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lden Spoon Investment Portfolio RAW novel - Chapter (214)
금수저 투자백서 214화(214/231)
214. 네네. 물론이죠!
뉴욕 5번가 768번지.
등까지 내려오는 긴 갈색 머리를 끈으로 질끈 묶은 데브라가 큰 숄더백을 어깨에 멘 채 플라자 호텔 도로 건너편 분수 옆에서 초조한 얼굴로 서성거렸다.
연신 손목에 찬 시계를 들여다보고 있을 때 호텔 유니폼 위에 코트를 걸친 금발 머리의 여자가 횡단보도를 종종걸음으로 건너왔다.
바로 그녀의 친구이자 정보원인 사라였다.
“여기야!”
데브라가 손을 들어 올리며 소리쳤다.
그러자 사라도 그녀를 발견하곤 얼른 앞으로 다가와 말했다.
“빨리 왔네.”
“마침 근처에 있어서 바로 달려왔지.”
사라는 누가 보고 있진 않은지 주변을 둘러보면서 낮은 목소리로 빠르게 속삭였다.
“근무시간 중에 잠깐 나온 거니까 빨리 들어가 봐야 돼.”
“알았어.”
고개를 끄덕인 데브라는 제일 중요한 것부터 물었다.
“정말 엘도라도 펀드 대표가 펜트하우스에 묵고 있는 게 확실해?”
“그럼 내가 너한테 거짓말을 하는 것 같아.”
사라가 눈을 흘기며 대답하자 데브라는 혹시라도 토라질까 봐 그녀를 달랬다.
“설마 그럴 리가 있겠어. 그냥 확인 차원에서 묻는 거야.”
새침한 표정을 짓던 사라는 이내 다시 입을 열었다.
“맞아. 매번 투숙할 때마다 엘도라도 펀드에서 숙박비를 지급하거든. 그리고 무엇보다 지배인님이 거기 대표라고 하는 이야기를 내 귀로 똑똑히 들었으니까 그 사람이 분명해.”
“!”
진짜 특종을 붙잡았다는 확신이 들자 데브라의 얼굴이 더욱 상기됐다.
데브라는 어깨에 멘 가방을 꽉 붙들고 당장에라도 호텔 펜트하우스로 달려갈 것 같은 모습으로 말했다.
“지금 객실에 있어?”
“룸서비스로 런치를 시켰으니까 그럴 거야.”
“그렇단 말이지.”
데브라의 눈이 반짝이자 사라가 팔짱을 낀 자세로 물었다.
“너 설마 이대로 곧장 펜트하우스에 쳐들어가려는 건 아니지?”
“성격에 무슨 문제라도 있는지 언론사 인터뷰에 한 번도 얼굴을 안 내미는 걸로 유명한 인간인데 정공법이 통하겠어? 어떻게든 들이받아서 인터뷰를 따내야지!”
데브라가 주먹을 꽉 움켜쥐며 의욕을 불태웠다.
그녀 역시 엘도라도 펀드에 수십 차례나 취재 요청 전화와 편지를 보냈지만 그때마다 번번이 거절당했었다.
그래서 더욱 오기가 생기는 것도 있었지만 목적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최근 일본에서 녹인-녹아웃 옵션을 팔아 거액의 수익을 거둬 엘도라도 펀드가 다시 한번 월스트리트에서 큰 화제가 되고 있었기에 베일에 싸인 대표의 최초 인터뷰를 따낼 수만 있다면 회사에서 주가도 높아질 거라는 계산도 깔려 있었다.
“후후후.”
전투력이 잔뜩 충전된 데브라의 모습에 사라가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그건 안 되지.”
“왜?”
멧돼지처럼 돌격할 기세를 보이던 데브라가 의아하게 사라를 쳐다봤다.
“펜트하우스 손님들은 따로 전용 엘리베이터가 있거든. 게다가 직원들도 허락된 사람이 아니면 펜트하우스가 있는 층에 못 올라가는데 무슨 수로 가려고?”
순간 멈칫한 데브라가 고집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하루 종일 객실에만 있지는 않을 테니 로비나 식당에 내려왔을 때 부딪쳐 봐야지.”
“어휴. 내가 그럴 줄 알았어.”
사라가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네가 사람들 앞에서 창피를 당하는 건 상관없는데. 그럼 난 어떡하라고.”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데브라가 눈을 깜빡이며 쳐다보자 사라가 미간을 찡그렸다.
“그 난리를 쳐서 펜트하우스 손님이 컴플레인을 걸면 호텔에 묵고 있다는 사실이 어떻게 새어 나갔는지 조사할 게 뻔하잖아. 그러다 걸리면 난 바로 해고라고. 아니. 고소나 안 당하면 다행이겠네.”
특종을 잡았다는 생각에 너무 기쁜 나머지 미처 거기까진 생각하지 못했던 데브라가 아차하는 얼굴로 사과했다.
“미안해.”
데브라는 섭섭하단 표정을 짓고 있는 사라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슬쩍 돌렸다.
“그럼 어쩌지?”
사라는 잠시 그런 모습을 보고 있다가 골치 아프다는 듯 이마를 짚었다.
“술김에 아무 말이나 한 내가 미친 년이지.”
그러더니 손가락으로 데브라를 가리켰다.
“일단 호텔 안에서는 절대 접근 금지.”
“말도 안 돼. 그럼 이대로 손가락만 빨고 있으란 말이야?”
데브라가 억울한 듯 외쳤다.
“누가 그러래.”
흥, 하고 코웃음을 친 사라가 다시 말을 이었다.
“호텔에 묵을 때마다 날씨가 좋으면 센트럴 파크를 돌면서 조깅을 하거든. 그때 재주껏 접근해 봐.”
그러자 금방 기운을 되찾은 데브라가 눈을 반짝였다.
“그게 정말이야?”
“그래. 마침 내일은 눈도 안 오고 기온도 올라간다니까 아마 조깅하러 나올 거야.”
“사라! 역시 너밖에 없어!”
데브라가 두 팔을 벌려 사라를 껴안았다.
“어우. 저리가 좀.”
사라는 엉겨붙는 데브라를 억지로 떼어내고 손바닥을 내밀었다.
“됐고. 이제 들어가 봐야 되니까 돈이나 줘.”
“당연히 줘야지.”
숄더백에서 미리 준비해 둔 반으로 접어서 고무줄을 묶은 20달러 뭉치를 건네자 사라가 냉큼 받아 코트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참. 움직일 때 경호원 한 사람이 항상 같이 따라다니니까 조심하고.”
“어떻게든 인터뷰를 따낼 테니까 걱정하지 마.”
데브라가 다부진 말투로 대답하자 사라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이제 정말 가봐야겠어.”
그러고는 몸을 돌려 마침 신호가 바뀐 횡단보도를 황급히 건너갔다.
뒤에 혼자 남은 데브라는 도로 건너 우뚝 서 있는 플라자 호텔을 올려다보면서 기대감으로 잔뜩 가슴을 부풀렸다.
* * *
어제와 달리 구름 한 점 없이 햇살이 따스하게 내리쬐는 아침.
뉴욕의 상징인 센트럴 파크 공원(Central park)에는 많은 사람들이 간편한 트레이닝복을 입고 긴 산책로를 따라 조깅을 하고 있었다.
그런 사람들 속에 섞여 흑발의 사내 한 명이 적당한 속도로 뛰면서 운동을 하고 있었는데 바로 석원이었다.
건장한 체격의 보커스가 서너 걸음 뒤에서 연신 주위를 경계하며 따라갔다.
오성급답게 플라자 호텔 안에 피트니스 센터가 잘 갖춰져 있었지만 이렇게 상쾌한 공기를 마시면서 뛰는 게 훨씬 기분 전환도 되고 좋았다.
맨해튼에 다른 특급 호텔들도 많았지만 뉴욕에 올 때마다 항상 플라자 호텔에 머무는 이유 중에 하나가 바로 앞에 조깅을 하기 좋은 센트럴 파크가 있다는 거였다.
석원은 이어폰을 귀에 꽂은 채 음악을 들으면서 가볍게 산책로를 달렸다.
한편 데브라 역시 새벽부터 일어나 센트럴 파크 안에 있는 갭스토 브릿지(Gapstow Bridge)에 나와 있었다.
거북이가 올라와서 헤엄을 친다는 뜻을 가진 터틀 폰드 연못 위를 지나갈 수 있도록 만들어진 아치형 돌다리인 갭스토 브리지는 주변 나무들과 멀리 우뚝 솟아 있는 맨해튼 고층 빌딩들이 잘 어울려 사진 명소로 유명한 장소였다.
“흐암.”
데브라는 연신 하품을 해대며 거울로 얼굴을 체크했다.
운동복에 너무 진한 화장은 안 어울렸기에 간단하게 혈색을 살리는 정도로만 꾸민 상태였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크리스마스에 친구들과 진탕 술을 마시고 전 남친을 욕하면서 이별의 아픔을 달랜 후 한참 침대에 늘어져 꾸물대고 있어야 할 시간이었다.
“으. 추워.”
추위에 몸을 부르르 떨면서 그녀는 모자를 푹 눌러썼다.
점퍼는 물론이고 장갑에 비니모자까지 완전 중무장을 한 데브라는 졸음이 가득한 얼굴로 투덜거렸다.
“벌써 9시가 넘었는데 왜 안 나타나는 거야.”
혹시라도 놓칠까 봐 아침 7시부터 나와 기다렸으니 조바심이 나는 것도 당연했다.
“혹시 다른 코스로 간 거 아냐?”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초조해할 때 앞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지자 데브라가 목을 길게 빼고 누가 오는지 쳐다봤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나타난 건 허리에 점퍼를 묶고 몸매가 그대로 드러나는 옷을 입은 숏커트 머리의 여자였다.
데브라는 실망한 표정을 짓다가 앞을 스쳐 지나가는 여자의 풍만한 상체를 보곤 자기도 모르게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
그러고는 느껴지는 상대적 박탈감.
모델 일을 해볼 생각이 없냐는 이야기를 들을 정도로 얼굴도 예쁘고 몸매도 좋은 데브라였지만 유일한 콤플렉스가 바로 빈약한 상체였다.
데브라는 어느새 다리를 건너 반대편으로 사라지는 여자를 보면서 괜히 궁시렁거렸다.
“추운데 뭐하러 저런 탱크탑을 입고 나와.”
그렇게 데브라가 혼자 유치한 질투를 하고 있을 때 다시 발소리가 들려왔다.
아무 생각 없이 고개를 돌린 데브라는 모델처럼 잘생긴 젊은 동양인 사내가 건장한 흑인과 함께 뛰어오는 걸 보고 눈을 반짝였다.
“저기. 잠깐만요!”
데브라는 열심히 팔을 휘적거리며 스트레칭을 하는 척하다가 타이밍을 맞춰 지나쳐가려는 석원의 앞을 가로막았다.
석원이 깜짝 놀라 발걸음을 멈추자 뒤에서 따라오던 보커스가 얼른 달려와 커다란 몸으로 그를 가렸다.
“당신 뭐야!”
위압적인 목소리에 순간 움찔했지만 데브라는 속으로 용기를 내며 주머니에서 신분증을 꺼냈다.
“CNBC 기자인데 잠깐 인터뷰 좀 해주시겠어요.”
“기자?”
그러자 석원이 미간을 찌푸린 얼굴로 차갑게 대꾸했다.
“기자면 이렇게 무례하게 행동해도 되는 겁니까.”
“그건 먼저 사과드릴게요. 하지만 수십 번도 넘게 취재 요청을 해도 매번 거부하셔서 이렇게밖에 할 수 없었어요.”
석원은 러닝을 하느라 살짝 거칠어진 호흡을 고르면서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인터뷰를 거절당했다고 이렇게 직접 막무가내로 덤벼든 사람은 데브라가 처음이었다.
석원은 앞을 가로막고 있는 데브라를 그제야 천천히 훑어봤다.
갸름한 턱선에 갈색의 커다란 눈동자.
거의 민낯에 가까운 얼굴이었는데도 상당한 미녀였다.
외모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 것처럼 보였지만 조금만 제대로 꾸며놓아도 웬만한 모델은 뺨칠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여성적인 매력보다 석원의 시선을 끈 것은 데브라의 취재에 대한 열정이었다.
확실히 만날 수 있을지 어떨지도 모르는데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아침 일찍 산책로에 나와 그를 기다리고 있던 걸 보면 끈기만큼은 대단했다.
석원은 추운 듯 살짝 떨고 있는 데브라의 손끝을 힐끔 쳐다보고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취재 요청을 거부하는 건 말 그대로 인터뷰를 하기 싫다는 의사 표현이에요. 이번에는 그냥 넘어가지만 다음에 또 이러면 그쪽 회사에 정식으로 항의할 겁니다.”
하지만 데브라는 냉랭한 태도에도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달라붙었다.
“월가에서 엘도라도 펀드에 대한 관심이 많은 거 아시죠? 원한다면 질문지를 작성하고 사전에 허락을 받아도 되니까 한 번만 인터뷰를 부탁드려요.”
무시하듯 대꾸하지 않고 석원이 다시 걸음을 옮기려고 할 때 전화벨이 울렸다.
발을 멈춘 그는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여보세요.”
[지금 바빠요?]킨슬리의 목소리에 석원이 조금 풀어진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니. 아침 운동 중이었어.”
[부지런하네요.]짧게 웃은 킨슬리가 이내 사과했다.
[그런데 미안해서 어쩌죠? 아무래도 오늘 약속은 못 갈 것 같아요.]“무슨 일이라도 있어.”
오랜만에 얼굴을 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역시 유명모델이다 보니 킨슬리도 바쁜 모양이었다.
“아쉽지만 일이 있다니 어쩔 수 없지. 그럼 다음에 봐.”
[정말 미안해요.]대화하는 도중에도 휴대폰 너머에서 매니저가 5분 뒤에 스탠바이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괜찮으니까 다음에 연락해.”
석원은 그렇게 말하며 전화를 끊었다.
못 본다니 아쉽기는 했지만 킨슬리와 애인 사이가 아니라 아직은 그냥 좋은 친구 정도였기에 크게 섭섭한 마음 같은 건 없었다.
휴대폰을 집어넣고 걸음을 떼려던 석원은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고개를 돌려 데브라를 쳐다봤다.
그녀는 어떻게든 다가서려다 벽처럼 우뚝 서 있는 보커스한테 가로막혀서 뒤에서 발만 동동 구르고 있는 상태였다.
킨슬리와 약속이 깨져 오후 시간이 빈 걸 떠올린 석원은 불쑥 솟아오른 변덕에 툭 말을 내뱉었다.
“1시간 뒤에 내가 묵고 있는 호텔로 와요.”
“네? 뭐라고 하셨어요?”
데브라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인터뷰하자고 했잖아요. 대신 편집본을 먼저 확인하고 문제 될 것이 있으면 방송에 안 내보는 조건이에요.”
무심한 말투에 한순간 제 귀를 의심한 데브라가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네. 물론이죠!”
석원은 대답하지 않고 그대로 다시 뛰어 다리를 건넜다.
“기자 아가씨 오늘 운이 좋군요. 로또라도 하나 사보지 그래요.”
보커스도 짧게 말을 건네고는 곧바로 석원을 따라갔다.
뒤에 혼자 남은 데브라는 한동안 어안이 벙벙해서 멍해 있다가 이내 허공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예쓰! 됐어! 내가 해냈다고!”
그런 그녀의 외침을 등 뒤로 들은 석원은 피식 웃으며 이어폰을 다시 귀에 꽂고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