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lden Spoon Investment Portfolio RAW novel - Chapter (265)
금수저 투자백서 265화(265/283)
265. 이 모든 그림을 미리 다 그려두고 움직이신 겁니까?
4월 13일 토요일.
오전장만 열리고 증시가 마감되기 때문에 보통 토요일이 되면 객장이 한산해지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다른 때하고 달리 이른 아침부터 투자자들이 잔뜩 몰려들었다.
투자자들이 한손에 들고 있거나 객장 의자에 앉아 읽고 있는 신문 헤드라인에 이유가 나와 있었다.
[대흥그룹 대 반격! 동해 유량 지분 18% 매집 사실 공개!] [동해그룹, 미도파 백화점 상대 대흥방직 지분 매각금지 가처분 신청] [동해그룹 공개 매수로 미도파 백화점 지분 13.24% 추가 취득] [대흥그룹 동해 유량 지분 추가 매집으로 역 M&A 시사] [점점 진흙탕 싸움으로 번지고 있는 두 그룹의 지분 다툼에 재계 우려] [전경련 무리한 경영권 탈취 행위를 멈추고 원만한 사태 해결 촉구]“어머! 다들 여기 계셨네.”
미도파 백화점 매매로 짭짤한 재미를 봤는지 손에 신상 명품 핸드백을 든 파마머리 아줌마가 객장 단말기 앞에서 항상 붙어 다니는 이국상이라는 이름의 사내와 중년인을 발견하곤 반가운 표정을 지으며 가까이 다가갔다.
“두 분 다 토요일인데도 나오셨네요.”
그러자 역시나 미도파 백화점 주식으로 적지 않은 수익을 낸 중년인이 웃음을 터트렸다.
“제대로 큰 판이 섰는데 주말이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호호. 맞아요.”
과일 가게 이름이 새겨진 갈색 점퍼 대신 새 양복을 빼입은 이국상도 실실 웃으며 말했다.
“이번에도 크게 한번 땡겨야죠. 여사님도 그러려고 오신 거 아니에요?”
“아이. 당연하죠.”
파마머리 아줌마는 주변을 슬쩍 둘러보더니 중년인의 옆에 바싹 붙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동해 유량 주식을 사실 거죠?”
그러자 중년인이 작게 머리를 끄덕였다.
“미도파도 가겠지만 이미 오를 만큼 올랐으니까요. 아무래도 동해 유량 쪽이 더 먹을 게 많지 않겠습니까.”
“역시 김 선생님이세요.”
파마머리 아줌마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안색을 환하게 밝혔다.
“두 분은 벌써 매수 주문서를 쓰셨어요?”
“그럼요. 보나마나 장이 열리면 창구 앞에서 아귀다툼이 벌어질 텐데. 조금이라도 빨리 주식을 살려면 미리미리 준비를 해둬야죠.”
이국상이 뻐기듯이 말하며 어깨를 으쓱이자 파마머리 아줌마도 약간 급한 표정이 되었다.
“나도 얼른 주문서부터 써야겠네요. 그럼 두 분은 얼마를 쓰셨는데요?”
그러자 중년인이 점잖은 목소리로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
“그건 각자가 알아서 판단해야죠. 대신 주식을 매수하려면 어제 종가보다는 무조건 높게 가격을 써야 될 겁니다.”
“하긴 그렇겠네요.”
파마머리 아줌마는 더 늦기 전에 서둘러 한쪽에 있는 테이블로 걸어가 매수 주문서에 생각해둔 가격을 적어넣었다.
[매수 주문가 : 35,000 ₩]전날 종가보다 1,480원이나 비싼 가격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체결이 안 될까 봐 불안한지 잠시 머뭇거리다가 이내 손에 쥔 주문서를 찢어서 버리곤 새 걸 꺼내 가격을 다시 적었다.
[매수 주문가 : 37,000 ₩]“다들 동해 유량을 사려고 안달을 낼 텐데. 이 정도는 되어야지 주식을 살 수 있겠지.”
말도 안 되게 비싼 가격이었지만 이미 미도파 백화점 주식으로 아주 달달하게 재미를 봤기에 이번에도 M&A 이슈를 타고 주가가 크게 오를 거라고 확신했다.
파마머리 아줌마는 손에 든 매수 주문서를 보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이번에는 크게 욕심 안 부리고 딱 두 배만 먹고 빠져야지.”
가방은 이미 샀으니 그에 어울리는 새 옷이나 구두가 갖고 싶었다.
아니면 다이아몬드 반지나 팔찌도 괜찮을 것 같고.
기대에 잔뜩 부푼 얼굴을 한 파마머리 아줌마는 매수 주문서를 접어 소중하게 주머니에 챙겨 넣었다.
아줌마뿐만 아니라 객장에 모여든 투자자들 모두 두 그룹이 지분 싸움을 벌이는 틈을 타서 한 몫을 챙기려는 희망과 욕심으로 가득차 있었다.
장 시작 전부터 창구 앞에 투자자들이 길게 줄을 섰고 지난번에 호되게 당한 경험이 있는 증권사에서는 경비원과 남자 직원들을 전부 동원해 질서를 유지시키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개장을 하는 것과 동시에 동해 유량은 물론이고 잠시 주춤하던 미도파 백화점까지 주가가 크게 튀어 오르자 먼저 주식을 매수하려는 투자자들이 우르르 앞으로 몰리면서 객장은 또다시 난장판이 되고 말았다.
“밀지 마!”
“내가 먼저라니까!”
“아까부터 내가 앞에 서 있었는데 뭔 헛소리야.”
“비키라고.”
“여러분 질서를 지켜 주세요!”
“줄을 서세요. 앞으로 오지 마시라니까요!”
경비원들과 증권사 직원들이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지르고 어떻게든 줄을 다시 세워 보려고 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오히려 대형 시황판에 띄워진 동해 유량과 미도파 백화점의 주가가 붉은색을 표시하며 점점 더 올라갈수록 창구 앞에서 벌어지는 몸싸움과 고성은 격렬해져만 갔다.
* * *
[동해 유량 : 37,6004,080]
“어휴. 단번에 상한가로 가버리는 게 아주 불기둥이 따로 없는데요.”
모니터에 띄워 놓은 주가창을 보며 머리를 절레 흔든 정환엽 과장은 의자에 앉은 채 슬쩍 고개를 돌려 뒤편에 서 있는 석원을 힐끔 쳐다봤다.
석원은 폭등하는 주가를 보면서도 태연한 표정이었다.
오늘도 완벽한 핏을 뽐내는 정장에 눈에 띄는 디자인의 손목시계를 하고 있었는데, 시계가 아니라 하나의 예술 작품이라고 불리는 브랜드이자 얼마 전 구찌에 이어 석원이 새롭게 인수해 개인 포트폴리오에 담은 바쉐론 콘스탄틴에서 작년엔 출시한 메르카토르 옐로 골드 워치 가죽 시계였다.
‘와 저런 건 얼마쯤 하지.’
정환엽 과장은 석원의 눈치를 살피려다가 자연스럽게 시계에 시선을 빼앗기고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뭔진 잘 몰라도 엄청 비싼 것 같은데 그게 또 석원한테 무척 잘 어울렸다.
무의식적으로 감탄한 정환엽 과장은 옆으로 시선을 옮겼다.
석원과 나란히 함께 서 있는 최호근 부장은 물론이고 다른 직원들 역시 뜨겁게 타오르는 증시 상황하고 달리 다들 한가롭게 자리에 앉아 주가가 오르는 걸 지켜만 보고 있었다.
그새 동해 유량 주가가 3만 8천 원을 넘기려 하고 있는 걸 본 정환엽 과장은 결국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이대로 간다면 오늘 장이 끝나기 전에 주당 4만 원을 넘길 것 같은데. 정말 이대로 손을 놓고 있어도 괜찮겠습니까?”
집중적으로 주식을 매집해 동해 유량 주가를 크게 올려놨던 어제와 달리 오늘은 단 한주도 매수 주문을 안 넣고 있었기에 유석현과 홍재희도 의아해하는 시선으로 석원을 바라봤다.
최호근 부장은 혹시라도 석원이 기분 나빠할까 봐 얼른 정색하며 정환엽 과장을 야단치려고 했다.
“그냥 가만히 있…….”
“폭등해도 상관없어요. 어차피 더 이상 지분을 사들일 생각이 없으니까요.”
그때 석원이 미소 띤 얼굴로 하는 말에 최호근 과장이 고개를 홱 돌렸다.
다른 두 사람 역시 당황한 표정을 짓긴 마찬가지였다.
“예에?”
“그게 무슨…….”
동해 유량 지분을 18%나 확보했다는 공시를 올리고 지분 취득 이유로 경영권 확보가 목적이라고 명확하게 밝힌 만큼 다들 당연히 공격적으로 주식 매수에 나설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 더 이상 동해 유량 주식을 매수하지 않을 거라고 하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정환엽 과장은 눈을 껌뻑이며 무슨 말이냐는 얼굴로 물었다.
“동해 유량 지분을 매집해서 역 M&A를 거시려던 게 아니었습니까?”
“그냥 블러핑(bluffing)이었어요. 상대를 당황하도록 만들려고 일부러 그런 거죠.”
“그러시다면…….”
“임시 주총 소집을 요구하고 경영진 교체를 안건으로 올리겠지만 정말로 동해그룹을 삼킬 생각은 전혀 없어요.”
이미 이야기를 들어서 알고 있던 최호근 부장을 제외한 다른 직원들은 모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석원은 어깨를 으쓱이며 무심한 태도로 말했다.
“식용유와 사료 시장을 과점하고 있어서 꾸준히 현금을 벌어들이는 회사니 인수 대상으로 나쁘진 않지만 조금만 있으면 폭탄 세일이 벌어져 헐값에 주워 담을 수 있는데. 굳이 지금 비싼 값에 살 이유는 없죠.”
폭탄 세일이라는 말에 정환엽과 다른 직원들은 물론이고 심지어 최호근 부장 역시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M&A 호재가 붙어서 주가가 비싸진 건 분명한 사실이지만 세일이라고 할 정도로 값이 떨어질 거라니?
바로 내년에 IMF라는 엄청난 해일이 대한민국을 덮칠거란 걸 전혀 모르고 있는 입장에서는 이상하게 들릴 만도 했다.
말 그대로 대한민국 전체가 폭탄 세일을 벌이며 알짜 회사와 자산들을 헐값에 마구 쓸어 담을 기회가 열리는 것이 바로 IMF였다.
하지만 그렇게 지난 수십 년간 온 국민들이 힘들게 이루어낸 국부(國富)를 약탈하다시피 가져간 자들이 바로 월가를 중심으로 한 서방 투기 자본들이었기에 석원은 내심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원래 역사에서는 서방 투기 자본에 무력하게 양털 깎기를 당했지만 이번에는 내가 그렇게 놔두지 않을 거야.’
한편 정환엽 과장은 납득이 안 된다는 얼굴로 아예 의자까지 뒤로 돌려 앉은 채 물었다.
“말씀대로 한다면 잠깐은 상대를 속일 수 있을지 몰라도 곧 허세였던 걸 깨닫고 독이 바짝 올라서 전보다 더 강하게 미도파 백화점 경영권을 빼앗으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당연히 그럴 테죠. 하지만 얼마 있지 않아 더 이상 적대적 M&A를 추진할 동력을 상실해 버리게 될 테니까 신경 쓸 필요 없어요.”
“예에?”
이건 또 무슨 이야기냐며 정환엽 과장과 직원들이 머리를 갸웃거렸다.
혹시 아는 게 있냐는 눈빛으로 쳐다보자 최호근 부장이 슬쩍 시선을 피했다.
치사하게 혼자만 알고 입을 닫고 있다니 살짝 배신감마저 들었다.
그때 석원이 한쪽 팔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이제 조금 있으면 찌라시가 돌기 시작할 테니까. 직원들한테 알려줘도 상관없겠네요.”
“그래도 되겠습니까?”
석원은 괜찮다는 듯 머리를 끄덕였다.
“궁금해서 미치겠습니다. 뭔지 어서 좀 가르쳐 주십시오.”
거기다 한껏 애가 탄 정환엽 과장까지 안달복달하며 졸라댔다.
“너란 놈은…….”
한참 후배인 유석현과 홍재희도 말을 안 하고 가만히 있는데 왜 과장이란 놈이 염병을 떨고 있는 것인가.
최호근 과장이 끄으응 앓는 소리를 내며 손으로 이마를 짚자 석원이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어차피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대응하고 움직이려면 알고 있어야 되는 일이니까 보여주도록 해요.”
“알겠습니다.”
최호근 부장은 바지 뒷주머니에서 반으로 접은 A4용지 크기의 종이를 꺼내 정환엽 과장에게 건넸다.
“대체 뭔데요…… 어.”
내용을 확인한 정환엽 과장이 눈을 크게 치켜떴다.
“이게 정말입니까?”
“그래. 증권감독원 원장과 간부급 직원들이 조직적으로 뇌물을 받고 얼마 전 신규 상장된 유창 정보통신을 비롯한 여러 기업들의 부실 회계와 비리들을 눈감아 줬다는 증거들이야.”
정환엽 과장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다.
“예전부터 구린내가 나는 건 알았지만 상장 자격이 아예 안 되는 회사를 눈감아주질 않나 신고를 받은 비리까지 뭉개 버리다니. 완전히 썩을 대로 썩었네요.”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나 옆으로 온 유석현과 홍재희도 정환엽 과장 손에 들린 종이에 적힌 내용을 확인하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이거 정말 심한데요.”
“어쩜 이럴 수가 있어요? 그것도 다른 데도 아니고 증감원이!”
“내 말이 그거야. 완전히 고양이한테 생선 가게를 맡긴 꼴이나 다름없잖아.”
화를 내면서 욕을 내뱉던 정환엽 과장은 문득 든 생각에 고개를 돌려 석원을 쳐다봤다.
“그런데 이거하고 동해그룹이 무슨 상관이 있어서 지분 싸움을 벌일 여력이 없을 거라고 하시는 겁니까?”
그러자 석원이 흰 이를 드러내며 씨익 웃었다.
“문제가 된 기업들의 신규 상장을 맡은 주관사가 어딘지 자세히 봐요.”
“네? 어…….”
의아한 표정을 한 채 곧 찌라시로 증권가와 언론사에 뿌려질 내용을 다시 훑어보던 정환엽 과장은 이내 눈을 크게 떴다.
“동해 페레그린 증권사가 전부 주관사를 맡았네요!”
“맞아요. 그리고 동해 페레그린 증권이 중간에서 다리 역할을 하며 회계 조작과 주가 띄우기, 비리 무마등을 하는 걸 적극적으로 도왔죠.”
뜻밖의 연결고리에 다들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와. 설마 이런 일이?”
“놀랍네요. 저는 갑자기 왜 증감원이 튀어나오나 했는데.”
“아 그래서 사장님이!”
석원은 여유로운 표정으로 직원들을 쳐다봤다.
“이런 사실이 알려지고 나서도 과연 동해그룹이 계속 적대적 M&A를 진행시킬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러기가…… 쉽지 않겠네요.”
정환엽 과장은 저도 모르게 입을 벌린 채 감탄했다.
그리고 유석현 대리 역시 대단하다는 시선으로 물었다.
“설마 이 모든 그림을 미리 다 그려두고 움직이신 겁니까?”
석원은 대답 대신 입가에 짙은 미소를 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