이지.’
석원의 속내를 모르는 우춘일 의원은 잠시 아무런 말없이 그를 바라보다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정말 박 회장의 지시가 아니라 박 본부장 독단으로 돈가방을 가져온 거요?”
“그렇습니다.”
“우리야 이렇게 도움을 준다면 고맙지만 자칫 불이익을 받게 될 수도 있는데 괜찮겠소.”
“그런 걸 무서워했다면 애초에 의원님을 뵙자고 하지도 않았겠죠.”
담담한 태도로 석원이 말을 계속 이었다.
“그리고 저는 올바른 국정 운영을 하기 위해서는 야당이 제대로 역할을 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이렇게나마 도움을 드리려고 하는 것이고요.”
상대의 자존심을 세워주는 것과 동시에 정치 자금을 건네받는 정당한 명분까지 만들어주는 이야기에 우춘일 의원의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IMF 사태가 터지면 정권 교체가 이뤄지는 건 불을 보듯 뻔할 테니 김재춘 전 대표한테 베팅하는 게 정배지.’
앞으로 벌어질 미래를 뻔히 다 꿰고 있는 석원한테는 당연한 일이었다.
이렇게 미리 돈독한 관계를 만들어 둔다면 IMF를 극복하며 청와대 주도로 이루어질 대규모 재계 구조조정과 빅딜에서 상당한 이득을 취할 수 있을 터였다.
‘특혜까지는 아니더라도 받아 먹은 것이 있으니까. 최소한 해코지는 하지 않겠지.’
TG 그룹이 공들여서 키우던 반도체 사업을 억지로 빼앗기다시피 내놔야 했던 걸 생각하면 살벌한 구조조정과 빅딜의 칼날에서 비켜날 수 있는 것만으로도 큰 이득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창당을 앞두고 돈을 쓸 곳이 많았는데 박 본부장 덕분에 한숨 돌릴 수 있을 것 같소.”
“도움이 되셨다니 다행입니다.”
우춘일 의원이 얼굴에 웃음을 띠며 말했다.
“박 본부장 같은 젊은이가 있다니 우리 대한민국의 미래가 밝은 것 같소. 대표님께도 이번에 도움을 준 걸 꼭 말씀드리겠소이다.”
원하는 대답을 들은 석원은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자, 다시 한잔 합시다.”
기분이 좋은 듯 우춘일 의원이 술잔을 내밀자 석원은 잔을 들어 가볍게 부딪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