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lden Spoon Investment Portfolio RAW novel - Chapter (237)
금수저 투자백서 237화(237/283)
237. 저한테 왜 이런 기회를 주시는 겁니까.
한쪽에 걸린 벽시계가 퇴근 시간을 가리키자 뿔테 안경을 쓴 과장이 보고 있던 서류를 덮으며 말했다.
“다들 슬슬 정리하고 퇴근들 해.”
그러자 왼편에 앉아 있던 증감원 직원인 배명욱이 그제야 살겠다는 듯 양팔을 위로 올리고 크게 기지개를 켰다.
“끄으윽.”
“거. 소리 한번 요란하네.”
옆자리에서 문창석이 핀잔을 주자 배명욱이 뻐근한 어깨를 주무르며 말했다.
“으으. 죽겠다. 얼마나 앉아 있었는지 엉덩이에 땀띠가 다 나겠어.”
“엄살 좀 그만 부려. 한겨울에 무슨 땀띠야?”
“말이 그렇다고.”
배명욱이 한 손으로 술을 마시는 시늉을 하며 실실댔다.
“그나저나 내일 휴일인데 오돌뼈에 소주 한잔 어때?”
“좋지.”
그러자 배명욱이 고개를 돌려 옷걸이에 걸어둔 윗도리를 빼서 입고 있는 과장한테도 물었다.
“과장님! 술 한잔 마시러 갈 건데 같이 가실 거죠.”
“집에 일찍 가봐야 할 일도 없는데 그러지 뭐.”
“미스 권도 갈 거지?”
“죄송한데. 전 약속이 있어서 이번엔 빼 주세요.”
단발머리를 한 권숙희가 슬쩍 거절하자 배명욱이 짓궂은 얼굴로 놀렸다.
“오. 혹시 데이트라도 가는 거야?”
“아이. 참. 아니에요.”
“아니긴. 맞구만 뭘!”
그때 옆에 있던 문창석이 팔꿈치로 배명욱을 툭 치면서 턱으로 한쪽에 혼자 덩그러니 앉아 있는 최복락 과장을 가리켰다.
취업 청탁으로 문제가 돼서 징계위원회에 회부된 최복락 과장은 기존 업무에서 배제된 채 서류 정리 같은 잡일을 하고 있었다.
원래라면 진즉에 징계위원회 결정이 나왔어야 했지만 증감원장이 이번 총선에 출마하면서 공석이 되는 바람에 잠시 보류된 상태였다.
“어…….”
배명욱이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문창석을 쳐다봤다.
진짜 최 과장님까지 데려갈 거냐, 하고 눈으로 묻자 문창석이 어쩔 수 있냐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하…… 분위기 완전 조질 텐데.’
뒷머리를 벅벅 긁은 배명욱이 마지못해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저. 최 과장님. 저희 다 같이 오돌뼈 집에서 한잔하려고 하는데. 함께 가시겠습니까?”
그러자 최복락 과장이 고개를 들어 엉거주춤 서 있는 배명욱을 쳐다봤다.
함께 가자고 권하긴 했지만 자신이 끼는 걸 꺼려하는 분위기를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둔하지 않았기에 최복락 과장은 건조한 목소리로 거절했다.
“고맙지만 나도 다른 일이 있어서 안 되겠어.”
“앗. 그렇습니까. 알겠습니다.”
얼굴을 활짝 편 배명욱이 혹시라도 말을 바꿀까 봐 냉큼 대답했다.
다른 이들도 은근히 안심하는 듯한 모습에 최복락 과장은 다시 고개를 숙여 씁쓸한 표정을 감췄다.
독고다이라는 별명이 붙었을 정도로 원래부터 동료들과 친근하게 지내던 스타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취업 청탁 사건이 터진 이후 동료들이 왕따를 시키다시피 그를 의도적으로 피했고 상사들도 그걸 알면서 방치를 넘어 은근히 그런 분위기를 조장했다.
그 때문에 지난 몇 달간 하루하루가 지옥 같았지만 최복락 과장은 오기로 버티는 중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다음 주에 새로운 증감원장이 부임하면 끝이었다.
“그럼 먼저 갑니다!”
최복락 과장만 남겨두고 동료들과 함께 사무실을 나온 배명욱은 복도를 걸어가다가 먼저 앞서가는 과장의 등에 딱 붙어 속닥였다.
“소문에 징계위원회에서 최 과장님을 파면하기로 결정내렸다고 하던데 그게 사실입니까?”
그러자 과장이 뒤를 힐끗 쳐다보곤 무표정한 얼굴로 대꾸했다.
“아마 다음 주쯤에 책상을 비우게 될 거야.”
“역시 소문이 진짜였나 보네요.”
그때 이야기를 듣고 있던 문창석이 중간에 끼어들며 말했다.
“잘못을 저지르긴 했지만 그 정도 사건으로 파면까지 하는 건 조금 과한 거 아닙니까?”
배명욱도 같은 생각인지 머리를 주억거렸다.
기껏해야 감봉이나 근신으로 끝날 일을 너무 엄격하게 다룬다는 느낌이었다.
“다 이유가 있어서 그런 결정을 내렸겠지. 아무튼 정식으로 처벌이 확정돼 공고가 될 때까지 다들 모르는 척하고 있어.”
“예.”
직원들이 다 퇴근하고 텅 빈 사무실에 혼자 남아 있던 최복락 과장은 어느새 어두워진 창밖에 고개를 들어 벽시계를 봤다.
이제 막 정각 8시가 넘어가고 있는 시간.
최복락 과장은 몸을 일으켜 사무실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는 한쪽 벽에 놓여 있는 철제 4단 서랍장 앞으로 다가갔다.
나란히 놓여 있는 서랍장들을 빠르게 훑은 최복락 과장은 “o”라고 적힌 서랍에서 시선을 멈추곤 손잡이를 잡고 열었다.
“…….”
마른 침을 꿀꺽 삼킨 최복락 과장은 주위를 다시 한번 둘러보고 빼곡하게 채워져 있는 종이 파일박스에 붙어 있는 라벨을 하나씩 재빨리 확인했다.
그러다가 [유창 정보통신]이라고 적혀 있는 파일박스를 찾자마자 곧바로 꺼내 들었다.
가까이 있는 책상에 묵직한 파일박스를 올려두고 열어보자 그 안에 또 서류철들이 한가득 들어있었다.
바로 유창 정보통신이 회사를 증시에 상장시키기 위해 증감원에 보낸 서류들이었다.
서류들을 하나씩 꺼내 빠르게 훑어본 최복락 과장은 긴장한 얼굴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다행히 필요한 것들이 다 있군.”
최복락 과장은 서류철 몇 개를 따로 빼서 챙겨 들고는 사무실 구석에 있는 복사기로 향했다.
그러고는 아직 전원이 켜져 있는 복사기 위에 책철을 분리해서 빼낸 서류를 한 장씩 집어넣고 복사를 하기 시작했다.
위이이잉.
기계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덮개 사이로 환한 불빛이 새어 나왔다.
복사가 제대로 된 걸 확인한 최복락 과장은 얼른 다음 장을 복사기 유리판 위에 올려놓고는 덮개를 닫고 버튼을 눌렀다.
오늘따라 유난히 더 시끄럽게 들리는 복사기 소리에 최복락 과장은 마른 입술을 혀로 축이며 혹시 다른 사람이 지나가지 않는지 연신 주변을 둘러봤다.
그렇게 한껏 초조한 얼굴을 한 채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서 혼자 계속 서류를 복사하는 작업을 반복했다.
* * *
다음날.
강남에 위치한 고급 한식당 별실에 석원이 혼자 앉아 있었다.
그렇게 얼마쯤 있었을까, 여종업원이 밖에서 인기척을 내며 미닫이문을 열었다.
“일행분이 오셨습니다.”
석원이 고개를 들자 그동안 마음고생이 심했는지 약간 초췌한 얼굴을 한 최복락 과장이 안으로 들어왔다.
“오랜만이군요.”
몸을 일으킨 석원이 미소 띤 얼굴로 먼저 손을 내밀자 최복락 과장이 맞잡으며 입을 뗐다.
“얼마 전에 대흥 창투 사장으로 가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조금 늦었지만 축하드립니다.”
“고맙습니다.”
부드럽게 웃은 석원이 그에게 자리를 권했다.
“자 일단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도록 할까요.”
“그러시죠.”
널찍한 교자상을 가운데 두고 두 사람이 마주 보며 방석이 깔린 좌식 의자에 앉았다.
“바로 식사를 가져다드릴까요?”
“그렇게 해줘요.”
“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여종업원이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갔다.
문이 닫히자 긴장한 얼굴을 한 최복락 과장이 가져온 가방에서 두툼한 서류 봉투를 꺼내 그 앞에 내려놨다.
“말씀하셨던 유창 정보통신 회계 관련 서류들입니다.”
석원은 서류 봉투를 열어 가져온 서류를 꺼내 살펴보고는 눈빛을 반짝였다.
기대했던 내용이었는지 그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서류를 다시 봉투에 집어넣고는 옆에 내려놨다.
“제대로 잘 가져왔네요.”
“정말 이거면 배 국장을 물 먹일 수 있는 겁니까?”
최복락 과장이 몸을 앞으로 당겨 앉으며 확인하듯 물었다.
그를 통해 가벼운 처벌이 내려지도록 도와주기는커녕 동해 그룹 장남인 우호근의 사주를 받아 오히려 중징계를 받게 뒤에서 꾸몄다는 사실을 알게 된 최복락 과장은 배신감에 독이 바짝 올라 있었다.
석원은 좌식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여유롭게 대꾸했다.
“지금 있는 자리에서 파면되는 건 물론이고 사법처리까지 받아 교도소에 꽤 오래 들어가 있어야 될 겁니다.”
그러자 최복락 과장이 굳어 있던 표정을 살짝 풀고 중얼거렸다.
“꼭 그렇게 됐으면 좋겠군요.”
한순간 들끓은 감정 때문인지 그의 양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때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온 여종업원이 쟁반에서 흰 사기그릇을 두 사람 앞에 하나씩 내려놓으며 말했다.
“밤을 넣어서 만든 타락죽입니다.”
우유처럼 뽀얀 빛깔에 고소한 향내가 피어오르자 석원이 먼저 숟가락을 들어 한 입 먹어보고는 그에게도 권했다.
“고소하고 부드러워서 맛이 괜찮네요. 어서 먹어보세요.”
그러자 최복락 과장도 숟가락을 들고 죽을 떠먹었다.
잠시 뒤 죽 그릇이 치워지고 전채 요리로 궁중 어채와 아롱사태 육전이 나왔다.
하나씩 맛을 본 석원은 냅킨으로 입가를 닦고는 맞은편에 있는 최복락 과장을 응시하며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징계위원회에서 파면을 확정지었다고 들었는데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
“아직 별다른 계획은 없고 그냥 조금 쉬면서 천천히 생각해볼까 합니다.”
최복락 과장이 씁쓸한 표정으로 답했다.
배 국장한테 복수를 해도 그의 망가진 경력과 이미 결정된 파면은 되돌릴 수가 없었다.
“그럼 잠깐 외국에 나가 있는 건 어떻습니까.”
“네?”
전혀 생각도 못 한 이야기에 최복락 과장이 의아한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한 이년 정도 머리를 식힌다 생각하고 일본이나 미국에 있는 적당한 대학교에서 연수를 다녀오는 겁니다.”
“……!”
“그 사이에 배상윤 국장 일도 정리가 되어 있을 겁니다.”
잠시 말이 없던 최복락 과장은 석원을 똑바로 쳐다보며 약간 가라앉은 목소리를 냈다.
“혹시 지난번 보성통신 일로 제가 껄끄러우신 거라면 관에 들어갈 때까지 입을 다물고 있을 테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런. 뭔가 오해가 있으신 것 같군요.”
하지만 최복락 과장은 여전히 굳은 얼굴로 그를 마주했다.
석원은 옅게 미소를 지으며 여유롭게 최복락 과장의 눈빛을 받았다.
“정말로 그런 것이 염려됐다면 더 확실한 방법을 썼겠지요.”
최복락 과장은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일부러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며 겁을 주는 것보다 구체적으로 뭘 하겠다고 이야기한 건 아니지만 태연하게 웃으며 내뱉는 석원의 말이 오히려 더 섬뜩했다.
“외국에 나가 있길 권한 건 당분간 바로 뭘 새로 시작하기가 어정쩡하니 잠시 머리를 식히고 돌아오라는 겁니다. 물론 필요한 비용은 전부 제가 지원해 드리도록 하죠.”
“……정말 그것뿐입니까?”
“물론입니다.”
쉽사리 의심을 내려놓지 못하는 모습에 석원이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고 내려놨다.
“2년 뒤면 문제가 됐던 사건도 기억 속에 잊혀지고 국내 분위기도 많이 바뀌어 있을 테니까. 그때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겁니다.”
“글쎄요. 너무 갑작스러운 제안이라 솔직히 좀 혼란스럽군요.”
그러자 석원이 몸을 살짝 앞으로 숙이고는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정치에 관심이 있습니까?”
“…….”
“만약 그렇다면 양복 옷깃에 은 배지를 하나 달아드리도록 하죠.”
눈을 동그랗게 뜬 최복락 과장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지금 절 국회의원으로 만들어 주신다는 겁니까?”
석원은 대답 대신 머리를 끄덕였다.
지역구에서 선거를 통해 당선된 국회의원을 금배지 그리고 공천을 받아 전국구로 손쉽게 국회에 입성한 의원을 흔히 은 배지라고 낮춰 불렀다.
그러니 석원의 이야기는 전국구 의원으로 그를 국회에 들어가도록 해주겠다는 거였다.
“이대로 주저앉기에는 지금까지 어렵게 쌓은 경력과 최 과장님이 품고 있는 야망이 너무 크지 않습니까.”
목이 타는 듯 찻잔을 들어 한 번에 벌컥 다 마신 최복락 과장이 그를 보며 되물었다.
“정말 절 국회의원으로 만들어 주실 수 있습니까?”
그러자 석원이 흰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안 될 일이라면 아예 이런 말을 꺼내지도 않았을 겁니다.”
잠자코 머리를 끄덕인 최복락 과장은 잠시 생각을 정리하고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한테 왜 이런 기회를 주시는 겁니까.”
불신과 기대가 섞인 복잡미묘한 감정이 그의 목소리에 그대로 묻어났다.
“전 사람을 이용만 하고 버리진 않습니다. 그리고 최 과장님이 국회에 들어가면 저한테도 도움이 되기 때문이지요.”
그냥 아무런 대가 없이 도움을 주는 거라면 의심을 했을 테지만 원하는 것이 있다고 하자 오히려 안심이 됐다.
그와 동시에 자포자기하고 있던 최복락 과장의 가슴 속에 뜨거운 열망이 다시 솟아올랐다.
어느새 처음과 달리 생기가 도는 눈동자로 변한 최복락 과장은 그에게 고개를 숙이며 부탁했다.
“염치없지만 한 번만 더 도와주십시오. 그러면 시키시는 대로 뭐든 하겠습니다.”
석원은 그런 상대를 보며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