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lden Spoon Investment Portfolio RAW novel - Chapter (271)
금수저 투자백서 271화(271/283)
271. 맞습니다. 협박입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석원은 에릭 버나스의 안내를 받으며 푹신한 카펫이 깔린 고급스럽게 꾸며진 호텔 복도를 걸었다.
이내 복도 끝에 있는 미팅룸 앞에 멈춰선 에릭이 말했다.
“여깁니다.”
그가 작게 머리를 끄덕이는 것을 본 에릭이 가볍게 노크를 하고는 원목으로 된 문을 열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제일 먼저 맞은편에 뚫린 커다란 창문 너머로 넓게 펼쳐진 빅토리아 하버의 아름다운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미팅룸은 별다른 장식물 없이 모던하면서도 심플한 인테리어였다.
먼저 도착해 창문을 뒤에 두고 기다란 회의 테이블에 나란히 앉아 있던 상대가 석원이 일행과 함께 들어서는 걸 보고 몸을 일으켰다.
오늘 석원이 만나기로 한 상대는 바로 홍콩 최대 투자 회사로 명성이 높은 페레그린 증권사의 설립자이자 사장인 리처드 리였다.
홍콩 출신인 50대 후반의 리처드 리는 점잖은 느낌의 중년인으로 미국 MBA를 나와 젊은 시절엔 월가 투자은행에서 일하기도 한 실력있는 증권맨이기도 했다.
1988년 증권사를 처음 설립해 불과 5년 만에 홍콩내 주식발행 업무의 6분의 1을 독차지할 정도로 급성장하며 홍콩증권가에서 전설적인 인물이 된 게 그저 운이 좋아서 이룬 업적이 아니었다.
하지만 짧은 시간 공격적인 투자로 회사 덩치를 빠르게 키워 왔던 페레그린 증권은 레버리지를 잔뜩 써서 동남아시아 채권에 무리한 투자를 벌였다가 내년에 아시아를 덮치는 금융위기를 견디지 못하고 모래성처럼 무너져 버릴 운명이었다.
‘리스크는 무시한 채 오직 수익률만 보고 동남아 기업들의 정크본드 투자에 집중했으니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 수도 있지.’
그처럼 회귀해서 과거로 돌아온 것이 아니라면 투자는 가위바위보 같은 거였기에 아무리 확신이 있고 지금까지 큰 수익을 안겨줬더라도 언제든 잘못될 수 있는 법이었다.
‘어쩌면 전설이라고 불리며 칭송받는 페레그린 증권의 성공이 애초부터 호황기에 만들어진 신기루였을지도 모르지.’
그렇게 잠시 상념을 떠올리던 석원은 에릭의 말에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이분이 엘도라도 펀드 설립자이신 박석원 대표님이십니다.”
“박석원입니다.”
석원이 먼저 손을 내밀며 유창한 영어로 말했다.
그러자 리처드 리 역시 손을 맞잡고 가볍게 악수를 나누면서 흥미로운 시선으로 그를 바라봤다.
“월가에서 가장 핫한 투자자를 이렇게 만나게 돼서 반갑습니다.”
“저도 홍콩 증권가의 전설이신 리처드 리 사장님을 뵙게 되어서 기쁘군요.”
인사치레인 걸 모르지 않았지만 석원의 말에 리처드 리는 얼굴 가득 미소를 지었다.
영란은행을 무너뜨린 월가의 거물 투자자인 조지 해밀턴이 극찬하고 얼마 전에도 뉴욕 증시의 폭락을 정확히 맞춰 크게 화제가 됐던 월가의 신성인 석원이 그를 띄워주니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었다.
리처드 리는 한결 부드러워진 태도로 함께 온 사람들을 소개했다.
“여기 이 친구는 우리 회사 부사장인 더글라스입니다.”
그러자 약간 날카로운 인상의 백인 사내가 손을 내밀며 말했다.
“더글라스 허드입니다. 박 대표님의 명성은 많이 들었습니다.”
“과장된 것들이 많으니까 다 믿지는 마십시오.”
석원이 가볍게 농담하며 그와 악수했다.
오랫동안 영국의 식민지로 있었던 만큼 홍콩에선 영어가 일상적으로 쓰였기에 별도의 통역이 없어도 서로 대화를 나누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렇게 부드러운 분위기 속에 인사를 나눈 양측은 기다란 회의 테이블을 가운데 두고 마주 보는 형태로 앉았다.
그러자 단정한 유니폼을 입은 여종업원이 한쪽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커피와 차를 각자 기호에 맞춰 놓아주고는 밖으로 나갔다.
깊은 향이 풍기는 보이차를 한 모금 마시고 찻잔을 내려놓은 리처드 리 사장이 석원의 왼편에 자리한 에릭에게 눈길을 주며 먼저 입을 열었다.
“에릭 저 친구가 운용하는 주피터 펀드의 뒷배가 어딘지 궁금했었는데. 그게 엘도라도였을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일부러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운용했으니 그러셨을 겁니다.”
리처드 리 사장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엘도라도 펀드의 성과가 알려지면서 아무래도 주시하는 눈들이 많아졌으니. 포지션을 숨기기 위해 페이퍼 컴퍼니를 만든 거겠지요.”
정답은 아니었으나 포지션을 감추려고 한 건 맞았기에 석원은 굳이 부정하진 않았다.
잠시 대화를 나누며 분위기가 어느 정도 무르익자 리처드 리 사장이 자연스럽게 본론으로 넘어갔다.
“그런데 홍콩까지 오셔서 날 보자고 한 용건이 뭔지 궁금하군요. 혹시 홍콩과 아시아 지역에 본격적으로 진출하려는 겁니까?”
리처드 리 사장의 얼굴에 살짝 기대감이 스쳤다.
홍콩 최대 투자사인 페레그린 증권이었지만 지난 몇 년간 엄청난 수익률을 내며 월가에서도 주목받고 있는 엘도라도 펀드와 손을 잡게 된다면 한 단계 더 도약하는 계기가 될 수 있었기에 그럴 만도 했다.
특히나 급격한 성장을 한 이후 최근 조금 정체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기에 더욱 기대감이 컸다.
그런 기색을 읽은 석원은 담담하게 대꾸했다.
“아시아 시장에 관심이 많은 건 맞지만 오늘은 그것 때문에 온 것이 아닙니다.”
“흐음. 그렇습니까.”
리처드 리 사장이 약간 실망한 표정을 지었으나 석원은 못 본 척 흘려넘겼다.
그러고는 부드럽지만 사무적인 어투로 말했다.
“최근 합작사를 세운 동해그룹을 도와 한국에 있는 백화점을 상대로 적대적 M&A를 진행 중이시지요?”
“맞습니다.”
리처드 리 사장이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앉아 있다가 뭔가 떠올린 듯 옆에 있는 더글라스 허드 부사장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 보니 주피터 펀드에서 미도파 백화점 지분을 가지고 있다고 하지 않았나?”
“5%를 보유 중입니다.”
허드 부사장이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블록딜을 제안했지만 계속 가격을 올리면서 간을 보더니 뒤통수를 치고 반대편에 있는 대흥그룹 쪽에 섰다는 것까지 떠올린 리처드 리 사장은 눈을 가늘게 뜨며 맞은편에 있는 석원을 봤다.
순간 가지고 있는 미도파 백화점을 넘기려고 하는 건가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속으로 머리를 가로저었다.
‘저 정도 되는 거물이 직접 전용기를 타고 홍콩까지 날아오기에는 사이즈가 너무 작은 딜이지.’
M&A로 인해 미도파 백화점 주가가 급등한 상태지만 프리미엄을 아무리 많이 쳐준다고 해도 1억 달러가 채 안 되는 거래였다.
그런데 겨우 그 정도 딜을 하려고 수백억 달러의 자금을 주무르는 석원이 직접 나서는 건 말이 안 됐다.
‘에릭 선에서 처리를 해도 충분한 일이지.’
거기다가 굳이 자신까지 만나자고 할 이유도 없었다.
다른 뭔가가 있다는 걸 알아차린 리처드 리는 상체를 바로 세우고는 석원을 슬쩍 떠봤다.
“엘도라도 펀드가 한국에 관심이 많은 줄 몰랐습니다. 그런 작은 일까지 다 파악하고 계시다니 솔직히 놀라운데요.”
그러자 석원이 대수롭지 않은 투로 대답했다.
“제가 태어나고 살고 있는 나라이니 관심이 없을 수가 없지요.”
“아. 그렇군요. 이름을 듣고 한국계인 건 알았지만 재미교포라고 생각했는데 한국 출생인 것은 미처 몰랐습니다.”
리처드 리가 더욱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조지 해밀턴 덕분에 의도치 않게 엘도라도 펀드가 월가에 알려지고 데브라와 한 인터뷰로 석원의 이름과 얼굴이 공개됐지만 개인적인 부분은 여전히 노출되지 않은 것들이 많았다.
‘설마하니 월가를 들썩이게 만든 펀드 소유자가 토종 한국인일 거라고는 생각 못 하는 선입견도 많이 작용했을 테지.’
이때까지만 해도 국제 금융시장에서 한국의 위상은 미미한 정도였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OECD 가입과 금융시장 개방 정책에 따라 종금사들을 중심으로 홍콩을 비롯한 동남아시아 지역에 적극 진출하고 있는 정도가 다였다.
‘그나마도 아시아 금융위기가 터지면서 직격탄을 맞고 처참한 실패로 끝나고 말았지만 말이야.’
그로 인해 종금사들이 막대한 손실을 입으면서 대한민국이 IMF 사태를 맞이하는데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석원은 앞에 있는 리처드 리를 똑바로 마주 보면서 말했다.
“그리고 미도파 백화점이 속한 대흥그룹의 박태홍 회장님이 제 아버지이시기도 합니다.”
생각지도 못한 말에 리처드 리 사장과 허드 부사장이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가급 적이면 끼어들지 않으려고 했는데 가족 일이니 그럴 수가 없더군요.”
“네? 아니.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리처드 리 사장은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 고개를 돌려 허드 부사장을 쳐다보면서 눈으로 이런 사실을 알고 있었냐고 물었다.
그러자 허드 부사장이 얼른 머리를 가로저었다.
하긴 알았다면 그에게 보고하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그렇다고 해도 이런 중요한 정보를 미리 파악하지 못하고 일을 벌인 것에 대해 리처드 리 사장은 질책하는 눈빛으로 허드 부사장을 노려봤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맞은 심정이었으나 큰 실수를 한 건 분명했기에 허드 부사장도 고개를 들지 못했다.
‘대체 일을 어떻게 처리했기에!’
욕설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석원 앞에서 야단을 칠 수는 없는 노릇인데다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리처드 리 사장은 짜증을 꾹 눌러 참고 표정을 가다듬었다.
역시 맨주먹으로 페레그린 증권이라는 기업을 일군 인물답게 금방 평정심을 되찾고는 석원을 향해 정중하게 말했다.
“대흥그룹과 그런 관계에 있는 건 미처 몰랐습니다.”
“그러시겠죠. 제 개인 신상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많이 없으니까요. 만약 알고도 이번 일을 벌인 거라면 자신을 너무 과신하신 것일 테죠.”
마지막 말에 리처드 리 사장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말씀이 너무 과한 것 같군요.”
“최대한 자제를 한 거였는데 그렇게 들렸다면 유감입니다.”
석원은 아랑곳하지 않고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상대를 도발했다.
그러자 모욕감을 느낀 리처드 리 사장의 얼굴이 울긋불긋해졌고 함께 온 허드 부사장도 표정을 딱딱하게 굳혔다.
오늘 만남을 주선한 에릭 역시 석원이 이렇게 세게 나올 줄은 몰랐는지 놀란 눈빛이었지만 염려보다는 흥미진진한 마음으로 대화를 지켜봤다.
화기애애했던 처음 분위기와 달리 미팅룸 안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은 가운데 석원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상대를 보며 말을 계속했다.
“잡설은 빼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죠. 험한 꼴 보지 않고 곱게 빠져나갈 기회를 드릴 테니까. 페레그린 증권이 동해그룹에 빌려준 채권을 전부 저희한테 넘기고 이번 일에서 완전히 손을 떼시죠.”
제안이 아니라 사실상 협박에 가까운 이야기였다.
“지금 뭐라고 했소!”
리처드 리 사장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언성을 높였다.
“저흴 겁박하는 겁니까!”
옆에 있던 허드 부사장 역시 발끈해 소리쳤다.
하지만 뒤로 몸을 기댄 채 팔짱을 낀 석원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맞습니다. 협박입니다.”
“허어.”
리처드 리 사장은 헛웃음을 내뱉다가 이내 사납게 표정을 바꿔 석원을 노려봤다.
“더 이상 이야기를 나눌 이유가 없을 것 같으니 이만 일어나 보겠소.”
그러고는 불쾌감을 온몸으로 드러내며 리처드 리 사장은 곧바로 몸을 일으켰다.
“지금 이대로 나가시면 크게 후회하실 텐데요.”
석원의 말에 리처드 리 사장이 가소롭다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
여태껏 회사를 키워오면서 얼마나 많은 압박과 위기를 넘겨왔던가.
고작 이 정도쯤은 아무런 위협도 되지 못했다.
리처드 리 사장이 어디 해보라는 것처럼 턱을 치켜 올리자 석원이 느긋한 몸짓으로 말했다.
“알아보니 페레그린 증권이 구리 선물에 꽤 많은 포지션을 가지고 있더군요.”
“……!”
“최근 구리 가격이 하락 중이라 손해를 조금 보고 있는 걸로 아는데. 여기서 제가 선물을 대량매도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순식간에 리처드 리 사장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