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lden Spoon Investment Portfolio RAW novel - Chapter (297)
금수저 투자백서 297화(297/308)
297. 짐을 하나 덜었네.
영등포 동해 그룹 본사.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며 전해철 비서실장이 들어오자 책상 앞에 앉아 있던 우용갑 회장이 상체를 바로 세웠다.
“안 그래도 부르려고 했는데 잘 왔군. 거기 앉게.”
턱으로 사무실 가운데 있는 소파를 가리키자 전해철 비서실장이 머리를 숙여 대답했다.
“예.”
읽고 있던 보고서를 덮고 일어난 우용갑 회장은 책상을 돌아 나와서 가운데 상석에 자리했다.
그러고는 한쪽 다리를 꼰 자세를 취하는 우용갑 회장의 얼굴이 전보다 많이 까칠해져 있었다.
야심차게 추진했던 미도파 백화점 적대적 M&A가 실패로 끝나면서 재무적으로 막대한 타격을 입고 증감원 조사를 비롯한 여러 사법 리스크까지 안게 됐으니 그럴만도 했다.
우용갑 회장이 탁자 위에 놓인 원목 케이스를 열어 안에 가지런히 놓인 담배를 한 개비 집어 들자 오른쪽 소파에 앉은 전해철 비서실장이 얼른 일어나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여줬다.
몸을 뒤로 기댄 우용갑 회장은 새하얀 담배 연기를 깊이 들이마셨다가 천천히 내뱉으며 입을 뗐다.
“홍콩 놈들이 가지고 있는 증권사 지분 인수 자금 마련은 어떻게 되고 있나?”
시선을 받은 전해철 비서실장은 차분한 목소리로 곧장 대답했다.
“HSBC를 통해 6천만 달러를 2년 만기 조건으로 조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6천만 달러면 한화로 얼마나 되는 거지?”
“현재 환율로 대략 495억 정도 됩니다.”
우용갑 회장이 살짝 눈썹을 찡그렸다.
“겨우 그거밖에 안 된다고?”
“달러당 826원으로 지난 몇 달 동안 환율이 많이 올라 환손실이 커졌습니다.”
“쯧. 일이 꼬이려니까 별게 다 말썽이군.”
혀를 찬 우용갑 회장이 짜증 섞인 목소리로 내뱉었다.
스스로 생각해도 환율이 그리 좋지 않은 데다가 적대적 M&A 실패 이후 우용갑 회장이 계속 저기압 상태인 걸 알았기에 전해철 비서실장은 말을 보태지 않고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이내 우용갑 회장이 탁자 위에 놓인 크리스털 재떨이에 담뱃재를 가볍게 털며 물었다.
“한 4천만 달러 정도 외채를 더 당길 수는 없겠나?”
“HSBC 쪽하고 이야기를 해봐야 되겠지만 가능은 할 겁니다. 하지만 이율이 낮지가 않아서 부담이 클 겁니다.”
“이율이 9%라고 했었지?”
“그렇습니다.”
9%면 국내 기업들이 해외에서 자금을 조달할 때 적용받은 평균 금리보다 훨씬 높은 거였다.
적대적 M&A에 실패하면서 재무 상태가 어려워진 동해 그룹의 상황을 반영해 그만큼 가산 금리를 붙었기 때문이었다.
높은 이율에 우용갑 회장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래도 두 자릿수인 국내 금리보다는 낮잖나.”
“그건 그렇지요.”
우용갑 회장은 손가락 사이에 담배를 끼운 채 잠시 생각하다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M&A를 실패한 뒤처리를 하느라 여유 자금이 빠듯해진 상황이니. 이번 기회에 현금을 더 확보해 뒀으면 하는데 자네 생각은 어떤가.”
석원의 술수에 말려 비싸게 매집한 미도파 백화점 지분을 헐값에 넘기고 반대로 상대가 가지고 있던 동해 유량 주식을 시세보다 곱절을 더 주고 사들이면서 그룹의 재무 상황이 엉망이 되어 버린 건 사실이었다.
거기다가 주가 조작, 불법 대출 등 우호근이 저지른 범법 행위로 인해 본사는 물론이고 여러 계열사들이 증감원과 검찰의 조사를 받게 되어 국내에서 자금을 조달하는 것이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러니 이참에 외채 액수를 더 늘려 필요한 운용 자금을 확보하자는 것에 전해철 비서실장도 동의했다.
“이자가 부담되기는 하지만 말씀대로 국내보다는 싸니 그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럼 HSBC하고 협의해서 대출 액수를 1억 달러로 늘리도록 해.”
“그러겠습니다.”
이걸로 꼴 보기 싫은 홍콩 페러그린 증권과 합작사 지분을 완전히 정리하고 4천만 달러의 여유 자금을 확보하게 된다면 당장 급한 불은 끌 수 있었다.
거기다가 진행 중인 동해 의료 매각까지 완료된다면 어느 정도 숨통이 트일 터였다.
처음보다 한결 여유를 찾은 우용갑 회장은 반쯤 태운 담배를 크리스털 재떨이에 비벼 끄며 물었다.
“그건 그렇고 다음 주에 보성통신인가 뭔가하는 주가 조작사건 1심 판결이 나온다고 했었지.”
“그렇습니다.”
“빌어먹을 놈 같으니라고.”
생각만 해도 울화통이 치밀어 올랐지만 그래도 하나뿐인 아들이었기에 우용갑 회장은 한 손으로 관자놀이를 누르며 한숨을 삼켰다.
“판결이 어떻게 나올 것 같나?”
전해철 비서실장은 바로 대답을 못하고 머뭇거리다가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우 상무가 주가 조작을 주도했다는 증거가 워낙 많아 실형을 피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우용갑 회장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쳐다봤다.
“검찰과 판사 출신 전관 변호사를 넷이나 썼는데도 어렵다는 거야.”
다그치듯 묻는 말에 전해철 비서실장이 곤혹스러운 얼굴로 대답했다.
“그게 유죄 판결은 피할 수 없더라도 집행유예를 받아내 우 상무가 교도소를 가는 건 막아보려고 했는데. 재판 도중에 뒷돈을 댄 걸로 밝혀진 친구들한테 써준 차용증을 검찰이 증거로 제시하면서 일이 틀어져 버렸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공범으로 몇 년은 교도소에서 썩어야될 거라는 검찰의 압박과 회유에 넘어간 유석찬과 전건우가 선처를 약속받고 친구인 우호근을 배신한 거였다.
“그런 녀석들하고 친구라며 어울려 다니다니. 한심하기는.”
우용갑 회장이 인상을 구긴 채 혀를 쯧쯧 찼다.
주변에 형편없는 놈들밖에 없으니 물이 든 것 아니겠냐는 말투였지만 솔직히 전해철 비서실장은 다 끼리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불법 대출이 드러나자 우호근이 권승섭 상호신용금고 사장한테 모든 죄를 다 떠넘기려고 했던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은가.
다 비슷한 부류이니 서로 친하게 지내며 주가 조작 같은 불법적인 일까지 서슴없이 저지른 것 아니겠냐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구태여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실형이 나온다면 형량은 얼마나 받을 것 같나.”
우용갑 회장이 미간에 만든 주름을 더욱 깊게 하며 물었다.
“검찰이 구형한 징역 4년에 벌금 20억이 그대로 인용될 가능성이 크다고 합니다.”
“4년이나 교도소에 들어가 있어야 된다고?”
우용갑 회장이 말도 안 된다는 듯 언성을 높였다.
안 그래도 일그러져 있던 표정이 더욱 사납게 변하는 것을 보면서 전해철 비서실장이 머뭇거리다 덧붙였다.
“상호신용금고 불법 대출과 증감원 비리 사건 등 진행 중인 다른 재판에서도 유죄 판결이 나올 가능성이 높아 걸 감안하면…….상당히 오래 수감 생활을 해야될 수도 있을 겁니다.”
“끄으으응.”
이마를 짚으며 앓는 소리를 내뱉은 우용갑 회장이 깊게 한탄했다.
“아들이 아니라 원수야. 원수.”
우호근이 저질러 놓은 일들로 인해 엉망이 된 재무 상황과 시궁창에 처박힌 그룹 이미지를 생각하면 전해철 비서실장도 내심 한숨밖에 나오지 않았다.
‘이렇게 큰 사고를 치고 경영에 자질이 없는 것이 드러났지만 그래도 결국엔 아들인 우 상무한테 그룹을 넘겨주겠지.’
지금도 막상 실형을 살아야 할지 모른다고 하니까 화를 내면서 편을 들어주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회장 자리를 이어받은 우호근이 그룹을 성장시키는 건 언감생심 바라지도 않았다.
제발 망하게만 만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전해철 비서실장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 * *
“내일 나올 조간신문 초판을 가져왔습니다.”
노크를 하고 들어온 나성미가 가지런히 정돈한 조간신문 초판을 책상 위에 내려놨다.
“고마워요.”
“커피 한 잔 타 드릴까요?”
“그래 주면 좋죠.”
“네. 금방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나성미가 살짝 웃으며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보고 있던 서류를 책상 한쪽으로 밀어둔 석원은 팔을 뻗어 나성미가 가져온 초판 신문들 가운데 제일 위에 있는 걸 집어 들었다.
윤전기에서 바로 뽑힌 걸 알려주듯 신문에서 잉크 냄새가 진하게 풍겼다.
석원은 언제나처럼 1면부터 신문에 실린 기사들을 꼼꼼하게 훑으며 읽어내려갔다.
정치와 사회면을 다 보고 경제면으로 넘어가려고 할 때 나성미가 얼음을 넣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가져왔다.
“잘 마실게요.”
이내 빈 쟁반을 가지고 나성미가 자리를 떠나자 석원은 유리컵을 들어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쭉 들이켰다.
그의 취향에 맞게 샷을 추가해 원두 맛이 진하게 느껴지는 커피였다.
카페인이 들어가자 늦은 오후라 식곤증이 겹치며 약간 나른해진 몸에 왠지 모르게 다시 활력이 도는 기분이 느껴졌다.
“이래서 커피를 끊을 수가 없지.”
석원은 다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마시고 사회면을 넘겼다.
그러자 사진과 함께 실린 기사 하나가 그의 시선을 끌었다.
[동해 그룹 우호근 前상무 주가조작 유죄 판결에 불복해 항소
보성통신 주가를 조작해 개인 투자자들에게 큰 피해를 안긴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가 1심에서 징역 4년 벌금 17억 5천만 원을 선고받았던 우호근 前 동해그룹 상무는 실형 판결에 불복하고 항소를 하겠다고 밝혔다.
주가 조작을 시도한 건 맞지만 주식을 팔기 전에 주가가 폭락해 이득을 취하지 못하고 오히려 큰 손해를 봤기에 검찰의 구형과 재판부의 판결이 너무 가혹하다는 주장이다.
이에 대해 검찰은 실질적인 이득을 얻지 못했더라도 그런 목적으로 증시를 교란하고…….]
1심 판결을 받고 잔뜩 굳은 얼굴로 법원을 나오는 우호근의 모습이 찍힌 흑백 사진을 보며 석원이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항소를 한다고 해도 실형을 피하긴 힘들겠지만 줄줄이 기다리고 있는 다른 재판 결과를 생각하면 어떻게든 형량을 줄이고 싶겠지.”
진행 중인 다른 재판에서도 발뺌하기 어려울 정도로 증거가 명확한 데다가 우호근이 저지른 범죄의 죄질이 아주 나빴기에 중형을 피하기가 어려웠다.
석원은 손에 든 신문을 내려놓으며 중얼거렸다.
“뭐 그렇다고 우호근이 형량을 다 채우고 나오진 않겠지.”
재판에서 전부 다 실형을 받아 10년 가까운 형량을 받게 되더라도 시간이 조금 지나 국민들의 관심이 사라지면 슬그머니 크리스마스나 광복절 특사로 교도소를 나올 것이 불을 보듯 뻔했다.
“원래 돈과 권력 앞에서 약해지는 것이 법이지.”
불편한 진실이지만 힘없는 서민들과 달리 재벌이나 권력자들은 수백 수천억을 횡령하거나 부당한 이득을 취하다가 붙잡혀 실형을 받더라도 금방 교도소에서 나와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떵떵거리며 살아가는 것이 현실이었다.
“이걸로 우호근이 정신을 차릴 리 없겠지만 그래도 한동안은 우연이라도 거슬리는 얼굴을 마주할 일은 없겠군.”
그때 책상에 놔둔 휴대폰 벨이 울리자 석원이 액정에 뜬 번호를 확인하고 전화를 받았다.
“형? 어쩐 일이야.”
[바쁘냐?]“아니. 괜찮아.”
[다른 게 아니라 지난번 본가에서 네가 한 이야기 말이다.]“어.”
석원은 아버지와 형에게 외환위기 가능성을 경고했던 걸 떠올리며 대답했다.
[네 말대로 선양 2공장 증설을 연기하고 긴축 경영을 하기로 했다.]“그래? 잘 생각했어.”
석원이 반색한 얼굴로 대꾸했다.
[그때 이야기를 듣고 상황을 살펴보니까 확실히 조짐이 안 좋더라고.]“최악의 상황까지 안 가더라도 앞으로 경기가 나빠질 건 분명하니까. 미리 대비를 해둬서 손해 볼 건 없을 거야.”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아무튼 너도 알고 있어야 할 것 같아서 연락한 거야. 바쁠 테니 이만 끊고 나중에 밥이나 같이 먹자.]“언제든 연락만 해.”
통화를 끝낸 석원은 다행히 아버지와 형이 이번엔 자신의 경고를 흘려듣지 않고 대비를 하기 시작한 것에 안도한 표정을 지었다.
“이러면 IMF 사태가 터지더라도 대흥 그룹 걱정은 더 이상 안 해도 될 테니 짐을 하나 덜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