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lden Spoon Investment Portfolio RAW novel - Chapter (189)
금수저 투자백서 189화(189/231)
189. 으이구. 저 화상. 내가 너 때문에 제 명에 못 살지
서울 여의도 국회 본회의장.
검은색 정장을 입은 석원이 2층 방청석으로 올라가 출입구에서 조금 떨어진 벽에 등을 기댄 채 팔짱을 끼고 섰다.
환한 조명 아래 텔레비전에서 자주 보던 높은 연단을 앞에 두고 반원 형태의 웅장한 느낌으로 배치되어 있는 국회의원 좌석이 내려다보였다.
평소에는 일부 기자들을 제외하곤 대부분 텅 비어 있는 방청석이었으나 오늘은 대정부 질문 첫날이라 꽤 많은 숫자의 방청객들이 보였다.
점심 식사를 끝낸 국회의원들이 하나둘 입장하는 걸 보며 석원이 소매를 걷어 손목에 찬 롤렉스 시계를 확인하자 막 1시 30분이 지나고 있었다.
한참 주식 거래가 이루어지고 있을 시간에 회사가 아닌 국회 의사당에 와 있는 건 오늘 아주 중요한 사건이 터질 예정이기 때문이었다.
우태형 총리를 비롯한 국무위원들이 먼저 자리를 잡고 기다리는 가운데 여야 국회의원들도 속속 입장해 좌석을 채웠다.
그걸 보며 석원이 작게 중얼거렸다.
“지금이나 나중이나 국회의원들이 밥값을 제대로 못 하는 건 마찬가지지만 이때는 그래도 할 일은 하고 서로 싸움을 벌였는데 말이야.”
어떻게 시간이 흐를수록 정치판은 더 막장이 되는 건지.
본회의를 여는데 필요한 정족수를 채우지 못해 국회의장이 의원들 이름을 부르며 출석 체크를 하고 여야 원내 대표들이 비상 연락망을 돌리는 촌극이 벌어지는 미래의 모습을 생각하면 정말 한숨 밖에 나오지 않았다.
10분쯤 더 지나 의석이 절반 이상 차자 몸을 일으킨 국회의장이 마이크에 입을 가까이 가져다 대며 말했다.
“정족수가 모두 충족되어 지금부터 대정부 질문을 속개하도록 하겠습니다.”
땅땅땅!
손에 든 의사봉을 세 번 두드리며 국회의장이 본회의를 속개하자 여당 의원 한 명이 자리에서 일어나 연단으로 걸어 나왔다.
그걸 본 석원이 눈을 반짝였다.
회색 정장을 입고 발언대에 선 민평당 초선 의원 주규황은 왼편에 있는 국무의원석을 쳐다보며 말했다.
“법무부 장관님. 앞으로 나와주시겠습니까.”
그러자 법무부 장관이 자리에서 일어나 비어 있는 맞은편 발언대로 나왔다.
작게 헛기침을 한번 하고 좌중을 둘러본 주규황 의원은 목에 잔뜩 힘을 주며 입을 뗐다.
“지난 8월 총무처 장관이 기자들과 술자리를 가지던 중에 전직 대통령이 거액의 비자금을 몰래 숨겨두고 있다는 발언을 한걸 아시죠?”
“네.”
“사건이 있은 지 벌써 두 달이 넘었는데 아직 검찰 수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이유가 뭡니까!”
다그치듯 묻는 말에 이런 질문이 있을 거라고 예상했던 법무부 장관은 당황하는 기색 없이 차분히 대답했다.
“이미 본인이 시중에 떠도는 소문을 가볍게 이야기한 것일 뿐이라고 해명했고, 정치적으로 아주 민감한 문제이기 때문에 섣불리 다루지 않고 신중을 기하고 있습니다.”
“그럼 확실한 증거가 있다면 바로 수사에 착수하겠군요.”
“당연히 그럴 겁니다.”
대답을 하기 무섭게 주규황 의원은 품 안에서 반으로 접힌 종이를 한 장 꺼내 펼치고는 손에 쥐고 위로 들어 올렸다.
“이게 뭔지 아십니까?”
“……글쎄요.”
“노기훈 전 대통령이 우영 은행 서소문 지점에 유령 회사 명의로 128억 2,700여만 원을 예치해둔 계좌의 예금 조회표입니다!”
“……!”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폭탄 발언에 법무부 장관이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는 것과 동시에 좌중이 크게 술렁였다.
“저게 진짜야?”
“정말로 숨겨둔 비자금이 있었던 건가.”
점심을 먹은 이후라 약간은 나른한 분위기에서 시작한 대정부 질문은 주규황 의원의 폭로로 인해 뜨겁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기자석에 있던 기자들이 부산하게 움직였고, 화들짝 놀란 동료 의원들은 웅성거리며 늘어져 있던 몸을 바로 세웠다.
주규황 의원은 모든 시선이 자신한테 집중되는 상황을 내심 즐기면서 더욱 목에 힘을 주고 발언을 이어나갔다.
“이건 노기훈 전 대통령이 퇴임을 앞두고 측근을 시켜 4천억 원에 달하는 비자금을 각 시중 은행에 40여 개의 계좌에 나눠 분산 예치시킨 것 중에 일부입니다!”
주규황 의원은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법무부 장관을 똑바로 쳐다 보며 다그치듯 말했다.
“이렇게 명백한 증거가 있으니 조금 전 장관이 말한 대로 검찰은 즉각 노기훈 전 대통령과 측근들을 출국 금지시키고 수사에 착수하길 촉구합니다.”
답변을 요구하듯 노려보는 시선에 제대로 외통수에 걸린 법무부 장관은 바로 대답을 못 하고 머뭇거렸다.
그러자 야당 의원들이 벌떼처럼 일어나 식은땀을 흘리며 서 있는 법무부 장관을 향해 비난을 쏟아냈다.
“조금 전까지 잘도 나불거리더니만 갑자기 꿀 먹은 벙어리라도 된 거요!”
“수사 착수 여부를 명확하게 밝히시오!”
“검찰이 알아내지 못한 증거가 이렇게 버젓이 나왔는데. 이번에도 뭉갤 거요!”
“왜 대답이 없는 거요!”
“저. 그게…….”
순식간에 코너에 몰린 법무부 장관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도움을 청하듯 여당 의원들 쪽을 쳐다봤다.
이럴 때 여당 의원들이 나서서 도와줘야 했지만 전혀 예상치 못한 핵폭탄급 폭로에 다들 수군거리며 어떻게 대처해야 될지 몰라 허둥거리기만 했다.
“이거 가만히 있으면 안 되는 거 아닙니까?”
“하지만 뭘 어떻게 하란 말이오.”
“괜히 나섰다가 저게 진짜면 싸잡혀서 욕을 들어먹을 수도 있으니…….”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 여당 의원들의 모습에 주규황 의원이 득의만만한 얼굴로 외쳤다.
“검찰이 제대로 수사를 못 하겠다면 특검을 실시해서라도 비자금 문제를 하나의 의혹도 남김없이 국민들 앞에 명명백백히 모두 밝혀야 될 겁니다!”
“옳소!”
“맞는 말이오!”
야당 의원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소리치며 크게 호응했다.
기세에 밀린 법무부 장관은 식은땀을 흘리다가 마지못해 마이크 앞에 입을 가져다 대고는 변명하듯 말했다.
“금융거래범죄의 경우 신중을 기해야 하니 의원님이 제시하신 증거를 바탕으로 진위 여부를 면밀히 따져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우!”
“그게 무슨 헛소리야!”
“당신이 그러고도 법무부 장관이야!”
야유와 비난이 쏟아지는 가운데 주규황 의원이 더욱 기세가 등등해 법무부 장관을 몰아붙였다.
“계좌를 역추적하면 반나절도 안 돼서 노 전 대통령의 비자금이 맞는지 알아낼 수 있는데. 신중을 기한다는 핑계로 사건을 뭉개려고 하다니 장관의 답변은 손으로 하늘을 가리고 국민들을 우롱하는 행위인 걸 모릅니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움직일 수 없는 증거를 앞에 두고도 무사안일한 태도로 일관하는 검찰을 어느 국민이 신뢰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것이 아니라 의원님이 제시하신 증거는 오늘 처음 알게 된 것인 데다가 다른 의도가 없이 정치, 사회적으로 파장이 큰 사건이니 조심스럽게 다루려는 것뿐입니다.”
법무부 장관이 애써 항변했지만 돌아오는 건 거센 질타뿐이었다.
“어디서 꼼수를 부리려는 거야!”
“그딴 식으로 일을 할 거면 자리에서 물러나!”
“지금 우리보다 그걸 믿으라는 거요!”
“당장 때려쳐!”
도저히 더 이상 대정부 질문을 진행하기 어려울 정도로 소란이 심해지자 국회의장이 의사봉을 탕탕 두드렸다.
“다들 조용히 하세요!”
몇 번이나 그렇게 외치며 장내 분위기를 진정시키려고 했지만 별로 효과는 없었다.
결국 국회의장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의사봉을 세게 내리치고 마이크를 잡았다.
“지금부터 1시간 정회를 선언합니다!”
국회의장의 선언에도 불구하고 한번 달아오른 분위기는 수그러들지 않고 더욱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노 전 대통령 비자금이라니 이거 완전 특종이잖아!”
“어서 데스크에 전화부터 돌려!”
“주 의원 어디 갔어?”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제일 신난 건 방청석에 있던 기자들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특종에 잔뜩 흥분한 기자들은 노 전 대통령 비자금을 폭로한 주규황 의원한테 조금이라도 기삿거리를 더 캐내기 위해 황급히 1층으로 뛰어 내려갔다.
벽에 몸을 기댄 채 그걸 전부 지켜본 석원은 여전히 아수라장처럼 시끄러운 본회의장을 내려다보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대형 폭탄이 터졌으니 증시도 유탄을 피하지 못하고 크게 요동치겠군.”
그러고는 이제 더 볼 것이 없다는 듯 벽에서 몸을 떼곤 그대로 돌아서 출입문 밖으로 나갔다.
* * *
배불리 점심을 먹고 사무실로 들어온 정환엽 대리는 이쑤시개를 하나 입에 물고 자리에 앉아 느긋하게 마우스를 딸깍거렸다.
매매를 할 만한 종목이 있는지 살펴보고 있을 때 뒤에서 불쑥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일은 안 하고 뭐하냐.”
“으헉!”
흰 와이셔츠에 넥타이를 맨 최호근 팀장이 자판기에서 뽑은 커피를 홀짝이며 쯧쯧 혀를 찼다.
“짜식. 놀라긴.”
“팀장님! 갑자기 뒤에서 불쑥 나타나지 말라니까요!”
“정신줄 놓고 있었던 네 탓이지 인마.”
“무슨 자객이라도 된답니까? 왜 발소리도 없이 튀어나와요?”
“헛소리하지 말고. 그래서 뭐하고 있었냐고.”
정환엽 대리는 깜짝 놀란 가슴을 움켜잡고 의자에 앉은 채 몸을 바로 돌렸다.
“보시다시피 시장 체크 중이잖아요.”
“오늘 할당액은 다 채우고 농땡이를 치고 있는 거겠지?”
“아이 참. 노는 게 아니라 시장을 지켜보는 중이라니까요.”
최호근 팀장은 투덜거리는 소리를 가뿐히 무시하곤 모니터를 향해 턱을 까딱였다.
“그렇다고 치고 돈은 벌었냐고.”
“제가 누굽니까. 오전 장에 벌써 밥값은 다 해치웠죠.”
정환엽 대리가 우쭐거리며 오전에 매매한 기록을 보여줬다.
상체를 살짝 숙여 컴퓨터 모니터에 띄워진 매매 기록들을 본 최호근 팀장이 그제야 씨익 미소를 지었다.
“잔잔바리로 많이도 사고 팔았네.”
“그래도 돈은 확실히 벌었지 않습니까.”
그러자 최호근 팀장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래 잘했다. 그래도 다른 직원들 시선도 있으니까 눈치껏 농땡이를 쳐. 어? 남한테 싫은 소리 안 듣게 알아서 잘 하라고.”
“에헤헤. 그럼 옥상에 가서 한 대 땡기고 와도 됩니까?”
“하하하.”
최호근 팀장이 활짝 웃으면서 눈을 부라렸다.
“되겠냐.”
“죄송합니다.”
곧바로 머리를 박은 정환엽 대리가 슬쩍 입맛을 다시며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오늘은 유달리 장이 크게 오르내리는 것 없이 잔잔한 것 같네요.”
“가끔 이런 날도 있어야지.”
최호근 팀장이 적당히 식은 커피를 홀짝였다.
“부정맥 환자처럼 시장이 매일 널뛰기를 하면 어디 불안해서 제 명에 살겠어.”
“그건 그렇지만요. 어제까지만 해도 불을 뿜던 종목들도 다 같이 약속이나 한 듯이 조용한 게 꼭 태풍 전의 고요 같아서 찝찝하단 말입니다.”
양팔을 머리 위로 올린 채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댄 정환엽 대리가 중얼거렸다.
그러자 최호근 팀장이 인상을 쓰면서 손바닥으로 정환엽 대리의 뒤통수를 가볍게 툭 쳤다.
“말이 씨가 된다는 이야기도 못 들었어? 재수 없는 소리하지 말고 일이나 해.”
“아이 참. 말로 하면 되지 애들도 있는데 너무 하신 거 아닙니까.”
“어쭈, 이제 대리 말년이다. 이거지?”
“아뇨 뭐 그냥 그렇다는 거죠.”
잽싸게 꼬리를 내리자 최호근 팀장이 눈을 흘기며 말했다.
“거래를 할 만한 종목이 안 보이면 괜히 무리하지 말고 오늘은 이쯤에서 적당히 마무리를 지어.”
“예.”
자리로 돌아가려고 최호근 팀장이 몸을 돌리는 순간.
갑자기 불길한 징조처럼 트레이딩 센터 전화기가 한꺼번에 시끄럽게 울려대기 시작했다.
심상치 않은 느낌에 최호근 팀장이 미간을 좁히자 한쪽에 앉아 있던 유석현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팀장님! 지수가 갑자기 10포인트 이상 빠지고 있습니다!”
“뭐!”
최호근 팀장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맞은편 벽에 설치되어 있는 대형 시황판을 확인했다.
정말로 조금 전까지 강보합에 머물러 있던 종합주가지수가 갑자기 파란색 불을 켜고 아래로 떨어지고 있었다.
“어, 어어?”
“이거 갑자기 왜 이래?”
다른 팀들도 갑작스러운 시장 변화에 당황해하며 술렁거렸다.
소란이 빠르게 번져나가고 있는 와중에 유석현이 다시 급하게 방금 들어온 정보를 알렸다.
“조금 전 국회 대정부 질문에서 노 전 대통령 비자금 폭로가 나왔다고 합니다.”
“젠장! 아닌 밤중에 홍두깨도 아니고 이게 뭔 날벼락이야.”
최호근 팀장이 와락 얼굴을 구겼다.
“어디든 좋으니까 당장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상황부터 파악해 봐!”
“예!”
유석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곧바로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최호근 팀장도 개인적으로 아는 기자에게 전화를 해보려고 급히 걸음을 떼다가 문득 아까 나눈 이야기가 떠올라 고개를 돌려 정환엽 대리를 노려봤다.
자기도 찔리는 게 있는지 움찔하며 시선을 피하는 모습에 최호근 팀장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으이구. 저 화상. 내가 너 때문에 제 명에 못 살지.”
최호근 팀장은 연신 어휴 하는 소리를 내면서 황급히 자리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