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lden Spoon Investment Portfolio RAW novel - Chapter (295)
금수저 투자백서 295화(295/308)
295. 더 공사를 재개해서는 안 돼.
며칠 뒤.
석원을 태운 벤츠 대형 세단이 한남동 본가 대문 앞에 미끄러지듯 다가와 멈춰 섰다.
먼저 내린 한지성 대리가 차문을 열어주자 길쭉한 다리를 뻗으며 석원이 뒷좌석에서 나왔다.
이제 8월 중순이라 더위가 한풀 꺾일 만도 했지만 역대급 폭염에 여전히 가만히 서 있어도 저절로 땀이 날 만큼 더웠다.
석원이 걸음을 옮기자 한지성 대리가 얼른 먼저 달려가 대문 한쪽 기둥에 설치된 초인종을 누르며 말했다.
“작은 사장님이 오셨습니다.”
그러자 곧바로 삑 하는 소리와 함께 철제 대문 잠금장치가 풀렸다.
높은 담장 안으로 들어간 석원이 한지성 대리를 대동하고 잘 정리된 정원을 가로질러 본채로 걸어가고 있을 때 냐옹하는 울음소리를 내며 나무 덤불 사이에서 삼색 고양이 가족이 나왔다.
몇 주만에 보는 거였지만 포니와 새끼 고양이들은 꼬리를 바짝 세우고 다가와 반갑다는 듯 다리 사이를 번갈아 스쳐 지나가며 몸을 비벼댔다.
그걸 본 석원은 입가에 미소를 지은 채 몸을 숙여 고양이들을 쓰다듬었다.
“이 녀석들. 털에 윤기가 반들반들한 걸 보니까. 맛있는 걸 잔뜩 얻어먹고 있나 보네.”
그때 유일한 수놈인 고등어 태비 막둥이가 뭐 맛있는 거 안 가져왔냐는 것처럼 앞발로 그의 다리를 툭툭 긁었다.
“아. 오늘은 깜빡하고 안 챙겨왔네. 대신 다음에 츄르를 한가득 가져다줄게.”
“야옹.”
막둥이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면서 울음소리를 냈다.
“녀석. 뭘 알고 대답하는 거야?”
“냥.”
야옹야옹거리면서 잘도 대답하는 모습에 석원이 피식하고 웃었다.
그렇게 잠시 고양이 가족과 놀아준 석원은 다시 걸음을 옮겨 본채로 들어갔다.
“왔니?”
홈드레스를 입은 조덕례 여사가 평소처럼 현관 앞에 나와서 오랜만에 보는 아들을 반갑게 맞이했다.
“어서 오세요. 사장님.”
그리고 옆에서 앞치마를 한 군산댁도 웃으며 머리를 꾸벅 숙였다.
“조 여사님. 안 본 사이에 더 젊어지신 것 같은데요.”
“뭐야?”
석원의 능청스런 아부에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은 조덕례 여사가 고개를 흔들었다.
“얘가 점점 갈수록 넉살만 늘어서는.”
그래도 싫지는 않은 듯한 눈치에 석원이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그동안 잘 지내셨죠?”
“잘 지냈겠니? 자식이라곤 딱 둘 뿐인데 전부 다 집을 나가 있으니 적적하더라.”
“그럼 다시 들어올까요?”
석원의 말에 조덕례 여사가 눈을 흘기며 손짓했다.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지 말고 어서 들어오렴. 네 아버지하고 형은 서재에 있으니까 가서 인사부터 해.”
“네.”
구두를 벗고 집안으로 들어선 석원은 혼자 서재로 향했다.
가볍게 노크한 뒤 원목으로 된 문을 열자 편한 옷차림을 한 박태홍 회장이 큰아들인 박진형 대흥 방직 사장과 함께 가죽 소파에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가운데 상석에 자리한 박태홍 회장은 석원을 보고는 들어오라고 눈짓했다.
“어서 오거라.”
“빨리 온다고 왔는데 제가 제일 늦었네요.”
석원이 사과하면서 비어 있는 오른쪽 소파에 앉았다.
“할 이야기가 있다면서 보자고 한 녀석이 늦게 오면 어떡하냐.”
“미안하다니까.”
맞은편에 있던 박진형 사장이 장난스럽게 타박하자 석원도 웃으며 대꾸했다.
후계 문제로 다툼이 많은 다른 재벌 집안과 달리 사이가 좋은 두 아들의 모습에 박태홍 회장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가 이내 표정을 바꿔 말했다.
“너무 그러지 마라. 석원이가 부른 덕분에 이렇게 얼굴을 보는 거지 않냐.”
“예.”
박태홍 회장은 아무튼, 하고 말하면서 석원에게 시선을 줬다.
“우 회장이 동해 의료를 매물로 내놨다는 소식을 들었냐?”
동해의료는 주사기 같은 일회용 의료용품 생산 업체로 금융과 함께 우용갑 회장이 그룹의 미래 먹거리로 키우던 의료기기 계열사 중에 하나였다.
이철균을 통해 일찌감치 매각 사실을 알고 있던 석원은 담담한 얼굴로 대답했다.
“무리하게 적대적 M&A를 추진한 대가를 치르는 거 아니겠어요.”
“그래. 남의 것을 욕심내다가 가지고 있던 회사마저 내다 팔아야 하는 상황에 처했으니 이게 바로 인과응보지. 길 실장한테 소식을 전해 듣고 십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기분이더구나.”
박태홍 회장이 통쾌하다는 듯 대답했다.
그만큼 우용갑 회장과 동해 그룹에 원한이 많이 쌓였다는 뜻이기도 했는데 선대가 창업한 그룹을 통째로 빼앗아가려고 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형인 박진형 사장 역시 잘 됐다는 듯 말했다.
“불법 대출을 내준 동해 상호신용금고와 동해 페레그린 증권도 진행 중인 증감원 조사가 끝나면 상당히 무거운 처벌을 받게 될 거라고 하더군요.”
“흥. 당연히 그래야지.”
동해페레그린 증권 같은 경우에는 증감원 조사에 더해 홍콩에 있는 페레그린 증권사와 합작 관계를 청산할 수도 있다는 소문도 돌고 있었다.
‘페레그린 증권이 나한테 넘긴 채권 때문에 애지중지 아끼던 서초동 신사옥 부지를 어쩔 수 없이 넘겨야 했으니. 이가 부득부득 갈릴 텐데 계속 함께 가기가 어렵겠지.’
어쩌면 동해의료를 매각하는 이유 중에 하나가 홍콩 페레그린 증권이 보유한 지분을 가져올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일 수도 있었다.
박태홍 회장은 앞에 놓인 찻잔을 들어서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내려놓고는 큰아들을 보며 말했다.
“참. 웨이지중 성장이 중단된 선양 2공장 2단계 공사를 재개하면 추가로 세금을 감면해 주겠다고 했다면서?”
“예. 공장 건설에 필요한 자재와 기계에 대한 세금을 기존 50%에서 완전 면제해 주겠다고 합니다.”
“그럼 건설 비용을 수백만 달러 아낄 수 있는 것 아니냐?”
박태홍 회장이 혹하는 얼굴로 물었다.
“네. 아무래도 중국 중앙 정부에서 지방 성장들의 성과평가를 할 때 경제 성장률이 큰 영향을 미치다 보니 추가 혜택을 줘서 공사 재개를 독촉하는 것 같습니다.”
“미도파 백화점 상황도 어느 정도 정리가 된 만큼 어차피 조만간 공사를 다시 진행시킬 생각이었는데. 추가 혜택을 준다면 조금 일찍 공사 재개를 해도 나쁘진 않을 것 같군. 네 의견은 어떠냐?”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그러자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석원이 불쑥 끼어들며 말했다.
“그건 다시 생각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괜한 오해를 받기 싫어 형인 박진형 사장이 경영하는 대흥 방직에 대해서는 잘 관여하지 않던 석원이었기에 박태홍 회장이 의외라는 듯 눈썹 사이를 살짝 좁혔다.
“그게 무슨 말이냐?”
박진형 사장 역시 의아한 얼굴로 그를 쳐다봤다.
안 그래도 오늘 하려고 했던 이야기와 연결되는 일이었기에 석원은 두 사람의 시선을 받으며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동해 그룹과 싸움에서 이기긴 했지만 저희 역시 적대적 M&A를 막느라 무리를 한 만큼 지금은 지출을 최대한 억제하며 내실을 다질 때라고 생각해요.”
“흐음. 뭔 말을 하려는지 알겠다.”
박태홍 회장이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말했다.
“하지만 사업은 다 때가 있는 법이야. 어차피 마무리를 지어야 될 2단계 공사인데 현지 지방정부에서 추가 혜택을 주겠다고 할 때 일을 다시 시작하는 게 여러모로 낫지 않겠냐.”
그러자 박진형 사장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북한보다 위에 있는 랴오닝성은 겨울이 한국과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추워서 지금 공사를 재개하지 않으면 빨라도 내년 봄이나 되어서야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거야. 그러면 기간이 늘어지는 만큼 공사비 역시 크게 올라갈 거다.”
표정을 보니 이미 공장 건설을 재개하기로 마음을 굳힌 듯한 모습이었다.
“경영권 방어에 여유 자금을 거의 끌어다 써서 방직에 남아 있는 현금이 얼마 안 될 텐데 공사비는 어떻게 충당할 거야?”
“올해 하반기에 면사 수출 대금이 들어올 것이 있으니까. 그걸 가지고 수출 대출을 받는다면 자금을 조달하는 데 문제가 없을 거다.”
나름 자금 조달 계획까지 다 세워둔 모습에 석원이 몸을 앞으로 당겨 앉았다.
“수출 대금으로 들어올 달러를 써야 하는 상황이라면 더더욱 공사를 재개해선 안 돼.”
재차 강하게 반대하는 석원의 행동에 박태홍 회장은 뭔가 이상한 걸 눈치채고는 정색한 얼굴로 물었다.
“왜 안 된다는 건지 이유를 알아들을 수 있게 설명해 봐라.”
박진형 사장 역시 미간을 살짝 찡그린 채 동생을 쳐다보고 있었다.
두 사람의 의문 섞인 시선에 석원은 차분하게 목소리를 가다듬고 이야기를 했다.
“얼마 전 한국은행에서 발표한 상반기 경상수지 적자가 116억 6천만 달러를 기록했다는 건 들어서 알고 계실 거예요.”
“…….”
“작년 같은 기간 65억 달러보다 무려 79.4%나 증가한 수치에요. 거기다가 올 초까지만 해도 개당 15~17달러였던 DRAM 가격이 2~3달러나 떨어져 적자 규모는 더 커질 것이 확실할 거예요.”
석원은 가만히 설명을 듣고 있는 두 사람을 마주 보면서 말을 계속 이어갔다.
“이렇게 수출이 빠르게 둔화되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 거꾸로 원자재와 공장 기계 도입은 작년보다 더 늘어나 무역수지 적자가 커지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있죠.”
세계 경제 상황이 급변하고 있는데도 그걸 빠르게 알아차리지 못하고 지금까지 수출이 잘 됐으니 앞으로도 그럴 거라는 낙관적인 생각만 하고 있는 안일한 국내 기업들의 모습에 석원은 내심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수출이 다시 회복된다면 괜찮겠지만 문제는 역 플라자 합의로 인한 엔화 절하로 경쟁 상대인 일본 제품들의 가격 경쟁력이 높아져서 예전처럼 수출이 늘어나기가 쉽지 않다는 거예요. 그러면 필연적으로 과잉투자로 인한 채무와 재고 부담으로 기업들이 힘들어질 수밖에 없고 이건 가뜩이나 기세가 꺾인 경기를 더욱 악화시킬 거예요.”
상황이 심상치 않은 걸 깨달은 박태홍 회장과 박진형 사장의 표정이 굳어졌다.
국내 경기가 침체되면 그룹의 캐시카우 역할을 하는 미도파 백화점의 매출 역시 크게 줄어들 수밖에 없었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은 물론이고 대만을 비롯한 아시아 수출국들의 경제를 어렵게 만들 악재가 하나 더 있어요.”
“그게 뭐냐?”
“바로 내후년 3월부터 일본은행들이 BIS 자기자본 비율을 10%까지 맞춰야 된다는 거예요.”
BIS 자기자본비율은 부실 위험을 낮추기 위해 국제결제은행(BIS)에서 일반 은행들에게 권고하는 자기자본비율 수치를 뜻했다.
“그게 왜 문제가 된다는 거야.”
박진형 사장이 머리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버블 붕괴 이후 일본 정부가 실시한 초저금리 정책에 수많은 엔화 자금이 일본을 빠져나와 외국으로 흘러들어 갔잖아.”
“그랬지.”
박진형 사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싼 금리로 엔을 빌려서 고성장하는 신흥국에 투자해 수익을 거두는 소위 엔 캐리 트레이드라는 새로운 투자 방식이 생겨난 걸 형도 알고 있을 거야.”
이렇게 일본 밖으로 쏟아져 나온 막대한 엔화는 아시아 각국의 버블을 키우는 데 상당한 역할을 했다.
“그렇게 엔화를 바깥에 마구 뿌려 놨는데 갑자기 자기자본비율을 10%까지 끌어 올려야 되는 상황에 놓였으니 일본은행들이 어떻게 하겠어?”
“으음.”
말뜻을 알아차린 박진형 사장이 침음성을 내뱉었다.
“일본은행들이 빌려준 돈을 대거 회수하려고 하겠구나.”
“맞아. 정확히 액수가 얼마나 되는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 한국에도 많은 엔 캐리 트레이드 자금이 들어와 있을 텐데. 그중에 절반 아니 3분의 1이라도 한꺼번에 빠져나간다면 바로 시중의 유동성이 급격하게 말라 버리지 않겠어.”
그러자 두 아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박태홍 회장의 표정도 심각해졌다.
석원은 이에 그치지 않고 더욱 강한 어조로 말했다.
“여기에 계속되는 경상수지 적자로 벌어들이는 것보다 빠져나가는 달러가 더 많다는 것까지 생각하면 자칫 외환위기 상황이 올 수도 있어.”
충격적인 예측에 두 사람이 눈을 크게 뜨고 그를 쳐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