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lden Spoon Investment Portfolio RAW novel - Chapter (258)
금수저 투자백서 258화(258/283)
258. 지금 한세 그룹이 부도가 나기라도 한다는 건가?
별채에 마련된 응접실은 천성득 회장의 성품을 알려주듯 그리 화려하진 않았으나 기품 있게 꾸며져 있었다.
호두나무로 만든 응접세트를 가운데 두고 한쪽 벽에 수수한 산수화 한 점이 걸려 있고 맞은편 선반 위에는 커다란 백자가 놓여 있었다.
소파에 혼자 앉아 언뜻 보기에도 상당히 오래되어 보이는 산수화를 무심코 바라보던 석원은 왼편 구석에 난곡(蘭谷)이라고 적힌 글씨와 함께 원백(元伯)이란 낙관이 찍혀 있는 것을 발견했다.
“어쩐지 그림이 예사롭지 않더라니 겸재(謙齋) 정선의 산수화였네.”
진경산수화의 창시자이자 대가인 정선은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화가로 국내뿐만 아니라 바다 건너 중국에서도 인정받으며 청나라 고관대작들이 그림을 한 점이라도 소장하고 싶어 했다는 뛰어난 예술가였다.
선반 위에 있는 도자기 역시 온화한 백색에 유려한 곡선을 그리며 크고 둥근 모양을 한 백자 달항아리였다.
흠집 하나 없이 깨끗하고 아름다운 형태만 봐도 최소한 보물급 문화재일 것이 분명했다.
“못해도 수십억은 나갈 미술품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전시해놓다니. 역시 명동 사채시장 큰 손 답네.”
석원이 약간 감탄하듯 중얼거렸다.
그때 바깥에서 인기척이 나는가 싶더니 문이 열리며 한복을 입은 백발 노인이 앞서 만났던 오태민 집사와 함께 들어왔다.
한눈에 백발 노인이 바로 천성득인 걸 눈치챈 석원은 앉아 있던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앞으로 다가와서 선 천성득이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빤히 쳐다보며 아래위로 훑었다.
마치 사람을 물건처럼 대하듯 값어치가 얼마나 될지 감정하는 시선이었다.
기분이 나쁠 수도 있는 행동이었지만 석원은 별다른 내색을 하지 않고 그저 무덤덤하게 고개를 숙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박석원이라고 합니다.”
아버지인 박태홍 회장을 언급하지 않고 자기 이름만 밝히는 석원의 모습에 천성득은 순간 눈에 이채를 떠올렸다가 금방 지워 버렸다.
‘제법 강단이 있는 것 같은데 그게 만용인지 진짜 자신감인지는 두고 보면 알겠지.’
그렇게 생각한 천성득은 건조한 목소리로 말하며 한쪽 손을 내밀었다.
“천성득일세.”
보통은 그를 처음 만나면 다들 어려워하기 마련이었다.
대부분 돈을 빌리기 위해 찾아오는 사람들이니 저자세를 취할 수밖에 없고, 정재계를 막론하고 넓고 깊은 인맥을 가지고 있어 가급적이면 그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석원은 그런 기색 없이 당당하면서도 예의를 갖춘 태도로 천성득의 손을 맞잡았다.
“갑자기 연락을 드렸는데 이렇게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 석원의 태도가 불쾌하진 않은 듯 천성득은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자리를 권했다.
“일단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세.”
그러고는 자연스럽게 가운데 상석을 차지하자 석원도 앉아 있던 자리에 다시 허리를 내렸다.
오태민 집사가 조용히 문을 닫고 나가는 사이 천성득은 탁자 위에 놓인 찻주전자를 들어 새 찻잔에 쌍화차를 따랐다.
진한 계피향이 풍기는 가운데 석원을 지그시 응시하던 그가 불쑥 입을 열었다.
“얼굴 생김을 보니까 외탁을 많이 한 모양이구만. 눈썹하고 코가 딱 조 장관이야.”
천성득이 티스푼으로 쌍화차를 살짝 저으며 말했다.
“관직에서 나오고 나서 여당에서 몇 번이나 출마제안을 한 걸 다 거절하고 유유자적 세월을 보내고 있단 이야기는 들었는데. 잘 지내고 있나 모르겠군.”
“염려해주신 덕분에 건강히 은퇴 생활을 보내고 계십니다.”
“아직 한창때인데 뒷방 늙은이처럼 지내다니. 그 어렵다는 고시 3개를 모두 패스한 좋은 머리가 아깝구만.”
천성득이 가볍게 혀를 찼다.
석원의 외할아버지인 조승재 전 내무부장관은 하나 붙기도 어렵다는 사법고시와 외무고시 그리고 행정고시를 모두 합격한 수재 중의 수재였다.
그래서 그가 하버드 대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을 때 어머니인 조덕례 여사가 머리는 확실히 자기 집안을 빼닮았다며 자랑을 해대서 박태홍 회장이 한동안 삐져 있던 걸 떠올린 석원이 내심 피식 웃었다.
“온갖 이전투구가 판치는 정치판에 들어가 더러운 꼴을 보는 것보단 차라리 진흙탕에서 멀리 떨어져 세월이나 낚으며 지내는 것이 차라리 더 나을 수도 있겠군.”
뒤로 몸을 기댄 천성득이 두 손으로 깍지를 끼고 석원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요즘 미도파 백화점 일로 정신없이 바쁠 텐데. 이 늙은이를 보자고 한 용건이 뭔가?”
그러자 석원이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뗐다.
“연락을 드렸을 때 이미 짐작하셨겠지만 가지고 계신 미도파 백화점 지분에 관해 드릴 이야기가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며칠 전에 동해 그룹 우 회장도 와서 미도파 주식을 팔라고 했었다네. 어디 어떤 이야기인지 한번 해보게나.”
천성득은 동해 그룹 쪽에서도 제안이 있었다는 걸 은근히 흘렸다.
젊은 놈이 나이답지 않게 침착하니 애가 닳아서 발을 동동 구르는 모습을 보고 싶다는 약간의 심술도 곁들인 말이었다.
하지만 천성득의 기대와 달리 석원은 전혀 조바심을 내지 않고 평정을 유지했다.
천성득 같은 대주주의 지분을 한 번에 넘겨받는 것이 장내에서 수백, 수천 주씩 힘들게 매집하는 것보다 훨씬 효율적이었기에 동해 그룹이 접근했을 거라 이미 짐작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동해 그룹에서 어떤 제안을 해왔습니까?”
“내가 그걸 자네한테 알려줘야될 의무는 없지 않나.”
천성득은 느긋하게 쌍화차를 홀짝였다.
“제가 너무 성급했던 것 같군요. 언짢으셨다면 사과드립니다.”
더 묻지 않게 바로 깔끔하게 물러서는 모습에 천성득이 의외라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주당 8만 원에 내가 가진 주식을 전부 가져가겠다고 하더군.”
그러곤 갑자기 마음이 변한 것처럼 변덕스레 동해 그룹의 제안을 알려줬다.
공개 매수를 선언한 것보다 주당 만원이 더 비싼 가격이었지만 이번에도 석원은 놀란 기색 없이 담담했다.
대주주 지분을 가져오려면 프리미엄을 얹어 개인 투자자보다 좋은 조건을 제시해야 되는 것이 당연했기에 어느 정도 예상한 일이기도 했다.
“지분 싸움을 걸어온 걸 보곤 동해 그룹이 만만치 않은 상대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천 회장님한테 겨우 그런 제안을 했다니 조금 실망이군요.”
오히려 여유 가득한 얼굴로 살짝 미소까지 짓는 석원을 천성득이 이것 봐라하는 눈으로 쳐다봤다.
석원은 안광이 형형한 천성득의 시선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으면서 말했다.
“저희도 천 회장님의 지분을 매수하거나 아님 곧 열리게 될지 모르는 임시 주주총회에서 의결권을 위임해 주시길 바랍니다.”
“가격은 얼마나 쳐줄 텐가?”
천성득이 흥미로운 표정으로 물었다.
“주당 오만 원입니다.”
천성득은 순간 제 귀를 의심했다.
동해 그룹이 주당 8만원을 부른 것에 비해 한참이나 낮은 가격이라 뭘 잘못 들었나 하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천성득은 허리를 꼿꼿하게 세운 채 정색한 얼굴로 되물었다.
“지금 얼마라고 했나?”
“주당 오만 원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말을 끝내기 무섭게 천성득이 차갑게 그를 노려보면서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날 놀리는 건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럼 무슨 생각으로 그딴 말을 한 건지 어디 한번 설명을 해보게. 단 날 설득시키지 못한다면 뒷일은 각오해야 될 걸세.”
적지 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묵직하게 피워 올리는 기세가 온몸을 짓누르는 듯한 압박감을 느끼게 했다.
보통 사람이라면 입 한번 벙긋하기도 힘들 분위기였으나 석원은 그저 태연하게 대꾸했다.
“동해 그룹이 제안한 가격에 지분을 파신다면 얻으시는 이득은 많아 봐야 2백억이 안 되겠지요.”
천성득은 대답하지 않고 팔짱을 낀 자세로 차가운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저희 편을 들어주신다면 천억을 벌게 해드릴 겁니다.”
“어이가 없군.”
누가 들어도 허무맹랑한 소리에 천성득이 냉소했다.
“웃돈을 더 얹어서 주식을 사가는 것도 아니면서 천억을 벌게 해주겠다니 허풍이 지나치구만.”
“아. 말씀을 잘못 드린 것 같군요. 천억을 버는 게 아니라 잃는 걸 막아드리겠습니다.”
천성득은 불쾌한 표정으로 눈매를 찡그리곤 이내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대흥 그룹 둘째 아들이 제법 똑똑하고 인물이라고 해서 오라고 했는데. 아무래도 시간 낭비만 한 것 같군. 아무래도 더 할 이야기가 없을 것 같으니 그만 돌아가 보게.”
그러고는 더 볼 것 없다는 듯 천성득이 몸을 일으키려고 하자 석원이 불쑥 말을 내뱉었다.
“한세 그룹에서 발행한 CP 천억 원 치를 가지고 계신 걸로 알고 있는데, 아닙니까?”
순간 멈칫한 천성득이 고개를 돌려 그를 무섭게 노려봤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친 채 응접실 안에는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이내 천성득이 진득한 음성으로 먼저 입을 열었다.
“어디서 그런 이야기를 들었나?”
CP는 기업이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자신의 신용을 바탕으로 발행하는 1년짜리 단기 약속어음이었다.
석원은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며 자리를 가리켰다.
“계속 이야기를 나누실 거라면 다시 앉으시는 게 어떻습니까.”
누가 주인인지 모를 말에 천성득은 기가 막혀 헛바람을 내뱉었다.
성격 같아서는 당장 크게 호통을 치고 고용인들을 불러 석원을 집 밖으로 끌어내도록 했을 테지만 한세 그룹이라는 말을 들은 이상 그럴 수가 없었다.
잠시 날카로운 눈빛으로 석원을 쳐다보던 천성득은 이내 다시 자리에 앉고는 가라앉은 목소리를 냈다.
“자. 이제 자네가 말한 천억과 한세 그룹이 무슨 상관인지 말해보게.”
“그 전에 저희 제안을 받아 주실 겁니까?”
천성득은 눈가를 찡그렸다.
능청맞다 못해 뻔뻔하기까지 한 태도를 보니 저 나이 또래에 당해낼 인물이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긴 그러니 자신의 귀에까지 이름이 들려왔을 터였다.
“좋네. 이야기를 들어보고 그럴듯하다 싶으면 주당 오만 원에 내가 가진 미도파 주식을 전부 넘기겠다고 약속하지.”
“감사합니다.”
석원은 그 말만 기다렸다는 것처럼 환하게 반색했다.
법적 구속력이 전혀 없는 구두 약속이었으나 천성득 회장은 자신이 내뱉은 말은 하늘이 두 쪽 나더라도 꼭 지키는 것으로 명동 사채시장에서도 유명했다.
‘비록 직접 본 적은 없지만 거기에 얽힌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전설처럼 남아 있었지.’
몸을 살짝 앞으로 당겨 앉은 석원이 차분히 입을 열었다.
“기업의 입장에서는 은행에서 요구하는 담보나 보증을 제공할 필요 없이 간편하고 빠르게 원하는 자금을 조달할 수 있는 것이 바로 CP죠.”
천성득은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눈빛으로 계속 말하라고 재촉했다.
“반대로 CP를 산 투자자는 단기에 연 15%의 고금리를 얻을 수 있으니. 서로한테 이득이 되는 금융상품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결국 인내심이 다한 천성득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지금 나한테 경제학을 가르치러 왔나?”
“물론 아닙니다.”
석원은 사뭇 진지한 얼굴로 다시 말했다.
“이렇게 좋기만 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건 제대로 운용됐을 경우고 때에 따라 치명적인 독이 든 사과로 변하기도 하죠.”
이에 천성득이 새하얗게 센 눈썹을 꿈틀거렸다.
“바로 높은 이자를 주는 만큼 짊어져야될 리스크 역시 크기 때문입니다.”
“…….”
“절차가 까다롭지 않고 발행이 쉬운 만큼 CP를 파는 기업의 재무 상태나 내부적인 위험이 있는지 제대로 알기가 쉽지 않죠.”
어느새 기대고 있던 등을 바로 세우고 표정이 심각해진 천성득의 모습에 석원은 제대로 낚았다는 생각을 하며 내심 미소를 지었다.
“거기에 더해 발행 기업이 부도를 냈을 때 은행 담보 대출을 비롯한 선 순위 채권의 변제가 먼저 이루어지고 난 뒤에, 남은 자산으로 돈을 받아낼 수 있다는 걸 생각하면 사실상 투자금을 몽땅 날릴 가능성이 아주 높죠.”
잠시 말이 없던 천성득이 무겁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지금 한세 그룹이 부도가 나기라도 한다는 건가?”
그러자 석원이 시선을 똑바로 마주한 채 확신에 찬 태도로 단언했다.
“그렇습니다. 길어봤자 1년을 넘기기 어려울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