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lden Spoon Investment Portfolio RAW novel - Chapter (278)
금수저 투자백서 278화(278/283)
278. 지금 바로 만나세. 어디가 좋겠나.
짙은 어둠이 깔린 한강 고수부지 야외 주차장은 텅 빈 채 구형 소나타 한 대만이 덩그러니 세워져 있었다.
차창 유리를 살짝 내려둔 채 엔진을 끄고 운전석에 혼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던 이철균은 환한 전조등 불빛을 밝히며 승용차 한 대가 야외 주차장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고 눈에 이채를 띠었다.
이내 달빛에 모습을 드러낸 승용차는 석원의 애마인 BMW 540i였다.
BMW가 약간 거리를 두고 옆에 멈춰 서자 이철균이 차문을 열고 내렸다.
날카로운 눈빛으로 주위를 살핀 이철균은 반쯤 태운 담배를 시멘트 바닥에 버리고는 구두로 비벼서 껐다.
그러고는 걸음을 옮겨 BMW 차문을 열고 조수석에 올라탔다.
어둠 속에서 운전석에 앉아 있던 석원이 고개를 돌려 이철균을 쳐다보며 입을 뗐다.
“말했던 것보다 하루 더 빨리 연락을 했네요.”
“급하신 것 같아서 좀 서둘러 더듬이를 움직였습니다.”
이철균이 어깨를 으쓱였다.
“결과가 빨리 나온 건 좋은데 내용이 부실한 건 아니겠죠?”
“다른 건 몰라도 밥값은 확실히 하니까 그런 염려는 안 하셔도 됩니다.”
그러면서 이철균이 점퍼 지퍼를 내리고는 안에서 반으로 접힌 서류봉투를 하나 꺼내 건넸다.
석원이 안에 들어있는 내용물을 빼내자 서류 몇 장과 사진들이 나왔다.
그중에서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건 고급 일식당 앞에서 우호근이 누군가와 찍힌 사진이었다.
“이건?”
석원이 의아한 얼굴로 쳐다보자 이철균이 차분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동해상호신용금고 사장인 권승섭입니다. 일주일 전쯤 우호근한테 붙여둔 녀석이 찍은 사진인데 말씀을 듣고 생각나서 뒤를 한번 캐봤더니 아주 재미있는 것이 나오더군요.”
“그게 뭐죠?”
석원이 흥미를 보이며 물었다.
“함께 첨부한 서류에도 나와 있지만 동해 상호신용금고에서 일진상사라는 곳에 320억 원을 대출해준 걸 알 수 있으실 겁니다.”
“그게 내가 알아보라고 한 것과 무슨 상관이 있는 거죠.”
“얼핏 보기에는 정상적인 대출 같지만 조금만 깊이 들여다보면 수상한 구석이 한두 개가 아니더군요.”
“구체적으로 어떤 걸 말하는 거예요.”
이철균이 약간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우선 일진 상사는 지금까지 동해상호신용금고와 전혀 거래가 없던 회사입니다. 그런 곳에 1~2억도 아니고 무려 320억을 단번에 대출해주다니 거기서부터 뭔가 수상한 냄새가 풀풀 나지 않습니까? 더군다나 담보 대출도 아니고 신용으로만 말입니다.”
확실히 정상적이라면 대출이 나갈 수가 없는 상당히 이례적인 경우였다.
‘비정상적인 행위 뒤에는 항상 구린 것이 숨겨져 있기 마련이지.’
이철균이 꼬리를 제대로 잡았다는 느낌에 그는 더욱 이야기에 집중했다.
“그래서 조금 더 파봤더니 홍콩에 주소를 두고 있는 무역회사인데. 설립한 지 십여 년이 넘은 곳이긴 하지만 지난 몇 년간 매출이 거의 없이 사실상 서류상으로만 남아 있는 회사였습니다.”
석원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페이퍼 컴퍼니라는 거네요.”
이철균이 정답이라는 듯 작게 머리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그리고 동해상호신용금고에서 320억의 대출이 실행돼 홍콩으로 송금된 다음 날부터 동해그룹이 다시 미도파 백화점 주식을 대량 매수하기 시작했더군요.”
“……!”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딱 맞아 떨어지지 않습니까.”
석원은 아래로 시선을 내려 사진과 함께 있던 서류들을 차분히 살폈다.
이야기대로라면 매출이 없는 회사였지만 대출 서류에는 연간 6천만 달러 이상의 매출을 올리고 영업 이익이 수백만 달러인 견실한 회사로 나와 있었다.
이철균의 말이 사실이라면 누군가가 거액의 불법 대출을 받기 위해 서류를 가짜로 꾸민 거였다.
서류를 훑어보는 석원에게 이철균이 말을 덧붙였다.
“더욱 의심스러운 건 대출 신청부터 심사와 승인까지 겨우 나흘밖에 걸리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러자 석원이 미간을 좁히며 고개를 들었다.
“그게 정말이에요?”
“대출 부서 직원을 통해 확인한 사실이니 틀림없을 겁니다.”
이철균이 자신 있게 대답했다.
복사본이긴 하지만 대외비인 대출 관련 서류를 어떻게 입수했는지 궁금했었는데 이철균의 이야기에서 의문이 풀렸다.
한쪽 손으로 매끈하게 면도한 턱을 매만지면서 석원이 말했다.
“이만한 액수의 대출이 이렇게 부실하고 빠르게 처리됐다는 건 처음부터 계획적으로 이루어진 불법 대출이었다는 뜻이겠네요.”
“맞습니다. 그것도 최고위층에서 내려진 오더였을 가능성이 클 겁니다.”
석원은 우호근과 권승섭 사장이 찍힌 사진을 내려다보면서 머리를 끄덕였다.
갑자기 돈이 어디서 나왔는지 의문이 깨끗하게 풀리는 기분이었다.
“한 가지 더 알아낸 것이 있는데 어제 우호근이 명동 사채업자인 유정일 사장을 만났습니다.”
귀에 익은 이름에 석원이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대구 출신인 유 사장을 말하는 거예요?”
이철균이 의외라는 듯한 쪽 눈썹을 치켜올리며 그를 쳐다봤다.
“그렇습니다. 말씀하시는 걸 보니 유 사장이 누군지 잘 알고 계신 모양이군요.”
천성득 회장만큼은 아니었지만 수백 억대의 돈을 굴리며 명동 바닥에서 나름 이름이 알려진 인물이었다.
특히나 올해 7월로 예정된 코스닥(KOSDAQ) 출범이후에는 주가조작을 하는 작전 세력에 돈을 대주는 쩐주 역할을 하며 상당히 큰돈을 번 것으로 여의도 증권가에서 유명했기에 그가 모를 수가 없었다.
‘그러고 보니 우정일 사장 아들이 우호근하고 친구였지.’
머릿속에서 퍼즐이 맞춰진 석원은 가소롭다는 듯 피식 웃음을 흘렸다.
“동해 유량에 대한 공격을 방어하면서 임시주총까지 최대한 지분을 끌어모으려면 돈이 더 필요할 테니 자금을 빌리려고 한 거겠죠.”
홍콩 페레그린 말고 다른 외부 투자자를 찾은 거였다면 살짝 귀찮아질 뻔했지만 불법 대출과 사채를 써서 말 그대로 영끌을 해서 돈을 모은 거라면 크게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마무리를 더 쉽게 지을 수도 있겠네.’
이철균은 혼자 생각에 잠긴 석원을 쳐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이 정도면 만족스러우신지 모르겠습니다.”
“정말 잘 해줬어요.”
석원이 흡족한 얼굴로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역시 영입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러자 이철균도 살짝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말했다.
“더 캐면 나올 것이 상당히 많을 거 같은데 계속 파볼까요?”
석원은 잠시 고민하다 이내 머리를 가로저었다.
“임시 주총까지 이제 얼마 안 남았으니까 더 확실하고 빠르게 마무리할 수 있는 곳에다가 뒷일을 맡기기로 하고 이만 손을 떼도록 해요.”
“알겠습니다.”
이철균은 군말없이 지시를 받아들였다.
석원은 사진과 서류를 무릎 위에 내려놓고는 품 안에서 두툼한 돈 봉투를 꺼냈다.
“보너스예요.”
“감사합니다.”
사양하지 않고 넙죽 대답한 이철균이 돈 봉투를 얼른 받아 챙겼다.
“그럼 더 하실 말씀이 없으시면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렇게 해요.”
이철균은 앉은 채 가볍게 목례를 하고는 차 문을 열고 밖으로 내렸다.
차 안에 혼자 남게 된 석원은 입가에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페이퍼 컴퍼니를 이용한 불법 대출로 자금을 끌어다 쓰다니 어지간히 급했나 보네. 하지만 그게 스스로 명을 재촉하는 일이었다는 걸 곧 깨닫게 될 거야.”
석원은 휴대폰을 꺼내 저장된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연결음이 들리고 얼마 있지 않아 곧 새시대민족회의 우춘일 사무총장이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사무총장님. 저 박석원입니다.”
[오. 박 사장이 이 시간에 어쩐 일인가?]반가워하는 목소리를 들으며 석원이 무릎 위에 올려둔 사진을 집어 들었다.
“늦은 시간에 전화를 드려서 실례를 한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우춘일 사무총장이 호탕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단순히 안부 인사를 하러 전화를 한 건 아닐 테고. 무슨 일인가?]그는 사진에 찍힌 우호근을 쳐다보면서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
“사무총장님께서 들으시면 흥미로워하실 일이 하나 있어서 연락을 드렸습니다.”
[그게 뭔가?]“재벌 그룹 오너 일가가 계열사 신용금고를 이용해 수백억 원의 불법 대출을 받은 일이 있다고 합니다.”
한순간 휴대폰 너머에서 정적이 흘렀다.
우춘일 사무총장은 웃음기를 지우고 진지해진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동해그룹을 말하는 건가?]“그렇습니다. 마침 내일 국회에서 기재부를 상대로 한 대정부 질문이 예정된 걸로 아는데. 거기서 이걸 공론화시킨다면 꽤 이목을 끌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우춘일 사무총장이 예상대로 미끼를 덥석 물었다.
[의혹만 가지고 국회에서 섣불리 얘기를 꺼냈다가는 오히려 망신만 당할 수도 있네.]“설마 제가 아무런 증거도 없이 연락을 드렸겠습니까.”
[증거가 있단 말인가?]“물론입니다. 비록 사본이지만 동해 상호신용금고 내부 대출 서류 정도면 빼도박도 못할 확실한 증거가 되지 않겠습니까.”
[지금 바로 만나세. 어디가 좋겠나.]석원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여유롭게 대답했다.
“오진암에 연락해서 별채를 비워두라고 하겠습니다.”
[알겠네. 그럼 한 시간 뒤에 보세.]“그러시죠.”
통화를 끝낸 석원은 손에 들린 사진에 찍힌 우호근을 보면서 차갑게 혼잣말을 내뱉었다.
“이건 아무리 비싼 변호사를 쓴다고 해도 집행유예를 받기 쉽지 않을 것 같은데. 진짜로 감방에 들어가게 생겼네. 뭐 다 자업자득이지.”
* * *
다음날 오후.
점심 약속을 끝내고 돌아온 우용갑 회장은 밀려오는 식곤증에 잠시 소파에 몸을 기대고 앉아 눈을 붙이고 있었다.
그때 노크를 하고 들어온 여비서가 그를 조심스럽게 깨웠다.
“회장님.”
“으음…… 무슨 일이야.”
우용갑 회장이 실눈을 뜨면서 잠이 덜 깬 목소리로 웅얼댔다.
“전 실장님이 드릴 말씀이 있으시다고 합니다.”
한참 단잠을 자다가 깨서 그런지 살짝 짜증 섞인 표정을 지은 우용갑 회장이 끙하고 흐트러진 자세를 바로했다.
“들어오라고 해. 아 그리고 잠 좀 깨게 커피 한 잔 타오고.”
“예.”
여비서가 나가고 얼마 있지 않아 전해철 비서실장이 들어와 목례를 했다.
“앉게.”
우용갑 회장은 턱으로 오른편 소파를 가리켰다.
전해철 비서실장이 자리에 앉자 우용갑 회장은 자다가 일어난 탓에 약간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할 이야기가 있다는 게 뭔가?”
그러자 전해철 비서실장은 상체를 꼿꼿하게 세우고는 사뭇 진지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우 상무가 새로 찾았다는 홍콩 투자자에 대해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또 그 이야기인가.”
우용갑 회장이 지겹다는 듯 눈썹을 찌푸렸다.
전해철 비서실장은 그런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몸을 앞으로 당겨 앉으며 말했다.
“제가 따로 조사를 해봤는데 새로운 투자자라고 하는 곳의 정체가 상당히 의심스럽습니다. 홍콩 쪽에 수소문을 해봤지만 큐빅 캐피탈이라는 회사를 아는 사람이 없고 회사 주소가 바하마로 되어 있는 것까지 수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우 상무가 홍콩에 있을 때 인연이 닿은 곳이라고 하지 않았나.”
우용갑 회장이 시큰둥한 얼굴로 대꾸했다.
“그리고 소수의 재력가들이 돈을 내서 만든 사모펀드라고 하니까 아는 사람이 적을 수도 있지.”
뭐하러 그런 사소한 걸 따지냐는 것처럼 대수롭지 않아하는 태도였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이 정도 자금을 움직이는 곳이라면 아는 사람이 몇몇은 있어야 정상인데 이름조차 모른다는 것이 너무 이상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얼굴조차 본 적이 없고 오직 우 상무하고만 소통이 이루어지는 것도 걸리고 말입니다.”
이야기를 듣고 있던 우용갑 회장은 떨떠름한 시선으로 전해철 비서실장을 쳐다봤다.
“지금 우 상무가 없는 투자자를 있다고 나한테 사기라도 치고 있다는 건가?”
전해철 비서실장은 입을 다문 채 무언의 긍정을 표시했다.
그 모습에 우용갑 회장이 눈가를 찡그리며 버럭 화를 냈다.
“우리가 투자를 하는 것도 아니고 거꾸로 돈을 받는 건데 그런 거짓말을 왜 하겠어! 그리고 설사 거짓말이라고 해도 호근이 놈이 한두 푼도 아니고 수백억이나 되는 돈을 어떻게 마련해서 가져오겠냔 말이야.”
그 부분에 대해서는 전해철 비서실장 역시 의문이었기에 아무런 반박을 하지 못했다.
한차례 성질을 부린 우용갑 회장이 착 가라앉은 눈빛으로 그를 응시했다.
“내가 자넬 신임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넘지 않아야 될 선은 지키도록 하게.”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였다.
충고를 제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또다시 아들을 감싸는 모습에 전해철 비서실장은 내심 깊게 실망하며 마지못해 고개를 숙였다.
“……예.”
“더 할 말이 없으면 그만 나가 봐.”
우용갑 회장이 차가운 태도로 문 쪽을 향해 턱을 까닥였다.
“……실례했습니다.”
전해철 비서실장이 막 일어나려던 찰나.
문이 벌컥 열리며 비서실 직원이 노크도 하지 않고 황급히 안으로 뛰어들어왔다.
안 그래도 심기가 불편하던 우용갑 회장은 눈썹을 대뜸 치켜올리면서 버럭 언성을 높였다.
“자넨 노크도 할 줄 모르나!”
“죄. 죄송합니다.”
얼굴이 새하얗게 된 직원은 호통 소리에 어깨를 움츠렸다가 이내 용건을 떠올리곤 고개를 들었다.
“큰일 났습니다! 조금 전 국회에서 대정부 질문을 하던 중에 동해 상호신용금고가 유령 회사를 이용해 300억이 넘는 미도파 백화점 지분 매수 자금을 불법 대출해줬다는 폭로가 나왔다고 합니다.”
“뭐야!”
우용갑 회장이 곧바로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와 동시에 전해철 비서실장은 이야기를 듣자마자 불길한 예감이 맞았다고 생각하며 두 눈을 질끈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