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lden Spoon Investment Portfolio RAW novel - Chapter (310)
금수저 투자백서 310화(310/332)
310. 이야기가 통하지 않았다면 그건 가져간 돈이 부족해서야
서울 강남구 대치동 은마아파트.
강남에서도 부촌으로 손꼽히는 이곳 아파트 상가 3층에 한세그룹 본사가 위치해 있었다.
얼마 전 새로 발표된 재계 순위에서 4단계가 더 올라 14위가 된 재벌 그룹의 본사가 번듯한 고층빌딩이 아닌 아파트 상가 한 층을 그냥 쓰고 있는 걸 알면 다들 깜짝 놀라워했다.
실제로 한세그룹에 채용된 신입사원들이 처음 출근을 할 때 제일 당혹스러워하는 부분도 바로 이것이었다.
은마아파트와 미도파 아파트를 지은 회사가 바로 한세그룹이기도 했지만 따로 사옥을 짓지 않았던 건 “목수가 자기 집을 가지면 망한다”는 최병무 회장의 철학 때문이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그러면서 본사가 입주해 있는 은마아파트 상가 3층이 한세그룹이 아닌 최병무 회장의 개인 소유라는 거였다.
물론 얼마 있지 않아 한세그룹 사태가 터지면서 본사로 쓰던 상가 3층 역시 전체가 경매로 나오게 되지만 아직은 조금 뒤의 일이었다.
3층 가장 안쪽의 널찍한 회장실 안.
최병무 회장을 가운데 두고 주요 임원 여섯 명이 심각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담배를 입에 문 최병무 회장이 무겁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먼저 입을 뗐다.
“그러니까 보유 현금이 바닥났다 이 말이지?”
일한은행 부행장 출신으로 그룹 재무를 맡고 있는 서준제 이사가 굳은 얼굴로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오늘 임직원 월급을 지급하고 나면 남는 현금이 백억이 채 안 됩니다.”
얼핏 많은 것처럼 보여도 재계 서열 14위인 한세그룹의 규모를 생각하면 턱없이 부족한 현금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액수를 듣자마자 모여 있던 임원들이 자신도 모르게 침음성을 내뱉었다.
“그마저도 앞으로 사흘 동안 돌아오는 어음을 결재하고 나면 다 소진되고 말 겁니다.”
“지난달에 추가로 회사채를 발행하고 가지고 있던 부동산들을 처분했는데도 돈이 없다는 거야.”
짜증 섞인 최병무 회장의 말투에 서준제 이사가 피로한 기색이 가득한 모습으로 말을 받았다.
“말씀대로 부동산 처분과 회사채 발행을 통해 3천억 상당의 자금을 조달했습니다만 이자를 상환하고 당진 철강공장 건설 비용으로 금방 다 나가 버렸습니다.”
“으음.”
“연말까지 어음들이 줄줄이 돌아올 텐데. 이대로 간다면 다음 주를 넘기지 못하고 부도가 날 수도 있습니다.”
부도라는 말에 다들 눈을 크게 뜨거나 안색을 흐리며 속으로 신음을 삼켰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결국 올 것이 왔다는 모습이기도 했다.
밖으로는 최대한 숨기고 있었으나 이미 1년 전부터 그룹의 재무 상황이 급격하게 안 좋아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건설업이 불황인 가운데 작년에 부도를 낸 유원 건설을 무리하게 인수한 여파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당진에 짓고 있는 제철소 공사 비용이 계획보다 무려 두 배로 늘어난 것이 치명적이었다.
처음 2조 7천억 원 정도로 예상했던 제철소 공사비가 5조 7천억으로 늘어났으니 자금난에 시달리지 않는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일 터였다.
방 안 공기가 더욱 무거워진 가운데 서준제 이사가 힐끔 눈치를 살피고는 조심스럽게 의견을 내놨다.
“일단 급한 대로 자금 상황이 나아질 때까지 당진 제철소 공사를 잠시 중단하거나 진행을 늦추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건 안 돼. 이제 몇 달 뒤면 완공인데 여기서 공사를 멈출 수는 없어.”
말을 하기 무섭게 최병무 회장이 정색했다.
“지금 당장 돌아오는 어음을 막기에도 벅찬 상황인데 완공까지 필요한 공사비 7천억을 마련할 방도가 없습니다.”
그러자 그룹 창업 때부터 함께 한 최병무 회장의 측근인 우영학 전무가 끼어들어 말했다.
“지금 공사를 중단하거나 속도를 늦추면 그만큼 비용이 추가로 들어가게 될 걸세.”
“연말까지 돌아올 어음들을 못 막는다면 바로 부도입니다. 지금 당진 제철소가 문제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서준제 이사가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언성을 높였다.
“은행에서 추가 대출을 받아낼 방법은 없겠나?”
최병무 회장이 손가락 사이에 담배를 끼운 채 묻자 서준제 이사가 고개를 저으며 난색을 표했다.
“주거래 은행인 일한 은행을 비롯한 금융권에 진 채무가 철강만 이미 3조 6천억이나 됩니다. 거기다 다른 계열사들까지 다 합치면 무려 8조 원에 달하고요.”
천문학적인 액수에 다들 말문이 막힌 가운데 서준제 이사가 목소리에 힘을 주며 말을 이었다.
“연간 이자로 내야 하는 돈만 1조에 달합니다. 이런 상황이라면 설사 당진 제철소를 완공시키더라도 정상적인 경영이 어려울 겁니다.”
그러자 최병무 회장이 거의 다 타들어 간 담배를 크리스털 재떨이에 비벼서 끄고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래도 공사 중단은 안 돼.”
“하지만 현금이 바짝 말라붙었는데…….”
최병무 회장은 재차 설득하려는 서준제 이사의 말을 중간에 끊으며 건조한 어투로 툭 내뱉었다.
“공사를 멈추면 우리 그룹이 극심한 자금난을 겪고 있다는 시중의 소문을 인정하는 꼴이 될 거야.”
사실이지 않냐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서준제 이사는 겨우 꾹 눌러 참았다.
한세그룹의 자금 상황이 안 좋다는 건 명동 사채 시장은 물론이고 여의도 증권가에도 이미 다 퍼져서 알만한 사람은 아는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당장 한세그룹에서 발행한 회사채가 명동에서 액면가보다 훨씬 낮은 가격에 거래되는 것도 이런 영향 때문이었다.
“어렵다는 이야기가 소문으로 도는 것만으로도 주가가 크게 떨어지고 자금 회전이 안 되는 판국이야. 그런데 진짜로 당진 제철소 공사를 중단해 버리면 어떻게 될 것 같나.”
서준제 이사가 선뜻 대답하지 못하자 최병무 회장이 냉소적인 태도로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돈을 떼일까 봐 당장 은행들이 채권을 회수하려고 득달같이 달려들겠지. 서 이사. 자넨 은행 출신이니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 않나.”
사실이었기에 서준제 이사는 반박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뿐 아니라 하청 업체들도 진짜 부도가 날까 봐. 회사로 찾아와 밀린 대금을 내놓으라고 난리를 치거나 가지고 있는 어음을 헐값에라도 팔아 버리려고 한바탕 소동을 벌이겠지.”
“…….”
이때까지만 해도 하청 업체에 현금이 아니라 일종의 지급 보증서인 어음을 끊어주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원청 입장에서는 당장 돈이 나가지 않고 그걸로 자금을 회전시킬 수 있으니 이득이었으나 하청 업체로서는 애물단지가 따로 없었다.
물론 만기까지 가지고 있으면 약속한 금액을 받을 수 있었으나 당장 돈이 급한 대부분의 하청 업체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명동 사채 시장에서 어음을 할인해 처분하곤 했다.
그럼 어음을 안 받으면 되지 않냐고 말할 수도 있지만 그렇게 했다가는 주문이 전부 끊겨 버렸기에 어쩔 수가 없었다.
문제는 한세그룹이 자금난을 겪고 있다는 소문이 돌면서 명동 사채 시장에서 한세그룹 어음을 사길 꺼려한다는 거였다.
그 때문에 한세그룹에서 어음을 받은 하청업체들은 절반 가까이 후려쳐서 할인해 팔거나 아니면 억지로 만기까지 들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크게 할인해서 팔면 너무 손해였기에 대부분이 마지못해 어음을 만기까지 떠안고 있었다.
여기서 한 번 더 한세그룹이 악질적으로 행동한 건 보통 3개월이나 6개월 단위로 끊어주는 어음을 자신들의 현금 유동성 확보를 위해 일부러 9개월에서 길면 1년짜리로 발행해주고 있다는 거였다.
한세그룹이 부도를 내자 수많은 중소 하청 업체들이 줄도산했던 이유가 바로 이거였다.
최병무 회장은 눈에 힘을 주고 절대 물러설 수 없다는 태도를 보였다.
“그렇게 되면 부도가 나지 않을 것도 부도가 나 버리고 말 거야.”
“하지만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추가 자금 수혈이 되지 않는다면 더 이상 공사를 진행시킬 돈이 없습니다.”
서준제 이사가 난색을 보이자 최병무 회장이 상체를 바로 세우며 말했다.
“보유한 지분을 담보로 추가 대출을 받는 건 어떤가?”
“회장님과 가족분들이 가지고 계신 한세철강 주식 9백만주 가운데 이미 5백 40만 주는 은행에 담보로 잡혀 있는 상태라 남은 지분은 3백 60만 주 뿐입니다. 그나마도 최근 주가가 폭락해 담보를 잡는다고 해도 가액이 210억 정도밖에 안 될 겁니다.”
이미 거기까지 다 계산을 해본 듯 서준제 이사가 막힘없이 말을 늘어놨다.
“이걸로는 간신히 한두 달을 더 연명할 수 있을 뿐이지 근본적인 해결책은 되지 않습니다.”
고개를 저으며 회의적으로 반응하자 최병무 회장은 팔짱을 낀 채 잠시 고심하다 고개를 돌려 최측근인 우영학 전무에게 시선을 줬다.
“우 전무.”
“예. 말씀하십시오.”
“맞은편에 있는 미도 맨션 상가에 차명으로 보유한 상가가 몇 개 있지.”
우영학 전무는 모여 있는 다른 임원들을 슬쩍 쳐다보고는 대답했다.
“13평짜리 네 개와 15평 하나가 있습니다.”
“그거 요즘 시세가 얼마쯤이나 해?”
“13평이 8천만 원 정도 하고 15평은 1억이 조금 안 되는 가격에 거래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 정도면 적당하군.”
작게 머리를 끄덕인 최병무 회장은 다시 고개를 돌려 왼편에 자리한 서준제 이사를 보며 말했다.
“일한은행 류 행장한테 연락해서 내가 오늘 저녁에 급히 좀 만났으면 한다고 하게.”
“제가 이미 여러 차례 추가 지원을 요청해봤지만 더 이상의 대출은 어렵다고 거절당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직접 나서겠다는 거야.”
“어떻게 하시려고 그러십니까?”
그러자 최병무 회장이 흥 하고 코웃음을 쳤다.
“이 세상에 남자여자를 가리지 않고 다들 좋아하는 것이 뭔지 아나? 바로 돈이야. 이야기가 통하지 않았다면 그건 가져간 돈이 부족해서라고.”
서슴없이 뇌물을 주겠다고 말하는 모습이 과연 로비왕이라는 별명이 붙은 최병무 회장다웠다.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온갖 뇌물과 로비로 위기를 넘겨 왔었기에 서준제 이사와 임원들은 노골적인 말을 듣고서도 그리 크게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그럴 줄 알았다는 반응을 보이며 늘상 그래왔듯이 이번에도 최병무 회장이 로비를 통해 자금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마저 떠올렸다.
“내가 알고 있기로 류 행장 임기가 이번으로 마지막이라고 들었는데 맞나?”
최병무 회장이 뒤로 몸을 기대며 물었다.
“보통 연임을 끝으로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이 관례이니 아마 그럴 겁니다.”
서준제 이사의 말에 최병무 회장이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그럼 슬슬 퇴직 이후를 생각할 때가 됐으니 더 잘 됐군.”
이미 문제가 다 해결된 것처럼 거드름을 피우며 지시했다.
“일단 은행 한 곳만 가지고는 필요한 대출을 다 받아내기 어려울 수 있으니까. 철강에 빌려준 돈이 많은 다른 세 곳의 은행장들하고도 최대한 빨리 약속을 잡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서준제 이사의 대답을 들으며 최병무 회장은 담배를 새로 꺼내 입에 물었다.
“수서 사건에서도 살아 돌아온 난데 고작 이 정도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 수는 없지.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당진 제철소만 완공시키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될 거야. 암, 그렇고말고.”
스스로 세뇌시키듯 낮게 중얼거린 최병무 회장은 라이터를 켜서 담배에 불을 붙였다.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느껴지는 불안함은 애써 무시한 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