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lden Spoon Investment Portfolio RAW novel - Chapter (224)
금수저 투자백서 224화(224/231)
224. ‘가볍게’라니…….그런 표현을 쓸 수 있는 건 보스뿐일 겁니다.
1996년 1월 5일.
오늘도 한바탕 눈이 쏟아지려는지 아침부터 구름이 잔뜩 끼어 흐린 가운데, 룸서비스로 간단히 아침을 먹은 석원은 펜트하우스 거실 소파에 앉아 원두 향이 진한 커피를 마시며 월스트리트 저널을 읽고 있었다.
[US Federal Government Shutdown 20day올해 예산 편성안을 둘러싼 백악관과 의회 다수당인 공화당 간의 힘겨루기로 인한 연방정부 폐쇄 사태가 오늘로 무려 20일째 계속되고 있다.
당초 새해 시작과 함께 극적 타결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희망이 컸지만 기대와 달리 양측은 의견을 좁히지 못하고 여전히 벼랑 끝 대치를 이어가는 중이다.
데이비슨 대통령은 “사비츠 하원의장과 공화당의 일방적이고 강경한 태도가 국가 안보에 역효과를 미칠 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미국의 평판에 손상을 가하고 있다”고 상대를 강하게 비난했다.
반면 사비츠 하원의장은…….]
1면 전체에 걸쳐 큼지막하게 실려 있는 셧다운 기사를 보며 석원이 혼잣말을 내뱉었다.
“이제 슬슬 인내심이 바닥을 드러낼 때가 됐지.”
새해 첫날에는 뉴욕 증시가 크게 폭등하면서 투자자들의 기대를 한껏 키웠었다.
하지만 예산안 타결이 예상과 달리 좀처럼 진전되지 않은 채 지지부진 시간만 끌며 셧다운 기간이 점점 길어지자 뉴욕 증시도 더 이상 오르지 못하고 혼조세를 보였다.
그의 말대로 시장에 희망보다는 불안감이 팽배해 있다는 걸 여실히 보여주는 모습이었다.
“뭘 그렇게 보고 계십니까?”
고개를 돌리자 짙은 회색 캐시미어 코트를 벗어 한쪽 손에 든 랜든이 가까이 다가와 비어 있는 왼편 소파에 앉았다.
그러고는 석원이 내려놓은 신문을 힐끗 쳐다보더니 머리를 설레 내저었다.
“금방이라도 협상이 이루어질 것 같더니 양쪽 다 고집이 정말 대단한 것 같습니다.”
“그렇죠. 차는 마셨어요?”
“아. 네. 괜찮습니다.”
랜든이 차를 사양하자 그는 앉은 자세 그대로 몸을 뒤로 기대며 입을 열었다.
“공화당 하원 초선의원들이 특히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기존 예산안을 수정없이 그대로 통과시켜야 된다는 강경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면서요.”
“예. 그것 때문에 여론이 안 좋은데도 불구하고 공화당 내 온건파들이 좀처럼 힘을 쓰지 못하는 모양새입니다.”
“막무가내로 우기는 것이 아니라 부채 축소를 위해 균형예산을 편성해야된다는 그럴듯한 명분이 있으니까. 공화당 지도부가 이쯤에서 적당히 합의하고 상황을 마무리 짓고 싶어도 무턱대고 찍어 누르기가 쉽지 않을 거예요.”
“맞는 말씀입니다. 그것 때문에 시장에서는 이제 연방 정부 폐쇄가 더 길어질 수 있다는 불안감이 커지는 분위기입니다.”
“이미 최장기간 기록을 깨버린 상황인 데다가 워싱턴에서 계속 이견을 좁히지 못하고 있으니 당연히 그렇겠죠.”
앞에 놓인 찻잔을 들어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내려놓으며 석원이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오히려 그동안 뜨거운 인터넷 열풍에 눈이 가려져 정치 리스크를 너무 과소평가하다가 이제야 심상치 않다는 걸 알아차렸다는 것이 맞을 거예요.”
그러자 랜든이 몸을 앞으로 당겨 앉고 말했다.
“어제 장 막바지에 선물 매도가 크게 늘어난 걸로 볼 때 어쩌면 오늘 불안감을 이기지 못한 대규모 매도가 쏟아질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 역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기에 작게 머리를 끄덕였다.
“금요일이라 오늘 팔지 않으면 주말동안 고스란히 리스크에 노출되는 거니까. 아직 수익 구간에 있을 때 정리하려는 욕구가 클 거예요.”
“그렇겠지요.”
랜든이 한쪽 입꼬리를 위로 올리면서 의미심장하게 눈을 빛냈다.
“안 그래도 서로 눈치만 보고 있는 살얼음판 같은 분위기인데. 어디선가 대규모 매도가 나온다면 너도나도 물량을 던지기 시작할 테니 그러면 드디어 저희가 기다리던 크래시가 터지게 되겠군요.”
랜든은 잔뜩 기대에 찬 얼굴로 들뜬 목소리를 냈다.
증시가 폭락하면 숏포지션을 잡고 있는 엘도라도 펀드가 큰 수익을 낼 수 있으니 당연한 모습이었다.
더군다나 베팅한 것과 반대로 뉴욕 증시가 계속 올라 증거금을 20억 달러나 추가로 넣어서 포지션을 유지하고 있었기에 더욱 지수 하락을 기대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당연히 함께 기뻐해야 할 석원은 의외로 약간의 표정 변화도 없이 차분한 태도였다.
“매도가 쏟아지면 지수가 빠지긴 하겠지만 여전히 시장에 힘이 남아 있어서 폭이 그리 크진 않을 거예요.”
뜻밖의 반응에 의아한 표정을 짓는 랜든의 시선을 받으면서 그가 말을 이었다.
“그렇게 증시가 흔들리는 모습을 보인다면 미적거리고 있는 정치권을 자극해 주말 동안 극적인 예산안 타결이 이루어질 수도 있을 거예요.”
그러자 랜든이 미간에 주름을 만들며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물었다.
“증시 폭락이 큰일이긴 하지만 작년부터 그토록 애를 써도 안 되던 예산안 협상을 이끌어낼 만큼 파급력이 있겠습니까?”
“물론이죠.”
석원이 차근차근 그렇게 예상하는 근거를 설명했다.
“셧다운으로 공무원들이 일손을 놓고 있지만 그건 연방정부에 해당하는 것이고 주 정부는 여전히 정상적으로 돌아가고 있잖아요.”
“예.”
랜든이 머리를 끄덕였다.
“그렇다는 건 크고 작은 불편이 있긴 하지만 주급을 받지 못하는 연방 공무원들을 제외하면 일반 국민들이 느끼는 피해는 심각하다고 말할 정도는 아니라는 뜻이기도 하죠.”
“하지만 증시 폭락은 다르다는 말씀입니까.”
“그래요. 401K라는 걸 알고 있죠?”
“물론입니다.”
401K는 회사가 매년 연봉의 12분의 1 이상을 근로자 개별계좌에 적립하면 본인이 원하는 포트폴리오 옵션을 골라 은행, 보험, 증권사에 맡겨 운용하도록 하는 미국의 연금제도였다.
미국의 근로자 퇴직소득보장법 401조 K항에 관련 조항이 나와 있어 흔히 401K라고 불렀다.
정년까지 일하고 퇴직한 미국의 은퇴자들이 여유로운 삶을 즐길 수 있도록 해주는 대표적인 노후보장 수단이었다.
“안정적인 채권을 매입하기도 하지만 보다 큰 수익을 내기 위해 가입자들 대부분이 포트폴리오의 상당 부분을 주식 그것도 미국 증시에 많이 투자하고 있는 것도 알 거예요.”
“……!”
“인텔과 마이크로소프트 그리고 넷스케이프까지 혁신적인 기업들이 끊이지 않고 계속 나오는 것이 미국 증시가 장기 우상향하는 밑거름인 건 분명한 사실이에요. 하지만 지수를 끌어 올리는 또 다른 한 축은 401K를 통해 지속적으로 들어오는 투자 자금이라는 것도 부인할 순 없죠.”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는 랜든을 보며 석원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데 많은 미국 노동자들의 은퇴 자금이 잔뜩 들어가 있는 증시가 갑자기 폭락한다면 어떻게 될 것 같아요.”
“노후에 쓸 돈이 줄어드는 거니까 국민들의 반발이 크겠군요.”
랜든이 큰 깨달음을 얻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바로 그거예요. 표를 받아야 되는 유권자들의 반발을 사서 이득 될 것이 없는 데다가 올해 대선에서 대통령만 뽑는 게 아니라 상하원 의원들도 같이 선출한다는 걸 생각하면 공화당이 계속 강경하게 나올 수는 없을 거예요.”
한 번의 선거로 국회의원을 전부 새로 뽑는 대한민국하고 달리 미국은 하원의원 임기인 2년에 맞춰 하원 전체와 상원 의석의 1/3을 돌아가면서 선출했다.
“까딱했다가는 자기 의석을 잃을 수도 있으니 눈치를 볼 수밖에 없겠지요.”
납득한 듯 그렇게 중얼거린 랜든이 곧 표정을 굳혔다.
“말씀대로 주말에 예산안 협상이 이루어진다면 큰일 아닙니까!”
연방정부 예산안 타결로 악재가 해소된다면 떨어졌던 지수가 바로 크게 반등할 건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렇게 된다면 숏베팅을 한 엘도라도 펀드로서는 악몽이 아닐 수 없었다.
더군다나 공매도 가격이 상당히 아래에 있어 오늘 하루 S&P500이 15포인트 넘게 폭락하지 않는 이상 손실을 피하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안절부절못하는 랜든과 달리 석원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느긋한 태도를 보였다.
“주말에 예산안 협상이 타결돼 연방정부 폐쇄가 끝난다고 해도 염려할 것 없어요.”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월요일에 반등이 나오더라도 소폭에 그칠 뿐, 금방 다시 크게 주저앉을 테니까요.”
“……?”
가장 큰 악재인 셧다운이 끝나는데 증시가 오르는 것이 아니라 폭락할 거라고 하자 랜든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연방정부는 다시 열리겠지만 며칠 뒤에 투자자들한테 더 중요한 이벤트가 기다리고 있잖아요.”
머리를 갸웃거리던 랜든은 순간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에 눈을 크게 떴다.
“곧 나올 기업들의 실적 발표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석원은 정답이라는 듯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애플과 HP, 코카콜라, GE등등 지난 4/4분기 기업들의 실적이 줄줄이 나오기 시작할 텐데. 인터넷 열풍을 타고 증시가 크게 올라와 있는 것과 달리 실망스러운 결과가 나온다면 어떻게 될 것 같아요?”
말뜻을 알아차린 랜든이 살짝 입을 벌려 탄성을 내뱉었다.
“기대가 큰 만큼 실망 매물이 엄청나게 쏟아지겠군요.”
“바로 맞췄어요. 그런데 셧다운의 영향으로 기업들의 실적이 좋지 않을 거라는 리포트들이 나오고 있으니 투자자들의 불안감이 크지 않겠어요.”
어느새 굳어 있던 표정을 푼 랜든이 눈을 반짝이며 대꾸했다.
“증시가 크게 올라 이미 수익을 많이 낸 상태니까. 위험을 감수하기보단 일단 팔아서 수익을 확정지어 두고 실적이 나오는 걸 확인한 뒤에 다시 매매하려는 움직임이 크겠군요.”
“그렇게 차익실현 매물이 쏟아지기 시작하면 포지션을 그대로 유지하고 실적을 보려던 투자자들까지 수익이 줄어드는 걸 우려해 물량을 던지면서 갑작스러운 폭락이 벌어지게 될 거예요.”
랜든은 감탄에 찬 얼굴로 석원을 쳐다봤다.
“앞에서 뛰고 뒤에서 미니까 너도나도 따라서 뛰다가 결국은 패닉에 빠져 절벽 아래로 떨어지는 쥐떼처럼 행동할 거라는 말씀이군요.”
“공포처럼 빠르고 무섭게 번지는 것이 없으니까요.”
그 말에 랜든이 동의하듯 머리를 끄덕였다.
석원은 한쪽 다리를 꼬면서 무릎 위로 깍지 낀 손을 올렸다.
“그때가 정말 찐 폭락이니까. S&P500이 580을 깨고 내려오고 실적 발표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기 전에 숏포지션을 전부 청산해 버리고 빠져나오도록 해요.”
“애널리스트들의 예상과 달리 보스께서는 실적이 나쁘지 않을 거라고 보시는 겁니까?”
“지금은 경기가 커지는 확장 구간인데 실적이 나쁠 이유가 뭐가 있겠어요. 그리고 설사 안 좋게 나오더라도 금방 성장성에 대한 기대감이 올라오면서 증시가 다시 오르기 시작할 거예요.”
석원은 마치 정확하게 치고 빠지는 타이밍을 아는 사람처럼 서슴없이 지시를 내렸다.
“그리고 그때부터는 모든 우려를 털어내고 정말로 거침없이 뉴욕 증시가 오르기 시작할 테니까. 포지션을 바꿔 S&P500 선물을 대거 사들이도록 해요.”
“베팅은 어느 정도나 할까요?”
한 손을 들어 아침에 매끈하게 면도한 턱을 매만지며 잠시 고심한 석원은 이내 다시 입을 뗐다.
“이번에 200억 달러를 공매도했으니까. 가볍게 딱 두 배만 늘려서 베팅하도록 해요.”
“그럼 400억 달러인데 ‘가볍게’라니…… 그런 표현을 쓸 수 있는 건 보스뿐일 겁니다.”
머리를 절레 흔들자 석원이 흰 이를 드러낸 채 크게 소리를 내며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