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lden Spoon Investment Portfolio RAW novel - Chapter (276)
금수저 투자백서 276화(276/283)
276. 끝까지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모양이네
몇 시간 뒤.
우호근은 서울 시내에 위치한 고급 일식당 별실에서 권승섭 동해상호신용금고 사장과 마주 앉아 있었다.
싱싱한 생선회와 먹음직스러운 요리들이 한 상 가득 차려져 있었지만 거의 손을 대지 않은 채였다.
영문도 모른 채 갑자기 불려 나온 권승섭 사장은 우호근의 이야기를 듣고는 화들짝 놀라 눈을 크게 부릅떴다.
“그러니까 절 보고 부정 대출을 하라는 말씀이십니까?”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는 권승섭 사장과 달리 우호근은 태연하게 손에 든 술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권 사장님도 아시다시피 대흥그룹과 지분 싸움을 벌이느라 자금이 많이 필요한데 조달이 쉽지 않은 상황입니다.”
계열사인 동해상호신용금고 역시 처음부터 담보 대출 형식으로 자금을 밀어주고 해주고 있었기에 상황을 잘 알고 있었다.
“돕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습니다만 이미 2백억이나 대출이 나가 있어 더 이상은 어렵습니다.”
권승섭 사장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페이퍼 컴퍼니를 활용한 편법을 쓰려는 것이지 않습니까.”
편법이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하지만 페이퍼 컴퍼니를 이용한 우회 대출은 명백한 불법 행위였다.
‘갑자기 만나자는 연락을 받았을 때부터 쎄한 느낌이 들더라니.’
권승섭 사장은 똥이라도 밟은 기분을 느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우호근은 그룹을 승계받을 것이 확실한 상대였다.
그런 사람한테 괜히 잘못 보였다간 연임은 고사하고 임기를 다 못 채우고 그만둬야 될지도 몰랐다.
일단 이렇게 불려와서 이야기를 들은 이상 회사를 나갈 생각이 아니라면 절대 안 된다고 거부할 수는 없었기에 권승섭 사장은 애써 표정을 관리하며 조심스레 물었다.
“얼마 정도나 필요하신 겁니까?”
“가능한 많은 자금을 끌어오고 싶지만 신용금고 사정을 고려해서 딱 3백억만 더 밀어줬으면 합니다.”
“3, 3백억이라고 하셨습니까.”
2~30억 정도는 어떻게든 마련할 방법을 찾아보려고 했던 권승섭 사장은 예상을 훌쩍 뛰어넘는 액수에 기겁하며 입을 벌렸다.
하지만 우호근은 권승섭 사장이 놀라는 걸 보면서도 무시한 채 재촉했다.
“상황이 급하니 가능한 빨리 돈을 만들어 줬으면 합니다.”
말만 들으면 권승섭 사장이 벌써 요구를 받아들인 것 같은 태도였다.
권승섭 사장은 이마에서 진땀을 흘리며 곤혹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정상적인 대출도 아니고…….갑자기 그만한 액수를 마련하긴 어렵습니다.”
에둘러 거절하자 대번에 우호근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걸 본 권승섭 사장이 속으로 뻘뻘 땀을 흘리며 황급히 다시 말을 바꿨다.
“대신 30억, 아니 50억 정도는 만들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것도 엄청나게 노력한 거였으나 우호근은 영 성에 안 차는 듯 마뜩잖은 얼굴을 하고는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권 사장님.”
“……예. 말씀하십시오.”
사나운 눈빛을 마주한 권승섭 사장은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지금 전 부탁을 하러 온 것이 아닙니다.”
똑바로 쳐다보며 노골적으로 압박을 가하자 권승섭 사장은 더욱 곤란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마치 승냥이 앞의 토끼가 따로 없는 모습이었다.
그런 권승섭 사장을 보며 우호근이 강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길게 이야기하지 않겠습니다. 보름을 드릴 테니 그 안에 아까 말씀드린 페이퍼 컴퍼니로 대출을 실행해 주십시오.”
“하, 하지만 자칫 문제가 되면 상황이 심각해질 수도 있는데 회장님께서 허락하신 일입니까?”
그러자 우호근이 눈썹을 살짝 꿈틀거렸다.
“아버지한테 이번 M&A에 관한 전권을 넘겨받은 걸 모르시진 않을 텐데요.”
우호근은 일부러 불쾌한 티를 내며 두리뭉실하게 대꾸했다.
사실은 아직 우용갑 회장한테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그런 걸 말해줄 필요는 없었다.
미리 허락도 받지 않고 이런 짓을 벌이다니 우용갑 회장이 안다면 노발대발할 일이었지만 또다시 석원한테 당했다는 사실에 눈이 돌아간 우호근은 뒷일은 무시한 채 오직 임시주총에서 이겨 미도파 백화점 경영권을 가져오는 것만 생각했다.
‘나중에 들키더라도 결과만 좋다면 용서받을 수 있을 거야.’
지난번에 외숙부한테 돈을 빌렸을 때도 우용갑 회장과 상의하지 않고 독단으로 일을 처리했지만 오히려 잘 했다고 칭찬받지 않았던가.
우호근은 그렇게 속으로 되뇌며 애써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했다.
이런 사정을 알 리가 없던 권승섭 사장은 우용갑 회장이 허락한 일이라고 받아들이고는 더욱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처지에 빠졌다.
회사를 그만둘 생각이 아니라면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다.
고민을 거듭하던 권승섭 사장은 이내 고개를 들어 우호근을 쳐다보며 마지못해 입을 뗐다.
“……알겠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하겠습니다.”
그러자 우호근이 굳어 있던 표정을 풀며 비어 있는 권승섭 사장의 술잔에 직접 술을 채워줬다.
“잘 생각했습니다. 이번에 권 사장이 적극적으로 도와준 건 잊지 않고 아버지한테 얘기해드릴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감사합니다.”
차마 건네지는 술잔을 거부할 수 없었던 권승섭 사장은 어두운 얼굴로 힘없이 대답했다.
우용갑 회장한테 눈도장을 받는 건 둘째치고 제발 이번 일이 문제가 되지 않길 바랄 뿐이었다.
그리고 얼마 뒤.
식사를 끝내고 나온 우호근은 권승섭 사장의 배웅을 받으며 먼저 대기하고 있던 승용차에 올라탔다.
우호근이 탄 벤츠가 멀어지는 걸 복잡한 표정으로 잠시 바라보던 권승섭 사장은 이내 몸을 돌려 기사가 열어준 차문을 통해 국산 대형 세단 뒷좌석에 앉았다.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처음부터 몰래 지켜보는 시선이 있었다.
도로 건너편에 정차해 있는 은색 구형 소나타 운전석에 얇은 점퍼를 입은 사내가 앉아 우호근과 권승섭 사장이 헤어지는 장면을 놓치지 않고 모조리 카메라 렌즈에 담았다.
그러고는 망원렌즈가 달린 카메라를 눈에서 떼며 입맛을 다셨다.
“쳇. 돈이 좀 될만한 사진을 건지나 했더니. 아무래도 오늘은 꽝인 것 같네.”
빵과 우유로 부실하게 저녁을 때우며 차 안에서 한참을 죽치고 있다가 겨우 찍은 사진이 딱히 돈이 될 것 같지 않자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사내는 카메라를 조수석에 내려두고는 서둘러 시동을 걸어 앞서 출발한 우호근의 차를 뒤쫓았다.
* * *
며칠 뒤.
구찌 로고가 들어간 붉은색 넥타이를 한 석원은 사장실 한쪽에 있는 통유리창 앞에 서서 바깥 풍경을 내다보며 우춘일 새시대 민족회의 사무총장과 통화를 하고 있었다.
[이번 주 안으로 검찰이 보성통신 주가조작 사건 재수사에 들어갈 걸세.]기다리던 소식에 석원이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여러 가지로 바쁘실 텐데 신경을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자 우춘일 사무총장이 기분 좋게 웃으면서 말했다.
[하하하. 아닐세. 이번 일로 청와대와 여당을 몰아세우면서 총선 패배로 어수선했던 당내 분위기를 추스르는 계기로 삼을 수 있었네. 오히려 내가 자네한테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은 마음이라네.]살짝 목소리를 낮춘 우춘일 사무총장이 은근한 어조로 친근감을 드러냈다.
[그리고 우리 사이에 이 정도 일은 얼마든지 해줄 수 있지 않겠나.]“그렇게 생각해주신다면 저야 감사할 따름이지요.”
석원이 겸손하게 대답했다.
아직 젊은 나이인데도 가볍게 나대지 않고 적절히 선을 지키는 모습에 우춘일 사무총장은 더욱 마음에 들어했다.
[아. 그리고 지난번 참외 선물은 잘 받았다고 총재님께서 전해달라고 하셨네.]“약소하지만 그래도 마음에 드셨다니 다행입니다.”
[지난번에 한 번 미루었던 약속을 다시 잡으라고 하셨는데 언제쯤 시간이 괜찮나?]그러자 석원의 눈에 이채가 반짝였다.
차기 대통령이 될 인물을 만날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였으니 당연했다.
‘더군다나 IMF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중복, 과잉 투자를 해소하기 위한 대기업들 간의 소위 빅딜(Big Deal)이 청와대 주도로 이루어진다는 걸 생각하면 더욱 김재춘 총재와 인연을 맺어 두는 것이 중요하지.’
이때 이루어진 빅딜은 자율적인 것이 아니라 청와대에 의해서 반강제로 실시됐기에 재벌 그룹들에게 엄청난 상처와 영향을 끼쳤다.
‘반대로 생각하면 알짜 사업을 헐값에 가져올 수 있는 다시 없는 기회이기도 하지.’
손해를 보는 그룹 입장에서는 이보다 억울하고 화가 나는 일이 없을 터였다.
오죽했으면 빅딜로 인해 애지중지 키우던 반도체 사업을 통째로 현우에 넘겨주고 피눈물을 흘려야 했던 TG 그룹은 그 뒤로 다시는 반도체 쪽으로는 고개도 돌리지 않았을 정도였다.
그렇게 TG전자 반도체 사업부를 가져가서 덩치를 키운 현우 전자 역시 끝이 좋지는 않았다.
곧이어 벌어진 D램 치킨게임에서 계속 누적되는 천문학적인 손실을 감당하지 못하고 결국 부도를 내고 말았다.
그 뒤로 오랫동안 법정관리를 받아야 했던 걸 생각하면 강제로 회사를 넘겨줘야 했던 것이 오히려 TG 그룹에 다행이었을 수도 있었다.
‘물론 나중에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다시 화려하게 부활하게 되지만 그건 한참 시간이 지난 이후의 일이지.’
상념을 지운 석원은 손에 든 휴대폰을 고쳐 쥐며 말했다.
“언제든지 말씀만 하시면 일정을 비워두겠습니다.”
[알겠네. 그러면 총재님한테 말씀드리고 다시 연락을 해주겠네.]“감사합니다.”
[더 통화하고 싶지만 본 회의에 들어가야 해서 이만 끊도록 하세.]“예.”
전화를 끊은 석원은 창밖을 바라보면서 조금 전 우춘일 사무총장과 나눈 대화를 떠올렸다.
“김재춘 대통령…….아니, 아직은 총재지. 아무튼 그 사람을 직접 만날 걸 생각하니 벌써부터 기대가 되네.”
한쪽 손으로 턱을 매만지며 어떻게 하면 김재춘 총재의 호감을 사서 더 깊은 인연으로 만들지 고심하고 있을 때 책상 위에 설치된 키폰 벨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뒤로 돌아서서 책상으로 걸어간 석원이 버튼을 누르고 말했다.
“무슨 일이에요.”
[최호근 부장님 전화입니다.]키폰 스피커 너머에서 나성미가 대답했다.
“연결해요.”
[네.]얼마 있지 않아 키폰이 다시 울리자 석원은 의자를 끌어당겨 책상 앞에 앉으며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나예요.”
[보고드릴 일이 있어서 연락을 드렸습니다.]“뭔지 말해봐요.”
[오후장이 시작되는 것과 함께 매수 주문이 급격하게 들어오면서 횡보하던 미도파 주가가 다시 7만 2천 원대를 깨며 크게 오르고 있습니다.]본능적으로 심상치 않은 느낌이 든 석원은 눈썹을 찡그렸다.
“매수 물량이 얼마나 돼요?”
[불과 1시간 남짓 사이에 나온 것만 해도 이십만 주가 넘습니다.]그 정도 물량이라면 누군가 큰 손이 대량 매수를 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석원은 황급히 마우스를 움직여 모니터에 미도파 백화점 주가를 띄웠다.
그러자 정말로 오후장부터 매수 주문이 쏟아지면서 갑자기 커다란 양봉을 만들며 주가가 쭉 올라가고 있었다.
“누가 매수를 하고 있는지 알아봤어요?”
[지금 확인 중에 있습니다만 아무래도 며칠 잠잠하던 동해그룹에서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석원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홍콩 쪽 자금줄을 끊어놨으니 한동안 주춤하며 기세가 한풀 꺾일 줄 알았는데 예상이 빗나간 것에 석원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머릿속으로 빠르게 생각을 정리한 석원은 수화기를 단단히 부여잡았다.
“우보 재단과 방직 계좌에 들어있는 자금으로 우리도 빨리 대응하도록 해요.”
[돈을 얼마나 넣을까요?]“일단은 백억을 밀어 넣고 상황을 봐서 그만큼 더 사들여요.”
[알겠습니다.]지시를 내리자 최호근 부장이 곧바로 대답했다.
수화기를 내려놓은 석원은 그새 또 가격이 올라 7만 3천 원을 넘으려고 하는 미도파 주가를 보며 쯧하고 혀를 찼다.
“끝까지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모양이네. 그래봤자 죽기 직전에 하는 마지막 발악일 뿐이야.”
석원의 눈빛은 한겨울의 서리처럼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상대의 행동에 위협을 느끼기는커녕 이미 판이 다 만들어져서 마지막 숨통만 끊으면 되는데 불필요한 돈을 쓰게 된 것이 귀찮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