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lden Spoon Investment Portfolio RAW novel - Chapter (261)
금수저 투자백서 261화(261/283)
261. 말은 고맙지만 호의만 받도록 하겠네.
잠시 뒤 회의를 끝내고 다들 방을 나가자 박태홍 회장은 홀로 소파에 앉아 담배를 피우며 정오에 공시로 발표될 내용이 적힌 서류를 차분히 다시 한번 읽었다.
그때 정윤경 대리가 노크와 함께 문을 열고 들어와 물었다.
“사성 그룹 곽동훈 회장님이 전화를 하셨는데 어떻게 할까요.”
“곽 회장이?”
서류에서 시선을 뗀 박태홍 회장이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바로 연결해.”
“알겠습니다.”
얼마 있지 않아 소파 옆 협탁에 설치된 키폰 벨이 울리자 박태홍 회장이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여보세요.”
[박 회장님. 접니다. 며칠 전 전경련 오찬 모임에 안 나오셔서 많이 아쉬웠습니다.]재계 서열은 사성 그룹이 높았지만 곽동훈 회장이 열 살 넘게 더 어렸기에 박태홍 회장은 편하게 말을 놨다.
“알고 있겠지만 회사에 일이 있어서 빠지게 됐네. 이해해 주게.”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전화를 드렸습니다.]박태홍 회장은 수화기를 귀에 댄 채 미간을 살짝 좁혔다.
“그게 무슨 말인가?”
그러자 곽동훈 회장이 진지한 목소리로 용건을 꺼냈다.
[그동안 재계에서 지켜온 묵계를 깨버린 동해 그룹의 행동에 다들 우려가 아주 큽니다.]“…….”
[이런 식으로 룰을 어기는 걸 용납한다면 앞으로 경영권을 노린 적대적 M&A가 무분별하게 벌어지며 재계의 질서가 흐트러지게 될 테니까요.]대놓고 적대적 M&A를 시도한 우용갑 회장과 동해 그룹을 비난하는 태도에 박태홍 회장이 기꺼운 표정으로 맞장구를 쳤다.
“내 말이 그걸세. 비겁하게 행동한 동해 그룹이 뜻을 이루도록 만들어서는 절대 안 된다는 말이야.”
[그래서 오전 중에 전경련 명의로 이번 적대적 M&A를 당장 멈출 것을 강력히 촉구하는 성명서가 발표될 겁니다.]이미 비난을 각오하고 덤벼드는 우용갑 회장과 동해 그룹이었기에 그 정도로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터였다.
하지만 전경련이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지켜보고 있는 것보단 이렇게 말로나마 힘을 실어주는 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됐다.
“고맙네.”
박태홍 회장은 진심으로 감사를 표했다.
[하지만 전경련에서 성명서를 발표한다고 그만둘 것 같았으면 우 회장님도 애초에 이런 일을 벌이지 않으셨겠죠.]“……?”
[그래서 현우 그룹 정 회장님을 비롯한 전경련 회장단이 의견을 모아 경영권 방어에 필요한 자금 지원을 해드리기로 했습니다.]전혀 예상치 못한 이야기에 박태홍 회장이 놀라 되물었다.
“자금 지원을 해준다고 했나?”
[그렇습니다. 1차로 신주인수권부 사채 형식으로 오백억을 바로 지원하고 필요하다면 추가로 그만한 자금을 더 밀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천억이나 되는 거액을 빌려준다는 이야기에 크게 반색하던 박태홍 회장은 뒤에 붙은 조건을 듣고는 눈썹을 찌푸렸다.
이자를 받으면서 만기 때 약정한 가격의 주식으로 받거나 아님 그냥 원금을 상환받을 수 있는 신주인수권부 사채는 채권자가 일방적으로 유리한 계약이었기 때문이었다.
‘전경련 능구렁이들이 어떤 인간들인데. 아무런 이득 없이 그냥 도움을 줄 리가 없지.’
박태홍 회장은 한순간 기뻐했던 마음이 차게 식어 버리는 것을 느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만약 든든한 둘째 아들이 없었다면 상당히 불리한 조건이라는 걸 알면서도 감지덕지하며 제안을 받아들였을 터였다.
하지만 막판 뒤집기를 할 계획과 충분한 자금이 준비되어 있었기에 그럴 필요가 없었다.
[제안을 받으시겠습니까?]“말은 고맙지만 우리 그룹 힘만으로 충분히 상황을 해결할 수 있으니 호의만 받도록 하겠네.”
박태홍 회장은 약간의 망설임도 없이 단호하게 거절했다.
굳이 증권가에서 돌고 있는 찌라시가 아니더라도 대흥 그룹의 재무 상황이 좋지 않은 건 다들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렇기에 당연히 제안을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하던 곽동훈 회장은 뜻밖의 대답에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도움이 필요 없다고 하셨습니까?]굽신거리며 불리한 조건을 덥석 받아 물줄 알았다가 막상 거절을 당하자 당혹스러워하는 것을 보고 박태홍 회장은 작은 쾌감을 느꼈다.
“그렇네.”
여유로운 목소리에 도리어 허둥거리는 건 곽동훈 회장 쪽이었다.
[오늘이 동해 그룹이 제시한 공개 매수 마감일인데. 설마 이대로 미도파 백화점을 포기하려는 건 아니겠지요?]“백화점은 우리 그룹의 핵심 계열사인데 그럴 리가 있겠나.”
박태홍 회장은 느긋하게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반면 곽동훈 회장은 더욱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빨라진 말투로 되물었다.
[그런데 자금 지원이 필요 없다는 말씀이십니까?]“하하.”
박태홍 회장은 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밖에서는 어떻게 보는지 모르겠지만 우리 그룹이 이 정도 공격에 무너질 만큼 호락호락하진 않네.”
곽동훈 회장이 아무런 말을 못 하고 있자 박태홍 회장은 의미심장하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자세한 건 밝힐 수 없지만 곧 내 말뜻을 알게 될 걸세.”
도대체 뭘 어떻게 하겠다는 건지 짐작되는 부분이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필요 없다는데 억지로 돈을 떠안길 수도 없는 노릇이었기에 곽동훈 회장은 떨떠름한 목소리를 냈다.
[뭐. 그러시다면 알겠습니다. 나중에라도 마음이 바뀌면 언제든 연락을 하십시오.]“그러지. 나중에 일이 다 마무리되면 밥이나 한 끼 하세.”
바로 오늘이 공개 매수 마감일인데 발등에 불이 떨어진 상태여야 할 사람이 너무 태연하게 굴고 있으니 의문만 가득 떠올랐다.
[……예. 그러시죠.]마지막까지 떨떠름하게 대꾸한 곽동훈 회장이 이내 전화를 끊었다.
수화기를 내려놓은 박태홍 회장은 통화를 하느라 탁자 위에 내려둔 서류를 쳐다보며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후후후. 조금 있다 공시가 올라가면 다들 발칵 뒤집히겠군.”
* * *
강남 대흥 창투.
회의를 끝내고 본사에서 돌아온 석원은 사장실로 가지 않고 곧장 자금운용부 사무실을 찾았다.
수행비서인 한지성과 안으로 들어서자 동해 유량 주식을 매집하느라 다들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따르릉! 따르릉!
“동해 유량 2만 9,500원에 3천 500주 매수!”
“오케이 딜!”
흰색 와이셔츠 소매를 걷어 올린 최호근 부장이 뒤편에 서서 팔짱을 낀 채 매섭게 눈을 번득이며 거래를 지켜보다가 큰 소리로 말했다.
“지금까지 몇 주나 매수했어?”
그러자 아예 답답한 넥타이를 풀어 버린 정환엽 과장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대답했다.
“10만 주 조금 넘게 샀습니다!”
이어서 유석현 대리도 컴퓨터 앞에 앉아 수화기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전 5만 6천 주 정도 됩니다.”
“우리가 계속 쓸어 담는 바람에 벌써 천원 넘게 올랐는데. 잠깐 쉬어서 바람을 좀 빼고 갈까요?”
정환엽 과장이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물었다.
그 와중에도 재빠르게 손을 놀려 또 한 번 매수 주문을 넣고 있는 걸 보면 평소 모습이 농땡이를 부리고 깃털처럼 가벼워서 그렇지 실력만큼은 확실했다.
[동해 유량 29,760 ▲ 1,320]최호근 부장은 한쪽 벽에 설치된 대형 시황판에 띄워진 주가를 쳐다보며 어떻게 할지 고심했다.
그때 뒤에서 묵직한 석원의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곧 공시가 뜨면 주가가 치솟을 테니까. 멈추지 말고 그 전에 최대한 물량을 많이 사들이도록 해요.”
몸을 뒤로 돌린 최호근 부장이 석원을 보고 황급히 머리를 숙였다.
“오셨습니까.”
석원은 최호근 부장 앞으로 한발 나서며 물었다.
“시장 분위기는 어때요?”
“아직까지는 큰 움직임이 없습니다만 보시다시피 저희가 매물을 거의 싹쓸이 하다시피 주워 담으면서 동해 유량 주가가 크게 오르자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곳들이 조금씩 생겨나고 있습니다.”
세련된 회색 정장을 입은 석원이 작게 머리를 끄덕였다.
“평소 거래가 그렇게 많지 않던 종목인데 갑자기 거래량이 터지니까 더 의구심이 들 거예요.”
그러자 최호근 부장이 곧바로 말을 덧붙였다.
“거기다가 M&A 이슈와 엮여 있는 종목이다 보니까. 눈치 빠른 곳에서는 벌써 뭔가 있다는 걸 알아차리고 매수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석원은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대량 매집이 이루어지고 있는데. 시장에서 낌새를 알아차리지 못한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겠죠.”
“그건 그렇습니다.”
당장 최호근 부장 같아도 이런 움직임을 보이는 종목이 있다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바로 따라붙어서 매매에 들어갔을 터였다.
“미도파 주가는 어때요?”
석원의 물음에 최호근 부장이 바로 대답했다.
“주당 7만 원 중반을 살짝 넘겼다가 저희 그룹 재무 상태가 어렵다는 찌라시가 돌고 난 이후로 쭉 빠지더니 오늘은 7만 100원에서 오르내리고 있습니다.”
“딱 동해 그룹에서 내건 공개 매수 가격이네요.”
“오늘이 마감일인데 아직도 저희가 가격을 추가로 올리지 않는 걸 보고 동해 그룹의 공개 매수에 응하는 쪽으로 분위기가 기우는 모양새입니다.”
하긴 아무것도 모르는 개인 투자자들 입장에선 당연한 심리였다.
“이번 공개 매수로 상대가 필요한 지분을 모두 확보하게 된다면 그동안 폭등했던 주가가 반대로 꺾여 버릴 테니 그 전에 팔려고 하겠죠.”
“저 같아도 그럴 겁니다.”
“지금은 상대가 희희낙락하고 있겠지만 곧 비싼 가격에 사들인 미도파 백화점 주식이 계륵이 되어 버릴 거예요.”
석원이 무슨 계획을 가지고 있는지 알고 있는 최호근 부장이 입가에 옅은 미소를 그렸다.
“이제 곧 올라갈 공시를 보면 여의도에 있는 증권사 직원과 개인 투자자들은 오늘 하루 점심을 제대로 먹긴 글렀겠군요.”
“그렇겠죠.”
석원도 그와 눈을 마주치며 함께 웃었다.
미도파 백화점이 가지고 있던 방직 지분을 전부 다른 곳에 넘겨 버렸다는 공시가 올라오고 뒤이어 동해 유량 지분 매집 발표가 나오면 시장이 발칵 뒤집힐 것이 불을 보듯 뻔했다.
이렇게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는데 한가하게 사무실이나 객장 밖으로 나가 점심을 먹고 올 여유 따위 있을 리가 없었다.
그건 자금운용부 직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석원은 문득 생각났다는 듯 뒤에 서 있는 한지성을 불러 말했다.
“가져온 걸 나눠주도록 해요.”
“알겠습니다.”
수행비서인 한지성이 양손에 들고 있던 비닐봉지를 사무실 한쪽에 있는 회의용 테이블 위에 올려놨다.
“저게 뭡니까?”
“점심시간 동안 자리를 비우기 어려울 것 같아서 일식집에서 도시락을 사 왔어요.”
사소한 부분까지 놓치지 않는 배려에 최호근 과장이 고마운 표정을 지었다.
“저희 점심까지 신경 써주시고 감사합니다.”
타이밍을 잘 맞춘 것인지 때마침 정각 12시가 되어 점심 휴장에 돌입했다.
열심히 일하면서도 뒤에서 들리는 대화를 다 듣고 있던 정환엽 과장이 냉큼 다가와 쌍엄지를 치켜들었다.
“크으. 역시 사장님뿐입니다.”
석원의 도시락 선물에 감동한 건 유석현과 홍재희도 마찬가지였다.
“안 그래도 점심을 어떻게 때워야 하나 고민이었는데 감사해요.”
“이렇게 신경 써주시는 분은 사장님뿐일 겁니다.”
그렇게 모두가 모인 가운데 정환엽 과장이 제일 먼저 비닐을 열어 안에 든 도시락을 꺼냈다.
“우와! 이거 비싼 장어 덮밥 아닙니까?”
“스테미너에 좋은 거니까 먹고 힘내라고 그걸로 정했어요.”
젓가락으로 크고 두툼한 장어구이를 하나 집어 든 정환엽 과장이 입에 쏙 넣고 우물거리면서 말했다.
“오! 맛이 장난 아닌데요. 완전 맛있습니다.”
히히 웃는 꼴을 본 최호근 부장은 끙 소리를 내며 이마를 짚었다.
“저. 저놈이 또…….”
반면 석원은 잘 먹으니 보기 좋다는 표정으로 웃었다.
“맛있다니 다행이네요.”
“사장님도 함께 드시죠.”
“아니에요. 내가 있으면 체할지도 모르니까 그냥 직원들끼리 먹어요.”
주변을 보니 최호근 부장만 혼자 안절부절못하고 있지, 유석현과 홍재희는 벌써 도시락 뚜껑을 까고 열심히 먹어대고 있었다.
정환엽 과장 곁에 있으니 다른 둘도 뻔뻔함이 옮은 듯했다.
내가 부하 교육을 잘못시켰나 하고 최호근 부장이 혼자 자괴감에 빠져 있는데 갑자기 컴퓨터에서 알림 소리가 울렸다.
“뭐야?”
“제가 확인해보겠습니다.”
벌떡 일어나 컴퓨터를 확인한 유석현 대리가 석원을 보며 말했다.
“방금 미도파 백화점에서 올린 공시가 떴습니다.”
“그래요.”
석원이 이채를 띠며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