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lden Spoon Investment Portfolio RAW novel - Chapter (22)
금수저 투자백서 22화(22/231)
22. 처음 들어보는 이름인데. 나만 그런가.
뉴욕에서 일주일 동안 필요한 일들을 하고 돌아온 석원은 다시 학교생활을 이어갔다.
넓은 강의실 안.
옆으로 길쭉하게 붙어 있는 책상에 간격을 띄우고 앉은 학생들이 다양한 표정을 지은 채 시험지를 풀고 있었다.
12월이 되면서 기온이 크게 내려가자 학생들이 입고 있는 옷도 자연스럽게 두꺼워졌다.
석원 역시 캐시미어로 된 검은색 터틀넥을 입고 강의실 한쪽에 앉아 시험을 보고 있었다.
문제는 딱 하나였지만 정답이 정해진 것이 아니라 서술형이었기 때문에 더욱 어려웠다.
주제에 대한 완벽한 이해와 논리정연한 글솜씨가 없으면 높은 점수를 받기 어려운 까다로운 시험.
하지만 석원은 다른 학생들처럼 머리를 싸매거나 끙끙거리지 않고 오히려 즐거운 표정으로 빈 공간을 빼곡히 채워나갔다.
그렇게 자신의 생각을 한참 동안 적어나가던 석원은 뒷장까지 가득 채우고 나서야 마침표를 찍고 손에 든 샤프를 내려놨다.
혹시 실수한 부분이 없는지 답안을 천천히 다시 한번 확인한 석원은 손목시계를 힐끔 쳐다봤다.
‘아직 10분 정도 더 남았네.’
슬쩍 주변을 둘러보자 다른 학생들은 미간을 찌푸린 채로 시험지를 노려보거나 글자를 썼다 지웠다 하면서 사투를 벌이는 중이었다.
시험을 다 봤는데 굳이 계속 앉아 있을 필요는 없었기에 석원은 소지품을 백팩에 챙겨 넣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답안지를 들고 앞으로 나갔다.
그러자 교수대 옆에 서 있던 프랭크 교수가 그를 보고 호오, 하고 눈을 빛냈다.
“벌써 다 끝냈나?”
“네.”
석원이 대답하며 답안지를 교수대 위에 올려놨다.
은발을 멋스럽게 쓸어넘긴 프랭크 교수는 깐깐하기로 유명했지만 동시에 몇 년 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했을 정도로 명성이 높고 학계에서 인정받는 저명한 학자였다.
그래서 매년 학기 초만 되면 프랭크 교수의 수업을 들으려는 학생들이 몰려들었다가 어려운 수업 내용에 우르르 떨어지는 현상이 반복되곤 했다.
‘이런 대단한 학자의 강의를 직접 들을 수 있다는 것도 하버드 대학의 자랑이자 혜택이지.’
솔직히 프랭크 교수 같은 사람에게 수업을 듣는 것만으로도 하버드 대학의 비싼 학비가 그 값어치를 하고도 남았다.
석원은 어깨에 백팩을 매고 아직 시험을 치고 있는 학생들을 배려해 조용히 강의실 밖으로 나왔다.
팔짱을 낀 자세로 남아 있는 학생들을 바라보던 프랭크 교수는 무심코 방금 나간 석원의 답안지를 집어 들었다.
어차피 나중에 자세히 채점할 거였기에 대충 훑어만 보려고 했던 프랭크 교수의 눈에 점차 흥미로운 빛이 더해졌다.
잠시 벗어놓았던 안경까지 다시 끼고 답안지를 읽어내려가던 프랭크 교수는 다른 학생들이 한창 시험 중인 것도 잊은 듯 가끔씩 낮게 감탄사도 터트렸다.
“블랙먼데이가 발생하는데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원인이 시장의 불안정성과 컴퓨터 프로그램 거래가 아니라 심리적 불안감이었다니…… 상당히 재미있는 의견이군.”
고개를 돌려 조금 전 석원이 나간 강의실 문을 쳐다본 프랭크 교수는 이내 시선을 바로 했다.
그러고는 답안지에 적힌 이름을 작게 중얼거렸다.
“박석원이라.”
이렇게 프랭크 교수의 관심을 받게 된 줄도 모르고 홀로 강의동을 나온 석원은 자전거에 올라타 캠퍼스 안에 있는 카페테리아로 향했다.
“따뜻한 아메리카노 라지 사이즈 나왔습니다!”
금발 머리를 질끈 묶은 여자 알바생이 테이크아웃 컵을 내밀었다.
석원은 장갑을 낀 손으로 커피를 받아들고는 자전거를 세워둔 야외 테이블에 앉아 한 모금 홀짝였다.
“이제 추워서 밖엔 못 앉아 있겠네.”
답답한 실내보다 탁 트인 바깥 공간을 좋아하는 석원이 아쉬운 듯 중얼거렸다.
그러다 문득 뭔가를 떠올린 표정으로 옆자리에 놔둔 백팩에서 휴대폰을 꺼내 시험을 치는 동안 잠시 꺼둔 전원을 다시 켰다.
버튼을 눌러 콕스에게 전화를 걸자 연결음이 울리더니 이내 장중이라 그런지 한창 바빠 보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나예요.”
[안 그래도 연락을 드렸는데 전화가 꺼져 있더군요.]“사정이 있어서 꺼뒀어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석원이 대충 둘러대자 콕스도 깊이 캐묻지 않고 넘어갔다.
[그랬군요. 알고 계시겠지만 새벽에 끝난 런던 FTSE 100 지수가 3,233포인트에 도달했습니다.]“3개월 만에 폭락 직전 지수까지 회복하다니 예상했던 것보다 영국 경제의 펀더멘탈이 좋았나 봐요.”
반등에 베팅하면서 석원은 빨라도 내년 초는 되어서야 FTSE 100 지수가 원래 자리까지 되돌아갈 수 있을 거라 예상했었다.
그런데 불과 석 달 만에 수직으로 반등해서 3천 포인트를 깨고 올라서 버렸다.
‘원래 역사에서도 내년 5월이나 되어서야 ERM 탈퇴 이전 수준을 회복했는데. 정말 예상 밖이네.’
물론 좋은 방향으로 예상을 벗어난 거였다.
하지만 과거로 돌아온 석원이 가진 가장 큰 무기는 바로 앞으로 벌어질 미래를 알고 있다는 거였다.
그런데 이렇게 원래 알던 사실과 어긋나는 일들이 하나둘 생겨난다면 불안감이 들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는 좋은 쪽이었지만 다음에도 그럴 거라는 보장은 없잖아.’
또 어떤 변수가 갑자기 튀어나올지 몰랐기에 앞으로 조금 더 조심해서 신중하게 움직이기로 마음먹었다.
[그런 것도 있지만 부진할 거라는 우려와 달리 환차익을 본 수출 기업들의 매출이 급증했고, 영국 정부가 적극적인 경제 활성화 정책들을 쏟아내자 시장 분위기가 반전됐습니다. 거기다 파운드를 공격했던 헤지펀드들이 이번에는 FTSE 100 지수 상승에 돈을 베팅하며 롱포지션을 잡은 것이 컸고요.]“조금만 생각하면 알 수 있는 건데 돈 냄새를 기가 막히게 맡는 헤지펀드들이 그걸 모르고 지나칠 리 없겠죠.”
[맞습니다.]콕스가 석원의 말에 동의하면서 물었다.
[오늘까지 수익률이 27.2%나 되는데 어떻게 하시겠습니까?]잠깐 고심한 석원은 이내 손에 든 휴대폰을 고쳐쥐며 물었다.
“시장 분위기는 어때요?”
[많이 오른 만큼 강도는 약해지겠지만 당분간은 상승세가 계속 이어질 거라는 의견이 지배적입니다.]“그럼 일단 연말까지는 포지션을 유지하는 걸로 하죠.”
[알겠습니다. 솔직히 저 역시 많이 먹긴 했지만 여기서 수익실현을 하는 건 조금 아깝다는 생각이었습니다.]“하하, 마음이 통했네요.”
석원이 씨익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리자 콕스도 낮은 웃음소리를 냈다.
[그러게 말입니다. 그러면 변동 사항이 생기는 즉시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알겠어요.”
석원은 통화를 끊고 콕스와 방금 했던 이야기를 되새겼다.
“향후 몇 년간은 런던 증시의 상승세가 계속되겠지만 더 큰돈을 벌기 위해서는 적당한 때에 빠져나올 줄도 알아야겠지.”
주식이 올라 아무리 큰돈이 됐다고 해도 결국 팔아야 내 것이 되는 법이라던 오 부장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메아리쳤다.
휴대폰을 다시 백팩에 집어넣은 석원은 그새 미지근해진 커피를 한 손에 쥔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미국 텍사스주 댈러스.
시내 한가운데 유리와 스테인리스 스틸로 마감된 37층 높이의 AT&T 본사 건물이 우뚝 솟아 있었다.
회사 로고가 큼지막하게 내걸린 AT&T 본사는 수천 명의 직원들이 근무하는 댈러스의 대표적 랜드마크였다.
건물 제일 윗층에 위치한 임원 회의실.
마른 체격에 키가 큰 로버트 메이어 AT&T 회장이 고위 임원 다섯 명과 함께 기다란 회의 테이블에 둘러앉아 은밀히 추진 중인 NCR 인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저쪽에서 계속 주당 105달러를 고수한다고 들었는데 맞나?”
탈모로 인해 머리가 반쯤 벗겨진 CFO 앨런이 왼편 자리에 앉아 있다가 살짝 난감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예. 협상이 진행 중입니다만 태도가 워낙 강경해서 인수 가격을 낮추기가 쉽지 않아 보입니다.”
“쯧.”
메이어 회장이 마뜩잖은 얼굴로 혀를 찼다.
“애틀란타에서 힐슈 회장을 만났을 때 고집이 세 보이더니. 아니나 다를까 애를 먹이는군.”
그러자 검은 머리를 단정하게 빗어넘긴 라이트 COO가 오른편에 앉아 있다가 중간에 끼어들며 말했다.
“저쪽이 원하는 대로 해주면 인수 금액이 70억 달러를 훌쩍 넘기게 될 겁니다.”
“70억 달러라. 적은 액수는 아니군.”
뒤로 몸을 기댄 메이어 회장의 말에 라이트가 살짝 목소리를 높였다.
“NCR 시총의 두 배가 넘는 돈입니다. 이런 가격이라면 협상이 타결된다고 해도 이사회에서 승인을 받기가 쉽지 않을 겁니다.”
다른 임원들 역시 같은 생각인지 머리를 주억거리며 동의했다.
NCR의 고집스런 태도에 혀를 차면서도 은근히 미련을 버리지 못한 메이어 회장이 한쪽 손으로 매끈하게 면도한 턱을 매만지면서 대꾸했다.
“확실히 비싸긴 하지만 그렇다고 감당 못 할 액수는 아니지 않나?”
매년 수십억 달러의 순이익을 내고 회사에 쌓아둔 잉여 현금 역시 그만큼은 됐기에 메이어 회장의 말대로 지불하지 못할 액수는 아니었다.
“물론 그렇기는 합니다만 너무 비싸게 인수한다면 나중에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우려 섞인 라이트의 이야기에 미간을 좁힌 메이어 회장은 고심하는 표정을 지었다.
경영을 오너가 했기에 위험 부담이 있더라도 과감하게 밀어붙일 수 있는 한국 재벌과 달리 메이어 회장은 임기가 끝나면 재선임을 받아야 되는 전문 경영인이었다.
그러다 보니 항상 실적과 이사회를 신경 쓸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이어 회장이 쉽게 NCR 인수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이유가 있었다.
바로 내년이 AT&T 회장으로서 두 번째 임기가 끝나는 마지막 해였기 때문이었다.
계속 CEO직을 유지하길 원하는 메이어 회장 입장에서는 이사회와 주주들에게 자신의 능력을 어필할 성과가 필요했다.
모여 있는 임원들 역시 이런 상황을 모르지 않았기에 비싸다는 걸 알면서도 섣불리 NCR 인수를 포기하자는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짧은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앨런이 슬쩍 메이어 회장의 표정을 살피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M&A와 관련해서 한 가지 더 보고드릴 일이 있습니다.”
“말해보게.”
“최근 일주일 사이 NCR 주가가 슬금슬금 올라가고 있습니다.”
“뭐?”
메이어 회장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말인가?”
“자세히 알아보니 엘도라도 펀드라는 곳에서 NCR 주식을 대랑 매집 중인 것이 확인됐습니다.”
순간 예상치 못한 이야기에 회의실이 술렁거렸다.
메이어 회장 역시 눈썹을 치켜올리고는 등받이에서 몸을 떼며 다그치듯 물었다.
“확실한 건가?”
“그렇습니다. 벌써 6억 달러가 넘는 주식을 매집한 걸로 파악됐습니다. 그 때문에 현재 주가가 55달러로 10%나 오른 상태고요.”
확 얼굴을 구긴 메이어 회장이 매서운 눈초리로 앨런을 노려봤다.
“아니 그럴 때까지 상황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대체 뭘 한 거야!”
“워낙 빠르고 은밀하게 움직이는 바람에 눈치채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앨런이 바로 변명했지만 이번엔 맞은편에 있던 라이트 쪽에서 물음이 튀어나왔다.
“그렇다는 건 뭔가 의도가 있다는 건데…… 혹시 이번 M&A 정보가 새어 나간 것 아니요?”
“그게…….”
앨런은 그를 향한 임원들의 시선을 느끼면서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럴 가능성을 아예 배제할 순 없을 겁니다.”
에둘러 대답했지만 난데없이 헤지펀드가 그만한 자금을 쏟아부어 주식을 매집한다면 뭔가 냄새를 맡은 것이 분명했다.
“도대체 어디서 정보가 샌 거야!”
버럭 짜증을 내던 메이어 회장은 이내 정색을 하며 말했다.
“NCR에서 협상을 유리하게 가져가려고 꼼수를 부리는 거 아냐.”
의심의 화살이 NCR을 향하려던 찰나, 앨런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부정했다.
“시장에 M&A 사실이 알려져서 판이 깨져 버리면 NCR입장에서도 좋을 것이 없을 테니 그건 아닐 겁니다.”
생각해 보니 충분히 일리가 있는 의견이었다.
메이어 회장은 어쩔 수 없이 수긍하면서도 찡그린 얼굴을 펴지 못한 채 중얼거렸다.
“그럼 우리 쪽에서 이야기가 샜다는 거잖아.”
“보안을 철저히 유지하고 있어서 그럴 가능성은 낮습니다.”
“이런 빌어먹을. 이것도 저것도 아니라고 하면 대체 누가 쓸데없이 입을 나불거렸다는 거야!”
차마 대답할 말이 없어 앨런이 입을 꾹 다문 가운데 라이트가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화가 나시겠지만 지금 중요한 건 정보가 누출된 곳을 찾는 것보다 상황이 더 꼬이기 전에 협상을 마무리 짓는 겁니다.”
“맞습니다. M&A 사실이 시장에 퍼져 버리면 협상이 더욱 힘들어질 겁니다.”
앨런도 라이트의 말을 거들었다.
메이어 회장 역시 그런 사실을 모를 리 없었기에 결국 화를 누그러뜨리고 끙 앓는 소리를 내뱉었다.
“일이 골치 아프게 됐군.”
한 손으로 관자놀이를 주무른 메이어 회장이 엘런을 향해 물었다.
“주식을 매집하고 있는 곳이 어디라고 했지?”
“엘도라도 펀드입니다.”
메이어 회장이 머리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처음 들어보는 이름인데. 나만 그런가?”
“그러실 겁니다. 저도 생소해서 알아보니 설립한 지 아직 일 년도 안 된 신생 펀드였습니다.”
이야기를 들은 메이어 회장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내뱉었다.
“허어. 더 기가 막히는군.”
어이없는 상황이긴 하지만 어쨌든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손가락 끝으로 앞에 있는 탁자를 탁탁 두드리면서 한참 동안 고심을 거듭한 메이어 회장은 결정을 내렸는지 고개를 들었다.
“이렇게 되면 어쩔 수 없지. 저쪽에서 원하는 대로 주당 105달러에 합의를 하도록 하게.”
비싼 가격이었지만 이제 와서 다른 인수 대상 기업을 찾는 것도 힘들었다.
메이어 회장은 결국 3연임을 위해 무리수라는 걸 알면서도 NCR 인수를 그대로 강행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