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lden Spoon Investment Portfolio RAW novel - Chapter (306)
금수저 투자백서 306화(306/308)
306. 그러고 보니 그게 있었군요.
커다란 통유리창 너머로 시원하게 펼쳐진 이스트 강이 내려다보이는 대표실 소파에 석원을 가운데 두고 랜든과 그동안의 성과를 인정받아 얼마 전에 최고투자책임자(Chief investment officer)로 승진한 앤드루가 양옆에 앉아 있었다.
비서인 데이지가 쟁반에 들고 온 차를 내려놓고는 밖으로 나가자 석원이 푹신한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입을 뗐다.
“태국 쪽에서 이상 징후가 나타나기 시작했다면서요.”
시선을 받은 앤드루가 사뭇 진지한 태도로 대답했다.
“예. 씨티와 소시에테 제네랄 은행을 시작으로 그동안 태국에 많은 투자를 했던 해외 은행과 투자자들이 신규 대출을 중단하고 투자금 회수에 나서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거의 700억 달러에 육박하는 대외 부채를 태국이 상환할 수 있을지 불안감이 들기 시작한 모양이네요.”
이런 상황을 예상이라도 한 듯 석원이 담담하게 반응하는 걸 보며 앤드루가 말을 이었다.
“매년 큰 폭의 경제 성장을 이어갈 때는 아무리 채무가 많더라도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지만 성장이 꺾이는 순간 커다란 부담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을 테니까요.”
동의하듯 그가 머리를 끄덕이자 랜든이 자연스럽게 끼었다.
“작년에 비해 성장률이 2% 넘게 줄어들기도 했지만 태국 국내 부동산 시장이 급격하게 얼어붙으며 가격이 폭락하자. 연쇄작용으로 과도한 담보 대출을 내준 은행들의 불량 채권이 급증하고 있어 불안감을 더욱 키우고 있습니다.”
“거기다가 경상수지 적자가 줄지 않고 계속 커지고 있으니 바트화 평가 절하 압력이 높아질 수밖에 없겠죠.”
“정확히 보셨습니다.”
“올해 태국의 경상수지 적자액이 150억 달러를 넘길 가능성이 크다고 했죠?”
석원의 물음에 앤드루가 바로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저희 예상으로는 태국 GDP의 8%에 해당하는 150억 달러 안팎이 될 걸로 보고 있습니다.”
“GDP 8%라…… 그 정도 적자라면 문제가 생기지 않는 것이 더 이상한 일이겠네요.”
“더 심각한 건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경상수지 적자 증가세가 지속적이고 점점 액수가 커지고 있다는 겁니다.”
다시 생각해봐도 성장률이 꺾이고 경상수지 적자폭이 늘고 있는 모습이 한국과 너무나도 판박이였다.
‘한국과 태국만 이런 것이 아니라 인도네시아와 필리핀 등등 일본을 뺀 아시아 국가 대부분이 똑같은 상황일 테지.’
이런 걸 볼 때 한국의 체력이 태국보다 조금 더 낫지 않았다면 아시아 금융위기의 진원지가 태국이 아니라 한국이 될 수도 있었을 터였다.
문득 떠오른 잡념을 지우고는 앤드루를 보며 물었다.
“태국 정부도 이런 분위기를 모르고 있진 않을 텐데 어떤 반응을 보이고 있어요?”
“말씀대로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걸 느꼈는지 조만간 재무장관을 교체해 외국 투자자들의 우려를 가라앉히려 하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뭘 어떻게 한다는 거죠.”
얼마 안 있어서 벌어질 헤지펀드들과의 싸움에 영향을 줄 수 있었기에 몸을 앞으로 당겨 앉으며 석원이 관심을 보였다.
“정부 예산을 수십억 달러 규모로 축소하는 긴축 재정을 펼치고 은행 대출 규제 강화와 함께 부실 은행의 인수 및 합병을 추진할 거라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상당히 과감한 개혁 정책인데 그대로 이루어진다면 외국 투자자들의 우려를 낮출 수도 있겠네요.”
그러자 앤드루가 회의적인 태도로 말을 받았다.
“계획대로 성공한다면 그렇겠지만 쉽진 않을 겁니다.”
“왜 어려울 거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우선 경기가 나빠지고 있는 상황에서 긴축 재정을 펼치는 것에 야당은 물론이고 연립 정권 내부에서도 불만과 반대의 목소리가 벌써부터 나오고 있습니다.”
한국과 달리 태국은 총선에서 승리해 과반수를 차지한 다수당이 행정부를 구성하는 내각책임제를 채택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난 총선에서 과반수를 차지한 정당이 나오지 않으면서 어쩔 수 없이 집권 여당이 다른 소수 정당을 끌어들여 연립 내각을 구성하고 있었다.
이러다 보니 서로의 신념과 이익에 따라 내각 안에서도 불협화음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오히려 야당과 연립 정부 일부에서까지 긴축 재정이 아니라 경기를 살리기 위해 재정을 더 풀어야 된다는 주장이 강한 상황이라 현재로서는 개혁 정책이 성공할 가능성이 아주 낮을 겁니다.”
“이야기를 듣고 보니 그런 것 같네요.”
하긴 개혁 정책이 성공했다면 태국이 외환 위기에 빠지지도 않았을 터였다.
앞에 놓인 찻잔을 집어든 석원이 적당히 식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내려놓는 걸 보며 랜든이 말했다.
“조만간 바트화 절하를 노리고 헤지펀드들이 행동에 나설 것으로 보이는데. 저희도 그때 같이 움직이도록 할까요?”
앤드루도 눈을 반짝이며 석원을 바라봤다.
팔짱을 낀 채 잠시 고심하던 석원은 이내 머리를 가로저으며 입을 뗐다.
“1라운드는 일단 그냥 지켜보도록 해요.”
다른 때와 달리 신중한 태도에 랜든이 내심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태국이 헤지펀드들의 공격을 버텨낼 거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경고등이 켜진 건 분명하지만 380억 달러에 이르는 외환보유고를 가지고 있는 만큼 공격을 받는다고 해도 금방 무너지진 않을 거예요.”
그러자 앤드루가 바로 반박했다.
“말씀대로 외환보유고가 많긴 하지만 국제 금융시장에서 하루에 거래되는 외환이 1조 달러 이상이라는 걸 생각해볼 때 헤지펀드들이 작정하고 밀어붙인다면 순식간에 녹아내려 버릴 겁니다.”
“맞습니다. 콧대 높은 영란은행과 일본도 필사적으로 방어에 나섰지만 결국에는 무릎을 꿇었지 않습니까.”
경제 대국인 영국과 일본도 견뎌내지 못했는데 태국이 버텨내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 어쩌면 당연했다.
“앞서 공격을 받았던 두 나라에 비하면 태국이 상대적으로 체력이 약한 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반대로 영국과 일본에는 없었던 무기가 하나 있죠.”
“그게 뭡니까?”
“바로 작년에 태국 정부가 주변 국가들과 맺어둔 쌍무협정이에요.”
뭘 말하는지 알아차린 랜든과 앤드루가 낮게 탄성을 내뱉었다.
“아.”
“그걸 잊고 있었군요.”
영란은행과 일본이 헤지펀드들의 공격에 당하는 걸 본 각국 중앙은행들은 언제든 자신이 먹잇감이 될 수 있다는 위기감을 느꼈다.
아시아 국가들 역시 마찬가지였는데 그에 대한 대책으로 미리 협정을 맺어두고 있다가 위기가 발생하면 서로 돕는 일종의 연합을 구성했다.
태국 역시 싱가포르, 홍콩, 말레이시아 등과 통화 위기에 빠지면 중앙은행들이 협력해 해당국을 돕는 협정을 체결해뒀다.
“나뭇가지 하나는 부러뜨리기가 쉽지만 여러 개가 뭉쳐 있으면 어려운 법이죠.”
앤드루가 무겁게 머리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주변국들이 태국을 지원해 준다면 확실히 쉽지 않은 싸움이 되겠군요.”
“특히 홍콩이 나선다면 더욱 승리를 낙관하기 어렵겠습니다.”
랜든 역시 굳은 얼굴로 말을 보탰다.
아시아의 금융 허브인 홍콩은 928억 달러라는 막대한 외환보유고를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아시아 국가들과 달리 금융에도 밝아 헤지펀드들 입장에서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거기에 더해 먼저 나서면 그만큼 리스크를 많이 져야된다는 걸 지난 두 번의 사례에서 봤을 테니까. 헤지펀드들도 공격을 하더라도 처음에는 가볍게 잽만 날리면서 서로 간을 볼 거예요.”
“괜히 돈키호테처럼 덤벼들었다가 태국 중앙은행의 달러를 소모시키는 총알받이가 되려고 하진 않을 거라는 말씀이시군요.”
“그래요.”
랜든도 입맛을 다시면서 납득한 표정을 지었다.
“하긴 저 같아도 남 좋은 일을 시키긴 싫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 헤지펀드들의 공격이 시작되면 우리는 반대로 바트화를 매수하도록 해요.”
“……!”
전혀 예상하지 못한 지시에 랜든과 앤드루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쳐다봤다.
“숏이 아니라 바트화 롱을 잡으라는 말씀이십니까?”
“맞아요.”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는 두 사람을 보며 석원이 태연하게 말했다.
“방금 말했다시피 서로 눈치를 보며 몸을 사릴 것이 분명한 헤지펀드들과 달리 태국은 전력을 다해 바트화 방어에 나설 테니까. 1라운드는 태국 중앙은행이 승리할 가능성이 클 거예요.”
뭘 노리는 건지 알아차린 앤드루가 눈을 반짝이며 몸을 앞으로 당겨 앉았다.
“아. 그럼 바트화가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르겠군요.”
“리스크가 큰 도박인 만큼 공격에 나섰던 헤지펀드들이 적지 않은 손해를 보게 되겠죠. 하지만 그렇다고 거기서 손을 들고 포기하진 않을 거예요.”
랜든이 머리를 끄덕이며 말을 받았다.
“애초에 모든 힘을 다 쏟아부은 것도 아닌데다가 환율을 방어한다고 태국 중앙은행의 외환보유고가 상당히 줄어들어있을 테니까. 오히려 기력을 회복하기 전에 재차 더 강하게 밀어붙이려고 하겠지요.”
월스트리트에서 주목하는 헤지펀드 운영 책임자다운 모습에 석원은 내심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깍지를 낀 손을 양쪽 팔걸이 위에 올리고 앉은 채 이야기를 계속했다.
“이미 체력이 깎인 상태에서 두 번째 공격까지는 막아내기 힘들 거예요. 그러니 우린 그 전에 포지션을 바꿔 바트화를 팔아 버리는 거죠.”
그러자 랜든이 무릎을 치면서 탄성을 내뱉었다.
“서퍼처럼 파도를 절묘하게 타면서 바트화가 위아래로 출렁이는 걸 전부 다 털어먹으시려는 거군요.”
앤드루도 감탄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허어. 그런 생각을 하시다니 정말 대단하십니다.”
담담하게 앉아 있었지만 사실 석원도 회귀 전 기억이 없었다면 절대 이런 리스크가 큰 줄타기를 하지 않고 안전하게 그냥 바트화 매도만 했을 터였다.
‘위아래로 전부 먹으려다가 파도를 거꾸로 타 버린다면 수익은 고사하고 오히려 크게 털려 버리는 거지.’
하지만 앞으로 상황이 어떻게 전개될지 알고 있었기에 이렇게 과감한 베팅을 할 수 있는 거였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지나가는 것이 좋겠지.’
그의 존재로 인해 많은 변화가 일어났기에 상황이 원래 흐름대로 똑같이 흘러갈 거라고 보장할 순 없었다.
이번 아시아 금융위기가 지나고 나면 더욱 많은 부분이 달라져 있을 테니 알고 있는 미래대로 흘러가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예상대로 상황이 흘러간다면 좋겠지만 언제든지 변수가 발생할 수 있으니까. 헤지펀드들과 태국 중앙은행의 움직임을 더욱 면밀하게 살피도록 해요.”
“예. 그러겠습니다.”
짧게 대답한 랜든은 이번 베팅으로 수익을 얼마나 낼지 잔뜩 기대하는 얼굴로 물었다.
“첫 베팅액은 얼마로 할까요?”
“너무 많이 넣었다가 헤지펀드들의 손실이 커지면 자칫 흐름을 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변수가 되어 버릴 수 있으니까. 적당히 1억 달러 정도만 베팅하도록 해요.”
그러자 랜든이 살짝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머리를 끄덕였다.
“조금 아깝긴 하지만 어차피 본 게임 앞에 벌이는 몸풀기 같은 거니까.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저도 그 정도가 딱 적당한 것 같습니다.”
“대신 태국 중앙은행이 바트화를 방어해 내더라도 그사이 주식 시장은 충격을 고스란히 다 받아 크게 폭락해 버릴 거예요. 그럼 옵션 계약으로 충분히 재미를 볼 수 있을 테니 아쉬워할 필요 없어요.”
일본 증권사들과 맺어둔 CDS 옵션 계약을 떠올린 두 사람은 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러고 보니 그게 있었군요.”
“태국 증시가 박살 나면 덩달아 CDS 옵션을 판 일본 증권사들도 머리를 부여잡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