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lden Spoon Investment Portfolio RAW novel - Chapter (24)
금수저 투자백서 24화(24/231)
24. 자네 올해 졸업 학년이지?
[대흥그룹 태산 증권 인수!3일 대흥그룹은 태산증권 주식 5백 66만주(지분율 30.44%)를 1천 142억 원에 인수하기로 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이로써 태산증권 최대 주주가 된 대흥그룹은 태산증권을 계열사로 편입시킬 예정이다.
이번 인수를 통해 금융사업에 첫발을 내디딘 대흥그룹은 기존 백화점과 면방직 사업에 이어 증권업을 새로운 주력 사업으로 키워나갈 것이라고 야심찬 계획을 밝혔다.
한편 증시 활황에 대흥그룹 외에도 많은 대기업들이 증권사를 인수하며…….]
많은 지면을 할애해서 상세하게 실린 기사를 전부 다 읽고 신문을 아래로 내린 석원은 머리를 갸웃거렸다.
“내 기억으로는 대흥그룹 계열사들 중에 증권사는 없었던 것 같은데.”
혹시나 싶어 예전 기억을 더듬어 봤지만 확실히 금융업하고는 그다지 얽힌 것이 없었다.
“창업투자 회사가 하나 있긴 하지만 그다지 큰 규모는 아니고.”
그런데 갑자기 뜬금없이 증권사를 인수했다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것도 천억 원이 넘는 거액을 투자하다니. 기사 내용처럼 아버지가 작정하고 증권사를 키우려는 건가.”
정부가 금융시장 선진화를 추진하면서 주식 시장이 호황기에 들어가고 있었기에 증권사 인수는 나쁜 선택은 아니었다.
거기다 몇 년 뒤에 찾아올 닷컴 버블까지 생각한다면 인수 자금 천억 원이 전혀 아깝지 않을 만큼 쏠쏠하게 돈을 벌어다 주는 알짜 계열사가 될 터였다.
“인수한 뒤에도 돈만 잡아 먹고 있는 애물단지 계열사들보단 훨씬 나은 선택일 거야.”
그렇긴 한데 원래는 전혀 관련이 없던 증권사를 난데없이 인수한 것에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
“이것도 나 때문에 벌어진 일인가.”
석원의 존재 말고는 달라진 것이 없으니 충분히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었다.
씁 입맛을 다신 석원이 작게 읊조렸다.
“아무래도 내가 파운드화 투자에 성공한 걸 보고 증권사를 인수하시기로 한 것 같은데.”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불과 몇 달 만에 규모가 작지도 않은 증권사를 하나 인수해 버리다니.
즉흥적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상당히 과감한 행동이었다.
“겉보기와 달리 은근히 한번 꽂히면 코뿔소처럼 밀어붙이는 스타일이란 말이야.”
석원은 서울에 있는 박태홍 회장의 근엄한 모습을 떠올렸다.
건장한 덩치에 육중한 무게감이 느껴지는 외양만 봐서는 그처럼 빠른 행동력이 있을 거라고 상상하기 어려웠다.
“하긴 그러니까 물려받은 그룹을 재계 서열 30위까지 올려놓을 수 있었던 거겠지.”
물론 급격하게 커진 덩치와 달리 내실을 제대로 다지지 못하면서 박태홍 회장의 공격적인 경영은 나중에 그룹을 휘청이게 만드는 원인이 됐다.
“외부에서 들어온 공격이 결정타가 됐지만 애초에 그룹의 체력이 튼튼했다면 상대가 섣불리 덤벼들 마음을 먹지도 못했을 거야.”
원래대로라면 몇 년 뒤부터 급격히 쇠락하다가 결국 IMF라는 거센 파도를 넘기지 못하고 그룹이 해체되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대흥그룹이었다.
“하지만 내가 있는 이상 절대 그런 일은 없을 거야.”
석원은 스스로한테 다짐하듯 말하고는 가늘게 내리뜬 눈으로 다시 신문에 실린 증권사 인수 기사를 봤다.
돈만 잡아먹는 애물단지가 아니라 그룹의 새로운 캐시 카우가 될 수 있는 증권사를 인수한 것이 어쩌면 변화의 시작점일지도 몰랐다.
* * *
경기도 안산 대흥방직 공장.
축구장 열 개를 합쳐 놓은 것보다 큰 공장 안에 3열로 길게 설치된 방직기들이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쉬지 않고 돌아가고 있었다.
화장기 없는 풋풋한 얼굴의 여공들이 파란색 유니폼을 입고 방직기 앞에 서서 열심히 일하는 가운데 양복을 입은 한 무리의 사내들이 걸음을 옮기며 작업 모습을 살폈다.
작업복을 입은 중년의 공장장은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옆에 있는 30대 초반쯤 되어 보이는 키 큰 사내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최근 늘어난 주문을 맞추기 위해서 현재 24시간 3교대로 라인을 돌리고 있습니다.”
사내는 바로 박태홍 회장의 장남인 박진형 본사 상무였다.
아버지인 박태홍 회장의 외모를 그대로 빼닮아 180이 넘는 장신에 건장한 덩치를 가지고 있어 단단한 돌벽 같은 느낌을 주는 사내였다.
국내에서 대학을 졸업한 박진형 상무는 박태홍 회장의 의지에 따라 일찌감치 회사에 들어와 착실히 후계자 수업을 받고 있었다.
차남인 석원이 있었지만 그룹 안팎으로 차기 회장 자리는 박진형 상무의 몫이 될 거라고 다들 생각했다.
그렇다 보니 박진형 상무를 대하는 공장장의 태도가 더욱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연말까지 중국으로 보내야 되는 원사가 1,100톤이 넘는 걸로 아는데 선적에 문제는 없겠죠?”
박진형 상무의 물음에 공장장이 바로 대답했다.
“일정이 조금 빠듯하지만 납기를 못 맞추는 일은 없을 겁니다.”
“당연히 그래야죠.”
크진 않지만 힘이 들어간 목소리로 박진형 상무가 말을 이었다.
“납기도 준수해야 되겠지만 그렇다고 불량이 나와서는 안 되니까. 품질 검사도 신경 써서 하는 걸 잊지 말도록 해요.”
“예. 명심하겠습니다.”
굽신거리는 공장장의 대답을 들으며 박진형 상무는 일행들과 함께 넓은 공장을 마저 돌아봤다.
그룹의 근간이자 백화점 사업과 함께 현금을 벌어다 주는 주 수입원이었기에 이처럼 틈날 때마다 충북 청주와 안산에 있는 방직 공장들을 둘러보며 신경 썼다.
생산 라인을 다 살펴보고 간부들을 격려한 박진형 상무는 허리를 직각으로 굽히는 공장장의 배웅을 받으며 타고 온 세단에 올라 서울로 향했다.
고급 세단이 공장 부지를 나와 큰길에 들어서자 조수석에 앉아 있던 남자가 몸을 돌려 뒷좌석에 자리한 박진형 상무에게 말했다.
“공장을 둘러보실 때 연락을 받았는데 새로 인수한 증권사 신임 사장이 결정됐다고 합니다.”
각진 턱에 이마가 넓은 사내는 박진형 상무의 최측근이자 오른팔인 오인환 비서실장이었다.
푹신한 가죽 시트에 몸을 기대고 있던 박진형 상무가 그 말에 흥미를 보이며 물었다.
“누가 가게 됐어.”
“최진우 전 재무부 차관입니다.”
말을 들은 박진형 상무는 의외라는 듯 미간을 살짝 좁혔다.
“조윤원 전무가 아니고?”
시선을 받은 오인환 실장은 작게 머리를 끄덕이며 상세히 설명했다.
“예. 작년에 재무부를 나온 인물로 금융국을 비롯해 요직을 두루 거친 금융 전문가라고 합니다. 조 이사장님의 대학 후배로 사적으로 친분이 두터운 사이라고 하더군요.”
박진형 상무의 외할아버지인 조승재 전 내무부 장관은 공직에서 물러난 뒤 현재 대흥그룹 공익 재단인 한결 재단 이사장직을 맡고 있었다.
“신임 사장으로 낙점하는데 조 이사장님의 추천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랬군.”
팔짱을 낀 채 잠시 생각을 정리한 박진형 상무는 이내 차분한 얼굴로 말했다.
“조금 의외이긴 하지만 금융 전문가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재무부 출신이라면 회사 운영에 이런저런 도움 되는 것이 많을 테니 나쁘지 않은 인선이군.”
“아마 회장님께서도 그런 점들을 고려해서 선택하신 것 같습니다.”
“그러시겠지.”
아무리 외할아버지의 추천이 있었다고 해도 중요한 계열사 사장을 아무나 임명할 박태홍 회장이 아니었다.
‘아니 어쩌면 아버지가 먼저 재무부 퇴직 관료들 가운데 적당한 인물이 없는지 물어보셨을 수도 있지.’
그룹 공익 재단 이사장직에 있지만 평소 회사 일에는 선을 긋고 일체 관여를 안 하던 외할아버지의 모습을 봤을 때 그랬을 가능성이 컸다.
그때 오인환 실장이 슬쩍 눈치를 살피고는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그리고 아직 확실한 건 아닙니다만 미국에서 유학 중이신 둘째 도련님이 돌아오시면 증권사로 발령이 날 거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디서 나온 이야기야?”
“회장 비서실에서 흘러나온 정보이니 아무런 근거도 없는 소문은 아닐 겁니다.”
박진형 상무가 잠시 침묵한 가운데 오인환 실장이 자신의 추측을 꺼냈다.
“혹시 증권사를 나중에 둘째 도련님 몫으로 계열 분리해서 떼주시려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주력 계열사인 백화점이나 방직이 아니고 뜬금없이 새로 인수한 증권사에 동생을 입사시킨다고 하니 그런 생각을 할 만도 했다.
“아버지께서 생각이 있으시겠지.”
박진형 상무는 별다른 감정을 내비치지 않고 짧게 대꾸한 뒤 옆으로 눈을 돌렸다.
더 이상 이것에 관해 말을 꺼내지 말라는 뜻.
그러자 오인환 실장도 눈치껏 입을 다물고는 몸을 바로 해서 앉았다.
이후론 차가 도로를 달리며 내는 엔진 소리만이 조용히 울릴 뿐이었다.
박진형 상무는 고개를 돌려 차창 밖을 바라보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조 전무가 아니라 외부 인사를 사장으로 임명한 것도 그것 때문인가.’
조윤원 전무는 박태홍 회장의 측근이지만 동시에 그를 지지하는 인물이기도 했다.
그러니 만약 정말로 증권사를 둘째에게 줄 생각이라면 조윤원 전무가 내려가 자리를 잡는 것이 당장은 몰라도 나중에 문제가 될 수 있었다.
‘증권사라…….’
박진형 상무는 아버지인 박태홍 회장의 마음을 헤아리기 위해 눈을 반쯤 내리깔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
* * *
매사추세츠주 케임브리지.
자전거를 타고 넓은 캠퍼스를 가로지른 석원은 붉은색 벽돌로 고풍스럽게 지어진 건물 앞에 멈춰 섰다.
안장에서 내려 장갑을 낀 손으로 능숙하게 자전거 앞바퀴에 잠금장치를 채우고 허리를 펴는 그의 양 볼이 찬 바람을 맞아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이제 추워서 자전거도 못 타고 다니겠네.”
실제로 연말이 다가오면서 영하로 뚝 떨어진 기온에 하얀 입김이 새어 나올 정도로 날씨가 추웠다.
이 상태로 조금만 더 있으면 하늘에서 눈이 펑펑 떨어지는 모습도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다음 주에는 한국으로 돌아가니까 그때까지만 버티자.”
석원은 목도리를 단단히 여미고는 걸음을 옮겨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난방이 돌아가는 실내로 들어서자 몸이 녹으며 그제야 좀 살 것 같았다.
복도를 한참 걸어간 석원은 프랭크라고 이름표가 붙은 교수실 앞에 멈춰 섰다.
똑똑.
한쪽 손을 들어 가볍게 노크하자 곧장 안에서 대답이 돌아왔다.
“들어와요.”
석원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프랭크 교수가 책상 앞에 앉아 있다가 그를 보곤 반가운 기색을 표했다.
“아, 어서 오게.”
프랭크 교수는 면바지에 네이비색 니트 조끼를 입은 편한 차림새였다.
“찾으셨다고 해서 왔습니다.”
“일단 앉아서 얘기하지.”
웃으면서 일어난 프랭크 교수가 커피포트가 있는 선반 앞에서 물었다.
“커피 괜찮나?”
“예.”
석원은 목도리를 풀고 손에 쥐면서 깔끔하게 잘 정돈된 교수실을 둘러봤다.
깐깐한 성미처럼 책장에 책들이 딱 높이를 맞춰서 줄지어 꽂혀있었고 너저분하게 흐트러진 물건이 하나도 없었다.
유리병에 든 인스턴트 커피를 머그컵에 넣고 뜨거운 물을 부은 프랭크 교수는 석원 앞에 한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자, 마시게.”
“감사합니다.”
“맛은 보장 못 하지만 그래도 그럭저럭 마실만은 할 거야.”
프랭크 교수가 맞은편 소파에 앉으며 가볍게 농담을 던졌다.
살짝 웃으며 커피를 한 모금 마신 석원은 머그컵을 내려놓으면서 슬며시 물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절 부르셨는지…….”
“다른 것이 아니고 이번 시험에 자네가 제출한 답안을 읽어봤는데 말이야. 아주 흥미롭더군. 아, 물론 긍정적인 쪽으로.”
프랭크 교수는 두 손으로 머그컵을 감싸 안은 채 한쪽 다리를 지그시 꼬았다.
“87년에 있었던 블랙먼데이의 원인을 포트폴리오 보험과 컴퓨터 프로그램 거래의 불안정으로 보는 견해가 많은데 자넨 그것보다 투자자들의 심리적 불안감이 결정적이었다고 적었더군.”
워낙 경제사에 큰 영향을 끼친 사건이었기에 오 부장한테 들은 것 외에도 나중에 많은 석학들이 출간한 책들을 찾아서 읽어봤던 석원은 머릿속에 나름 자신만의 생각을 가질 수 있었다.
그렇기에 자신감을 가지고 프랭크 교수의 질문에 당황한 기색 없이 바로 대답했다.
“위험을 헤지(Hedge)하기 위해 만들어 둔 안전장치인 포트폴리오 보험과 프로그램 거래가 막상 주가 폭락이 벌어지자 오히려 낙폭을 더 키우는 촉매제가 된 건 분명한 사실입니다.”
프랭크 교수는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흥미로운 얼굴로 가만히 이야기를 들었다.
“하지만 아무리 예전보다 포트폴리오 보험과 프로그램 자동매매 물량이 많아졌다고 해도 매일 뉴욕 증시에서 거래되는 전체 대금을 생각해 볼 때, 단 하루 만에 주가를 22.6%나 주저앉힐 만한 수준은 절대 아닙니다.”
눈에 반짝 이채를 띤 프랭크 교수가 자세를 바로 하면서 물었다.
“자네 말은 포트폴리오 보험과 프로그램 자동매매는 부차적인 요인일 뿐, 주가가 폭락하자 불안감에 투자자들이 주식을 투매한 것이 핵심이라는 거군.”
“그렇습니다. 덧붙인다면 미국의 쌍둥이 적자 누적과 세제 개혁안 그리고 무엇보다 과도하게 오른 증시에 투자자들이 언제 폭락이 올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가지고 있던 것이 블랙먼데이를 일으킨 트리거가 됐을 겁니다.”
석원은 진지하게 이야기를 듣고 있는 프랭크 교수를 힐끔 쳐다보고 말을 이었다.
“임계점에서 서로 눈치만 보고 있을 때, 주가가 하락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손에 쥔 주식을 내던지면서 앞다퉈 배에서 뛰어 내려 버린 겁니다. 그게 리스크 헤지를 해둔 포트폴리오 보험과 프로그램 자동매매를 자극했고 다시 대량의 매물이 쏟아지는 악순환에 빠져 버렸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그러자 프랭크 교수가 손바닥으로 무릎을 탁치면서 말을 받았다.
“매도가 다시 더 큰 매도를 부르는 죽음의 소용돌이(Death Spiral)가 발생한 거군.”
“그렇습니다.”
“그래, 자네 이야기를 들어 보니 충분히 일리가 있는 가설이구만 아주 흥미로운 생각이야.”
한쪽 손으로 턱을 매만지던 프랭크 교수가 갑자기 그에게 은근한 시선을 던졌다.
“자네 올해 졸업 학년이지?”
“그렇습니다.”
그러자 프랭크 교수의 눈빛이 더욱 진해졌다.
“혹시 내 밑에서 박사 과정을 밟을 생각이 있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