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lden Spoon Investment Portfolio RAW novel - Chapter (250)
금수저 투자백서 250화(250/283)
250. 알잖아. 내가 돈을 좀 많이 벌어놨거든.
마포 대흥 그룹 본사.
늦은 오후, 인조 대리석이 깔린 넓은 로비에는 마흔 명은 훌쩍 넘어 보이는 기자들로 때아닌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대흥 그룹에서 긴급하게 기자회견을 한다는 연락을 받고 다들 급히 모여든 거였다.
홍보실 직원들이 바쁘게 움직이며 1층 강당으로 안내하는 가운데 도착한 기자들은 서로 안면이 있는 사람들끼리 인사를 하거나 삼삼오오 모여 잡담을 나눴다.
넥타이 매듭을 느슨하게 맨 기자 한 명이 수첩을 손에 쥐고 어슬렁거리다가 낯익은 얼굴을 발견하고 아는 척을 했다.
“고 선배도 왔네요?”
그러자 한성일보 기자인 고대홍이 고개를 들어 상대를 보곤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나뿐만 아니라 웬만한 언론사는 죄다 불러 모은 거 안 보여.”
“그러게요. 갑자기 무슨 일이래.”
“난들 알아. 그리고 설마 안다고 해도 혼자 특종을 내지 너한테 말해 주겠냐.”
세계 경제신문 기자인 주치도는 느물거리는 웃음을 지으며 고대홍에게 들러붙었다.
“에이 그러지 말고 아는 거 있으면 서로 공유하고 그럽시다. 동업자끼리 같이 먹고 살아야죠.”
“동업자는 개뿔. 특종거리가 있으면 혼자 날름 챙겨먹을 놈인데.”
“아이 참. 지난번 세창 바이오 건을 가지고 아직도 꽁해 있는 거예요?”
“너 같으면 잊겠냐! 그거 때문에 데스크에서 얼마나 잔소리를 들었다고!”
“알았어요. 내가 오늘 끝나고 소주 한잔 살 테니까 그걸로 퉁 칩시다.”
흥 하고 코웃음을 친 고대홍이 손가락을 치켜세웠다.
“두 번 사. 그럼 용서해줄게.”
“예에. 근데 정말 뭐 들은 거 없어요?”
주변에 쫙 깔린 게 기자들뿐이라 저절로 속닥거리는 목소리가 작아졌다.
“없어. 다른 녀석들도 아는 게 전혀 없는 모양이더라.”
이미 다 찔러봤다며 고대홍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럼 뭐지…… 경제부 기자들을 몽땅 다 불러모은 걸 보면 분명 보통 일은 아닌데.”
“조금 있으면 알게 되겠지.”
그때 홍보실 직원 한 명이 기자들을 향해 크게 소리쳤다.
“5분 뒤에 기자회견을 시작할 테니 다들 안으로 들어가 주십시오!”
“어어. 시작하려나 보다.”
“얼른 가봐요.”
그러자 고대홍과 주치도를 비롯한 기자들이 웅성대며 강당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기자들이 대충 자리를 잡았을 때쯤, 강당 옆문이 열리며 굳은 얼굴을 한 박진형 대흥 방직 사장이 오인환 비서실장과 함께 걸어들어왔다.
홍보실 직원한테 잠시 귓속말로 뭔가를 전해 듣더니 측근인 오인환 비서실장을 세워두고 혼자 연단 앞에 섰다.
박진형 사장이 정면을 쳐다보자 마흔 명은 훌쩍 넘을 것 같은 각 언론사 기자들이 한가득 모여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앞줄에 삼각대를 세운 카메라 수십 대가 박진형 사장을 향해 렌즈를 고정하고는 요란한 셔터 소리와 함께 환한 플래시를 터트리기 시작했다.
“아. 아.”
이내 셔터 소리가 잦아들자 왼편 사회석에 서 있던 홍보실 과장이 마이크를 손끝으로 가볍게 두드려보곤 입을 가져다 대고 말했다.
“바쁘신 중에도 이렇게 참석해주신 여러 기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그럼 지금부터 대흥 그룹을 대표해서 박진형 방직 사장님의 긴급 기자회견이 있겠습니다.”
박진형 사장은 앞에 모여 있는 기자들을 잠시 쳐다보곤 숨을 크게 한번 들이마셨다가 천천히 내뱉으며 묵직하게 입을 뗐다.
“오늘 이렇게 기자분을 급히 모신 것은 저희 그룹과 관련해 국민 여러분들에게 알려드릴 사실이 하나 있기 때문입니다.”
어느 순간 강당 내부가 조용해진 가운데 기자들은 각자 수첩을 꺼내 적거나 녹음기를 켜서 발언 내용을 바쁘게 기록했다.
“최근 누군가 저희 주력 계열사인 미도파 백화점 주식을 몰래 대량 매집하고 있는 걸 파악하고 조사해본 결과. 저희 그룹을 노린 적대적 인수합병이 진행 중인 걸 알게 됐습니다.”
“!”
순간 좌중은 폭탄이 떨어진 것처럼 큰 충격에 휩싸였다.
갑작스러운 기자회견에 뭔가 있을 거라 어렴풋이 짐작하긴 했지만 그게 적대적 인수합병일 거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국내에서는 경영권을 노린 적대적 인수합병을 서로 안 하는 것이 재벌들 간에 일종의 묵계처럼 되어 있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적대적 인수합병이라니?!”
“미도파 백화점을? 도대체 누가 공격을 해온 거지?”
“설마 로테가?”
“최근 사세를 크게 늘리고 있는 유토피아일 수도 있지.”
친분이 있는 대흥 그룹 홍보실 직원의 연락을 받고 왔거나 데스크의 지시에 큰 기대를 걸지 않고 모여 앉아 있던 기자들은 적대적 인수합병이라는 말 한마디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빨리 끝내고 돌아갈 때 챙겨주는 차비로 소주나 한잔 마시러 갈까하는 생각들은 이미 머릿속에서 싹 사라져 버렸다.
본능적으로 특종감이라는 생각에 늘어져 있던 기자들의 눈빛이 달라진 것은 물론이고 잠시 소강상태였던 카메라 플래시들도 사방에서 번쩍거리며 요란한 셔터 소리를 뱉어냈다.
얼마나 사진을 찍어대는지 눈이 부실 정도였지만 박진형 사장은 눈썹 하나 까딱이지 않고 꼿꼿이 선 채 말을 이었다.
“외국인 투자자를 가장해 주식을 대량 매집하는 꼼수를 썼지만. 가증스럽게도 뒤에서 이런 계략을 쓰고 있는 주체가 바로 동해그룹이라는 걸 알아낼 수 있었습니다.”
적대적 인수합병을 벌인 상대가 백화점 전쟁을 벌이고 있는 로테나 유토피아가 아니라 동해그룹이라는 말에 기자들은 다시 한번 크게 술렁거렸다.
“동해그룹이라고?”
“이거 완전 예상 밖인데.”
“동해와 대흥 그룹의 싸움이라. 내일 1면 타이틀이 나왔네.”
기자들이 눈을 반짝이며 손에 쥔 볼펜을 움직이고 있는 가운데 연단에 선 박진형 사장은 결연한 표정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외국 세력을 끌어들여서 국내 기업의 경영권을 강탈해 가려는 동해그룹의 비열한 행동을 강력하게 규탄하며 지금 즉시 미도파 백화점에 대한 공격을 그만둘 것을 동해그룹에 공식적으로 요구합니다! 만약 그러지 않고 계속 공격을 해온다면 저희 역시 그룹의 모든 역량을 동원해서 상대와 끝까지 맞서 싸워. 회사를 지킬 것을 이 자리에서 밝힙니다!”
경영권 사수 의지를 강하게 드러낸 박진형 사장이 말을 끝내자 기자들이 벌떼처럼 일어나 질문을 쏟아냈다.
“언제부터 동해그룹이 적대적 인수합병을 시도한 겁니까?”
“동해그룹과 손을 잡았다는 외국 세력이 어딘지 말씀해 주십시오!”
“구체적으로 어떻게 대응할 생각인지 말씀해 주십시오!”
“상대가 동해그룹이 확실한 겁니까?”
무수히 쏟아지는 기자들의 질문에 박진형 사장은 대답하지 않고 살짝 머리를 숙였다가 바로 하고는 그대로 연단 옆으로 걸어 내려갔다.
“잠시만요!”
“박진형 사장님!”
특종을 놓치기 싫은 기자들이 우르르 앞으로 달려들자 대기하고 있던 홍보실 직원과 경비원들이 얼른 뛰어나와 막아섰다.
그야말로 벌집을 쑤신 것처럼 난장판이 되어 버린 강당의 모습에 사회를 보던 홍보실 과장이 연신 식은땀을 흘리며 마이크를 붙잡고 외쳤다.
“여러분! 자세한 내용은 보도 자료를 나눠드릴 테니 그걸 참고해주시고 질서를 지켜주십시오!”
그와 동시에 홍보실 직원 두 명이 프린트한 보도 자료를 양손으로 한 아름 들고 나왔다.
그걸 본 기자들은 이미 옆문을 통해 강당을 빠져나간 박진형 사장 대신 새로운 먹잇감을 발견한 것처럼 그리로 몰려들었다.
“자. 모두 다 나눠 드릴 테니까. 질서 있게 받아가십시오!”
수량이 충분하다고 사회자가 연신 이야기를 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특종에 눈이 돌아간 기자들이 메뚜기 떼처럼 몰려들었고 그 와중에 여기저기서 가벼운 몸싸움까지 벌어졌다.
“비켜! 내가 먼저 왔잖아!”
“이거 왜 이래!”
“아. 밀지 좀 마!”
그렇게 난장판이 펼쳐진 가운데 박진형 사장은 오인환 비서실장과 함께 밖으로 나왔다가 복도에서 기다리고 있던 석원하고 마주쳤다.
“고생했어.”
“기자들이란…… 휴우.”
박진형 사장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안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오인환 실장이 얼른 라이터를 켜서 불을 붙여줬다.
하얀 담배 연기를 길게 한 모금 빨아들였다가 천천히 내뱉으며 박진형 사장이 말했다.
“폭탄을 집어 던졌으니 내일 주식 시장이 열리면 난리가 나겠구나.”
석원은 양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은 채 태연히 대꾸했다.
“그게 우리가 원하는 거잖아.”
“그래…… 이제부터 말 그대로 전쟁이 벌어질 텐데 잘 해낼 자신이 있어?”
급히 본사 임원들을 소집해 대책 회의를 가진 박태홍 회장은 적대적 인수합병을 막기 위해 비상 경영 체제를 선포했다.
그리고 둘째 아들인 석원에게 전권을 위임하고 앞으로 벌어질 동해그룹과의 지분 확보 경쟁을 진두지휘하도록 했다.
그런 결정에 반발하는 의견이 없는 건 아니었다.
금융 감각이 뛰어난 건 알지만 그룹의 명운을 건 큰일을 맡기에는 석원의 나이가 너무 젊지 않냐는 우려였다.
하지만 석원이 동해그룹의 음흉한 계획을 밝혀낼 때까지 다들 뭘 하고 있었냐고 박태홍 회장이 회의 테이블을 손바닥으로 두드리며 고함을 쳐대자 다들 입을 다물었다.
게다가 장남인 자신을 제쳐두고 동생한테 중요한 임무를 맡긴 것에 서운한 마음을 가질 수도 있는 박진형 사장까지 석원을 적극 지지하고 나서자 아무도 뭐라 말을 하지 못했다.
“글쎄, 자신이 없어.”
“뭐?”
석원이 한쪽 입꼬리를 위로 올리며 멈칫하는 박진형 사장을 쳐다봤다.
“아무리 생각해도 질 자신이 없다고.”
“임마. 놀랬잖아.”
“하하.”
석원은 안도한 표정을 짓는 형에게 자신만만한 태도를 보였다.
“농담이 아니고 정말이야. 곧 동해그룹 놈들이 상대를 잘못 골랐다는 걸 알게 될 테니까. 나만 믿고 지켜봐.”
“그래. 제발 그렇게 됐으면 좋겠다.”
피식 웃은 박진형 사장은 담배를 손가락 사이에 끼운 채 진지하게 말했다.
“동원 가능한 현금을 최대한 빨리 마련해서 넘겨주도록 하마.”
“당장 쓸 수 있는 현금이 백억 남짓 정도라고 그랬지?”
그러자 박진형 사장이 무겁게 머리를 끄덕였다.
“그래. 너도 알다시피 강남점 신축에 자금을 다 밀어 넣는 바람에 현금이 그리 많지 않은 상황이야.”
“그렇겠지.”
“유휴 부동산을 담보로 은행 대출을 받고 추가로 전환사채(CB)를 발행할 생각도 하고 있으니까. 염려하지 말고 넌 지분 확보에만 신경 써.”
삼풍 백화점 부지 매입과 강남점 신축으로 인해 현금 유동성이 말라붙은 대흥 그룹 입장에서 당장 지분 매입 자금을 마련할 방법은 결국 빚을 내는 것밖에 없었다.
IMF를 앞두고 이렇게 빚을 크게 늘리는 건 당장은 버틸 수 있을지 몰라도 결과적으론 스스로 불길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석원은 혼자 각오를 다지고 있는 박진형 사장의 앞에서 뜻 모를 미소를 지었다.
“나머지 부족한 액수는 내가 알아서 메꿔 넣을 테니까. 은행 대출과 전환사채 발행은 실행하지 말고 만약을 대비해서 준비만 해둬.”
“못해도 수백억은 있어야 될 텐데 네가 그걸 다 대겠다고?”
“알잖아. 내가 돈을 좀 많이 벌어놨거든.”
“뭐?”
박진형 사장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얼마 전 동생이 아버지한테 전용기를 선물한 일을 떠올렸다.
‘운 좋게 거액의 미국 복권에 당첨된 이후에 투자를 해서 재산을 크게 불렸다고 했지.’
그래도 석원의 입장에선 거의 전 재산일 텐데 거리낌 없이 그룹을 위해 내놓겠다니 큰 결심이었다.
물론 이 모든 건 석원의 정확한 재산 규모를 모르는 박진형 사장의 착각이었다.
“형으로서 염치가 없지만 이번 일을 잘 부탁한다.”
“염려 마. 형제인데 이럴 때 도와야지. 그리고 대흥 그룹을 공격하는 건 우리 집안을 건드린 거나 마찬가지인데 내가 가만히 있을 순 없지 않겠어.”
“그렇지. 맞는 말이야.”
석원은 서늘하게 눈을 번득이며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확실하게 본때를 보여줄 테니까 지켜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