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lden Spoon Investment Portfolio RAW novel - Chapter (248)
금수저 투자백서 248화(248/283)
248. 지분을 팔아달라고 먼저 이야기한 건 그쪽입니다.
1996년 3월 28일.
홍콩에서도 가장 활기차고 번화한 상업지역인 침사추이 한가운데 아름다운 빅토리아 항구를 바라보며 오랜 세월 자리를 지키고 있는 페닌슐라 호텔 앞에 택시가 한 대 멈춰 섰다.
이내 뒷좌석 차 문을 열고 중키에 서글서글한 인상의 백인 사내가 내렸다.
바로 메릴린치(Merrill Lynch) 출신으로 엘도라도 펀드에 영입돼 홍콩에서 여러 페이퍼 컴퍼니를 운용하고 있는 에릭 버나스였다.
제복을 차려입은 도어맨이 열어주는 유리문을 지나 호텔 안으로 들어선 에릭은 궁전처럼 넓고 호화롭게 꾸며진 로비를 익숙하게 가로질러 한쪽에 있는 카페로 향했다.
“어서 오십시오.”
입구에 서 있던 여종업원이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데이비드 첸이라는 이름으로 예약이 되어 있을 텐데.”
“잠시만요.”
여직원이 명부를 확인해보더니 그에게 다시 물었다.
“에릭 버나스 씨 되십니까?”
“그렇소.”
“일행분은 먼저 오셔서 기다리고 계세요. 안내해 드릴 테니 절 따라오십시오.”
에릭은 친절하게 응대하는 여직원을 따라 카페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3층 높이로 시원하게 천장이 뚫린 로비 한쪽에 줄지어 서 있는 기둥을 따라 길게 만들어진 카페는 평일 오후인데도 테이블이 거의 다 채워져 있는 모습이었다.
이윽고 여직원이 한 동양인 사내가 앉아 있는 테이블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상대는 30대 후반쯤으로 보였는데 이마가 살짝 벗겨져 있고 나잇살이 붙어 후덕한 인상을 풍겼다.
“에릭 버나스 씨?”
테이블에 있던 사내가 일어서며 묻자 에릭이 바로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하하하. 반갑습니다. 제가 연락드린 데이비드 첸입니다.”
홍콩 특유의 악센트가 있는 영어를 하며 상대가 먼저 손을 내밀자 에릭이 맞잡고 악수를 나눴다.
건네받은 첸의 명함에는 홍콩 페레그린 증권사 부장이라는 직함이 인쇄되어 있었다.
두 사람이 의자에 앉자 여종업원이 메뉴판을 내밀며 물었다.
“주문은 뭘로 하시겠습니까?”
그러자 첸이 손수건으로 이마를 닦으며 살갑게 말을 붙였다.
“여기 얼그레이 티 맛이 꽤 괜찮습니다. 찻잎도 제대로 된 걸 쓰고, 향도 아주 좋아요.”
“그럼 저도 그걸로 하죠.”
첸이 테이블 옆에서 대기하고 있는 여종업원을 돌아보고 손가락을 두 개 세웠다.
“애프터 눈 티 세트 부탁해요. 홍차는 얼그레이로 두 잔.”
“알겠습니다.”
여종업원이 가볍게 인사하곤 테이블을 떠나자 첸은 다시금 눈을 접어 웃으며 에릭을 쳐다봤다.
“갑자기 연락을 드렸는데 이렇게 나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이야기를 들으니 예전에 메릴린치에서 일하셨다고요?”
홍콩에서만 5년 넘게 살아서 전화 몇 통만 걸어보면 금방 알 수 있는 정보였기에 에릭은 순순히 머리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재작년까지 메릴린치 홍콩지사에서 시니어 트레이더로 근무했었습니다.”
“듣자 하니 메릴린치 홍콩지사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실력있는 트레이더셨다던데.”
“칭찬 감사합니다.”
웃고 있지만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를 관찰하는 시선이 느껴졌다.
겉으로 보이는 것만큼 마냥 물렁한 사람은 아니라는 뜻이었다.
에릭이 일부러 모르는 척하며 겸손하게 대답하자 첸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이런 대단한 인재가 있는 줄 알았으면 진즉에 저희 회사로 스카웃 제의를 했을 걸 아쉬운 마음이 드는군요.”
“별말씀을요.”
그때 여종업원이 테이블로 다가와 주문한 메뉴와 함께 식기를 세팅해 올렸다.
5성급 호텔답게 금도금이 된 식기들은 전부 명품 브랜드인 티파니앤코 제품들이었는데 은으로 된 다기 세트들 역시 우아한 디자인을 뽐냈다.
그리고 스콘과 샌드위치, 케이크 같은 디저트들이 층층이 쌓인 3단 트레이에선 달콤하면서도 고소한 향내가 가득 풍겼다.
“맛있게 드십시오.”
여직원이 테이블 옆을 떠나자 첸이 능숙하게 은주전자를 들어 거름망을 대고 찻잔에 홍차를 따라줬다.
“제가 추천한 것이니 한번 드셔보시죠.”
살짝 고개를 끄덕인 에릭이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상쾌하면서도 약간의 맥아와 과일향이 풍부하게 느껴지는 것이 역시 상등품의 제품을 쓴 걸 알 수 있었다.
“어떻습니까?”
“아주 좋네요. 전문 티하우스 못지않은데요.”
홍콩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차라고 하면 커피 정도밖에 모르던 에릭이었지만 이제는 홍차 맛을 음미할 수 있을 정도로 즐기게 되었다.
3단 트레이에서 스콘을 하나 가져와 앞접시에 내려놓은 첸이 여전히 웃는 얼굴로 슬쩍 물음을 던졌다.
“그런데 지금 계신 주피터 펀드는 좀 생소한 이름이군요. 버나스 씨가 직접 모으신 사모펀드인 건가요, 아니면 다른 투자 회사나 펀드의 자회사입니까?”
“죄송하지만 그건 알려드릴 수가 없습니다.”
에릭이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딱 잘라 말했다.
눈을 가늘게 뜨고 그 모습을 쳐다보던 첸은 이내 웃으면서 그에게 사과했다.
“하하. 이거 제가 호기심에 첫 만남부터 너무 깊은 부분까지 물은 것 같군요. 불편하셨다면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허허 웃고 있지만 역시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분위기를 경직시키지 않고 매끄럽게 빠져나가는 솜씨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에릭은 속으로 긴장의 끈을 늦추지 않으며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담담하게 물었다.
“절 만나자고 하신 용건이 뭔지 궁금하군요.”
그러자 첸이 손에 든 나이프와 포크를 내려놓고는 냅킨으로 입가를 살짝 닦은 뒤 대답했다.
“한국에 있는 미도파 백화점 지분을 주피터 펀드가 5% 보유한 걸로 아는데 맞습니까?”
첸의 물음에 에릭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그러자 첸이 몸을 앞으로 살짝 당겨 앉으며 말했다.
“그 지분을 저희가 전부 샀으면 하는데 파실 의향이 있습니까?”
역시나 이럴 걸 예상했던 에릭은 눈에 이채를 띠었다.
하지만 겉으론 티를 내지 않고 태연한 표정으로 재차 되물었다.
“미도파 백화점 지분을 팔라고 하셨습니까?”
“맞습니다.”
“페레그린 증권에서 미도파 백화점 주식을 왜 사려고 하는 건지 궁금하군요.”
그러자 첸이 어깨를 으쓱이며 별것 아니라는 듯 대꾸했다.
“큰손 고객 중에 한국 유통회사 지분을 매수하길 원하시는 원하는 분이 있어서 거래를 대행하는 것뿐입니다.”
에릭은 한쪽 팔을 테이블 위에 올린 채 그를 응시했다.
“그렇다면 한국 주식 시장에서 주식을 매수해도 될 텐데요?”
“그러려고 했는데 이미 외국인 주식투자 한도가 거의 다 찼더군요.”
씨알도 먹히지 않을 변명을 둘러대는 모습이 능청스럽기 짝이 없었다.
“그래서 저희가 가지고 있는 지분을 팔라고 하시는 거군요.”
“맞습니다.”
한국 주식 시장에서 종목당 외국인이 투자할 수 있는 한계치가 있었기에 그게 다 차면 돈이 있더라도 주식을 단 한주도 더 매수할 수 없었다.
언뜻 듣기에 그럴듯해 보였지만 에릭은 의아한 표정으로 머리를 갸웃거렸다.
“제가 알고 있기로 며칠 뒤면 한국 주식 시장에서 외국인 주식투자 한도가 15%에서 18%로 상향 조정되는 걸로 아는데. 그때 장내매수를 하면 되지 않습니까.”
물론 에릭도 상대가 왜 미도파 백화점 지분을 사려는지 다 알고 있었지만 짐짓 모른 척 시치미를 뗐다.
정곡을 찔렸는지 첸이 순간 눈가를 찡그렸다가 금방 바로 눈웃음을 지었다.
“한도가 늘어났다고 하지만 겨우 3%밖에 안 되지 않습니까. 그러니 괜히 번거롭게 움직이는 것보다 주피터 펀드가 가지고 있는 지분을 블록딜로 한 번에 가져오려는 겁니다.”
“매수 의뢰를 했다는 큰손 투자자가 미도파 백화점 지분을 상당히 많이 사 모으려고 하는 모양이죠?”
에릭이 사뭇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묻자 첸은 대답 없이 어색하게 미소만 지었다.
아마 속으론 꼬치꼬치 캐묻는 것에 꽤 짜증이 나 있을 게 분명했다.
“솔직히 주식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배당을 특별히 많이 하는 것도 아니고 경쟁도 치열해서 크게 매력이 있는 회사가 아닌데. 왜 지분을 대량 매수하려고 하는지 궁금하군요.”
에릭은 살짝 목소리를 낮춰 은근슬쩍 그를 찔러 봤다.
“혹시 M&A라도 하려는 겁니까?”
“하하하. 농담도 잘하십니다. 진짜로 그런 마음이 있다고 해도 18%로 외국인 지분 한도가 정해져 있는데 어떻게 M&A를 할 수 있겠습니까.”
첸이 말도 안 된다는 듯 부정했다.
하지만 에릭은 태연한 척 구는 상대의 얼굴에 순간적으로 당혹감이 서렸다가 사라진 걸 놓치지 않았다.
‘역시 제대로 짚었군.’
갑자기 특정 종목의 주식을 대량으로 매집한다면 그 이유는 시장에서 모르는 엄청난 호재를 알고 있거나 M&A뿐이었다.
‘새로 짓고 있는 강남점 때문에 앞으로 몇 년 동안은 배당 인상 같은 호재를 기대할 수가 없는 상황이니까. 남은 건 적대적 입수합병밖에 안 남지.’
첸 역시 아닌 척하고 있었지만 에릭이 뭔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다는 걸 알아차렸다.
당연한 것이 정글 같은 홍콩 금융가에서 이만한 거래를 하는데 어쭙잖게 상대가 둘러대는 이야기를 곧이곧대로 믿을 만큼 순진한 사람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가 이렇게 블록딜을 제안했다는 건 적대적 인수합병 시도가 드러나도 상관없을 만큼 지분을 모았거나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주식 매집에 나설 거라는 뜻이었다.
어느새 얼굴에서 웃음기를 지운 첸은 똑바로 그를 쳐다보면서 물었다.
“저희하고 거래를 하시겠습니까?”
반대로 에릭은 여유롭게 팔짱을 끼며 대꾸했다.
“글쎄요. 갑작스러운 제안인 데다 제가 혼자 결정을 내릴 수 없는 문제라 이 자리에서 바로 답변을 드리기가 곤란하군요.”
“아. 물론 그러시겠죠. 다만 딱 한 가지, 지분을 파실 의향이 있으신지만 알고 싶습니다.”
“그거야 어떤 조건이냐에 따라서 달라지겠지요.”
“현재 가격에서 30% 프리미엄을 더 붙여드리죠.”
에릭은 썩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턱을 쓰다듬었다.
“주가가 많이 떨어져서 저희 평단가보다 훨씬 아래에 있는데. 30% 프리미엄이라면 솔직히 그다지 매력적인 제안은 아니군요.”
“그럼 어느 정도나 받길 원하십니까.”
잠시 고심하는 척한 에릭이 다시 고개를 들어 말했다.
“적어도 60%는 프리미엄을 더 얹어주셔야 매각을 고려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더군요.”
단번에 두 배를 더 올려 부르면서도 그 가격에 파는 것이 아니라 생각을 해볼 수가 있다는 거였다.
대놓고 배짱을 부리는 모습에 첸은 눈썹을 찌푸리며 내심 혀를 찼다.
지분을 끌어모으는 걸 알고 바가지를 씌우려는 게 분명했다.
짜증이 났지만 외국인 지분 보유 한도가 정해져 있는 이상 에릭이 쥐고 있는 미도파 백화점 지분은 꼭 필요했기에 첸은 애써 언짢은 기색을 내비치지 않았다.
“조금 전에 말씀하셨다시피 미도파 백화점 주가가 많이 떨어져 있는데. 그건 너무 비싸지 않습니까?”
“지분을 팔아달라고 먼저 이야기한 건 그쪽입니다. 비싸다고 생각되면 안 사면 그뿐이지 않겠습니까.”
느긋하게 대꾸하는 에릭의 모습이 무척 얄밉게 느껴졌다.
하지만 상대가 칼자루를 쥐고 있는 건 맞았기에 첸은 내심 앓는 소리를 내뱉었다.
‘젠장, 일이 꼬이는군.’
상대가 이런 식으로 나올 걸 처음부터 어느 정도는 예상했기에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첸이 말했다.
“알겠습니다. 버나스 씨도 논의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하셨으니 내일 다시 만나서 이야기를 나눠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렇게 하죠.”
얼마 뒤 첸과 헤어져 호텔 밖으로 나온 에릭은 정문 앞에 줄지어 서 있는 택시 가운데 한 대에 올라탔다.
뒷좌석 차 문을 닫자 40대쯤 되어 보이는 택시 기사가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어디로 모실까요?”
“센트럴로 가줘요.”
“알겠습니다.”
대답과 함께 택시가 출발하자 에릭은 힐끗 고개를 돌려 점점 멀어지는 호텔 정문을 한번 쳐다보곤 안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손가락으로 번호를 입력하고 통화버튼을 누르자 짧은 연결음 뒤에 곧 상대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랜든. 저 에릭입니다.”
뉴욕은 한밤중이었지만 오늘 홍콩 페레그린 증권 관계자를 만난다는 걸 알고 기다리던 랜든이었다.
[어떻게 됐나?]“예상대로 미도파 백화점 지분을 팔라고 접근한 거였습니다.”
[역시 그랬군. 알았네. 자넨 그쪽에서 페레그린 증권사 움직임을 최대한 파악해서 보고하게.]“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