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lden Spoon Investment Portfolio RAW novel - Chapter (244)
금수저 투자백서 244화(244/283)
244. 적당히 때를 봐서 한번 자리를 만들어보도록 하게.
며칠 뒤, 서울 여의도 한성 빌딩.
민평당에서 갈라져서 나온 새시대 민족회의가 당사로 사용 중인 10층 총재실에 세 사내가 모여앉아 있었다.
전체적으로 수수하게 꾸며진 총재실 한쪽 벽에는 선거를 앞두고 불과 몇 달 전에 확정된 선거구가 그려진 큼지막한 전국 지도가 걸려 있었다.
두 손을 소파 팔걸이에 올려놓은 김재춘 총재가 앞에 마주 보며 앉아 있는 측근들을 바라봤다.
당내 살림을 책임진 우춘일 사무총장과 원내총무로 국회 안에서 교섭을 맡고 있는 최재영 의원은 김재춘 총재의 양팔로 불리는 심복 중에 심복들이었다.
금방 서너 시간에 걸친 총선 대책 회의를 마치고 돌아와서 그런지 세 사람 모두 약간 피곤한 모습이었다.
“전국구 공천이 확정된 46명의 명단입니다.”
김재춘 총재는 커피잔을 내려놓고는 최재영 원내총무가 내민 명단을 건네받아 살펴봤다.
그러다가 뭔가 마음에 안 드는 것이 있는지 살짝 눈썹을 찌푸리며 고개를 들었다.
“전국구 안정권이 몇 번까지라고 했었지?”
그러자 후덕한 체격의 최재영 원내총무가 슬쩍 김재춘 총재의 눈치를 보면서 대답했다.
“19번입니다.”
“목표로 하는 원내 1당이 됐을 경우 말고 현실적인 순위 말일세.”
김재춘 총재의 말에 최재영 원내총무는 힐끗 맞은편에 있는 우춘일 사무총장과 시선을 교환하고는 다시 이야기를 했다.
“변수가 발생해 득표율이 예상보다 저조하더라도 최소한 15번까지는 무난하게 당선될 수 있을 겁니다.”
지난 총선보다 숫자가 줄었지만 전국구 의석이 46석이나 됐기에 김재춘 총재 역시 그 정도는 충분히 가능할 거라고 생각했다.
김재춘 총재가 전국구 공천 명단을 원목으로 만들어진 탁자 위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런데 내 이름이 1번에 적혀 있군.”
차기 대권 도전을 노리고 있던 김재춘 총재는 출마를 하게 되면 바로 의원직을 사퇴해야 됐기에 지역구 대신 전국구로 총선에 나서기로 한 상태였다.
지역구로 당선되면 사퇴 이후 재보궐 선거를 다시 치러야됐지만 전국구는 바로 후순위 후보가 의원직을 승계했기에 의석수를 그대로 지킬 수 있어 새시대민족회의 입장에서도 유리한 선택이었다.
“총재님은 저희 당의 얼굴이시니 당연히 1번을 받으셔야되지 않겠습니까.”
우춘일 사무총장도 같은 생각이라는 듯이 말을 덧붙였다.
“맞습니다. 총재님이 아니면 누가 1번을 맡겠습니까. 그리고 이렇게 하면 민평당이 아니라 저희가 야권의 정통성을 이은 정당이라는 걸 알려 득표율을 끌어올리는 효과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김재춘 총재는 여전히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이었다.
“무슨 이야기인지는 알겠네. 하지만 반대로 내가 낙선할까 봐 겁을 내서 전국구 1번을 달았다고 비난하는 이들도 있지 않겠나.”
“누가 그런 헛소리를 한단 말씀이십니까.”
곧바로 최재영 원내총무가 눈썹을 치켜올리며 당치도 않다는 듯 말했다.
우춘일 사무총장 역시 비슷한 표정으로 말을 거들었다.
“고향이신 목포는 물론이고 어느 격전지에 출마하더라도 너끈히 당선되실 수 있으신데 말도 안 됩니다.”
김재춘 총재는 그런 두 사람을 보며 떨떠름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물론 그렇긴 하지만 악의적인 의도를 가지고 소문을 퍼트린다면 혼란스러운 선거 기간 중에 유권자들의 눈과 귀를 충분히 현혹시킬 수 있다는 걸 자네들도 잘 알고 있지 않나.”
“그건…….”
두 사람이 서로 눈치를 살피며 낯빛을 흐렸다.
수십 년간 살벌한 여의도 정치판에서 뒹굴며 온갖 일들을 다 겪었던 두 사람이었기에 상대를 이기기 위해 각양각색의 유언비어가 난무하는 것이 선거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내년에 있을 대선을 생각해서라도 괜히 책잡힐 일은 만들지 않는 것이 상책일 걸세.”
이번 총선은 당연히 이겨야 하는 것이었고 김재춘 총재는 이제 얼마 남지 않은 대선에 더 관심을 두고 있었다.
그걸 바로 알아차린 최재영 원내총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어떻게 하길 원하십니까.”
그러자 김재춘 총재가 고개를 돌려 우춘일 사무총장을 보며 물었다.
“펜 있나?”
“아. 예.”
우춘일 사무총장이 얼른 안주머니에서 만년필을 꺼내 내밀었다.
만년필을 손에 쥔 김재춘 총재는 명단 제일 위에 있는 자신의 이름에다 줄을 좍좍 그었다.
그러고는 잠시 고심하더니 14번 옆에 이름을 새로 적고는 상체를 바로 세웠다.
“이렇게 순번을 바꾸도록 하게.”
새로 바뀐 순번을 본 최재영 원내총무는 살짝 우려 섞인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14번은 너무 뒷번호이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적당히 10번 정도로 하시는 게 나을 듯한데…….”
우춘일 사무총장 역시 처진 눈썹을 모으며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
“조금 전에 자네들이 15번까지는 당선 안정권이라고 하지 않았나.”
천연덕스러운 물음에 최재영 원내총무의 말문이 턱 막혀 버렸다.
“하지만 총재님…….”
우춘일 사무총장이 재차 그를 말리려고 하자 김재춘 총재가 한쪽 손을 들어 말을 막았다.
“그래도 만약을 생각해 한 칸 위로 올려서 14번에 이름을 넣은 거네. 이 정도는 해야 당원들은 물론이고 유권자들도 헛된 유언비어에 속지 않고 국가와 민족을 위해 백의종군하려는 내 진심을 알아주지 않겠나.”
혹시라도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 불안한 마음이 완전히 가시진 않았으나 김재춘 총재의 뜻이 확고했기에 두 사람은 더 이상 만류하지 못했다.
“총재님께서 그렇게 결심하셨다면 어쩔 수 없지요.”
“스스로 자신을 희생하는 총재님의 모습에 많은 당원과 국민들이 감동을 받고 지지를 보낼 겁니다.”
김재춘 총재가 전국구 순번을 과감하게 뒤로 옮긴 건 기존의 특권을 내려놓고 진정성 있는 모습을 보여주려는 의도였다.
이는 분열된 야권 지지층을 하나로 묶는 것과 동시에 정계 은퇴를 번복하고 다시 복귀한 것에 대한 비판을 잠재우려는 정치적 계산이 깔린 노련한 행동이었다.
오랜 측근답게 우춘일 사무총장과 최재영 원내총무은 이런 의도를 금방 알아차렸다.
그리고 기대한 것보다 득표가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최소한 15번까지는 충분히 전국구 의석을 가져올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이 있었다.
그 때문에 김재춘 총재의 행동을 더 적극적으로 말리지 않은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자만심이 얼마 있지 않아 어떤 결과로 돌아올지 이때까지만 해도 세 사람은 전혀 알지 못했다.
이야기가 일단락된 듯하자 김재춘 총재가 커피잔을 손에 들며 물었다.
“선거 자금 모금은 잘 되고 있나?”
그러자 우춘일 사무총장이 면목없다는 듯 대답했다.
“그게. 기업들과 접촉을 계속하고 있지만 기대만큼 돈이 모이지 않고 있습니다.”
“뭐?”
막 커피잔을 입에 가져다 대려던 김재춘 총재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이유가 뭔가?”
“두 전직 대통령 비자금 사태가 현재 진행 중인 상태라 기업들이 선거 자금을 건네기 부담스러워하는 모습입니다.”
“그럼 공정당에도 돈을 안 주고 있는 건가?”
얼굴을 굳히고 묻자 우춘일 사무총장은 난감한 기색을 보일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김재춘 총재가 그걸 보곤 입술을 뒤틀었다.
“여당에는 주고 우리한테 줄 선거 자금은 없다니. 비자금 사건 때문에 눈치가 보인다는 건 핑계고 그냥 돈을 주기가 싫은 거로군.”
그가 화난 목소리로 말하자 최재영 원내총무 역시 불쾌한 기분을 숨기지 않았다.
“지난 지방선거에서 여당이 참패했는데도 기업 총수들은 여전히 공정당이 정권을 계속 이어나갈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조금이라도 이득을 얻고 권력의 눈 밖에 나지 않기 위해 기업들이 청와대와 여당에 줄을 서는 건 사실 어제오늘 일이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야당들은 선거 때마다 항상 돈이 부족해 힘들게 선거 운동을 해야만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김재춘 총재 본인이 가장 유력한 대선 후보로 꼽히는 데다가 지난 지방선거에서 여당이 참패하며 바람을 탔기에 가장 정치 동향에 민감한 대기업들이 앞다퉈서 선거 자금을 가져올 것을 은근히 기대했었다.
그런데 결과가 정반대로 나왔으니 실망과 함께 서운한 마음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때 우춘일 사무총장이 성난 김재춘 총재를 달래려는 것처럼 그나마 나은 소식을 전했다.
“그래도 현우와 대흥 그룹은 여당이 불편해할 걸 감내하면서도 저희한테 꽤 큰 액수의 선거 자금을 보내왔습니다.”
“흐음. 그래?”
김재춘 총재가 눈에 이채를 띠며 흥미를 드러냈다.
다들 자신을 외면하는 가운데 두 그룹이 불이익을 감수하면서도 도와줬다고 하니 더욱 특별하고 고맙게 다가온 것이었다.
우춘일 사무총장이 그걸 보고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예. 특히 대흥 그룹 같은 경우에는 둘째 아들인 박석원 대흥창투 사장이 따로 30억이라는 큰돈을 가져다줬습니다.”
그러자 김재춘 총재가 크게 관심을 보이며 물었다.
“대흥 그룹 둘째라면 지난번에도 창당 자금을 도와주지 않았었나?”
“맞습니다. 그때 박 사장이 건넨 돈이 없었다면 당을 꾸려나가는 데 상당한 어려움이 있었을 겁니다.”
김재춘 총재가 동의하듯 머리를 끄덕였다.
“그랬겠지. 내 기억이 맞다면 대흥 증권에 있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그사이에 자리를 옮긴 모양이군.”
“예. 얼마 전에 박 회장한테서 대흥 창투 지분을 완전히 물려받아 회사 경영에 본격적으로 나선 걸로 알고 있습니다.”
호감 가득한 얼굴로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김재춘 총재의 모습에 우춘일 사무총장이 요즘 도는 소문을 덧붙였다.
“일각에선 박 회장이 창투를 비롯해 대흥 그룹 안에 있는 금융 계열사를 떼서 둘째 아들한테 물려주려 한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둘째 아들이 금융 쪽에 실력이 뛰어나다고 하니. 형제끼리 싸우지 않도록 미리 그렇게 나누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김재춘 총재가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자 최재영 원내총무도 맞장구를 치며 동조했다.
“맞습니다. 지난번에도 50억이나 돈을 보태줬었는데 이번에 또 잊지 않고 그만한 선거 자금을 보내오다니 말씀대로 능력이 뛰어난 친구인 것 같습니다.”
“하긴 거기 큰아들도 욕심을 많이 내지 않고 회사를 내실 있게 잘 이끌어가고 있다고 하던데. 박 회장이 자식 농사는 정말 잘 지은 것 같구만.”
“하하. 그러게 말입니다.”
김재춘 총재는 한쪽 손으로 턱을 매만지며 잠시 생각하다 이내 고개를 들고 우춘일 사무총장을 쳐다봤다.
“총선이 끝난 뒤에 적당히 때를 봐서 박 회장 둘째 아들과 한번 자리를 만들어보도록 하게.”
그러자 우춘일 사무총장이 살짝 놀란 표정으로 되물었다.
“박 사장을 직접 만나보시려는 겁니까?”
“그래. 두 번이나 도움을 받았는데 얼굴이라도 보는 것이 도리 아니겠나. 그리고 개인적으로도 그 친구한테 흥미가 있고 말이야.”
이런 경우는 한 번도 없었기에 최재영 원내총무 역시 의외라는 눈빛으로 김재춘 총재를 쳐다봤다.
“뭐. 그 친구가 날 만나기 부담스러워한다면 어쩔 수 없고.”
정권이 바뀐 뒤라면 모르겠지만 야권 유력 대선 주자와 독대한 것이 알려진다면 청와대와 여당에 안 좋게 찍힐게 불을 보듯 뻔했다.
그러니 기업가 입장에서는 김재춘 총재와의 만남이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박 사장도 분명 크게 기뻐할 겁니다.”
우춘일 사무총장의 말에 김재춘 총재는 입가에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다면 한번 말을 해보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이렇게 야권의 거물이자 유력한 대권 주자인 김재춘 총재의 머릿속에 석원의 이름 세 글자가 깊숙이 새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