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lden Spoon Investment Portfolio RAW novel - Chapter (268)
금수저 투자백서 268화(268/283)
268. 그럼 하나만 부탁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오성 정보통신, 상장 직전 부실회계 묵인 정황 드러나 증감원 조직적 비리 의혹]윤전기에서 뽑혀 나온 지 얼마되지 않아 잉크 냄새가 진하게 나는 세창일보 석간에 실린 기사를 다 읽은 석원은 입가에 짙은 미소를 지었다.
세창일보 말고도 책상 위에는 오늘 발행된 석간들이 종류별로 놓여 있었는데 하나같이 증감원 비리를 폭로하는 기사들이 1면 톱이었다.
그리고 기사 아래에는 세트처럼 미도파 백화점 봄 정기 세일 광고가 큼지막하게 붙어 있는 것 또한 공통점이었다.
“뭐든 이기려면 베팅을 확실히 해야 되는 법이지.”
석원이 뒤로 몸을 기대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증감원 스캔들 기사에서 동해 페레그린 증권이 연관되어 있는 걸 크게 부각시켜 주는 대가로 대흥그룹은 각 신문사에 미도파 백화점은 물론이고 증권과 방직 등 모든 계열사들의 광고를 하나씩 돌아가며 보름씩 실어 주기로 약속해 말 그대로 광고 폭탄을 안겨줬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각 신문사 편집장들한테 현금 뭉치를 가득 채운 종이 쇼핑백을 하나씩 돌려 완전히 쐐기를 박았다.
이러니 단발성으로 그것도 달랑 일회성 광고 두 개를 넣어주겠다는 우호근의 말이 애초에 들어 먹힐 리가 없었다.
“이걸로 불씨는 당겨졌으니까 땔감을 좀 더 넣어서 불을 크게 키워야겠지.”
그때 수행비서인 한지성이 노크를 하고 들어와 책상 앞으로 왔다.
“사장님. 시간에 맞춰 도착하시려면 이제 출발하셔야 합니다.”
“아. 그래요. 벌써 이렇게 된 줄도 몰랐네요.”
한쪽 팔을 들어 손목에 찬 시계를 확인한 석원은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 * *
한 시간 뒤.
석원은 종로 익선동에 위치한 특급 요정인 오진암(梧珍庵) 별채 방안에 우춘일 새시대 민족회의 사무총장과 마주 앉아 있었다.
널찍한 교자상 위에 마흔 가지가 넘는 진수성찬이 한가득 차려져 있는 가운데 두 사람은 시중을 드는 여종업원을 잠시 물린 채 이야기를 나눴다.
“큰 도움을 주기까지 했는데 총선 결과가 좋지 않게 나와 자네 볼 낯이 없구만.”
총선 패배 때문인지 우춘일 사무총장이 씁쓸한 표정을 짓고 있자 석원은 술 주전자를 집어서 빈 잔을 채워주며 말했다.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이 세상일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이번에는 결과가 나빴지만 오히려 이걸 계기로 흩어진 야권을 잘 추스른다면 분명 다음에는 좋은 결과가 있을 겁니다. 그러니 기운 내십시오.”
“그래야지.”
기분이 조금 풀린 우춘일 사무총장은 부드러운 시선으로 석원을 바라봤다.
“분명 아직 젊은 나이인데 이렇게 생각이 깊으니 볼 때마다 놀란다네. 마치 같은 또래하고 대화를 나누는 것처럼 편하기도 하고…… 아, 물론 칭찬일세. 오해하지 말게나.”
내심 뜨끔했지만, 석원은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우춘일 사무총장은 허허 웃으며 술잔을 들었다.
“총선이 끝나고 허탈한 마음을 떨치기 어려웠는데 이렇게 박 사장을 만나니 조금 위로가 되는 것 같네. 자, 한잔하세.”
“예.”
술잔을 가볍게 부딪친 석원은 고개를 살짝 옆으로 돌리고는 단번에 목구멍으로 넘겼다.
그런 뒤에 역시나 술잔을 깨끗하게 비운 우춘일 사무총장의 잔을 다시 채워주면서 말했다.
“요새 참외가 제철이라 사무총장님께 드리려고 맛있는 걸로 골라 한 박스를 챙겨왔습니다.”
“……참외를 말인가?”
뜬금없는 이야기에 우춘일 사무총장이 짙은 눈썹을 좁혔다.
영문을 몰라하는 그를 보며 석원이 살짝 미소지었다.
“네. 상심이 크실 총재님과 새시대 민족회의에 약소하나마 도움이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준비했습니다.”
이야기를 들은 우춘일 사무총장은 대번에 참외가 아닌 다른 것이 과일 상자에 들어있는 걸 알아차렸다.
“아니 지난번에도 도와줬는데 뭘 이런 걸…….”
“선거 후유증을 잘 수습하려면 아무래도 필요하시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선거 패배 이후 실망감이 큰 당원들을 어떻게 달래야 할지 고민이 컸었다.
그런데 마치 속내를 들여다보기라도 하듯 돈을 가져오자 우춘일 사무총장은 당황스러우면서도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허어. 이것 참.”
“그냥 제 마음이니 부담 갖지 말고 받아주십시오.”
“매번 이렇게 신세만 지는 것 같아 고마우면서도 볼 낯이 없어서 그러네.”
“그런 말씀 마십시오.”
총선에서 참패하자 원래부터 넉넉하지 않던 당 살림살이가 더 팍팍해진 처지였기에 우춘일 사무총장은 말뿐만 아니라 진심으로 고마워했다.
“염치없지만 당 사정이 여의치 않으니 고맙게 받도록 하겠네.”
“언제든 도움이 필요하시면 편하게 말씀하십시오.”
그러자 우춘일 사무총장이 만면에 웃음을 띠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하하. 그렇게 이야기를 해주니 든든하구만. 총재님께서도 박 사장을 꼭 만나고 싶어 하셨는데. 알다시피 상황이 그리 좋지 않으니 아쉽지만 다음으로 미뤄야될 것 같네.”
선거 전에 우춘일 사무총장을 통해 앞으로 대통령이 될 김재춘 총재가 그를 만나보고 싶어한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던 석원은 딱히 서운한 기색 없이 대답했다.
“전 괜찮습니다. 다른 더 시급한 일들도 많으실 테니 정리가 되면 언제든지 말씀해주십시오.”
섭섭해하지도 않고 오히려 이쪽 사정을 먼저 생각해주는 모습에 우춘일 사무총장은 속으로 더욱 석원에 대한 평가를 높이며 머리를 끄덕였다.
앞에 놓인 술잔을 들어 한 모금 삼킨 우춘일 사무총장은 잔을 내려놓으며 감탄하듯 말했다.
“박 사장 같은 젊은 기업가가 있다니 재계의 앞날이 참 밝은 것 같네.”
“아직 부족한 것이 많습니다.”
석원이 겸손한 태도로 대답했다.
그런 모습에 호감 가득한 표정을 짓던 우춘일 사무총장은 뭔가 떠올린 듯 입을 열었다.
“참. 총선 때문에 정신이 없어서 미처 신경 쓸 겨를이 없었는데 요즘 대흥그룹이 곤란한 상황에 처해 있다고 들었네.”
안 그래도 진짜 용건을 꺼낼 타이밍을 재고 있던 석원은 상대의 입에서 먼저 이야기가 나오자 일부러 얼굴을 살짝 굳혔다.
“예. 알고 계시다시피 동해그룹이 경영권을 빼앗으려고 공격을 해오는 바람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건 사실입니다.”
석원은 물론이고 대흥그룹으로부터 정치 자금 지원을 받은 영향도 있었지만, 노기훈 전 대통령과 사돈을 맺고 군사 정권 시절 많은 특혜를 받은 동해그룹이었기에 우춘일 사무총장은 대번에 정색하며 말했다.
“국내 기업들끼리 서로 협력을 하지는 못할망정 남의 회사를 비열하게 가로채려고 하다니. 역시 근본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구만.”
그러자 석원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동해그룹 하나라면 충분히 이겨낼 수 있을 텐데. 상대가 외국 세력을 끌어들여 협공을 하고 있어서 싸움이 쉽지가 않습니다.”
“외국 세력이라니. 그게 정말인가?”
깜짝 놀란 우춘일 사무총장이 마치 자기 일처럼 화를 내며 물었다.
“그렇습니다. 페레그린 증권이라고 홍콩에 기반을 둔 투자사입니다.”
“페레그린이라면 국내 최초로 합작 법인 설립을 인가받아서 동해그룹과 손을 잡고 국내에 증권사를 만든 곳을 말하는 건가?”
부릅 뜬 두 눈을 마주하며 석원이 작게 머리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알고 보니 두 곳이 손을 잡고 설립한 동해 페레그린 증권을 이용해 홍콩에서 상당한 자금을 끌어와서는 외국인 투자자로 위장해 그동안 미도파 백화점 지분을 몰래 매집했더군요.”
“허어! 그런 비열하고 음흉한 수단을 쓰다니. 그래서 대흥그룹이 미처 손쓸 틈도 없이 열세에 몰린 거였구만.”
“뒤늦게나마 이상한 걸 눈치채지 못했다면 한순간에 미도파 백화점을 빼앗기고 말았을 겁니다.”
“그건 정말 다행이네.”
우춘일 사무총장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물었다.
“큰 힘은 되지 않겠지만 내가 뭐 도와줄 일은 없겠나?”
석원은 내심 쾌재를 외치면서도 겉으론 티를 내지 않고 대답했다.
“총선 뒷수습을 하는 걸로도 정신이 없으실 텐데 신세를 질 수는 없지요.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아닐세. 지금까지 박 사장과 대흥그룹이 얼마나 많이 도와줬는데. 힘든 상황에 처한 걸 어떻게 외면할 수가 있겠나. 그러지 말고 도와줄 것이 있으면 말해보게.”
일부러 바로 대답하지 않고 잠시 망설인 석원은 이내 마지못한 것처럼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럼 하나만 부탁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두 개도 괜찮으니 편하게 말하게.”
“혹시 보성통신이라고 들어보신 적 있으십니까.”
그러자 우춘일 사무총장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글쎄. 처음 들어보는 것 같네만.”
“음향기기와 전자사전을 전문적으로 제작하는 업체로 매출이 3백억 가까이 되지만 매년 수억의 적자를 내는 중소기업입니다.”
“그렇군. 그런데 갑자기 그 회사 이야기는 왜 하는 건가?”
우춘일 사무총장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만성 적자에 시달리는 기업이긴 하지만 증권가에서는 작전주로 유명한 회사이기도 합니다.”
상체를 살짝 앞으로 기울인 석원이 비밀 이야기라도 하듯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그러자 우춘일 사무총장의 얼굴에도 흥미가 떠올랐다.
“대규모 수출 주문을 따냈다는 허위 공시를 내거나 M&A 호재를 띄워 주가를 급등시키는 방법으로 작전 세력들이 여러 차례 주가 조작을 했었는데. 최근에도 또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이번 일과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보성통신에 작전을 걸어 주가를 띄워 부당 이익을 챙기려고 했던 주포가 바로 동해그룹 장남인 우호근입니다.”
우춘일 사무총장은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게 정말인가!”
“물론입니다. 조금만 알아보면 금방 들통날 거짓말을 제가 왜 하겠습니까.”
“그래. 그렇지.”
“원하신다면 우호근이 작전을 꾸몄다는 증거를 보여드릴 수도 있습니다.”
“아니. 자네가 하는 이야기이니 믿네.”
우춘일 사무총장은 고개를 절레 흔들었다.
그러고는 앞에 놓인 술잔을 들어 마저 비운 뒤 내려놓았다.
“우 회장 장남이 주가 조작을 벌였다는 사실을 끄집어내서 검찰 조사를 받도록 만들어주면 되겠나?”
역시나 정치판에서 오랫동안 구른 능구렁이답게 석원이 원하는 걸 바로 알아차렸다.
“그렇게 해주신다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허허. 일이 이리되면 동해그룹이 미도파 백화점을 계속 공격하기가 쉽지 않겠구만. 정말 대단한 계책을 짜냈어.”
너털웃음을 짓던 그가 지그시 석원을 쳐다봤다.
“자네가 생각해낸 건가?”
석원은 대답 대신 입매를 끌어올리며 비어 있는 우춘일 사무총장의 술잔을 가득 채웠다.
“참고로 우호근이 주가 조작을 하는데 돈을 댄 쩐주 중 하나가 전진영 의원의 아들입니다.”
그러자 우춘일 사무총장의 눈이 번득였다.
“공정당 전 의원을 말하는 건가.”
“그렇습니다. 여당 4선 중진 의원 아들이 주가 조작에 가담했다고 하면 청와대와 여당의 입장이 상당히 곤란해지지 않겠습니까.”
총선 패배로 열세에 빠진 정국을 조금이나마 반전시킬 수 있는 수단을 찾은 우춘일 사무총장은 석원을 마주 보고 짙은 미소를 지었다.
“그렇겠구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