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lden Spoon Investment Portfolio RAW novel - Chapter (303)
금수저 투자백서 303화(303/308)
303. 이번 내기는 내가 진 것 같군.
얼떨떨해하는 가운데 버스가 멈춰 서자 짐을 챙겨서 내린 최호근 부장과 직원들을 늘씬한 금발 미녀가 웃으며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탑승을 환영합니다.”
베이지색 트렌치코트에 가죽 장갑을 끼고 올림머리를 한 미녀는 바로 전용기 스튜어디스인 벨라였다.
모델 같이 글래머러스한 몸매의 금발 미녀가 조금 어색하긴 하지만 그래도 상당히 능숙한 한국말로 인사를 건네자 다들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누가 봐도 눈에 확 띄는 미모의 외국인 여성이 한국말을 하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전용기 스튜어디스인 벨라 씨입니다.”
한지성 대리가 소개하자 최호근 부장이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 네. 환영해줘서 고맙습니다.”
뒤에 있는 다른 직원들도 벨라를 신기하게 쳐다보며 머리를 숙여 인사했다.
싱긋 웃은 벨라가 한쪽 팔을 들어 옆에 내려와 있는 트랩을 가리켰다.
“이쪽으로 탑승하시면 됩니다.”
“네.”
최호근 부장과 직원들은 각자 짐을 가지고 조심스럽게 처음 타 보는 전용기에 발을 들였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전체가 우드와 가죽으로 고급스럽게 꾸며진 실내였다.
마치 최고급 호텔 펜트하우스처럼 세련되게 꾸며진 내부에 다들 입을 다물지 못했다.
바닥 전체에 푹신하게 깔린 크림색 카펫트도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해서 흙이 묻은 신발을 신고 타도 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와. 비행기 안이 이렇게 고급스러울 수 있는 거예요?”
“이거 완전 호텔이 따로 없는데요.”
홍재희와 유석현이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구경했다.
“그러게. 이거 퍼스트클래스가 이코노미처럼 느껴질 정도잖아. 바닥에 누워서 자도 되겠는데?”
정환엽 과장도 쓰고 있던 선글라스를 위로 들어 올리고는 눈이 동그래져서 감탄했다.
애써 티를 내지 않았지만 최호근 부장 역시 눈이 이리저리 돌아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자기도 처음 전용기를 탔을 때 똑같은 반응을 보였기에 한지성 대리는 내심 웃으며 말했다.
“사장님은 앞쪽 좌석에 계십니다.”
그 말에 퍼뜩 정신을 차린 최호근 부장과 직원들은 일단 짐을 놔두고 앞쪽 자리로 먼저 인사를 하러 갔다.
한지성 대리가 안내하는 대로 따라가자 테이블 위에 노트북을 올려두고 퍼스트클래스보다 훨씬 넓은 베이지색 가죽 시트에 앉아 있는 석원이 보였다.
“사장님.”
최호근 부장이 얼른 옷매무새를 바로하고 가까이 다가가자 석원이 고개를 돌렸다.
넥타이 없이 흰 와이셔츠만 가볍게 걸친 석원은 최호근 부장과 직원들을 쳐다보면서 살짝 미소지었다.
“왔어요? 전용기는 처음이죠.”
“예. 설마 이런 좋은 비행기를 타고 가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한 걸음 뒤에 나란히 서 있던 직원들도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뉴욕까지 가려면 비행시간이 상당히 기니까. 내가 있다고 괜히 신경 쓰지 말고 편하게 타고 가도록 해요.”
“예.”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석원이 함께 있는데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궁금한 건 한 대리한테 물어봐요. 전담 스튜어디스인 벨라도 어느 정도 한국말을 할 줄 아니까. 딱히 불편하진 않을 거예요.”
그렇게 이야기하고는 다시 노트북으로 시선을 돌린 석원을 대신해 한지성 대리가 일행들에게 말했다.
“좌석은 넉넉하니까 편한 자리를 골라 앉으시면 됩니다.”
최호근 부장과 직원들은 가져온 짐을 선반에 집어넣고 석원과 대각선으로 약간 떨어진 좌석에 둘씩 나란히 앉았다.
사실 한 사람이 한 자리씩 차지하고 앉아도 좌석이 많이 남았지만 다들 해외여행이 처음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붙어 앉게 되었다.
창가에 자리한 홍재희는 집에 있는 소파보다 훨씬 부드럽고 푹신한 의자 가죽을 연신 손으로 만져보다가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카메라를 들고 탈 걸 그랬어요.”
“기념사진이라도 찍게요?”
“그럼요. 제가 언제 또 이런 전용기를 타 보겠어요.”
그러자 옆에 앉은 유석현이 웃으며 대꾸했다.
“사장님 개인 전용기라고 하니까 돌아갈 때 또 타지 않겠어요?”
“아! 그러네요. 그때는 꼭 사진을 찍어야지.”
홍재희가 손뼉을 짝 치며 굳게 다짐하듯 말했다.
앞자리에 탄 정환엽 과장 역시 연신 고개를 두리번거리다가 최호근 부장을 보며 속삭였다.
“너무 소탈한 성격이라 가끔 깜빡하는데 역시 재벌은 아주 클라스가 다르네요.”
“임마. 쪽팔리니까 촌뜨기처럼 그만 좀 두리번거려.”
“쳇. 또 저한테만 잔소리하십니까.”
입술을 삐죽거린 정환엽 과장이 탑승구를 닫는 벨라를 힐끗 쳐다보곤 다시 헤벌쭉한 표정을 지었다.
“근데 저 스튜어디스 너무 예쁘지 않아요? 완전 잡지에 나오는 모델 같네. 역시 전용기 스튜어디스는 미모도 보고 뽑나 봐요. 한국말도 잘 하던데 완전 제 스타일.”
그러자 최호근 부장이 또 헛소리한다는 얼굴로 눈을 흘겼다.
“미리 말하는데 괜히 작업이라도 걸었다가 망신당하지 말고 얌전히 있어라.”
“제가 차이기라도 할 것 같아요?”
“그럼 설마 너 같은 놈이 하는 데이트 신청을 받아주겠냐.”
“아니 제가 어때서요.”
발끈하는 말에 최호근 부장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 자식아. 국어를 배웠으면 주제를 알고 수학을 배웠으면 분수를 알아야지.”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잖습니까.”
“나무꾼도 아닌 놈이 맨날 그놈의 나무 타령은.”
최호근 부장이 머리를 짚으며 말했다.
“임마. 나무도 사이즈를 보고 찍어야지. 아무 데나 휘두르다가 괜히 도끼날만 날려 먹는다고. 그냥 하지 말라면 하지 마.”
“에이 절 너무 띄엄띄엄 보시는 거 아니에요?”
“뭔 소리야. 나보다 네놈을 더 정확하게 보는 사람이 어딨다고.”
그러자 괜히 더 반감이 생긴 정환엽 과장은 흥하고 콧김을 내뿜었다.
“부장님이 자꾸 말리니까 더 전의가 불타오르는데요. 어떻게든 번호를 따낼 테니까 두고 보십쇼.”
“네 마음대로 해라. 대신 차이고 질질 짜면서 술 사달라는 소리만 하지 마.”
“제 별명 모르십니까 여의도 정 바람이에요. 제 얼굴만 보면 여직원들 가슴이 들썩거린다니까요.”
“자꾸 귀찮게 굴어서 주먹이 떨리는 게 아니고?”
최호근 부장이 심드렁한 얼굴로 대꾸했다.
“그런 놈이 여태 장가도 못 갔냐.”
“못 간 게 아니라 제가 결혼하면 슬퍼할 여자들이 많아서 안 가는 거죠.”
“미친놈.”
그렇게 한창 투덕거리는데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벨라가 웃으면서 말을 걸었다.
“곧 이륙하니 안전벨트를 착용해주시겠어요.”
“아. 예.”
갑자기 훅 가까워진 거리에 정환엽 과장이 살짝 붉어진 얼굴로 시선도 제대로 못 마주치며 대답했다.
그걸 본 최호근 부장은 그럼 그렇지하며 피식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번호를 따긴 개뿔.”
얼마 있지 않아 일행을 태운 걸프스트림Ⅳ 전용기는 주기장을 떠나 관제탑의 유도를 받아 천천히 활주로로 이동했다.
대기선에서 이륙을 위해 엔진을 최대 출력으로 올린 전용기는 이내 쭉 뻗은 활주로를 시속 300㎞가 넘는 속력으로 질주하다가 힘차게 땅을 박차고 푸른 하늘로 날아올랐다.
* * *
서울 성북동.
명동 사채 시장 큰손인 천성득 회장이 돋보기안경을 쓴 채 한복을 입고 온돌방에 앉아 내일 아침 가판대에 깔릴 조간신문 초판을 읽고 있었다.
그때 바깥에서 인기척과 함께 집사인 오태민의 목소리가 들렸다.
“회장님. 잠깐 들어가겠습니다.”
미닫이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온 오태민이 옻칠이 된 서탁 너머에 놓인 방석에 앉자 천성득 회장이 돋보기안경을 벗으며 물었다.
“무슨 일인가?”
그러자 오태민 집사가 시선을 마주한 채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한세 그룹이 당진제철소 건설투자로 야기된 자금난을 해소하기 위해 보유한 부동산을 매각할 계획이라고 합니다.”
두툼한 비단 보료 위에 앉은 천성득 회장이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부동산을 판다고?”
“그렇습니다.”
천성득 회장은 약간 가라앉은 목소리로 재차 되물었다.
“뭘 내놓는다고 하던가.”
“아직 완전히 확정된 건 아니지만 서울 서소문에 있는 한세건설 빌딩과 송파구 장지동 아파트부지 4만 평 그리고 개포동 부지 1만 1천 평을 내놓을 거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전부 다 덩어리가 크고 알짜배기들인데. 부동산을 목숨처럼 아끼는 최 회장이 그것들을 팔려고 하는 걸 보니 시중에 도는 소문처럼 자금 사정이 안 좋긴 한가 보구만.”
건설업을 통해 재계 18위의 대기업으로 성장한 한세 그룹은 충남 당진에 백만 평이 넘는 바다를 매립해서 연산 8백만 톤에 달하는 세계 5위 규모의 제철소를 짓는 초대형 프로젝트를 야심차게 추진 중이었다.
하지만 처음 계획한 것과 달리 제철소 건설비가 2조 7천억 원에서 5조 7천억 원으로 두 배가 넘게 불어나고 주력인 건설업마저 불황에 빠지면서 심각한 자금난을 겪고 있었다.
“부동산 매각에 더해 다음 달에 7백억 원 규모의 회사채를 추가로 발행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그것도 당진제철소 건설 비용을 조달하기 위한 거겠군.”
“그렇습니다.”
서탁을 손가락으로 툭툭 두드리며 잠시 생각한 천성득 회장이 다시 입을 열었다.
“한세철강 부채 규모가 작년보다 크게 늘어서 4조 원을 넘겼다고 그랬지.”
혼잣말처럼 낮게 뇌까린 물음에 오태민 집사가 바로 대답했다.
“지난달까지 4조 5천억이 넘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새 또 천억이 넘게 부채가 늘었구만.”
“올해 6월에 끝난 1단계 공사보다 진행 중인 2단계 공사 규모가 두 배 가까이 되니 차입금이 커질 수밖에 없을 겁니다.”
그러자 천성득 회장이 짧게 혀를 찼다.
“쯧. 말 그대로 밑 빠진 독이 물 붓기로군.”
“그래도 내년 3월이면 1, 2단계 공사가 모두 마무리되며 제철소가 완공되니 상황이 좀 나아지지 않겠습니까?”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
어림도 없다는 듯 천성득 회장이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당진에서 뽑아내는 쇳물이 연간 8백만 톤이나 된다지. 경기가 좋을 때라면 모르겠지만 지금처럼 어려울 때 그 많은 쇠를 다 어디다 팔 수 있겠나.”
“…….”
“그렇다고 다른 공장들처럼 재고가 쌓인다고 고로를 끌 수 있는 것도 아니니 더욱 골치 아픈 일이지. 거기다가 제철소를 짓느라고 무리하게 당겨 쓴 부채까지 잔뜩 있으니 선택할 수 있는 건 하나뿐일 게야.”
“덤핑으로 재고를 밀어내게 될 거란 말씀이십니까?”
“그 많은 돈을 들여서 제철소를 다 지어 놓고 처음부터 제대로 가동을 못해 설비를 놀린다면 채권자들이 가만히 있겠나.”
“하긴 그렇군요.”
그러면 자신 같아도 빚을 제대로 못 돌려받을까봐 상환 독촉을 할 것 같았기에 오태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전에 엄청나게 커져 버린 빚을 감당하지 못해 부도가 나 버릴지도 모르지.”
불과 반년 전까지만 해도 설마 재계 18위의 재벌 그룹이 부도가 나겠냐고 부정했을 터였다.
그러나 건설업 불황이 겹치며 급격히 악화된 한세 그룹의 재무 상황에 이제는 그럴 수가 없었다.
천성득 회장은 몇 달 전 찾아와 미도파 백화점 지분을 넘겨주는 대신 자신과 내기를 하자며 맹랑하게 행동했던 석원을 떠올렸다.
“어쩌면 박 회장 둘째 아들의 말대로 한세 그룹이 무너질 수도 있겠군.”
무거운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오태민 집사의 얼굴에도 심각한 표정이 깃들었다.
“솔직히 처음에는 박 사장님의 이야기를 듣고 한보 그룹 회사채를 모두 처분하신 것이 너무 성급하시지 않았나 생각했는데. 지금와서 보니 정말 잘하신 결정 같습니다.”
“맞아. 그 녀석 말을 흘려듣고 회사채를 계속 가지고 있었다면 꽤 골치가 아팠을 거야.”
실제로 한세 그룹의 재무 상황이 안 좋다는 소문이 돌면서 철강은 물론이고 다른 계열사들까지 10% 이상 할인된 가격에 회사채가 거래되고 있었다.
“처음 보고 보통이 아니라고 느꼈지만 역시 내 눈이 틀리지 않았어. 아무래도 이번 내기는 내가 진 것 같군.”
선선히 패배를 인정하는 천성득 회장의 얼굴에 언짢은 기색 대신 기분 좋은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