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lden Spoon Investment Portfolio RAW novel - Chapter (203)
금수저 투자백서 203화(203/231)
203. 그럴듯한 간판을 하나 달고 있어야겠지.
[포터 지사장을 비롯한 일본 지사 직원들에 대한 출국 금지 조치가 오늘부로 전부 해제됐다고 합니다.]흰색 셔츠에 얼마 전 구찌 수석 디자이너인 제이콥 톰슨이 보내준 신상 넥타이를 한 석원이 창가에 선 채 휴대폰을 들고 입가에 옅은 미소를 지었다.
“약빨이 제대로 먹힌 모양이네요.”
[빈센트 상무장관한테 들으니 포괄통상법을 들먹이며 일본에 대해 무역 보복 조치를 취할 수도 있다고 압박을 줬다고 합니다.]“포괄통상법이라면 슈퍼 301조가 포함된 법률 아니에요.”
[맞습니다. 지난 정부에서 2년간 한시적 법률로 만들어졌다가 폐지된 걸 데이비슨 행정부에서 다시 작년에 부활시켰죠.]대통령의 재량으로 불공정 무역행위를 벌인 상대국에 대해 차별적이고 강력한 보복 조치를 취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한 것이 바로 슈퍼 301조였다.
이미 시한이 종료돼 폐지된 법안을 굳이 꺼내 다시 부활시킨 건 무역 마찰을 벌이고 있는 일본을 다분히 겨냥한 행동이었다.
‘실제로 그전까지만 해도 강하게 대립하던 일본 정부였지만 미국이 슈퍼 301조를 꺼내 드니까. 화들짝 놀라 바로 꼬리를 내려 버렸지.’
슈퍼 301조의 적용을 받으면 그 순간 세계에서 가장 큰 소비 시장인 미국에 수출이 불가능해질 뿐만 아니라, 다른 동맹국들한테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상대국의 경제를 단번에 파탄으로 몰고 갈 수 있을 만큼 핵폭탄 같은 무시무시한 파괴력을 가지고 있었다.
‘존재 자체만으로도 상대편에 엄청난 위협과 압박감을 준다는 걸 생각하면 통상무역에서의 핵폭탄이라고 불러도 과언은 아니지.’
휴대폰에서 들리는 랜든의 목소리에 석원은 상념을 지웠다.
[무시무시한 슈퍼 301조까지 들먹였으니 아마 모르긴 해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을 겁니다.]석원도 작게 머리를 끄덕였다.
“그럴 거예요. 설마 이번 일이 그렇게 커질 거라고는 전혀 짐작하지 못했을 테니까요.”
[하하. 맞습니다. 생트집을 잡으며 불장난을 벌이던 자리가 알고 보니 화약고 옆이었다는 걸 깨닫고 기겁을 하며 뒤집어졌을 겁니다.]“거기다 얼마 전까지 미일 통상 마찰로 인해 슈퍼 301조가 적용될 수 있다는 위협을 받았던 걸 생각하면 단순한 협박으로 들리지 않았을 거예요.”
[최대 쟁점이었던 자동차는 협상이 타결되면서 피해갔지만, 종이와 목재제품이 우선협상 지정 가능 품목으로 올라가 있으니까 더욱 그럴 겁니다.]자동차, 전자 제품이 일본의 주력 수출품이었기에 사실 종이와 목재 수출이 제한되더라도 큰 타격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렇게 우선협상 지정 가능 품목으로 올라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일본 정부 입장에서는 큰 부담이 됐다.
[다음 주에 통보받은 대로 포터 지사장에 대한 소환 조사가 이루어질 예정입니다. 하지만 옵션 상품을 만든 사유를 간단히 묻는 형식적인 조사에 그칠 거라고 대장성 쪽에서 미리 양해를 구했다고 합니다.]“그 정도면 일본 쪽 일은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아도 되겠네요.”
[네. 안심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대답하던 랜든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아. 그리고 대장성 조사가 시작되자 일본 제철을 비롯한 다른 회사들이 옵션 청산을 갑자기 미뤘다고 말씀드렸지 않습니까.]석원도 기억을 떠올리고서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그런데요?”
[약삭빠르게도 분위기가 바뀐 걸 알아차리고는 다시 옵션 청산을 요청해왔다고 합니다.]“손해를 줄이기 위해 대장성에서 계약에 문제가 있었다고 결론을 내려주길 기대하다가 안 될 것 같으니까 바로 태세를 전환한 모양이네요.”
석원이 가볍게 콧방귀를 뀌며 대꾸했다.
그러자 랜든 역시 입가에 비웃음을 머금었다.
[그 사이 엔화가 더 하락하는 바람에 꼼수를 부리려다가 오히려 원래보다 환손실이 커지기만 했으니 아주 쌤통입니다.]“그러게 말이에요.”
[아직 확정된 액수는 아닙니다만 옵션 계약이 전부 청산되면 비용을 제하고 수익금이 대략 31억 달러 정도 될 것 같습니다.]“그 정도면 그럭저럭 괜찮은 수익이네요.”
석원이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월가에서 알면 다들 발칵 뒤집힐 액수인데 이렇게 담담하게 받아들이시다니 역시 보스십니다.]아무리 생각해도 이런 담력은 절대 따라가지 못할 것 같았다.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석원이 말했다.
“앞으로도 일본에서 계속 사업을 하려면 대장성과 껄끄러운 관계가 돼서 좋을 것이 없으니까. 상황이 정리되면 앙금이 남지 않게 적당히 기름칠을 해두라고 해요.”
[그러겠습니다.]이번에 한탕하고 끝내는 것이 아니라 아직 일본에서 뜯어 먹을 것이 많이 남았기에 정관계 고위 인사들과 원만한 관계를 만들어둘 필요가 있었다.
‘이 정도로 만족하고 그만두기에는 너무 아쉽잖아. 등에 빨대를 꽂아두고 골수까지 쪽쪽 빨아먹어야지.’
항상 그렇지만 일본 등처먹는 일에는 양심의 가책 따위 느끼지 않는 석원이었다.
많이 기다릴 것도 없이 조만간 다시 거하게 털어먹을 건수가 있었다.
잠시 더 이야기를 나누고 통화를 끝낸 석원은 휴대폰을 바지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러자 타이밍을 맞춘 듯 나성미가 노크를 하고 들어왔다.
“최호근 4팀장님이 오셨습니다.”
“들어오라고 해요.”
얼마 안 있어 네이비색 정장을 입은 최호근 팀장이 들어와 꾸벅 머리를 숙였다.
“그쪽으로 앉아요.”
“예.”
석원이 먼저 소파 상석 자리에 앉자 최호근 팀장도 오른편 빈 소파에 엉덩이를 붙였다.
한쪽 다리를 꼬고 몸을 뒤로 기댄 석원은 약간 긴장한 듯한 최호근 팀장의 얼굴을 보며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그러자 최호근 팀장이 재킷 안주머니에서 얇은 봉투 여러 개를 꺼내 탁자 위에 내려놨다.
앞에 놓인 봉투들을 힐끔 내려다본 석원은 고개를 들어 최호근 팀장에게 시선을 줬다.
“이게 뭐죠?”
“사표입니다.”
최호근 팀장이 그를 마주 보면서 사뭇 진지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저를 포함해 4팀 팀원들 모두 본부장님을 따라가기로 마음을 모았습니다.”
석원은 깍지를 낀 손을 무릎 위에 올리고 물었다.
“한 사람도 빠짐없이 다 함께하기로 한 거예요?”
“그렇습니다.”
“다들 본인의 의지로 결정한 거겠죠?”
확인하듯 되묻자 최호근 팀장이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작게 머리를 끄덕인 석원은 사표가 든 봉투들을 다시 최호근 팀장 쪽으로 밀어 놓으며 말했다.
“다시 가져가요.”
“예?”
최호근 팀장의 표정이 금방 의문으로 뒤덮였다.
기껏 큰마음을 먹고 팀원들 모두가 퇴사하기로 마음을 모으고 사표까지 써왔는데 다시 되돌려주니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연말까지는 정상적으로 업무를 보고 내년에 자리를 옮길 예정이니까. 굳이 지금 사표를 가져올 필요는 없어요.”
“아. 예.”
뒤늦게 너무 성급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최호근 팀장이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딴에는 비장한 심정으로 끝까지 함께 따라가겠다는 결의를 보여주려고 한 것인데 일이 이렇게 되니 무안한 기분이 밀려 들어왔다.
약간 시무룩해진 모습에 석원은 입가에 살짝 미소를 짓고 말했다.
“이건 아직 윗선에서만 결정된 이야기인데.”
“……?”
“4분기 수익률이 조금 떨어지긴 했지만 지수보다 좋은 성과를 냈고 올해 목표치도 초과 달성해 연말 보너스가 꽤 두둑하게 나올 예정이에요.”
다른 증권사들에 비해 성과가 나쁘지 않았지만 전체 시장 분위기가 안 좋았기에 회사 내에서는 올해 연말 보너스를 크게 기대하지 않는 분위기였다.
그런 참에 석원의 입에서 반가운 소식을 들은 최호근 팀장은 솔깃한 얼굴로 그를 쳐다봤다.
“그렇습니까?”
“말이 나왔으니 하는 이야기지만 솔직히 다른 증권사 PI 부서보다 우리 실적이 훨씬 뛰어난 건 분명한 사실이잖아요.”
“마. 맞습니다.”
얼른 머리를 끄덕이는 최석원 팀장을 보며 석원이 은근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성과급 외에 특별 보너스까지 지급될 거예요.”
“특별 보너스까지요!”
조금 전까지 시무룩해 있던 건 까맣게 잊은 듯 최호근 팀장이 번쩍 눈을 빛냈다.
역시 최고의 치료는 금융치료라고 하던가.
지난 일년동안 고생했던 걸 보상받는 증거이자 선물 같은 느낌이었기에 직장인들에게 연말 보너스란 한 줄기 빛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니 이런 반응을 보이는 건 당연했다.
“그런데…….”
석원은 말꼬리를 늘이며 잔뜩 기대에 찬 얼굴을 하고 있는 최호근 팀장을 힐끔 쳐다봤다.
“지금 회사에 사표를 제출하면 연말 성과금은 물론이고 보너스도 못 받을 텐데 그러면 아쉽지 않겠어요?”
“허억!”
미처 거기까진 생각하지 못했던 최호근 팀장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 그렇지요.”
허둥지둥 당황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석원의 장난기가 발동했다.
“음.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니 앞으로 많이 바빠질 텐데. 새로운 자리로 옮겨 가기 전에 잠시 쉬는 시간을 가지며 심신을 재충전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네요.”
그러자 최호근 팀장의 얼굴에 낭패한 기색이 어렸다.
석원은 그걸 알면서도 은근히 모른 척 배려가 부족했다는 듯 굴었다.
“하루하루 치열한 시장에서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주식을 사고파는 게 보통 스트레스가 쌓이는 일이 아니죠. 하긴 이참에 휴식이 필요하긴 할 거예요.”
그러고는 사표 봉투를 다시 가져갈 것처럼 손을 뻗자 최호근 팀장이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움직여 후다닥 봉투들을 챙겼다.
얼른 사표 봉투를 재킷 안주머니에 집어넣은 최호근 팀장은 하하 웃으며 어색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다.
“오랫동안 일한 회사인데 제대로 마무리를 짓지 못하고 떠나면 개운치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본부장님도 올해까지 있으신다고 하셨는데 저희가 끝까지 보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무 변명이나 주워 삼키는 최호근 팀장의 눈동자가 정처 없이 흔들렸다.
“머물다 간 자리가 깨끗한 사람이 아름다운 사람이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하하!”
“그거 화장실에 자주 붙어 있는 명언 아니에요?”
“…….”
최호근 팀장은 할 말을 잃고 슬쩍 시선을 피했다.
“크흠. 뭐. 그래요.”
석원은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애써 참으며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다.
“최 팀장과 4팀 팀원들이 갑자기 그만둬 버리면 남은 직원들이 빈자리를 메꾸는 데 힘들 테니까. 당분간은 지금처럼 일을 계속하면서 조금씩 인수인계를 하도록 해요.”
“네. 알겠습니다!”
최호근 팀장은 행여라도 석원의 마음이 바뀔까 봐 얼른 대답했다.
“아직 장이 열려 있는 시간이라 바쁠 테니 그만 가봐요.”
“예.”
최호근 팀장이 곧바로 벌떡 일어나 사무실을 재빨리 빠져나갔다.
뒤에서 그런 모습을 보고 있던 석원은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최 팀장하고 4팀 팀원들이 전부 따라온다면 당분간 인력 문제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되겠군.”
수백억 달러를 움직이는 석원이 좁은 국내 시장에 끼어들면 작은 연못에 커다란 상어를 풀어 놓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가지고 있는 자금 가운데 일부만 국내 증시에 풀어도 개별 종목이 아니라 코스피 지수가 아래위로 춤을 춰 버릴 테니까. 말 그대로 생태계 교란종이나 마찬가지지.”
그 때문에 IMF 전까지 국내 투자는 엘도라도 펀드 본진은 움직이지 않고 최 팀장과 4팀 팀원들을 중심으로 할 계획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제대로 활동을 하려면 그럴듯한 간판을 하나 달고 있어야겠지.”
머릿속에 생각해 두고 있는 일들을 원활하게 진행하기 위해서라도 국내에 새로운 기반을 만들 필요가 있었다.
한쪽 손으로 매끈하게 면도를 한 턱을 매만지며 한참 고심하던 석원은 이내 어떻게 할지 결정을 내렸다.
“역시 그러는 게 제일 낫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