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lden Spoon Investment Portfolio RAW novel - Chapter (221)
금수저 투자백서 221화(221/231)
221. 며칠 생각할 시간을 주시겠습니까.
등이 훤히 보이는 드레스를 입은 금발 여가수가 마이크 앞에 서서 피아노 반주에 맞춰 감미로운 팝송을 부르는 가운데 웨이터가 식전 음식인 아뮤즈 부쉬를 가져왔다.
새하얀 도자기 접시에 토마토 벨루테와 새우, 그린빈 타르트가 하나의 예술 작품처럼 아름답게 플레이팅 되어 있었다.
석원은 함께 나온 올리브를 넣은 쿠글로프를 한입 먹어보곤 머리를 끄덕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주방 스태프들의 요리 솜씨가 아주 좋군요.”
그러자 맞은편에 자리한 건장한 체격의 댄틱이 얼굴 가득 함박웃음을 지었다.
“미슐랭 투 스타를 받은 우리 호텔의 자랑이지요.”
그때 웨이터가 첫 번째 와인을 가져와 병에 붙은 라벨을 보여주고는 두 사람의 잔에 화이트 와인을 따라줬다.
“오늘 만남을 기념하며 건배합시다.”
“그러죠.”
석원은 와인잔을 들어 앞으로 내민 댄틱의 잔과 가볍게 부딪치고는 그대로 한 모금을 입에 잠시 머금었다가 맛과 향을 음미한 뒤 목으로 삼켰다.
은은한 단맛과 깔끔한 목 넘김이 일품인 좋은 와인이었다.
앞에 앉은 댄틱이 와인잔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호텔에서 지내는데 불편한 건 없습니까?”
“시설도 마음에 들고 무엇보다 직원들이 친절해서 아주 만족하고 있습니다.”
“그거 다행이군요.”
석원이 스푼으로 토마토 벨루테를 먹으며 대답하자 댄틱 역시 식사를 시작했다.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이 호텔은 뉴욕시에서 공식적으로 랜드마크 지위를 받고 국립역사 건축물로도 지정된 아주 유서 깊은 곳이라오.”
“유명한 플라자 합의가 바로 여기서 이루어졌을 만큼 미국의 역사와 함께 한 장소이기도 하죠. <위대한 개츠비>와 <티파니에서 아침을> 같은 걸작 영화의 배경이 되기도 했었고요.”
자신이 소유한 플라자 호텔의 명성과 역사에 대해 석원이 자세히 알고 있는 듯하자 댄틱이 호감이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몇 년 전에 큰 히트를 친 <나 혼자 집에2>라는 영화도 여기서 촬영을 했는데 혹시 아는지 모르겠소.”
“저도 그 영화를 봤습니다. 거기에 댄틱 씨가 카메오로 출연하셨지요?”
“하하하! 알고 있었군요.”
관종답게 댄틱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만나는 사람마다 저 얘기를 떠들고 다니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누가 알아봐 줘서 상당히 기쁜 기색이었다.
“정말 자연스럽게 연기를 하시던데 배우를 하셔도 되겠더군요.”
“그런 끼가 있다고 주변에서 이야기를 많이 듣긴 하지만 그냥 가끔 즐기는 유희일 뿐 본업은 사업이니까요.”
“물론 그러시겠죠.”
그때 웨이터가 빈 접시를 치우고 으깬 감자와 캐비어를 가져왔다.
웨이터가 접시를 내려놓고 자리를 떠나자 댄틱이 입가심을 하듯 와인을 마시며 슬쩍 물었다.
“여기 플라자 호텔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약간 뜬금없는 물음에 의아한 기분이 들었지만 석원은 겉으로 티를 내지 않고 담담하게 대답했다.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역사와 명성을 가진 맨해튼, 아니, 뉴욕 최고의 호텔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센트럴파크 남쪽 5번가 요지에 위치한 만큼 부동산으로서의 가치 역시 아주 높고 말입니다.”
마지막에 덧붙인 가벼운 조크에 댄틱이 웃는 얼굴로 와인잔을 기울였다.
“역시 월가에서 알아주는 거물 투자자답게 플라자 호텔의 가치를 잘 알고 있군요. 세계 경제의 심장인 맨해튼 한복판에 이런 건물을 가진다는 건 자신이 성공했다는 일종의 트로피를 얻는 것과 같지요.”
한 도시를 상징하는 랜드마크인 만큼 엄청난 가격은 둘째치고라도 매물로 나오는 경우가 흔치 않았기에 희소가치가 있는 건 틀림없었다.
“그러고 보니 댄틱 씨가 플라자 호텔을 인수하시면서 빌딩이 아니라 루브르 박물관에 걸린 모나리자와 같은 걸작을 매입했다고 말씀하셨었죠.”
그러자 댄틱이 깜짝 놀란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다.
“상당히 오래전 일인데 그걸 알고 있다니 이거 놀랍군요.”
“꽤 인상적인 말이라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석원은 별일 아니라는 듯 가볍게 대꾸했다.
사실 어제 오후에 랜든이 보내준 댄틱 관련 자료에 나와 있던 것이었지만 그걸 굳이 밝힐 필요는 없었다.
“여기 그랜드 볼룸에서 지금 아내와 결혼식을 올렸던 만큼 이 호텔과 얽힌 추억이 많습니다. 트루먼 카포테(Truman Capote)가 1966년에 전설적인 가면 파티인 블랙 앤 화이트 볼을 열었던 바로 그곳이죠.”
댄틱이 가슴을 펴며 자랑하듯 말했다.
천생 바람둥이인 그가 곧 두 번째 부인과도 이혼하고 슬로베니아 출신의 24살이나 차이가 나는 전직 보그 모델과 무려 세 번째 결혼을 한다는 걸 알고 있는 석원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식사를 하며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고 보니 첫 번째 부인도 모델이었고 두 번째 부인은 배우였지. 댄틱의 여성 편력도 인생만큼이나 정말 대단하네.’
대화를 나누는 사이 어느새 다음 코스 요리가 준비됐다.
웨이터 두 명이 빈 접시를 치우고 두 사람 앞에 푸아그라 트러플 마카로니를 가져와 내려놨다.
트러플 특유의 향이 훅 풍기며 입맛을 돋웠지만 댄틱은 포크를 드는 대신 슬쩍 앞에 있는 석원의 표정을 살폈다.
“오늘 이렇게 만나자고 한 건 박 대표와 안면을 트고 싶은 것도 있지만 한 가지 비즈니스 제안을 할 것이 있어서요.”
안 그래도 언제쯤 본론을 꺼낼지 기다리고 있던 석원은 차분한 얼굴로 상대를 마주 바라봤다.
“뭔지 말해 보시죠.”
댄틱은 몸을 살짝 앞으로 기울이며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이 호텔을 살 의향이 있소?”
“……!”
전혀 생각 못 했던 제안에 석원이 놀란 듯 눈썹을 꿈틀거리며 되물었다.
“지금 플라자 호텔을 매입할 생각이 있냐고 물은 겁니까?”
그러자 댄틱이 머리를 끄덕이며 적극적으로 매수를 권했다.
“그렇소. 앞서도 이야기했지만 뉴욕을 상징하는 랜드마크의 주인이 될 수 있는 건 흔치 않은 기회일 거요.”
“……틀린 말씀은 아니지만 너무 갑작스러운 제안이라 조금 당황스럽군요.”
“물론 그렇긴 하겠지만 플라자 호텔을 매물로 시장에 내놓으면 서로 가지려는 경쟁이 엄청나게 치열할 거요. 그런 다툼없이 뉴욕에서 가장 명성이 높고 역사가 깊은 호텔을 가질 기회이니 한번 잘 생각해보시오.”
마치 기회를 놓치면 손해를 볼 것처럼 부추겨서 조바심을 자극하는 흔한 상술이었으나 그런 것에 넘어갈 만큼 석원이 호락호락하진 않았다.
물론 플라자 호텔이라는 이름값과 부동산 가치를 생각하면 매물로 내놨을 때 관심을 가지는 매수자가 없진 않을 터였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런 제안을 한다는 건 공개 매각을 꺼리는 다른 이유가 있다는 뜻이겠지.’
그게 아니라면 타고난 사업가인 댄틱이 손해 보는 행동을 할 리가 없었다.
바로 떠오르는 건 무려 12억 달러를 들여 애틀랜틱 시티에 만든 타지마할 카지노 리조트를 시작으로 몇 년 사이 연달아 세 곳의 대형 카지노와 호텔의 파산 신청을 할 정도로 댄틱이 재무적인 궁지에 몰려 있다는 사실이었다.
‘여러 핵심 사업장을 정리하고도 내년까지 갚아야 되는 댄틱 컴퍼니의 부채가 5억 5천만 달러가 넘는다고 하니까. 현금이 급하긴 할 거야.’
머릿속으로 빠르게 생각을 정리한 석원은 태연한 척하고 있어도 분명 속으로 초조하게 대답을 기다리고 있을 댄틱을 보며 느긋한 태도로 와인잔을 쥐었다.
“말씀대로 플라자 호텔이 매물로 나오면 관심을 가질 사람들이 많을 테니 그렇게 하시는 게 더 낫지 않습니까?”
그런 부추김에 홀랑 넘어갈 만큼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라는 걸 보여주자 댄틱의 눈동자에 아쉬운 기색이 스쳤다.
신경을 쓰고 지켜보지 않았다면 미처 알아보지 못했을 모습이었다.
‘역시 호구를 잡을 생각이었군.’
운이 좋아 큰돈을 번 애송이로 생각하고 달콤한 말로 살살 구슬려서 플라자 호텔을 비싸게 팔려는 수작이었던 게 분명했다.
석원은 속으로 콧방귀를 뀌면서 살짝 차가운 눈동자로 댄틱을 쳐다봤다.
‘앞날을 생각하면 좋은 인연을 만들어두는 게 낫지만 그렇다고 호구 노릇을 할 순 없지.’
친분을 쌓는 건 좋지만 나중을 위해서라도 만만한 상대로 보여져서는 안 됐다.
만약 사이가 틀어져서 악연으로 남을 것 같으면 최악의 경우 어려움에 처한 댄틱을 완전히 파산시켜서 두 번 다시 재기하지 못하도록 완전 알거지로 만들어 버리는 방법도 있었다.
석원이 가진 힘이라면 아직은 돈이 좀 많은 부동산 갑부에 불과한 댄틱을 주저앉히는 것 정도는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면 댄틱이 성공한 사업가로 TV에 캐스팅되지도 않을 거고 자연스럽게 전국적인 유명세를 얻어 미국 대선 후보로 출마해 대통령에 당선되는 미래도 없을 터였다.
다만 한 가지 우려스러운 건 그렇게 했을 때 어떤 나비효과가 발생할지 모른다는 거였다.
‘댄틱보다 더 한 어디로 튈지 모르는 예측 불가능한 괴짜가 백악관의 주인이 될지도 모르지.’
만약 그렇게 된다면 정말 최악의 결과가 아닐 수 없었다.
속으로 그런 생각들을 하며 석원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와인을 마시고 있자 댄틱이 그를 흘깃 쳐다보곤 입맛을 다셨다.
“사실은 따로 매각 협상을 진행 중인 곳이 있는데. 제시하는 액수가 너무 낮아서 다른 상대를 찾아보다가 박 대표라면 제값을 쳐줄 수 있을 것 같아 살 의향이 있는 물어본 거요.”
그제야 제대로 패를 내보이는 댄틱이었으나 석원의 눈매는 여전히 서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제값을 받는 게 아니라 바가지를 씌울 상태를 찾은 거겠지.’
하지만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은 채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댄틱은 그런 석원의 반응을 살피면서 억울한 듯 한탄을 쏟아냈다.
“재정 상태가 어렵지만 않았다면 절대 팔지 않았을 만큼 내가 아끼는 호텔이오. 그런데 힘든 상황인 걸 알고 헐값에 날름 가져가려고 하니 화가 나지 않을 수 있겠소!”
“상대가 얼마를 제시했기에 그러시는 겁니까?”
슬쩍 석원이 관심을 보이는 척하자 댄틱이 눈에서 이채를 띠며 얼른 대답했다.
“4억 달러요.”
7년 전에 댄틱이 플라자 호텔을 인수한 가격이 딱 4억 달러였다.
그동안의 물가 상승분은 빼더라도 낡은 호텔 내부를 완전히 리모델링하는데 추가로 1억 달러가량을 쓴 걸 생각하면 말 그대로 밑지고 파는 거였다.
“댄틱 씨가 서운하게 생각하실만한 액수군요.”
“그렇지. 완전히 날강도가 따로 없소!”
한바탕 억울함을 호소한 댄틱이 은근한 시선을 보내며 재차 물었다.
“다시 없을 기회인데 진짜 호텔을 인수할 마음이 없소?”
“흠…….”
석원은 일부러 손으로 턱을 매만지면서 고심하는 척 애를 태웠다.
그의 고민이 길어질수록 댄틱의 얼굴에도 초조한 기색이 점점 짙어졌다.
그렇게 시간을 끌다가 석원은 적당하다 싶은 타이밍에 입을 열었다.
“전혀 생각지 못한 일이기도 하고 액수도 적지 않으니 지금 당장 결정을 내리긴 어렵겠군요.”
이야기를 들은 댄틱이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관심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니 며칠 생각할 시간을 주시겠습니까.”
한순간 기대에 찬 얼굴로 바뀐 댄틱이 곧바로 되물었다.
“얼마나 여유를 주면 되겠소?”
“딱 사흘이면 됩니다.”
“좋소! 그 정도는 기다려줄 수 있지.”
댄틱은 벌써 거래가 이뤄진 것처럼 밝은 표정을 지었다.
“이제 골치 아픈 사업 이야기는 이쯤하고 식사를 즐깁시다.”
“그러시죠.”
댄틱이 자리에 앉은 채 손짓하자 대화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떨어져 있던 웨이터가 가까이 다가와 말했다.
“다음 요리를 가져다드릴까요?”
“음. 와인도 비었으니 새로 가져오게.”
“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