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lden Spoon Investment Portfolio RAW novel - Chapter (316)
금수저 투자백서 316화(316/332)
316. 어떻게든 막아보시오.
1997년 2월 12일 수요일 뉴욕 맨해튼.
자정을 막 넘긴 늦은 시간이었지만 원 뉴욕 플라자 빌딩 31층에 위치한 엘도라도 펀드 트레이딩 플로어는 불이 환하게 밝혀져 있었다.
비상 연락을 받고는 택시를 타고 황급히 달려온 최호근 부장과 팀원들이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대부분의 트레이더들이 나와 북적거리고 있었다.
여기저기에서 전화벨이 울리며 분주하게 돌아가고 있는 모습에 유석현이 긴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뭔진 몰라도 엄청 큰일이 터진 것 같은데요.”
무겁게 머리를 끄덕인 최호근 부장은 자리에서 일어선 채 큰소리로 누군가와 통화 중인 메이슨을 발견하곤 가까이 다가갔다.
“어. 알았어. 홍콩 쪽 상황도 체크해서 알려줘.”
때마침 통화를 끝낸 메이슨이 수화기를 내려놓는 걸 보고 최호근 부장이 말을 걸었다.
“메이슨. 도대체 무슨 일이 생긴 거예요?”
옆을 돌아본 메이슨은 최호근 부장과 팀원들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서 있는 모습에 한 손으로 갈색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며 말했다.
“다들 왔어요.”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책상 위에 설치된 네 대의 모니터들을 턱으로 가리켰다.
“보다시피 지금 태국 바트화가 공격당하고 있어요.”
최호근 부장과 팀원들이 모니터를 보자 정말로 방콕과 도쿄 외환시장에서 바트화 매도 주문이 말 그대로 홍수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저게 다 얼마야!”
“태국에서 뭔 일이라도 터진 거 아니에요?”
다들 깜짝 놀라는 가운데 최호근 부장이 뭔가를 알아차리곤 굳은 얼굴로 메이슨을 쳐다봤다.
“이거 혹시…….”
“역시 미스터 최는 바로 알아차렸네요. 헤지펀드들이 바트화를 두들기고 있는 거예요.”
“으음.”
최호근 부장이 낮게 침음성을 흘렸다.
“영란은행과 일본을 무릎 꿇렸던 것처럼 바트화를 절하시키려고 하는 거군요.”
그러자 메이슨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정확히 봤어요. 경상수지 적자가 늘어나고 경기까지 안 좋으니 바트화가 떨어질 때가 되지 않았겠어요. 그런데도 태국 정부가 사실상 고정 환율제를 계속 유지하고 있으니 헤지펀드들이 틈을 파고든 거죠.”
메이슨은 흰 이를 드러내고 웃으며 살짝 들뜬 표정을 지어 보였다.
“네 사람은 정말 운이 좋은 줄 알아요.”
“예?”
최호근 부장과 팀원들이 의아한 얼굴로 쳐다보자 메이슨은 더욱 활짝 웃었다.
“귀국하기 전에 이제부터 벌어질 빅게임을 직접 눈앞에서 볼 수 있게 됐으니 행운이죠.”
“듣고 보니 그렇네요.”
그제야 말뜻을 이해 한 최호근 부장이 고개를 끄덕여 수긍했다.
메이슨의 말대로 월가에 없었더라면 헤지펀드들과 태국 정부의 한판 승부를 직관하긴 어려웠을 터였다.
최호근 부장은 지금 이 순간 이 자리에 있는 것 자체가 보통 사람들에겐 주어지지 않는 대단한 기회인 것을 새삼 실감했다.
정환엽 과장과 팀원들 역시 활기차게 돌아가는 트레이딩 플로어를 보면서 자신들도 모르게 들뜬 표정을 지었다.
눈을 반짝이는 부하들을 힐끗 쳐다본 최호근 부장이 다시 메이슨에게 물었다.
“엘도라도 펀드도 이번 판에 참가하는 겁니까?”
그러자 메이슨이 어깨를 으쓱이며 엄지손가락으로 위를 가리켰다.
“그건 보스가 결정할 일이죠.”
보스라는 말에 최호근 부장은 석원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런데 이런 큰 판에 빠지실 보스가 아니죠.”
메이슨이 입가에 짙은 미소를 지은 채 말했다.
* * *
같은 시각.
대표실 소파에 석원을 가운데 두고 랜든과 앤드루 그리고 댄이 양옆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헤지펀드들은 물론이고 JP모건과 씨티 그리고 골드만삭스까지 이번 바트화 매도에 가세한 것으로 파악됐습니다.”
새로 선임 치프가 된 댄의 보고에 석원이 한쪽 다리를 꼰 채 입을 뗐다.
“퀀텀 펀드도 움직였어요?”
“아직까지는 포착된 것이 없습니다만 JP모건이나 골드만삭스를 통해 우회해서 공격에 나섰을 수도 있습니다.”
태국 정부나 월가 모두 퀀텀 펀드의 행동을 주목하고 있을 테니 포지션을 숨기기 위해 트릭을 사용했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었다.
“바트화 매도 규모가 얼마나 되죠?”
“오기 전까지 확인한 액수만 4억 달러가 조금 넘었습니다.”
대답을 들은 석원이 팔짱을 끼며 말했다.
“헤지펀드들이 본격적으로 바트화 공격에 나섰다고 하기에는 애매한 액수네요.”
석원은 고개를 돌려 투자운용본부장(CIO)이 된 앤드루에게 시선을 줬다.
“어떻게 생각해요?”
그러자 앤드루가 사뭇 진지한 얼굴로 대답했다.
“조금 더 지켜봐야 확실해지겠지만 지금까지 보인 움직임만 봐서는 본격적인 공격은 아닌 것 같습니다.”
“제가 보기에도 그렇습니다. 당장 퀀텀 펀드가 아직 나서지 않은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랜든이 중간에 끼어들어 말을 얹었다.
두 사람의 의견을 들은 석원은 동의하듯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바트화를 단번에 주저앉히려고 했다면 훨씬 더 많은 매도 주문을 한꺼번에 쏟아냈겠죠.”
“맞습니다.”
석원은 뒤로 몸을 기대며 물었다.
“태국 정부는 어떻게 대응하고 있어요.”
그러자 댄이 곧바로 대답했다.
“공격이 시작되자 외환시장에서 바트화를 받아내면서 적극적으로 환율을 방어 중입니다.”
“고정 환율이나 마찬가지인 태국의 복수통화바스켓제도를 지키기 위해서는 손해를 보는 걸 알면서도 울며 겨자 먹기로 그래야 되겠죠.”
그러자 앤드루가 손가락으로 금테안경을 치켜올리며 말을 받았다.
“관건은 공격하는 헤지펀드들이 손을 들 때까지 태국의 외환보유고가 버틸 수 있느냐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앤드루의 말대로 핵심은 그것이었다.
석원은 마주 쥔 양손을 무릎 위에 올리고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태국이 가지고 있는 외환보유고가 380억 달러 남짓이라고 했었죠.”
“작년 연말에 발표한 액수인걸 감안하면 지금은 그것보다 더 줄어 있을 겁니다.”
경상수지 적자가 계속되고 있는 상황에서도 바트화 상승이 완만하게 이루어진 건 태국 중앙은행의 개입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지 않았다면 바트화는 진즉에 크게 폭락했을 터였다.
“헤지펀드들이 본격적으로 매도 공세를 펼치면 외환보유고가 순식간에 녹아내리겠네요.”
“아마 200억 달러 아래로 떨어지면 더 버티지 못하고 항복해 버릴 가능성이 클 겁니다.”
“외환보유고가 몽땅 거덜 나 버리면 훨씬 큰 재앙이 닥칠 테니 그렇겠죠.”
랜든이 몸을 앞으로 당겨 앉으며 진지하게 물었다.
“계획대로 롱에 베팅하실 겁니까?”
석원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태국 정부도 이대로 힘없이 물러서진 않을 테고 헤지펀드들도 아직은 가볍게 잽을 날리는 정도로 보이니까 1라운드에서는 태국 쪽에 돈을 걸도록 해요. 하지만 태국 정부의 대응이 예상보다 약하다면 헤지펀드들이 태도를 바꿔 한 번에 몰아칠 수도 있으니까 일단 잠시 두고 보도록 하죠.”
“알겠습니다.”
석원은 고개를 돌려 앤드루에게도 지시했다.
“퀀텀 펀드의 움직임이 무엇보다 중요하니까. 행동을 면밀하게 주시하다가 뭔가 조짐이 있으면 바로 보고하도록 해요.”
“예.”
앤드루가 짧게 대답한 순간 소파 옆 협탁에 설치된 키폰 벨이 울렸다.
석원은 곧바로 팔을 뻗어 스피커폰 버튼을 눌렀다.
스피커에서 들리는 외환 트레이딩 팀장인 타일러의 목소리에 석원은 크게 놀란 기색없이 그럴 줄 알았다는 태도를 보였다.
“이제 전선이 두 군데로 확대됐으니. 지금부터 태국 중앙은행이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서 바트화 방어 의지가 얼마나 강한지 확인할 수 있겠네요.”
미래의 가격을 예상하고 거래가 이루어지는 곳이 바로 선물 시장이었다.
그러니 여기서 바트화 가격을 떨어뜨린다면 차익을 얻을 수 있는 건 물론이고 현물 시장까지 뒤흔들 수 있었다.
석원은 과연 예상대로 태국 중앙은행이 전력을 다해 방어에 나설지, 아니면 허둥거리다가 이대로 헤지펀드들한테 기선을 빼앗기고 말 것인지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앞으로 한두 시간.
그 사이 태국 중앙은행이 취하는 행동에 따라 석원이 어디로 베팅을 할지 여부가 결정될 터였다.
* * *
작년 12월에 새로 재무장관이 된 차트차이는 과감한 개혁성향의 인물이었다.
태국 경제가 속으로 크게 곪아 가고 있다는 걸 알고 수십억 달러 규모의 정부 예산 축소와 무분별한 대출 규제 그리고 부실 은행 인수합병으로 금융 기관들을 건전화시키려고 했다.
아울러 소비세를 도입해 정부 재정 수입을 늘리려고 시도했지만 야당은 물론이고 집권 여당에서도 반대 목소리가 나오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터진 헤지펀드들의 바트화 공격은 말 그대로 재앙 그 자체였다.
회색 정장을 입은 차트차이 재무장관은 선물 시장에서마저도 바트화 매도가 시작됐다는 이야기에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매도 물량이 얼마나 나오고 있소?”
그러자 와리트 태국 중앙은행장이 긴박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미 20억 바트를 넘겼고 지금도 계속해서 매도 주문이 쏟아지고 있습니다!]집무실 책상 앞에 앉아 수화기를 귀에 갖다 댄 차트차이 재무장관은 얼굴을 확 구겨 버렸다.
“하필이면 이럴 때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추진 중인 경제 개혁 조치가 모두 성공적으로 끝나면 부실화된 태국 경제를 다시 되살릴 수 있는데 가장 취약한 순간에 공격이 들어왔으니 짜증이 날 만도 했다.
반대로 생각하면 지금이 제일 태국 경제를 흔들어 놓기 좋은 타이밍이었기에 하이에나 같은 헤지펀드들이 그걸 놓치지 않고 군침을 흘리며 덤벼든 것일 터였다.
정색한 차트차이 재무장관은 손에 든 수화기를 고쳐쥐며 단호하게 지시를 내렸다.
“잘 들으시오. 여기서 밀리면 헤지펀드들이 더 기세를 올리면서 우릴 물어뜯으려고 할 테니. 무조건 바트화를 지켜내시오!”
그러자 수화기 너머로도 와리트 중앙은행장이 난감해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환율을 방어하려면 외환보유고를 꺼내 쓸 수밖에 없는데. 그러면 자칫 엄청난 손실이 발생할지도 모릅니다.]“나도 알고 있소. 하지만 지금은 환손실을 보더라도 환율을 지켜내는 것이 우선이요. 만약 바트화가 절하되게 된다면 그날로 태국 경제는 나락으로 떨어지게 될 거요!”
차트차이 재무장관은 목소리에 힘을 주며 강하게 밀어붙였다.
와리트 중앙은행장 역시 바트화 절하가 가져올 충격이 얼마나 클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어쩔 수 없다는 듯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알겠습니다. 그럼 외환을 얼마까지 쓸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겠습니까?]잠시 고민한 차트차이 재무장관은 이내 결정을 내리고는 대답했다.
“일단 80억 달러까지 재량권을 줄 테니까. 그걸로 어떻게든 막아보시오.”
80억 달러면 태국이 가진 외환보유고에서 거의 1/4에 해당하는 거액이었다.
이것만 봐도 차트차이 재무장관이 이번 사태를 얼마나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는지 잘 알 수 있었다.
[…… 알겠습니다.]“다시 말하지만 달러를 아낌없이 퍼부어서 헤지펀드 놈들이 겁을 먹고 물러서게 만드시오.”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통화를 끝낸 차트차이 재무장관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중얼거렸다.
“영란은행이나 일본처럼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든 초반에 공세를 꺾어놔야 돼.”
그러고는 환율 방어를 위해 외환보유고를 사용하는 걸 총리한테 사후 승인을 받기 위해 키폰 버튼을 누르며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당장 총리실로 전화 연결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