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lden Spoon Investment Portfolio RAW novel - Chapter (184)
금수저 투자백서 184화(184/231)
184. Winter is coming.
가져온 커피를 한 잔씩 내려놓은 나성미는 상석에 자리한 석원에게 꾸벅 머리를 숙이고는 방을 나갔다.
한쪽 다리를 꼰 석원이 탁자를 가운데 두고 양옆에 앉아 있는 PI부서 팀장들을 천천히 둘러보며 입을 뗐다.
“다들 오늘 종합주가지수가 1,000 포인트를 넘긴 걸 확인했을 거예요.”
그러자 김정식 1팀장이 미소를 지으며 얼른 말을 받았다.
“물론입니다.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힘없이 무너지는 증시에 암담했었는데. 예측하신 대로 정확히 7월부터 반등을 시작해 어려울 것 같았던 네자릿수에 재진입하다니 정말 대단하십니다.”
“맞습니다. 본부장님의 지시로 미리 포지션을 잡아둔 덕분에 지수 상승의 수혜를 그대로 다 누릴 수 있었습니다.”
“다들 수익이 크게 나서 3/4 분기 실적을 기대하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다 본부장님의 선견지명 덕분입니다.”
최호근을 비롯한 팀장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전부 석원을 치켜세우기에 바빴다.
실제로 석원의 혜안 덕분에 수익을 훨씬 더 키울 수 있었으니 아부를 하는 것만은 아니었다.
깍지를 낀 손을 무릎 위에 올린 채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석원이 차분히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일부터 각팀 별로 보유하고 있는 물량을 순차적으로 매도해 10월 첫째 주까지 전부 털어내도록 해요.”
“……!”
생각지도 못한 뜻밖의 지시에 다들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갑자기 불러서 뭔가 불안하더라니 이럴 줄 알았지.’
다른 팀장들보다 석원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하던 최호근이 내심 중얼거렸다.
‘이번에는 또 어떤 남들이 모르는 걸 봤기에 이러시는 걸까.’
최호근 팀장은 기대 섞인 눈빛으로 석원을 바라봤다.
하지만 그와 달리 다른 팀장들은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그중에서 김정식 1팀장이 혹시 잘못 들었나 싶어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보유한 주식을 전부 매도하라고 하셨습니까?”
“그래요.”
석원은 약간의 망설임도 없이 머리를 끄덕였다.
한순간 말문이 막힌 김정식 1팀장은 곧바로 몸을 앞으로 당겨 앉으며 황급히 입을 열었다.
“말씀하셨던 대로 외국인 주식투자 한도 추가 확대가 시행되면서 증시에 돈이 쏟아져 들어오고 반도체 호황 기대감에 대세 상승장으로 들어섰다는 분위기가 지배적인데. 오히려 주식을 더 사야 되는 것 아닙니까?”
최호근을 제외한 다른 팀장 두 명이 같은 생각이라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걸 보며 석원이 사뭇 진지한 태도로 말했다.
“진짜로 그렇다고 한다면 과감하게 베팅을 늘려야 되겠죠.”
안순환 투자 2팀장이 손가락으로 뿔테 안경을 추켜올리며 물었다.
“본부장님께서는 상승장이 아니라고 보시는 겁니까?”
그러자 최호근을 비롯한 팀장들의 시선이 석원에게 쏠렸다.
모두 무슨 대답이 나올지 궁금한 눈빛이었다.
석원은 앞에 놓인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고는 다시 내려놓으며 확신에 찬 어투로 말했다.
“이번 상승은 주식투자 한도가 확대되면서 그동안 막혀 있던 외국인 자금이 한꺼번에 들어온 덕분에 생긴 일시적인 반등일 뿐이에요.”
상당히 비관적인 태도에 안순환 2팀장이 눈치를 살피며 반론을 내놨다.
“외국인 자금 유입이 주가 반등에 중요한 역할을 한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수출이 전년 대비 크게 증가하는 등 근본적으로 기업들의 펀더멘탈이 좋아지고 있지 않습니까.”
맞은편에 자리한 김정식 1팀장이 말을 이어받으며 주가 상승 쪽에 무게를 뒀다.
“저 역시 같은 생각입니다. 특히나 새로운 주력 수출 상품으로 떠오르고 있는 메모리 반도체만 해도 윈도우 95 출시로 인한 수요 급증 때문에 한동안 가격 강세가 지속될 걸로 다들 예상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것만 봐도 하방보다는 상방이 더 열려 있다고 봅니다.”
마이크로소프트에서 새로 출시한 운영체제인 윈도우 95를 원활하게 쓰기 위해서는 기존에 쓰던 메모리 용량보다 높은 16MB의 램(RAM)이 필요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윈도우 95를 쓰기 위한 메모리 반도체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날 거라는 기대가 커질 수밖에 없었다.
‘그게 끔찍한 덫이 되어 버릴 줄은 이때까지만 해도 아무도 몰랐지.’
내심 씁쓸한 미소를 지은 석원은 모여 있는 팀장들을 쳐다보면서 물었다.
“그 모든 기대감이 잘못된 판단이라면 어떻게 되겠어요?”
그러자 다들 무슨 소리냐는 얼굴로 눈을 끔뻑였다.
최호근 역시 의아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석원이 말을 계속했다.
“지금껏 반도체 호황을 만든 가장 큰 요인이 뭐라고 생각해요?”
“국내는 물론이고 전 세계적으로 일어난 개인용 컴퓨터 붐 덕분에 메모리 반도체 수요가 늘어났기 때문이지 않습니까.”
최호근 4팀장이 곧바로 대답했다.
“맞아요. 그런데 개인용 PC 수요가 예상과 달리 줄어든다면 어떻게 될 것 같아요?”
그 말에 최호근은 물론이고 참석자들 모두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는 표정을 지었다.
인터넷 열풍에 더해 윈도우 95 출시로 PC 수요가 폭증할 거라고 다들 예상하고 있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요즘 컴퓨터 한 대 가격이 얼마인지 알고 있어요?”
뜬금없는 물음에 다들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석원은 그럴 줄 예상했는지 탁자 위에 놔둔 서류철을 펼쳤다.
“어제 세운 전자 상가에 가서 직접 뽑은 조립 PC 견적이에요.”
어리둥절한 얼굴을 한 팀장들이 일제히 목을 쭉 빼고 견적서를 쳐다봤다.
CPU : 586 펜티엄-60
HDD : 560MB
FDD : 5.25″, 3.5″
RAM : 8MB
키보드 : 103키
모뎀 : 자네트 336
CD-ROOM : 4배속
멀티미디어 : 16비트 미디 사운드 카드, 마이크, TV 수신카드
가격 (부가세 모니터 별도) : 157만원
“17인치 모니터까지 넣으면 2백만 원이 훌쩍 넘어가더군요.”
석원이 왼편에 앉아 있는 김정식 1팀장을 향해 물었다.
“우리 회사 대졸 신입 사원 월급이 얼마죠?”
“정확하게는 모르지만 대충 70만 원 남짓 될 겁니다.”
5대 그룹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재계 서열 50위권 안에 들어가는 대기업인 데다가 월급이 센 증권사였기에 연봉이 비교적 높은 편이었다.
“그럼 대충 3개월 치 월급을 다 모아야 살 수 있는 거니까. 쉽게 살 수 없는 고가품이지 않겠어요.”
“그. 그렇지요.”
“저도 PC를 마련했을 때 가격이 비싸 할부로 구입했었습니다.”
팀장들이 웅성거리듯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윈도우 95가 새로 나왔다고 해도 회사에서 사무용으로 구입한다면 모를까. 일반 사람들이 선뜻 PC를 바꾸거나 업그레이드 하기에는 부담스러운 가격이죠.”
“아…….”
그제야 뭘 말하려는지 깨달은 팀장들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이내 석원의 말에 동의했다.
“말씀을 듣고 보니 그렇군요.”
“확실히 금방 교체하긴 쉽지 않겠습니다.”
PC의 가정 보급이 급격하게 확대되고 있는 시기이긴 했지만 회귀 전에 쓰던 스마트폰처럼 없으면 안 되는 내 몸의 일부 같은 필수품까진 아니었다.
‘할 수 있는 거라고는 간단한 사무나 PC 통신, 게임 정도라서 가격에 비해 활용도가 떨어지는 비싼 사치품에 가깝지.’
문득 석원은 5인치 까만 플로피 디스크를 여러 장 바꿔 끼워가며 게임을 했던 예전 추억을 떠올렸다.
그때 주머니 사정으로는 꿈도 못 꿨을 컴퓨터였는데 오 부장이 앞으로는 컴퓨터가 필수인 시대가 올 거라며 한 대 사준 덕분에 가능했다.
‘제일 저렴한 모델이었지만 그 덕분에 컴퓨터를 배울 수 있었지.’
정작 처음 선물로 받았을 때는 매일 게임밖에 안 한 것 같지만 말이다.
잠시 떠오른 잡념을 지운 석원은 자세를 바로하며 재차 입을 열었다.
“거기에 더해 국내 기업들은 물론이고 대만과 일본 그리고 미국 반도체 업체들까지 수요 폭증을 예상하고 경쟁적으로 생산 시설을 증설 중인 걸 다들 알고 있겠죠.”
일순 머릿속을 스친 생각에 최호근이 얼굴을 굳혔다.
“공급 초과로 인해 메모리 반도체 가격이 하락할 거라고 예상하시는 거군요.”
그러자 다른 팀장들도 말뜻을 알아차리고 놀란 눈으로 그를 쳐다봤다.
역시나 실망시키지 않고 최호근이 제일 먼저 문제점을 눈치챈 것에 석원이 내심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겉으로 전혀 내색하지 않은 채 진지한 태도로 말을 이었다.
“내 예상대로 흘러간다면 이제 곧 반도체에 혹독한 겨울이 찾아올 거예요.”
소파에 앉은 팀장들의 얼굴이 점점 심각해졌다.
석원은 그걸 보면서 문제점을 하나 더 꼽았다.
“거기에 더해 향후 시장 전망을 어둡게 볼 수밖에 없는 악재가 하나 더 있어요.”
침을 꿀꺽 삼킨 김정식 1팀장이 먼저 물었다.
“그, 그게 뭡니까?”
“환율이에요.”
석원은 어느새 집중해서 듣고 있는 팀장들을 둘러봤다.
“슬금슬금 떨어지던 달러-엔 환율이 어느새 98.33엔까지 내려와 있는 거 다들 알고 있죠?”
팀장들이 무겁게 머리를 끄덕였다.
특히 김정식 1팀장 같은 경우에는 석원의 지시에 따라 엔화 숏베팅을 해둔 상태였기에 달러-엔 환율 변동을 시간마다 체크하고 있을 정도였다.
“반도체는 물론이고 자동차, 조선, 가전까지 가장 큰 수출 경쟁국이 바로 일본이라는 걸 모르지 않을 거예요. 그런데 엔화의 가치가 떨어져 엔저로 간다면 어떻게 되겠어요?”
“으음…… 엔저가 되면 일본 제품의 수출 가격이 낮아지는 효과가 있으니 상대적으로 한국 기업들의 경쟁력이 약해지겠군요.”
낮은 침음성을 흘린 김정식 1팀장이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석원은 고개를 돌려 안순환 2팀장에게 시선을 주며 물었다.
“이렇게 되면 2팀장이 상승장의 근거로 제시했던 기업들의 펀더멘탈이 크게 훼손되고 수출도 줄어들겠죠.”
“……제 판단이 틀렸던 것 같습니다.”
안순환 2팀장이 굳은 얼굴로 대답했다.
‘그것뿐만 아니라 증시를 추락시킬 시한폭탄이 또 하나 있지.’
석원은 속으로 중얼거리며 회귀 전 오 부장과 있었던 일을 회상했다.
“하여튼 세상에서 제일 쓸모없는 게 정치를 하는 것들이라니까!”
여느 때와 같이 구두를 맡기고 의자에 앉아 있던 오 부장이 손에 든 신문을 구기면서 짜증을 내자 석원이 고개를 들며 말했다.
“왜 그러세요?”
오 부장은 주머니에서 담배를 하나 꺼내 입에 물더니 턱을 까딱였다.
“이거 봤냐.”
구겨진 신문을 힐끔 쳐다보곤 석원이 대답했다.
“노 전 대통령 비자금 기사를 보고 그러시는 거예요?”
“그래! 5천억이라니 더럽게도 많이 처먹었네!”
오 부장이 자기 돈을 빼앗긴 것처럼 펄펄 열을 냈다.
에휴, 하고 한숨을 내쉰 석원은 헝겊에 구두약을 적당히 찍어 바르면서 씁쓸한 얼굴로 말했다.
“저 같은 놈은 평생 벌어도 손에 못 쥘 액수긴 하죠.”
“에이 썩을 놈들! 뒷구멍으로 돈을 받아 처먹은 것도 화딱지가 나는데 이거 때문에 증시까지 고꾸라져서 더 열이 받는다고!”
오 부장이 코로 하얀 연기를 내뱉으며 씩씩거렸다.
말을 듣다 보니 비자금보다 증시가 고꾸라진 게 더 짜증이 난 모양이었다.
“전 대통령 비자금 사건하고 주식이 뭔 상관이 있다고 이 사건 때문에 1,000을 넘겼던 증시가 다시 폭락해 버린 거예요?”
“왜 상관이 없겠냐! 원래 불확실성을 제일 싫어하는 것이 증시야. 비자금 문제로 정치권이 발칵 뒤집힌데다가 검찰이 수사를 한다고 이곳저곳 들쑤시고 다닐지도 모르는데. 이런 뒤숭숭한 분위기 속에서 누가 투자를 하려 들겠어.”
손가락 사이에 담배를 끼운 오 부장이 못마땅한 듯 얼굴을 찡그렸다.
“당장 큰손들은 괜한 불똥이라도 튈까 봐 몸을 사리며 넣어둔 돈을 빼고 있고, 거기에 느닷없이 불거진 세계 반도체 경기 불안에다 엔저로 인한 수출 위축까지 겹쳐서 외국인들까지 주식을 팔고 있으니 증시가 좋을 수가 있겠냐고.”
하루 종일 큰손들을 달래느라 진이 빠진 오 부장은 당장에라도 뒷목을 잡고 쓰러질 기세였다.
“그거 큰일이네요. 오 부장님은 괜찮으세요?”
“하하.”
오 부장은 어쩐지 공허한 웃음을 내뱉더니 이내 크게 한숨 쉬었다.
“괴로우니까 묻지 마라…….”
“……네.”
거기까지 회상한 석원은 여전히 무거운 얼굴을 하고 있는 팀장들을 쳐다봤다.
‘곧 터질 전직 대통령의 비자금 사건이 증시 폭락의 도화선이 될 테지만 그걸 이야기해 줄 수는 없겠지.’
이야기한다고 쉽사리 믿지도 않겠지만, 정치적으로 너무 민감한 사건이었기에 자칫 잘못하면 나중에 문제가 될 수 있었다.
“이런 이유들로 앞으로 증시에 호재보단 악재가 더 많고 이미 충분히 수익을 낸 상황이니까. 위기관리 차원에서라도 차익 실현을 한 뒤에 분위기를 지켜보면서 신중하게 거래를 하자는 게 내 생각이에요.”
그러자 팀장들은 서로 눈빛을 주고받으며 깊은 고민에 빠졌다.
한동안 말없이 시선이 오간 끝에 최호근이 먼저 입을 열었다.
“본부장님 말씀대로 목표 실적도 다 채운 상황이니 당분간 안정적으로 운용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내 안순환 2팀장도 뿔테 안경을 고쳐 쓰며 거들었다.
“저도 찬성입니다. 기껏 올린 수익을 홀라당 다 까먹어 버리는 것보단 차라리 한 템포 쉬고 가는 게 낫겠죠.”
“예, 그렇게 하시죠.”
김정식 1팀장 역시 이미 대세가 기운 걸 눈치채고 찬성했다.
남은 3팀장도 동의하자 석원이 머리를 끄덕이며 결정을 내렸다.
“그럼 모두 찬성한 걸로 알고 내일부터 포지션을 정리하도록 해요.”
“예.”
“알겠습니다.”
이로써 석원과 대흥 증권 PI팀은 곧 강한 비바람과 함께 국내 주식 시장에 몰려들 먹구름을 피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