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lden Spoon Investment Portfolio RAW novel - Chapter (191)
금수저 투자백서 191화(191/231)
191. 상황이 변했으니 그에 맞춰 계획을 수정해야 되지 않겠나.
10월 27일 금요일 오전.
다들 한참 바쁜 시간이었지만 대부분의 국민들이 일을 멈추고 텔레비전 앞에 모여 있었다.
바로 오늘 최근 4천억 원 비자금 사건으로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만들고 있는 노기훈 전 대통령의 기자회견이 예정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마포 본사에 나와 있던 박태홍 회장 역시 측근인 길성호 비서실장과 함께 회장실 소파에 앉아 기자회견이 시작되길 기다리고 있었다.
습관처럼 담배를 피우고 있는 박태홍 회장을 보며 길성호 비서실장이 입을 뗐다.
“노 전 대통령 측에서 뭔가 액션이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본인이 직접 기자들 앞에 나설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그만큼 다급하단 뜻이겠지.”
“청와대에서 직접 검찰에 수사 지시를 내리고 속속 드러나는 증거에 조만간 소환 조사가 진행될 거란 이야기까지 돌고 있으니 마음이 급하긴 할 겁니다.”
손가락 사이에 담배를 끼운 박태홍 회장이 쯧 하고 혀를 찼다.
“다 비자금을 허술하게 관리한 자업자득인 거지.”
그 말에 동의하듯 길성호 비서실장 역시 살짝 눈가를 찡그렸다.
“저도 설마하니 국내 은행에 현금으로 넣어두고 있을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내 말이 그거야. 주위에 다 멍청한 놈들만 있는 것도 아니고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박태홍 회장이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안일하게 행동한 탓도 있지만 금융실명제가 전격적으로 실시될 걸 모르고 있다가 꼼짝없이 묶여 버린 게 아닐까요.”
그러자 박태홍 회장이 담배를 입에 문 채 눈썹을 모으고 길성호 비서실장을 쳐다봤다.
“금융실명제가 실행되기 전에는 차명 계좌를 얼마든지 쉽게 만들 수 있고 추적하기도 쉽지 않았으니. 찾아 쓰기 간편하도록 수십 개로 쪼개 관리하고 있다가 그대로 묶여 버려 다른 곳에 옮길 수가 없게 되었다면 아귀가 맞지 않습니까.”
듣다 보니 그럴듯하게 느껴져 박태홍 회장이 작게 머리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전직 대통령 중에 한 명이 4천억 대 비자금의 실명 전환을 도와준다면 절반을 국가에 헌납하겠다고 은밀히 제안했었다는 소문이 있었지.”
“맞습니다.”
몸을 앞으로 당겨 앉은 길성호 비서실장이 살짝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현재까지 드러난 정황들로 볼 때 아무래도 소문의 주인공이 바로 노 전 대통령이었던 걸로 보입니다.”
“나도 같은 생각이야.”
하긴 박태홍 회장 본인 역시 둘째 아들인 석원이 미리 귀띔을 해주지 않았다면 속수무책으로 당했을 만큼 극도의 보안 속에 전광석화처럼 금융실명제가 진행됐었다.
그러니 노 전 대통령도 방심하고 있다가 비자금이 그대로 묶여 버렸을 가능성이 컸다.
“비록 노 전 대통령의 도움을 받아 청와대 새 주인이 됐지만 친밀한 사이는 아닌 걸 생각하면 금융실명제를 실시하기 전에 먼저 알려줬을 가능성은 거의 없을 거야.”
“그럴 겁니다. 반대로 노 전 대통령 측은 관계가 껄끄럽다고는 해도 같은 당에서 대권을 이어받았으니 방심한 측면이 없지 않았을 겁니다.”
여러모로 노 전 대통령이 뒤통수를 맞은 격이지만 그렇다고 동정할 기분은 안 들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너무 안이했어.”
만약 석원의 말을 듣지 않았다면 박태홍 회장 역시 금융실명제로 인해 상당한 곤욕을 치렀을 것이다.
‘이래저래 둘째 녀석의 도움을 많이 받는군.’
박태홍 회장은 그렇게 생각하며 새삼 석원의 선견지명에 감탄했다.
그때 길성호 비서실장이 아, 하고 입을 열었다.
“이제 시작하려나 봅니다.”
그 말에 박태홍 회장은 시선을 들어 정면에 있는 텔레비전을 쳐다봤다.
굳은 얼굴로 노기훈 전 대통령이 연희동 사저에 마련된 기자회견장으로 들어오자 카메라 플래시가 쉴새없이 번쩍였다.
연단 앞에 선 노기훈 전 대통령은 침통한 표정으로 잠시 모여 있는 기자들을 둘러보고는 마이크에 입을 가져다 댔다.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우선 불미스러운 일로 이렇게 여러분들 앞에 서게 된 걸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 지난 며칠 동안 얼마나 많은 허탈과 분노를 느끼셨습니까. 저를 향한 국민 여러분의 솟구치는 분노와 질책은 당연한 것입니다.]고개를 든 노기훈 전 대통령은 앞에 설치된 방송 카메라를 똑바로 쳐다 보면서 차분히 말을 이었다.
[그러나 오늘 국민 여러분 앞에 선 것은 저의 잘못에 대한 용서를 구하기 위한 건 결코 아닙니다. 오로지 국민 여러분에게 엄청난 충격과 실망을 준 작금의 통치자금 문제에 대한 저의 솔직한 심정을 말씀드리고 사죄를 드리기 위해 이 자리에 섰습니다.]노기훈 전 대통령은 허리를 꼿꼿이 편 채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구차한 변명처럼 들릴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통치자금은 분명 잘못된 것입니다. 하지만 그동안 우리 정치의 오랜 관행이기도 했습니다. 재임 당시 정치 문화와 선거풍토에서 불가피한 면도 없지 않았던 것입니다. 물론 관행이라고 해서 또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고 해서 그것이 용납될 수 있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이를 과감히 떨쳐 버리지 못한 건 전적으로 저의 책임입니다.]구구절절하게 늘어놓는 변명을 듣고 있던 박태홍 회장은 이어진 이야기에 이맛살을 찌푸렸다.
[대통령으로 재임하던 5년 동안 약 5천억 원의 통치자금이 조성되었습니다. 주로 기업인들로부터 자발적인 성금을 받아 조성된 이 자금은 저의 책임 아래 대부분 정당운영비 등 정치활동에 사용되었습니다. 결코 사사로운 이익을 위해 이 돈을 쓴 적이 없으며…….]석원이 예상했던 대로 노기훈 전 대통령은 비자금 조성 사실을 스스로 밝히고 있었다.
최악의 상황을 맞닥뜨리게 된 박태홍 회장은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아마 지금쯤 다른 기업 회장들도 발칵 뒤집혔으리라.
함께 기자회견을 보던 길성호 비서실장 역시 충격을 감추지 못한 표정이었다.
한참을 더 발언을 이어간 노기훈 전 대통령은 쏟아지는 기자들의 질문 세례에 대답하지 않고 그대로 들어가 버렸다.
박태홍 회장은 리모컨을 들어서 텔레비전을 끄며 거친 목소리로 화를 냈다.
“자발적이긴 개뿔. 청와대에서 돈을 내라는 데 싫다고 할 간 큰 놈이 어디 있겠어!”
뒤늦게 충격에서 벗어난 길성호 비서실장이 심각한 얼굴로 박태홍 회장을 향해 몸을 돌렸다.
“이렇게 되면 비자금을 낸 기업들도 수사를 피하기 어렵겠습니다.”
“으음. 그렇겠지.”
저절로 한숨이 나올만한 상황이었지만 며칠 전 서재에서 석원이 했던 이야기대로 정확히 흘러가는 게 놀라울 뿐이었다.
‘이걸 다 어떻게 예상한 건지.’
박태홍 회장은 내심 혀를 내두르며 진짜 무당처럼 작두라도 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곧 딴생각을 할 때가 아닌 걸 깨달은 박태홍 회장이 길성호 비서실장을 보며 물었다.
“노 전 대통령 측에 전달한 돈은 문제가 되지 않도록 깨끗하게 세탁한 거겠지?”
“물론입니다.”
곧바로 대답한 길성호 비서실장이 살짝 머뭇거리며 덧붙였다.
“저희는 탈이 안 나게 잘 처리해뒀지만 노 전 대통령 쪽에서 증거가 나온다면 꼼짝없이 엮여 들어갈 수밖에 없을 겁니다.”
“그럴 테지.”
이맛살을 찌푸린 채 잠시 생각을 정리한 박태홍 회장은 어느새 거의 다 타들어 간 담배를 크리스털 재떨이에 비벼서 껐다.
“일단 우리 쪽에 문제가 될만한 자료나 증거가 남아 있는 게 있는지 다시 한번 철저히 살펴보고, 비자금 수사 상황을 예의주시하도록 해.”
“그렇게 하겠습니다.”
지금처럼 거센 폭풍우가 몰아칠 때는 섣불리 행동했다가 그대로 휩쓸려 날아가 버릴 수 있었기에 바짝 엎드려 얼른 비바람이 지나가길 기다리는 것이 상책이었다.
‘문제는 아무런 탈 없이 조용히 지나가긴 글러 보인다는 거지.’
본인이 살기 위해 노 전 대통령이 여야 모두에 비자금이 흘러갔다는 걸 밝힌 이상 정치권도 국민들의 비난을 피하기 어려워졌다.
그러니 분명 쏟아지는 분노와 질타를 피하기 위해 비자금을 건넨 기업 총수들을 줄줄이 검찰 포토라인에 세워서 대신 화살 받이로 삼으려고 할 것이 불을 보듯 뻔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박태홍 회장 역시 검찰 수사를 피하기 어려울 터였다.
소파에 등을 기댄 채 길게 한숨을 내뱉은 박태홍 회장은 이내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뗐다.
“길 실장.”
“예. 말씀하십시오.”
“지난번에 세워둔 승계 계획 말이야.”
“……!”
“내가 가진 대흥 방직 지분을 우보 재단과 큰놈한테 넘기는 작업을 시작하도록 하게.”
뜻밖의 지시에 길성호 비서실장이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길게 시간을 두고 천천히 진행하실 계획이셨지 않습니까.”
“그랬지. 하지만 상황이 변했으니 그에 맞춰 계획을 수정해야 되지 않겠나.”
박태홍 회장이 담담하게 말했다.
“혹시 이번 비자금 사건 때문에 마음이 바뀌신 겁니까.”
그렇게 묻자 박태홍 회장이 무겁게 머리를 끄덕였다.
“기업 총수들에 대한 수사가 시작되면 나 역시 검찰 조사를 피할 수가 없겠지.”
“그건…….”
뭐라 대답할 말을 찾지못한 길성호 비서실장이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떨궜다.
“매번 검찰에 불려 다니고 기소가 돼 재판을 받는 상황이 되면 그룹 경영에 제대로 신경을 쓸 수 없게 될 걸세.”
박태홍 회장의 얼굴에 씁쓸한 기색이 감돌았다.
“거기서 끝나면 다행이겠지만 행여라도 실형이 선고되기라도 한다면 큰일이지 않겠나. 그러니 미리 대비를 해둬야지.”
“검찰 조사는 어쩔 수 없겠지만 비자금을 건넨 기업 총수가 한두 명이 아니니 기소가 되어 유죄를 받더라도 실형을 선고받지는 않을 겁니다.”
“자네도 둘째 놈하고 똑같은 말을 하는군.”
피식 웃은 박태홍 회장이 다시 말했다.
“물론 그렇겠지. 하지만 불구속 기소가 되든 집행유예로 풀려나든 당분간 경영 전면에 나서지 못하고 자숙 기간을 가질 수밖에 없을 거야.”
길성호 비서실장은 뭐라 반박을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온 나라가 발칵 뒤집힌 대형 스캔들에 연루돼 검찰 조사까지 받았는데 아무렇지도 않게 금방 경영에 복귀한다면 국민들의 시선이 곱지 않을 것이 불을 보듯 뻔했다.
“그게 아니더라도 아들놈들한테 슬슬 그룹을 넘겨줄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 조금 빨리 승계 작업을 시작한다고 여기면 되지 않겠나.”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이미 뜻을 확고하게 굳힌 걸 눈치챈 길성호 비서실장이 어쩔 수 없다는 듯 대답했다.
“승계 작업을 진행한다고 해도 하루 이틀만에 끝낼 수 있는 일이 아니니 그동안은 내가 계속 그룹을 이끌어 갈 걸세. 그리고 나중에 뒤로 물러나 있더라도 녀석들이 경영을 제대로 못 하는 것 같으면 바로 엉덩이를 걷어차서 자리에서 쫓아내 버릴 거야.”
씨익 웃으며 말하는 박태홍 회장의 모습에 길성호 비서실장도 옅은 미소를 지었다.
올해로 65세였지만 나이에 비해 혈기 왕성한 박태홍 회장이었기에 충분히 그러고도 남았다.
“그리고 방직 지분 정리가 끝나면 지난번에 말한 대로 증권과 창업 투자를 묶어서 둘째 녀석한테 넘기도록 해.”
“알겠습니다.”
줄곧 진지하게 지시를 내리던 박태홍 회장이 돌연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뭐 나보다 돈이 많은 녀석이라 이걸 줘도 크게 티도 안 나겠지만 그래도 제 몫은 챙겨줘야지.”
“예?”
“아무것도 아닐세.”
박태홍 회장은 신경 쓰지 말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참, 그리고 연말에 둘째 녀석을 전무로 승진시키려고 한 것 말이야.”
“안 그래도 그렇게 인사 발령을 낼 거라고 고영일 대표한테 귀띔을 해놨습니다.”
“그거 취소하도록 해.”
길성호 비서실장이 의아한 얼굴로 쳐다보며 물었다.
“그럼 둘째 도련님을 전무나 부사장으로 승진키시려고 하십니까?”
“아니. 등기 이사로만 이름을 올려놓고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게 해줄 생각이야.”
머리를 가로저은 박태홍 회장이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를 매달았다.
“이미 다 커서 용이 되어 버린 녀석을 좁은 우물에 억지로 가둬놓을 수는 없지 않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