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lden Spoon Investment Portfolio RAW novel - Chapter (238)
금수저 투자백서 238화(238/283)
238. 설마 이 정도로 문을 닫거나 하진 않겠죠?
1996년 2월 24일.
토요일이었지만 내후년 12월이나 되어서야 증시 토요휴장제가 실시됐기에 대흥 창투 자금운용부 직원들은 오후에도 사무실에 남아 있었다.
“으아. 이제 다 끝났네.”
넥타이 매듭을 느슨하게 풀고 앉은 정환엽이 거래 전표 정리를 전부 다 끝내곤 지긋지긋하다는 표정으로 책상 구석에 놔둔 머그컵을 집어 들었다.
아무 생각 없이 컵을 입에 갖다 댄 정환엽은 그새 다 마시고 커피가 없는 걸 보곤 다시 내려놓으며 투덜거렸다.
“다들 오전 근무만 하고 퇴근하는데 우리만 이게 뭔지. 이러니까 내가 장가를 못 가는 거라고.”
그때 뒤에서 누군가 혀를 쯧쯧 찼다.
“토요일에 일하는 거랑 네가 장가 못 간 거랑 무슨 상관이야?”
“앗. 부장님.”
정환엽이 의자에 앉은 채 뒤를 돌아보자 언제 왔는지 잠깐 자리를 비웠던 최호근 부장이 서 있었다.
“아니 좀 들어보세요. 데이트할 시간이 없는데 어떻게 결혼을 합니까!”
“일요일에는 뭘 하고?”
“집에서 자야죠. 월요일에 출근하려면 하루 정도는 푹 쉬어줘야 버틸 수 있다고요.”
“그러는 녀석이 월요일만 되면 병든 닭처럼 비실비실 거리냐.”
최호근 부장이 삐딱하게 서서 핀잔을 주자 정환엽이 어색하게 웃으며 슬쩍 시선을 피했다.
“불이 튀면 야근을 하고도 애인 집 앞에 달려가서 잠깐 얼굴이라도 보고 오는 것이 남녀 사이인데 하여튼 핑계는.”
“맨날 구박만 하고 너무하신 거 아닙니까? 여자 한 명 소개시켜 주지도 않으셨으면서.”
그러자 최호근 부장이 한심하다는 눈으로 그를 쳐다봤다.
“나중에 무슨 원망을 들으려고 너를 소개시켜 줘?”
“제가 뭐 어때서요!”
한껏 억울한 표정으로 반박하자 최호근 부장이 양손을 허리에 올린 채 크게 한숨을 내뱉었다.
“하아. 환엽아, 옛날에 소크라테스라는 훌륭한 분이 남긴 명언이 있어.”
“뭐요. 너 자신을 알라 그거요?”
“알긴 아네.”
뚱해진 정환엽이 나름대로 본인의 장점을 읊었다.
“요즘 운동을 안 해서 아랫배가 조금 나오긴 했지만 얼굴도 어디 가서 안 빠지는 편이고, 돈도 괜찮게 버니까. 이 정도면 1등 신랑감 아닙니까.”
“너는 진짜 뭘 믿고 그렇게 자존감이 높은 거냐.”
최호근 부장이 머리를 절레 흔들자 같은 사무실에 있던 유석현과 홍재희도 덩달아 키득거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은근히 진심으로 한 말이었는데 다들 웃어대자 정환엽이 입을 쭉 내밀고 투덜거렸다.
“저도 이제 과장을 달았는데 너무한 거 아닙니까.”
“그래. 말이 나와서 하는 이야기인데. 너 과장이 돼서 부서원들한테 모범은 못 될 망정 맨날 지각이나 하고 진짜 그럴 거냐? 어?”
“……죄송합니다.”
지은 죄가 있던 정환엽은 아무런 반박도 못 하고 한쪽 손으로 뒷머리를 긁적였다.
“으이구. 내가 너 때문에 늙는다 늙어. 정말 잘 좀 하자.”
“헤헤. 알겠습니다. 부장님.”
“웃지마. 정들어. 인마.”
최호근 부장이 그런 정환엽을 째려보면서 매몰차게 타박했다.
“거래 전표 정리 다 끝냈으면 얼른 홍 대리한테 주고 빨리 퇴근이나 해. 네 말대로 데이트를 하든 술을 마시든 알아서 하고 회사에 지각이나 하지 말아라. 제발.”
홍재희와 유석현도 대흥 창투로 옮겨오면서 대리로 직급이 올라갔다.
“예엡.”
“대답 똑바로 안 하지?”
“예. 알겠습니다!”
우렁찬 목소리로 대답한 정환엽이 얼른 정리를 끝낸 거래 전표를 챙겨서 자신의 자리에 앉아 있는 홍재희한테 넘겼다.
그걸 보며 다시 한번 최호근 부장이 한숨을 내쉴 때 전화벨이 울렸다.
“네. 자금운용부 유석현 대리입니다.”
약간 웃음기가 맺힌 얼굴로 전화를 받은 유석현의 입에서 갑자기 큰 소리가 터져 나왔다.
“뭐? 그게 진짜야!”
갑자기 튀어나온 목소리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고개를 돌려 쳐다봤다.
“어…… 알았어. 고마워.”
수화기를 내려놓자 최호근 부장이 가늘게 뜬 눈으로 그를 쳐다봤다.
“유 대리. 무슨 일이라도 있어?”
정환엽과 홍재희도 궁금한 시선으로 쳐다보는 가운데 유석현이 얼른 대답했다.
“조금 전 재정경제원에서 4월 1일부터 외국인 주식투자 한도를 15%에서 18%로 늘리고 국내 일반 투자자의 해외 증권 투자도 전면 자유화한다고 발표를 했다고 합니다.”
갑작스러운 재경원의 폭탄 발표에 정환엽과 홍재희가 눈을 크게 뜨며 화들짝 놀랐다.
“그게 정말이야!”
“어머. 갑자기 그런다고요?”
그런 두 사람의 반응을 보면서 유석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자로 있는 친구가 전해준 정보니까 확실할 겁니다.”
“허…… 이거 엄청 큰 뉴스인데.”
정환엽이 한 손으로 턱을 괴고 중얼거렸다.
조금 전까지 설렁거리며 농땡이를 부리던 사람이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진지한 표정을 지은 그는 이 소식이 증시에 미칠 파장을 머릿속으로 생각했다.
‘근데 부장님이 왜 이렇게 조용하지.’
문득 깨달은 사실에 정환엽이 고개를 돌려서 쳐다봤다.
팔짱을 낀 채 서 있는 최호근 부장이 크게 놀란 기색 없이 담담한 표정을 짓고 있자 정환엽이 의아한 눈으로 물었다.
“부장님. 혹시 재경원에서 발표가 나올 걸 알고 계셨습니까?”
“어? 설마요.”
“기자인 제 친구도 방금 알았다고 하는데…….”
홍재희와 유석현이 설마 하는 얼굴로 최호근 부장을 쳐다봤다.
그러자 최호근 부장이 감탄 섞인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예에?”
“!”
그냥 던져본 말이었는데 정말로 알고 있었다고 하자 정환엽과 직원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봤다.
경악한 시선들에 최호근 부장이 쓰게 웃으며 설명했다.
“내가 아니라 본부장…… 아니 사장님이 이렇게 될 걸 예견하고 계셨어.”
“그게 정말입니까?”
헉 소리를 낸 정환엽이 놀라서 재차 되물었다.
“총선을 앞두고 청와대와 여당이 강한 증시 부양책을 내놓을 거라고 하셨어.”
그러자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에 정환엽이 탄성을 내뱉으며 말했다.
“그래서 일주일 안에 새창통신하고 다른 두 종목을 집중 매집하라고 하신 거군요.”
“맞아. 4월에 총선이 있으니 괜히 선거용이라는 비난을 받지 않으려면 이번 달에 부양책을 내놓아야 할 테니까 말이야.”
“어쩐지. 사장님이라면 충분히 그러실 수 있죠. 거기까지 내다보시다니 매번 느끼는 거지만 정말 대단하시네요.”
정환엽이 혀를 내두르며 감탄했다.
“그러게요. 역시 사장님이세요.”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실 수 있는지…… 역시 전 아직 한참 멀었습니다.”
이어서 홍재희와 유석현도 한마디씩 보태며 떠들어댔다.
머리를 끄덕이면서 부하들의 말에 동조하던 최호근 부장은 이내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정환엽을 노려봤다.
“정 과장. 너 말이 좀 이상하다.”
“뭐가요?”
“아까는 의심에 찬 얼굴로 쳐다보더니. 사장님이 예견하셨다니까 왜 바로 수긍하는 건데.”
“에이. 난 또 뭐라고. 부장님은 저처럼 잔잔바리 스타일이지. 사장님같이 몇 수 앞을 내다보고 매매를 하는 성격은 아니잖아요.”
그러자 최호근 부장이 인상을 쓰며 와이셔츠 소매를 걷어 올렸다.
“뭐. 잔잔바리? 너 이 자식. 오늘 제대로 날 한번 잡아보자.”
“왜 또 이러십니까. 전 그냥 사실을 있는 그대로 말한 것뿐인데요!”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치면서도 정환엽이 끝까지 뺀질거리자 최호근 부장의 이마에도 핏줄이 불뚝 솟아올랐다.
“이게 정말! 오냐. 때로는 진실을 감출 줄도 알아야 한다는 걸 가르쳐 주마.”
“악! 주먹. 주먹 좀 내려놓고 말하세요!”
“너 거기 가만히 안 있어!”
“잡히면 죽일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데 어떻게 그냥 있어요!”
정환엽이 재빨리 사무실 밖으로 줄행랑을 치자 최호근 부장이 뒤에서 고함을 치며 쫓아갔다.
“너 이리 안 와!”
“아악! 사람 살려!”
복도를 요란하게 뛰어다니는 발소리를 들으며 홍재희가 덤덤하게 중얼거렸다.
“두 분은 나이를 한 살씩 더 먹으셨는데도 어째 바뀌는 게 없네요.”
“하하.”
유석현도 피식 웃으며 동감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 * *
벤츠 대형 세단이 막 강남역 사거리를 지나가는 가운데 석원은 뒷좌석 시트에 편하게 앉아 뉴욕에 있는 랜든과 통화를 하고 있었다.
[닛케이 선물 포지션 정리를 어제부로 모두 끝냈습니다.]“수익률은 얼마나 나왔어요?”
[예측하신 대로 닛케이가 크게 올라 2만을 넘긴 덕분에 43.65%나 되는 높은 수익률을 확정 지을 수 있었습니다.]큰 수익을 올려서 그런지 랜든의 목소리가 상당히 들떠 있었다.
[비용을 제외하고 최종적으로 34억 1천 2백만 달러를 벌어들였습니다.]액수를 들은 석원은 휴대폰을 손에 든 채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성과가 꽤 괜찮게 나왔네요.”
그러자 랜든이 크게 웃으며 말을 받았다.
[아마 모르긴 해도 지금쯤 노무라와 다이와를 비롯한 일본 대형 증권사들은 저희 때문에 실적이 박살 나 발칵 뒤집혔을 겁니다.]선물 시장에서 석원이 롱포지션을 잡았으면 반대로 그만큼 선물을 매도해 숏에 베팅한 쪽이 있어야 했다.
불안한 환율과 폭락하는 증시에 선물을 마구 내다 팔아 버린 건 아이러니하게도 노무라와 다이와 증권 같은 일본 증권사들이었다.
무섭게 떨어지는 증시에 조금이라도 수익률을 만회하려고 선물을 매도한 거였지만 그게 오히려 더 큰 손해를 안겨줬다.
‘설마 갑자기 이렇게 엔화가 약세로 돌아서고 닛케이가 급반등해 버릴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겠지.’
뒤늦게 상황을 파악하고 황급히 포지션을 바꾸려고 했지만 그때는 이미 늦어 아무도 선물을 팔려고 하지 않았고 물량이 그대로 잠겨 버리고 말았다.
의도치 않게 일본 증권사들을 탈탈 털어 버린 꼴이 된 석원은 미소를 머금은 채 말했다.
“그래도 베어링스 은행처럼 망한 곳은 없잖아요.”
[꼭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그게 무슨 말이에요.”
석원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야마이치 증권이라고 아실 겁니다.]“물론이에요.”
올해로 창업 99년이 된 야마이치 증권은 노무라, 다이와, 닛코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일본을 대표하는 4대 증권사 중에 하나였다.
[이번에 손실을 크게 입어서 파산까지는 아니지만 상당한 타격을 받았을 겁니다.]“얼마를 잃었기에 그래요?”
[정확한 건 알 수 없지만 대략 9억 달러는 넘어갈 겁니다.]상당한 규모의 돈에 석원이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
“액수가 좀 되네요.”
[아마 이번 분기 실적 발표를 보면 많이 처참할 겁니다.]“그래도 일본에서 두 번째로 큰 증권사인데 설마 이 정도로 문을 닫거나 하진 않겠죠?”
[하하. 그건 그렇습니다만 후유증이 적진 않을 겁니다.]“하긴 손해를 본 걸 다 상각 처리하려면 쉽지는 않겠죠.”
석원은 대꾸하면서 손에 든 휴대폰을 고쳐 쥐었다.
“닛케이 선물 투자는 그렇게 마무리 짓고 이제부터는 지난번에 말한 대로 CDS 계약에 집중하도록 해요.”
[알겠습니다.]CDS는 신용부도스와프(Credit Default Swap)을 줄인 단어로 국가나 기업 또는 특정 상품의 부도 위험 자체를 사고팔 수 있도록 만든 파생금융상품이었다.
곧 아시아 각국을 덮칠 금융위기를 앞두고 한국은 물론이고 큰 피해를 입을 인도네시아와 태국, 말레이시아, 홍콩 등의 CDS를 사뒀다가 프리미엄이 치솟으면 달러를 긁어모을 계획이었다.
랜든과 통화를 끝내고 차분히 생각을 정리하고 있을 때 다시 휴대폰 벨이 울렸다.
통화 버튼을 누르고 전화를 받자 어머니인 조덕례 여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디쯤 왔니?]“이제 서초역을 지나고 있어요.”
석원이 고개를 돌려 차창 밖을 쳐다보고 대답했다.
[그럼 거의 다 왔네. 경비실에 미리 말해뒀으니까 바로 들어오면 돼.]“네. 조금 있다가 뵐게요.”
[그래.]휴대폰을 내려놓으며 석원이 중얼거렸다.
“무슨 일로 밖에서 보자고 하시는 거지.”
이유가 궁금했지만 길게 생각할 일은 아니었다.
“뭐. 가보면 알겠지.”
석원은 이내 푹신한 시트에 몸을 기댄 채 차창 밖으로 지나가는 거리 풍경을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