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lden Spoon Investment Portfolio RAW novel - Chapter (280)
금수저 투자백서 280화(280/283)
280. 그런 거면 제때 찾아갔어야지요. 아님 일을 제대로 하시던가요.
영등포에 위치한 동해그룹 본사 앞에 검은색 벤츠 대형 세단 한 대가 미끄러지듯 다가와 멈춰 섰다.
조수석에서 나온 한지성이 얼른 뒷좌석 차 문을 열고 옆으로 비켜서자 네이비색 맞춤 정장에 행커 치프로 포인트를 준 석원이 긴 다리를 뻗으며 모습을 드러냈다.
길쭉한 상자를 세워 놓은 것처럼 투박하게 지어진 높은 본사 건물을 가만히 서서 잠시 올려다 본 석원은 무표정한 얼굴로 다시 고개를 내렸다.
“그럼 가볼까.”
석원이 성큼 앞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증감원 비리 스캔들과 보성통신 주가조작 그리고 최근 터진 동해상호신용금고 불법 대출 사건까지 연이은 악재로 인해 뜨겁게 타올랐던 지분 싸움이 주춤하며 다시 소강상태를 이루고 있었다.
하지만 동해그룹에서 요구한 임시 주총이 다음 주로 예정된 가운데 두 그룹 사이에는 여전히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적진 한복판으로 들어가는 거였지만 인조 대리석을 깔아 고급스럽게 꾸며진 건물 로비로 들어서는 석원은 위축되는 기색 하나 없이 아주 당당했다.
석원은 수행 비서인 한지성을 대동한 채 곧장 입구 근처에 있는 안내 데스크로 향했다.
그러자 밝은색 유니폼을 입고 서 있던 여직원 두 사람 가운데 한 명이 미소를 지으며 친절하게 말을 걸었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우용갑 회장님을 만나러 왔습니다.”
“예?”
담담하게 내뱉은 석원의 말에 여직원이 순간 눈을 깜빡이며 당황했다.
“대흥 창투 박석원이 왔다고 전하면 아실 겁니다.”
여직원은 여전히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 채 어찌할 줄 몰라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 그러니까 회장님을 만나러 오셨다고요.”
석원이 작게 머리를 끄덕이자 여직원은 뭐라고 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일단 매뉴얼대로 상투적인 대답을 내놓았다.
“죄송하지만 미리 약속이 되어 있으신 게 아니라면 회장님을 만나실 수는 없습니다.”
그때 누군가 급히 달려오더니 옆에서 깍듯하게 허리를 접고 인사했다.
“죄송합니다! 먼저 내려와 기다리려고 했는데 저희가 늦었습니다.”
석원은 다급하게 사과하는 남자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이내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얼굴이 낯익다 했더니 지난번에 호근이 녀석하고 같이 한번 봤었죠.”
“아. 예. 우 상무님 비서 일을 맡고 있는 오상현 과장이라고 합니다.”
설마 그때 잠깐 스쳐 지나간 걸 기억하고 있을 줄은 몰랐던 오상현 과장이 어색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지금 구치소에 들어가 있는 걸로 아는데 녀석은 잘 지내고 있어요?”
석원이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물었다.
우호근쯤 되면 신분이 확실한 데다가 비싼 전관 변호사를 써서 불구속 수사를 받는 것이 보통이었다.
하지만 보성통신 주가조작뿐만 아니라 상호신용금고 불법 대출 사건까지 연루된 것이 드러나면서 증거 인멸 우려를 이유로 구치소에 수감돼 구속 수사를 받고 있었다.
물론 검찰이 이렇게 깐깐한 태도를 보이는 건 야당이 눈을 부릅뜨고 주시하는 사건인 데다가 청와대와 여당에서도 정국 주도권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철저하게 수사하라는 지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고생을 모르고 편하게만 살아온 우호근의 구치소 생활이 좋을 리가 없는 걸 잘 알면서도 묻는 말에 오상현 과장은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래도 친구인데 언제 한번 시간을 내서 면회를 가봐야겠네. 이제 조금 있으면 여름인데 에어컨도 없이 구치소에서 지내려면 힘들겠지만 좀처럼 하기 힘든 경험이니 잘 버티라고 전해줘요.”
석원이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러겠습니다.”
마지못해 대답한 오상현 과장은 벌써부터 걱정이 됐다.
‘정말 면회를 온다면 지랄 맞은 성격에 난리를 부릴 텐데. 설마 진짜로 오진 않겠지?’
가까이에서 본 석원은 어쩐지 행동을 예측할 수 없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잘생긴 외모와 압도적인 카리스마.
게다가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주변의 시선을 모으는 강렬한 존재감까지 있으니 우호근이 혼자 열등감을 불태우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싶었다.
오상현 과장은 애써 표정을 바로 하고는 앞장서서 걸음을 옮겼다.
“회장님께서 기다리고 계시니 절 따라오십시오.”
그를 따라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석원은 이내 꼭대기 층에 위치한 임원 회의실로 안내됐다.
바닥에는 푹신한 카펫이 깔려 있고 고급 자재로 꾸며진 임원 회의실에는 우용갑 회장을 가운데 두고 전해철 비서실장을 비롯한 주요 임원 다섯 명이 먼저 와서 앉아 있었다.
최근 동해그룹의 상황을 보여주듯 담배를 입에 물고 있는 우용갑 회장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고 회의실에 들어선 석원을 쳐다보는 시선에 적대감이 가득했다.
얼마나 노려보는지 따가운 느낌이 들 정도였지만 석원은 동요하는 기색 하나 없이 오히려 여유 가득한 얼굴로 우용갑 회장을 마주봤다.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회장님.”
살짝 목례를 하며 인사하는 석원의 모습은 그야말로 당당하기 그지없었다.
사고를 연달아 쳐대고 결국 구치소에 들어가 있는 자신의 아들 녀석하고 달리 흠잡을 곳 하나 없이 완벽한 석원의 모습에 우용갑 회장은 내심 속이 쓰렸다.
‘박태홍 회장이 이렇게 부러워지는 날이 올 줄이야.’
하지만 우용갑 회장은 그런 내색을 하지 않은 채 이렇게 마주 앉게 된 상황 자체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떨떠름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다음 주로 예정된 임시 주총과 관련해서 할 이야기가 있다고 들었네.”
“그렇습니다.”
맞은편에 수행 비서인 한지성과 나란히 앉은 석원이 여유롭게 대답했다.
“미도파 백화점 경영권을 넘기겠다는 이야기를 하러 온 건가?”
우용갑 회장이 의도적으로 가볍게 도발했다.
적어도 눈썹 하나쯤은 꿈틀하는 반응을 보여주겠거니 했는데 그런 기대와 달리 석원은 약간의 동요도 보이지 않았다.
“표 대결로 간다고 해도 여전히 저희가 많은 지분을 보유하고 있는데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일부러 화를 억누르는 기색도 없이 태연하기까지 한 표정이었다.
도발에 쉽게 넘어가는 다혈질인 우호근과 달리 비슷한 나이인데도 마치 닳고 닳은 능구렁이 같은 태도를 보이는 석원의 모습에 우용갑 회장은 다시 한번 못난 아들과 비교가 되는 걸 느꼈다.
우용갑 회장은 박태홍 회장에 대한 부러움 때문에 더 퉁명스럽게 물었다.
“그럼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온 건가?”
그러자 석원이 맞은편에 있는 우용갑 회장과 동해그룹 주요 임원들을 느긋하게 훑었다.
“최근 연이은 사건들로 인해 동해그룹의 상황이 좋지 않은 걸로 압니다. 안 그래도 분위기가 나쁜데 여기서 적대적 M&A 이슈까지 다시 불거진다면 득 될 것이 없을 테니. 이쯤에서 싸움을 멈추고 서로 화해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전해철 비서실장을 비롯한 동해그룹 임원들은 그렇지 않아도 M&A 성공 가능성이 희박해진 상황에서 상대가 먼저 타협을 제안하자 내심 반색했다.
하지만 우용갑 회장은 뒤로 몸을 기댄 채 심드렁한 얼굴로 대꾸했다.
“최근 시끄러운 일들이 있었던 건 사실이지만 다음 주에 열리는 임시 주총이 지나면 미도파 백화점 경영권을 가져올 수 있는데. 내가 왜 그래야 하는지 모르겠군.”
흥미가 없다는 듯한 태도였지만 사실은 조금이라도 더 좋은 조건으로 타협을 보려고 허세를 부리는 거란 걸 석원은 어렵지 않게 알아차렸다.
‘그게 아니라 정말로 끝까지 가려고 하는 거라면 우호근 못지않은 멍청이인 거겠지.’
상념을 지운 석원은 우용갑 회장을 보며 말했다.
“임시 주총까지 가봤자 괜히 시끄러워지기만 할 뿐 뜻을 이루기 불가능할 텐데요.”
“흥. 공개 매수로 지분을 대거 늘린 걸 모르나? 거기다가 최근까지 시장에서 계속 추가로 사들인 물량까지 있지.”
우용갑 회장이 콧방귀를 뀌며 말을 이었다.
“어떻게 구워 삶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명동 천 회장이 가지고 있던 지분을 매입했다고 들었네. 만만한 양반이 아닌데 설득을 하다니 자네 수완이 보통이 아닌 건 인정하지.”
그러더니 거만하게 턱을 치켜들었다.
“하지만 그래 봤자 끌어모은 지분을 다 합쳐도 고작 35% 남짓일 테지. 한 가지 비밀을 알려준다면 우리가 사들인 지분은 그것보다 훨씬 많다네.”
배짱을 부린 것에는 이유가 있다는 듯 우용갑 회장이 득의만만한 태도로 말했다.
거의 비슷하게 대흥그룹이 확보한 지분율을 파악하고 있는 걸 보면 역시나 쉽게 볼 상대가 아니었다.
하지만 협상을 하러 오면서 아무런 준비도 없이 빈손으로 올 석원이 아니었다.
“확실히 그동안 지분을 꽤 많이 매집하셨더군요. 그 덕분에 미도파 백화점이 잠깐이지만 시총 상위 20위 안에 들어가는 기록도 세웠고 말입니다.”
말도 안 되는 가격에 미도파 백화점 주식을 마구 사들인 걸 비꼬는 듯한 말투에 우용갑 회장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함께 있던 전해철 비서실장 역시 정색을 하며 나섰다.
“싸움을 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면 말씀을 가려서 해주십시오.”
다른 동해그룹 임원들 역시 회장을 향한 노골적인 언사에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석원은 아랑곳하지 않고 거침없이 반박했다.
“그런데 저희 쪽 지분을 잘못 알고 계신 것 같군요.”
“뭐라?”
미간을 찌푸린 우용갑 회장을 향해 석원이 웃는 얼굴로 말했다.
“백제 산업이 가지고 있던 지분을 인수해서 44%를 넘겼으니까요.”
“!”
청천벽력 같은 이야기에 회의실 안은 충격에 휩싸였다.
마치 폭탄이라도 떨어진 듯 모두가 할 말을 잃고 석원을 쳐다봤다.
전해철 비서실장을 비롯한 임원들이 눈을 크게 부릅뜨며 동요를 감추지 못하는 가운데 우용갑 회장이 손바닥으로 앞에 있는 테이블을 세게 내려쳤다.
“무슨 바보 같은 소리를 하는 거야! 그딴 말도 안 되는 수작질에 내가 넘어갈 것 같나!”
쩌렁쩌렁한 노호성이 회의실 안에 크게 울려 퍼졌다.
백제 산업하고는 M&A를 성공시키면 상당한 이득을 안겨주기로 따로 이면 계약이 맺어져 있는 데다가 처남이 운영하는 회사였기에 더욱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불같이 화를 내는 우용갑 회장을 보면서 석원이 담담하게 말했다.
“돈 앞에서는 가족도 친구도 없다고 하죠. 전화 한 통이면 금방 들통날 거짓말을 제가 하겠습니까?”
너무나도 태연한 모습에 우용갑 회장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전해철 비서실장도 밀려오는 불길함에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설마 아닐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처남인 황정현 회장이 욕심이 아주 많은 성격이라는 걸 떠올린 우용갑 회장은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걸 느꼈다.
우용갑 회장은 애써 평정심을 유지하면서 고개를 돌려 전해철 비서실장을 봤다.
“당장 처남한테 전화를 걸어 봐.”
“예.”
전해철 비서실장이 회의 테이블 위에 설치되어 있던 키폰을 가져와 스피커폰 버튼을 누르고는 전화를 걸었다.
뚜르르르. 뚜르르르.
다들 숨을 죽인 채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연결음에 귀를 기울였다.
불과 몇 초 안 되는 시간이었지만 우용갑 회장에게는 엄청나게 길게 느껴졌다.
연결음이 계속되자 우용갑 회장이 초조한 표정을 지으며 짜증을 냈다.
“왜 이렇게 안 받는 거야.”
그때 전화가 연결되면서 묵직한 황정현 회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처남. 날세.”
[아. 네. 매형이 어쩐 일이십니까.]어쩐지 껄끄러워하는 것이 느껴지는 목소리에 우용갑 회장은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우용갑 회장은 불길한 생각을 애써 지우며 말했다.
“자네한테 한 가지 확인할 것이 있어서 전화를 했네.”
[그게 뭡니까?]슬쩍 고개를 들어 맞은편에서 느긋한 얼굴로 앉아 있는 석원을 한번 쳐다본 우용갑 회장은 심장이 두근대는 소리를 들으며 물었다.
“자네한테 맡겨 둔 미도파 지분을 팔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당연히 얼토당토않은 말이겠지?”
일부러 지분을 양도한 게 아니라 맡긴 거라는 걸 강조했지만 돌아온 대답은 우용갑 회장의 기대를 벗어난 거였다.
[이것 참. 미안하게 됐습니다. 매형.]“……!”
[가지고 있던 미도파 주식을 전량 매각했습니다.]믿었던 처남한테 제대로 뒤통수를 맞은 우용갑 회장은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배신감에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자네가 어떻게 그럴 수가 있나!”
우용갑 회장이 목에 핏대를 세우며 소리쳤다.
[상호 신용금고와 증권이 검찰 조사를 받는 마당에 호근이까지 구속되었으니 M&A는 나가리가 된 것이나 다름없지 않습니까. 이번 일에 저희 회사 보유 현금을 몽땅 다 털어 넣었는데. 그걸 다 날려 버릴 수는 없으니 저라도 살길을 찾아야죠.]뻔뻔한 태도에 우용갑 회장이 이를 부득 갈았다.
“잠시 맡겨둔 걸 허락도 받지 않고 누구 마음대로 팔아!”
[그런 거면 제때 찾아갔어야지요. 아님 일을 제대로 하시던가요.]“이. 이!”
우용갑 회장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아무튼 그렇게 됐으니 이 일로 더 이상 전화하지 마십시오.]그러고는 뚝 하고 전화가 끊어졌다.
“야! 황정현 이 자식아!”
우용갑 회장이 벌떡 몸을 일으키며 고함을 쳤지만 이미 스피커에서는 뚜뚜하는 통화 종료음만 허무하게 울릴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