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lden Spoon Investment Portfolio RAW novel - Chapter (211)
금수저 투자백서 211화(211/231)
211. 그렇다면 한 번 더 신세를 지겠네.
“절벽 위에 선 졸부들이라고 하셨습니까?”
시선을 받은 해밀턴은 입가에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니면 수북하게 털이 찐 양떼들이라고 하는 표현이 더 어울릴지도 모르겠군.”
“…….”
해밀턴은 말뜻을 이해한 듯 눈을 반짝이는 로드니를 두고 소파에서 일어나 서재 한쪽에 있는 홈바로 향했다.
위스키병을 열고 얼음을 넣은 온더락 잔을 반쯤 채우고는 로드니를 돌아보며 물었다.
“자네도 한잔 하겠나.”
“네.”
해밀턴은 온더락을 하나 더 만들어 양손에 들고 다시 돌아왔다.
그러고는 왼손에 든 잔을 로드니한테 건넨 뒤 맞은편 소파에 한쪽 다리를 꼬고 앉았다.
달그락 얼음 소리를 내며 차가운 위스키를 한 모금 마신 해밀턴은 잠시 끊어졌던 대화를 계속이었다.
“얼마 전에 세계은행에서 내놓은 통계를 보고 아주 흥미로운 걸 하나 발견했다네.”
“그게 뭡니까?”
“올해 상반기에만 개발도상국에 투자된 자금이 작년보다 20%나 늘어난 걸로 조사되어 있더군.”
“그거야 최근 몇 년간 중국을 비롯한 개발도상국들의 경제 성장이 가파르게 이루어지다 보니 투자금이 몰리는 것 아니겠습니까?”
푹신한 소파에 몸을 기댄 해밀턴이 작게 머리를 끄덕였다.
“틀린 이야기는 아니야. 원래 돈이란 성장과 수익이 있는 곳으로 쏠려 들어가는 속성이 있으니깐 말이야.”
“…….”
“관심이 생겨 관련 자료를 조금 더 자세히 살펴봤더니 개발도상국들 가운데서도 중국과 인도네시아, 태국 그리고 말레이시아까지 이들 네 아시아 국가에 전체 투자금의 절반에 가까운 260억 달러가 들어갔더군.”
“상반기에만 그만큼이 투자됐다는 말씀이십니까?”
“맞네.”
“……작지 않은 액수이군요.”
액수를 들은 로드니의 얼굴에 살짝 놀란 기색이 떠올랐다.
“더 재미있는 건 아시아 국가들에 투자된 자금 상당수가 공공자금이 아니라 민간자금이라는 걸세.”
로드니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멕시코 같은 남미 국가에 들어간 자금은 세계은행이나 IMF에서 대출한 구제 자금일 경우가 많지만, 아시아 국가들은 말 그대로 경제 성장의 과실을 따먹기 위해 투자되는 돈일 테니까. 성향부터가 다를 수밖에 없겠죠.”
“그렇지. 그런데 아시아 국가들이 지난 십 년간 급격한 경제 성장을 이루며 호황을 누릴 수 있었던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
딱히 어렵지 않은 질문이라고 생각하며 로드니가 곧바로 대답했다.
“플라자 합의 이후 엔고가 이어지자 비싸진 일본 제품 대신 다른 아시아 국가들의 수출이 크게 늘어나고 낮은 유가와 금리의 수혜까지 입은 덕분이지 않습니까.”
소위 3저 호황(달러, 금리, 유가)의 수혜를 가장 톡톡하게 누린 국가 중에 대표적인 곳이 바로 대한민국이었다.
386세대라고 불리는 80년대 말에서 90년대 중반까지 대학을 졸업한 청년들은 아예 취업난이라는 단어 자체가 없이 마음에 드는 직장을 골라서 갈 정도였으니 경제가 얼마나 호황인지 알 수 있었다.
“세계은행 통계에서 아시아 개발도상국 명단에 한국이 없어 확인해 봤더니 그새 개도국을 졸업하고 중진국으로 이름을 올렸더군. 그것만 봐도 아시아 국가들의 경제 성장이 얼마나 가파른지 알 수 있을 거야.”
그렇게 말하던 해밀턴이 이내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어떤 파티든 시작이 있으면 끝날 때가 찾아오는 법이지 않겠나.”
상체를 바로 세운 채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는 로드니를 쳐다보면서 말을 이었다.
“오전에 확인해 보니 오늘 달러-엔 환율이 103.10엔 정도 하더군.”
해밀턴의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던 로드니는 곧바로 말뜻을 알아차리고 낮게 탄성을 내뱉었다.
“엔저와 함께 연방준비은행의 정책이 강달러로 돌아서면서 그동안 아시아 국가들의 경제 성장 동력이 됐던 3저 현상이 깨졌군요.”
정답이라는 듯 언더락 잔을 손에 든 해밀턴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엔화 가치가 떨어진다는 건 반대로 이야기하면 그동안 환율에서 이득을 보던 아시아 국가들의 수출 경쟁력이 약화 된다는 거지.”
“수출이 위축될 것이 뻔한데도 투자를 줄이지 않고 계속 설비를 늘리고 있다면…… 결국 얼마 못 가서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겠군요.”
직접 영입한 천재답게 아시아 국가들이 어떤 시한폭탄을 품고 있는지 금방 눈치채는 모습에 해밀턴은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손에 든 위스키를 홀짝이며 말했다.
“아시아 국가들의 상황이 급격하게 나빠지면 투자된 자금의 상당수가 민간자금이라는 것이 큰 아킬레스건으로 작용하게 될 거야.”
“공공자금과 달리 불안한 모습이 보이면 그 즉시 넣어둔 돈을 빼가려고 하겠죠.”
“바로 그거야.”
해밀턴이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남미와 달리 아시아 국가들이 쌓아둔 외환이 많다고 해도 한 번에 수십, 수백억 달러에 달하는 뭉칫돈이 계속해서 유출된다면 어떻게 될 것 같나?”
“감당하기가 쉽지 않겠죠.”
“맞아. 그러다 보면 얼마 전 멕시코가 겪었던 외환위기가 아시아 각국에서 재발될 수도 있지 않겠나.”
로드니가 사뭇 진지한 얼굴로 해밀턴이 한 이야기를 곰곰이 곱씹으며 생각에 빠졌다.
그러는 동안 해밀턴은 온더락 잔에 든 위스키를 마시며 느긋하게 기다렸다.
얼마 있지 않아 고개를 치켜든 로드니가 맞은편에 있는 해밀턴을 향해 입을 열었다.
“처음 말씀하셨던 대로 그동안의 경제 성장 덕분에 아시아 국가들이 털을 잔뜩 찌우고 있는 만큼 예상대로 상황이 흘러간다면 영국이나 멕시코 때하고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아주 큰 판이 벌어지겠군요.”
“그래서 겁이라도 나나?”
“설마 그럴 리가요.”
짓궂은 물음에 로드니가 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판이 크면 땄을 때 돌아오는 수익 역시 엄청날 테니 벌써부터 짜릿하게 흥분되는 것 같습니다.”
눈동자에 떠오른 기대감을 알아챈 해밀턴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나 역시 그렇다네.”
로드니가 몸을 앞으로 당겨 앉으며 약간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만약 성공한다면 저희가 다시 한번 월가에 역사를 쓸 수 있을 겁니다.”
“그럴 거야. 이번에는 한 곳이 아니라 여러 국가를 상대로 도박을 벌여야 할 테니까 말이야.”
“타겟에 홍콩도 들어가는 겁니까?”
“물론이지. 아시아 국가들이 흔들리면 지역 금융 허브 역할을 하는 홍콩 역시 영향을 안 받을 수 없지 않겠나.”
“분명 그럴 겁니다. 거기다 중국 반환을 앞두고 어수선한 분위기이니 더욱 위기에 취약한 상태일 테죠.”
아편 전쟁에 승리한 영국이 전리품으로 홍콩섬을 할양받고 이어서 구룡반도를 비롯한 주변 지역을 추가로 99년간 임차하면서 대영제국의 영향력 아래 들어가게 됐다.
그러다가 양국 간의 협상을 통해 99년 임차 기간이 끝나는 1997년에 홍콩 전체를 중국에 영구 반환하기로 합의했다.
“영란은행과 일본에 이어 홍콩까지 무릎을 꿇리게 되면 금융계에서 트리플 크라운(Triple Crown)을 달성하며 그야말로 월가의 전설로 남으시겠군요.”
“하하. 트리플 크라운이라. 거기까진 생각 못 했는데 자네 이야기를 들으니 더욱 욕심이 나는군.”
느긋하게 웃던 해밀턴이 돌연 눈동자를 매섭게 번득였다.
“아직까지는 틈을 살짝 보인 정도에 불과하니까. 물밑에서 언제든 움직일 수 있게 준비만 해두고 아시아 각국의 상황을 면밀하게 주시하고 있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지금껏 해온 투자 가운데 가장 큰 판이 만들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로드니의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이런 짜릿한 감각은 어디에서도 맛볼 수 없을 터였다.
해밀턴은 어느새 얼음만 남기고 다 비운 온더락 잔을 탁자 위에 내려놓고 말했다.
“아시아 개발도상국들의 수출이 급격히 줄어들고 무역 적자가 연속으로 늘어나는 모습을 보인다면. 그때가 바로 사냥에 나설 시간이 됐다는 신호가 될 걸세.”
* * *
1995년 12월 21일. 미국 하와이 오하우섬.
마지막을 준비하라는 담당 의사의 이야기가 있고 나서 상태가 급격히 나빠진 아마르 커프의 어머니는 결국 이틀을 넘기지 못하고 병원 VIP실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녀가 공부하고 오랫동안 몸을 담았던 하와이 대학교 동서문화기술교류 센터 뒤편 정원에서 가족과 친지 그리고 가까운 지인들이 모인 가운데 조촐한 추도식을 가졌다.
그러고는 섬 남쪽에 있는 코코곶 인근 전망대에서 화장한 유골을 푸른 태평양 바다에 뿌렸다.
장례 절차가 모두 끝나자 지난 며칠 사이 많이 수척해진 커프가 신부님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는 검은색 정장을 입고 서 있던 석원에게 다가왔다.
“마지막까지 함께 해줘서 고맙네.”
석원은 커프의 손을 붙잡고 위로를 건넸다.
“분명 좋으신 곳으로 가셨을 테니 너무 슬퍼하지 마세요.”
“그러셨을 거야. 아프신 걸 알면서도 옆을 지키지 못해 항상 죄송했는데 자네가 아니었다면 마지막 가시는 모습도 보지 못하고 보내드릴 뻔했어. 정말 고맙네.”
커프의 표정엔 진심이 가득했다.
“이 은혜는 절대 잊지 않을 거야.”
맞잡은 손에 힘을 꽉 주며 커프가 다짐하듯 말했다.
눈 밑엔 붉은 자국이 아직 남아 있어 그가 얼마나 어머니의 죽음을 애도했는지 알 수 있었다.
어머니가 정신을 잃고 혼수상태에 빠진 건 석원이 보내준 전용기를 탄 커프가 하와이에 도착하고 얼마 있지 않아서였다.
그리고 불과 몇 시간 만에 돌아가셨으니 석원이 아니었다면 커프는 마지막 인사를 하지도 못하고 어머니를 떠나보내야 했을 터였다.
비록 산소마스크를 끼고 기력이 없어 제대로 대화를 나누기도 어려운 상태였지만 살아 있는 마지막 순간을 함께한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러니 석원에 대한 고마움이 클 수밖에 없었다.
“전용기뿐만 아니라 그동안 나 몰래 병원비를 내주고 간병인까지 붙여줬다는 이야기를 여동생한테 들었네.”
“질리안이 안 해도 되는 말을 했군요.”
질리안은 커프의 생부와 이혼한 어머니가 재혼해서 낳은 여동생이었다.
“자네가 아니었다면 질리안 혼자 병간호를 하느라 많이 힘들었을 거야.”
커프가 부드러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염치없지만 내가 부족해 제대로 챙겨주지 못한 걸 대신해줘서 정말 고맙네.”
“어렵고 힘들 때 서로 돕는 것이 친구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이제 그런 말씀은 그만하세요.”
그러자 커프가 살짝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자네 말이 맞아. 비록 어머니를 잃었지만 평생을 함께할 진짜 친우를 찾은 것 같아 기쁘네.”
커프의 눈동자에서 큰 신뢰와 믿음이 느껴졌다.
이번 일로 인해 커프가 그를 가족만큼 가까운 사이로 받아들이게 된 게 확실했다.
석원은 내심 큰 성과라고 생각하며 자연스럽게 화제를 바꿨다.
“이야기를 들으니 바로 시카고로 돌아가신다고요?”
그러자 커프가 입가에 쓴웃음을 띄우며 대답했다.
“자네도 알다시피 선거 운동 중이지 않나. 마음 같아서는 상심이 클 외할머니와 질리안 곁에 있어 주고 싶지만 시작한 건 마무리를 지어야지.”
혹시 이번 일로 미래가 틀어지는 건 아닌지 염려하던 석원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주 상원의원에 출마한 걸 크게 좋아하셨다니 돌아가신 어머니도 그러길 원하실 겁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커프는 여러 감정이 섞인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방금 장례식을 치렀는데 시카고로 돌아가 사람들 앞에 서서 연설을 하고 웃는 얼굴로 악수하고 다닐 생각을 하니 그 역시 마음이 복잡할 터였다.
“공항에 타고 오셨던 전용기가 대기 중이니까 그걸 이용하시죠.”
“그럼 자네한테 너무 신세를 지는 것 같은데.”
“어차피 선배가 안 타면 그냥 빈 비행기로 돌아가야 하는데 하늘에 기름을 뿌리는 것보단 낫지요.”
재차 권하자 그때서야 커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한 번 더 신세를 지겠네.”
“잘 생각하셨습니다.”
커프는 마지막으로 가볍게 악수를 하곤 다른 지인과 친척들에게 인사를 하러 떠났다.
말없이 그 모습을 지켜보던 석원은 구름 하나 없이 맑은 하늘을 잠시 올려다보다가 선글라스를 꺼내 썼다.
그러고는 뒤에 서 있던 보커스와 함께 몸을 돌려 한쪽에 세워둔 검은색 캐딜락 에스컬레이드로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