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lden Spoon Investment Portfolio RAW novel - Chapter (212)
금수저 투자백서 212화(212/231)
212. 보스처럼 배짱이 두둑하질 못해서 그렇게 여유를 부리진 못할 것 같습니다.
1995년 12월 22일 미국 뉴욕.
퀸스에 위치한 라과디아 공항(LaGuardia Airport)에 크리스털 화이트와 노틸 블루 투톤으로 동체를 도색한 걸프스트림 Ⅳ 비즈니스 제트기 한 대가 관제탑의 유도를 받아 활주로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아스팔트로 포장된 유도로를 따라 천천히 이동한 전용기는 넓은 주기장 한쪽에 도착해 엔진을 끄고는 완전히 멈춰 섰다.
아래로 트랩이 내려지자 갈색 캐시미어 코트를 입은 석원이 경호원인 보커스와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어서 오십시오. 보스.”
도착 시간에 맞춰 기다리고 있던 랜든이 계단을 밟고 내려오는 석원을 환한 얼굴로 반겼다.
“시장 분위기는 어때요?”
가볍게 악수하면서 묻자 웃고 있던 랜든이 살짝 표정을 굳혔다.
“별로 안 좋습니다.”
“표정을 보니 오늘도 증시가 반등을 이어가고 있는 모양이네요.”
“예. 셧다운 여파로 금리를 동결할 거라는 예상과 달리 연방준비제도이사회가 FOMC 회의에서 0.25% 금리를 내리자 증시가 바닥을 찍고 기술주를 중심으로 계속 오르고 있습니다.”
“많은 투자가 필요한 기술주에 금리 인하만큼 큰 호재도 없을 테니 그럴 거예요.”
담담한 태도를 보이는 석원과 달리 랜든은 우려 가득한 얼굴을 한 채 슬쩍 눈치를 살피고는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이틀간 S&P500 지수가 12포인트 넘게 올랐을 정도로 상승세가 심상치 않습니다. 아쉽지만 지금 손을 털고 나간다면 손해가 그리 크지 않으니 이쯤에서 포지션을 청산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숏베팅이 실패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석원이 지그시 쳐다보며 물었다.
정곡을 찌르는 질문에 랜든은 잠시 당황하다가 최대한 석원의 기분이 상하지 않도록 돌려서 말했다.
“금리 인하라는 돌발 변수로 하루 만에 불안감으로 가득했던 시장 분위기가 완전히 뒤바뀔지 누가 알았겠습니까. 거기다 내일부터 크리스마스 연휴에 들어가면 남은 영업일이 며칠 안 된다는 것도 저희한테는 불안 요소일 겁니다.”
여전히 입가에 미소를 지우지 않고 가만히 듣고 있는 그를 보며 랜든이 계속 말을 이었다.
“그 사이 백악관과 공화당이 타협을 봐서 셧다운이 끝나 버린다면 제대로 대처할 수 없으니. 그 전에 리스크 관리 차원에서라도 손절하는 것이 여러모로 낫지 않겠습니까.”
벌써 연방정부가 폐쇄된 지 일주일째였다.
지난번 셧다운 기간을 넘겨 버렸는데도 여전히 백악관과 공화당의 힘겨루기가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자 불만을 가지는 국민들이 늘어나며 양측 모두에 비난이 쏟아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크리스마스와 연말 연휴까지 앞두고 있었기에 더욱 벼랑 끝 대치를 계속 이어가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증시만 쉬는 것이 아니라 백악관과 의회도 휴식에 들어가니 까딱 잘못했다가는 셧다운 상태로 연말을 보내게 되겠죠. 그런 상태로 새해를 맞이하게 되는 건 양쪽 다 정치적인 리스크가 클 테고요.”
“제 말이 그겁니다.”
그의 반응을 힐끔 살핀 랜든은 목소리에 더욱 힘을 줬다.
“그런 분위기를 살려 온건파들이 뜻을 굽히지 않는 사비츠 하원의장과 데이비슨 대통령을 설득한다면 양쪽 다 못 이기는 척 협상에 나서서 극적 타결이 이뤄질 가능성이 크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하면 화해와 용서라는 크리스마스의 의미에도 딱 맞으니 명분도 그럴듯하겠네요.”
“그렇습니다. 정치인한테 제일 중요한 것이 명분이니까요.”
랜든이 이야기한 대로 상황이 흘러간다면 분명 백악관이나 공화당 모두 체면을 구기지 않고 부담스러운 셧다운 사태를 끝낼 수 있을 터였다.
정치적으로 보면 상황을 마무리 지을 좋은 기회였지만 석원과 엘도라도 펀드 입장에서는 최악의 시나리오이기도 했다.
다른 때 같으면 흐름을 보고 즉각 대응에 나설 수 있을 테지만, 하필이면 연말인 탓에 이어지는 연휴가 끝날 때까지 꼼짝없이 손이 묶여 버리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정말로 연휴 동안 극적 타결이 이루어지기라도 한다면 새해 증시 개장과 동시에 지수가 크게 위로 튀며 시작할 테니까. 걱정될 만도 하지.’
랜든은 사뭇 심각한 얼굴로 그를 열심히 설득했다.
“아직 셧다운이 해결되지 않았는데도 연준의 금리 인하에 곧바로 지수가 반등하는 걸 보십시오. 그것만 봐도 지금 시장의 힘이 얼마나 강한지 알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여기에 예산안 합의까지 이뤄진다면 그동안 눌려 있던 것까지 합쳐서 아주 크게 튀어 오를 겁니다.”
석원도 동의하듯 머리를 끄덕였다.
“스프링을 누르고 있던 압력이 사라지면 더 높이 튀는 법이니까 분명 그렇겠죠.”
“그렇게 되면 미처 손 쓸 틈도 없이 손해가 엄청나게 커져 버릴 테니 그 전에 조치를 취하는 것이 현명할 겁니다.”
이야기를 모두 들은 석원은 뜻밖에도 입가에 옅은 미소를 지었다.
“앤드루도 같은 생각이에요?”
“그렇습니다.”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건지 석원은 여유로운 목소리로 입을 뗐다.
“뭘 걱정하는지 잘 알고 있어요. 지금 지수가 반등해 며칠간 하락한 걸 빠르게 메꾸고 있는 것도 그런 기대가 많이 반영된 거겠죠.”
까딱 잘못했다가는 마진콜을 받거나 숏스퀴즈가 터질지도 모르는 상황인데도 너무나도 느긋한 모습에 랜든은 의아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럴 겁니다.”
“그런데 말이에요. 만약 기대와 달리 예산안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 것 같아요.”
그런 생각은 전혀 해보지 않은 듯 랜든이 눈을 크게 떴다.
“예?”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는 랜든을 보면서 석원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지금까지 말한 것들의 기본 전제가 전부 셧다운이 끝나는 거잖아요. 그런데 그게 아니라 연말이 지나고 새해가 되어서도 연방정부 폐쇄가 계속된다면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지지 않겠어요.”
“그럴 리가요.”
랜든은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흔들었다.
“여론에 가장 민감한 것이 정치인들인데 설마 데이비슨 대통령과 사비츠 하원의장이 극단적인 행동을 하겠습니까? 더군다나 내년에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말입니다.”
예상한 대로 회의적인 반응에 석원은 검지를 치켜들고 좌우로 가볍게 흔들었다.
“아니죠. 선거가 있으니까 더욱 서로가 정국 주도권을 쥐고 판세를 유리하게 끌고 가기 위해서 절대 물러서지 않으려고 할 거예요.”
하지만 랜든은 여전히 납득이 안 된다는 듯 반박했다.
“그러면 설사 힘겨루기에서 이긴다고 해도 민심을 잃어 투표에 악영향을 끼치게 될 텐데요.”
“물론 그렇겠죠.”
순순히 인정하자 랜든의 얼굴에 의아한 기색이 떠올랐다.
“내년 대통령 선거 예정일이 언제인지 알아요?”
“글쎄요. 정확한 날짜까진 모르지만 대충 11월쯤이지 않습니까.”
“11월 5일이에요. 그러니까 앞으로 1년 정도 남은 거죠.”
그게 무슨 상관이냐는 생각이 들었지만 랜든은 일단 입을 다물고 가만히 이야기를 들었다.
“정치에서 1년은 아주 긴 시간이죠. 더군다나 땅덩어리가 크고 온갖 인종들이 뒤섞여서 살아가는 미국이니 그사이 얼마나 많은 사건 사고들이 벌어지겠어요. 지금은 언론이고 뭐고 온통 시끄럽지만 아마 대통령 선거 때가 되면 셧다운에 관한 건 유권자들의 기억 속에서 희미해져 있을 거예요.”
아무리 큰 이슈라도 시간이 흐르면 점차 잊혀지기 마련이었다.
게다가 먹고 살기에도 바쁜 세상 아닌가.
당장 작년에 무슨 사건이 있었는지 아무나 붙잡고 물어봐도 제대로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몇 안 될 터였다.
석원은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덧붙였다.
“거기다 셧다운의 책임은 양쪽 모두한테 있으니까. 섣불리 선거에서 꺼내 상대를 비방하는 용도로 쓰진 못하겠죠.”
“아…….”
거기까진 생각하지 못했던 랜든이 살짝 입을 벌린 채 탄성을 내뱉었다.
“그에 반해 힘겨루기에서 이겨 주도권을 쥐게 된다면 대통령 선거 때까지 정국을 유리하게 끌고 갈 수 있을 테니까. 백악관이나 공화당 둘 다 쉽사리 양보하려고 들지 않을 거예요.”
석원은 언제나처럼 흔들림 없는 자세로 확신했다.
그러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한 가닥 불안한 마음을 감추지 못한 채 랜든이 물었다.
“셧다운이 길어질수록 눈덩이처럼 늘어날 국민들의 피해와 고통을 생각해 대승적인 차원에서 타협과 양보를 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제가 생각해도 너무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아름다운 결말이긴 하군요.”
석원이 피식 냉소를 지으며 단언하듯 말을 내뱉었다.
“그럴 일은 절대 없을 거예요. 그만큼 권력이란 달콤한 거니까요.”
권력에 대한 정치인들의 집착과 욕심이 얼마나 강한지 랜든 역시 잘 알고 있었기에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난 아직 이 게임을 끝낼 생각이 없어요.”
석원은 입가에 지은 미소를 더욱 짙게 만들며 눈매를 휘었다.
“진짜 게임은 2라운드부터일 테니 조바심을 내지 말고 나처럼 느긋하게 기다려 봐요.”
무려 200억 달러짜리 베팅을 벌이면서도 마치 친구들과 카드 게임을 하는 것처럼 태연한 모습에 랜든은 졌다는 듯 머리를 절레 흔들었다.
“저는 보스처럼 배짱이 두둑하질 못해서 그렇게 여유를 부리진 못할 것 같습니다.”
“하하하.”
시원하게 웃음을 터트린 석원이 어깨를 두드리며 가볍게 말했다.
“그럼 마침 내일부터 크리스마스 연휴니까. 아예 증시와 워싱턴 쪽엔 관심을 꺼 버리고 가족들이랑 같이 여행이나 다녀오지 그래요.”
“끄응. 저도 그렇고 싶지만 신경을 끊는 건 고사하고 여행지에서 분명 하루종일 안절부절못하고 있을 것 같아서 말입니다.”
“그렇기도 하겠네요.”
그가 보기에도 랜든의 성격이라면 수시로 사무실에 전화를 걸어대다가 결국 아내한테 한 소리를 들을 것이 뻔했기에 말없이 웃기만 했다.
“어쨌든 알겠습니다.”
작게 한숨을 내쉰 랜든이 여전히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계속 포지션을 유지하실 마음이신 것 같으니 곧 들어오게 될 마진콜에 대비해서 현금을 마련해 둬야겠군요.”
“기대감에 지수가 전 고점을 넘길 가능성이 크니까 넉넉히 준비를 해두도록 해요.”
“……그러지요.”
랜든이 반쯤 체념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다 뒤늦게 계속 추운 강바람이 부는 주기장 한복판에 서서 대화를 하고 있던 걸 깨달은 랜든이 낭패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저쪽에 호텔까지 모실 헬리콥터를 대기해뒀으니 가시죠.”
머리를 끄덕인 석원은 급하게 서두르는 랜든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잠시 뒤, 석원과 일행을 태운 쌍발엔진을 탑재한 벨 212 헬리콥터가 로터 블레이드를 빠르게 회전시키며 천천히 하늘 위로 떠올랐다.
고도를 충분히 올린 헬리콥터는 뉴욕만(New York Bay)으로 이어지는 이스트강을 따라 날아가며 목적지인 플라자 호텔이 있는 맨해튼으로 향했다.
헤드폰 형태의 방음 장치를 쓴 석원은 고개를 돌려 방풍창 너머로 발아래 펼쳐진 뉴욕 시가지를 내려다봤다.
지난 며칠간 계속 눈이 내려 거대한 도시는 온통 새하얗게 변해 있었다.
간신히 제설 작업을 마친 도로 위에 차들이 빼곡하게 들어앉아 거북이처럼 엉금엉금 느리게 움직이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러다 높이 솟아 있는 맨해튼의 마천루들 사이로 눈에 덮인 센트럴 파크가 눈에 들어오자 작년에 이어 올해도 맨해튼에 있는 브라이언트 공원(Bryant Park)에서 뉴욕 패션위크가 통합해 개최된다고 하던 제이콥 톰슨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킨슬리가 크리스마스에 뉴욕에 머문다고 했던 것 같은데.’
패션쇼가 개최되려면 아직 날짜가 많이 남았지만 킨슬리 같은 인기 모델이라면 뉴욕 패션위크에 분명히 참석할 터였다.
‘한번 연락해볼까.’
어쩌면 크리스마스에 새로운 일정이 생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석원은 입가에 작은 웃음을 띠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