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lden Spoon Investment Portfolio RAW novel - Chapter (324)
금수저 투자백서 324화(324/332)
324. 아니. 이제부터 시작일 거예요.
1997년 3월 11일, 태국 방콕.
태국 중앙은행(BOT) 국제국 사무실은 여기저기에서 시끄럽게 울려대는 전화벨과 외환 담당자들이 질러대는 고함 소리에 흡사 전쟁터를 방불케했다.
따르릉! 따르릉!
“5.9에 30개 아니 50개 보트!”
“시암상업은행(SCB) 외환 계정이 바닥났다고 합니다!”
“한 시간 전에 보충해 줬었잖아.”
“벌써 다 써 버렸다고 합니다.”
얼굴을 구긴 담타투이 외환센터장이 고개를 돌려 옆에 있는 부하 직원을 보며 날카로운 목소리로 물었다.
“남은 외환이 얼마나 있어?”
그러자 직원이 어두운 얼굴로 대답했다.
“2억 3천만 달러뿐입니다.”
“뭐야 벌써 그렇게나 줄었어.”
“바트화 매도가 너무 많다 보니 외환이 빠르게 소진되고 있습니다.”
“젠장!”
거친 욕설을 내뱉으며 담타투이 외환센터장이 다그치듯 물었다.
“이 상태로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 것 같아?”
그러자 직원이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이런 속도라면 장 마감이 되기 전에 계정이 바닥날 가능성이 높습니다.”
“끄응.”
앓는 소리를 내뱉은 담타투이 센터장은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었다.
“일단 SCB에 1억 달러를 넣어주고 잔고가 5천만 달러 아래로 떨어지면 나한테 바로 보고해.”
“알겠습니다.”
앞에 놓인 여섯 대의 모니터로 바트화 매도 일색인 외환시장 상황을 확인한 담타투이 외환센터장은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러고는 외환 사용을 추가로 승인받기 위해 급히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오늘 하루에만 벌써 두 번째로 하는 추가 승인 요청이었다.
이것만 봐도 헤지펀드들과 싸움이 얼마나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는지 알려주는 증거였는데 빠르게 줄어드는 외환에 담타투이 외환센터장의 등골에선 식은땀이 흘렀다.
아무리 돈을 긁어모아도 무지막지하다는 말 밖에 나오지 않는 저 물량 공세를 도저히 막아낼 수 있다는 확신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빌어먹을.”
담타투이 외환센터장은 모니터를 노려보면서 손에 든 수화기를 으스러뜨릴 것처럼 꽉 움켜쥐었다.
***
다음날.
절체절명의 위기에 놓인 태국의 상황을 보여주듯 하늘에 먹구름이 잔뜩 끼어 있는 가운데 국왕의 거처인 찟라다 궁(Chitralada Palace) 정문 앞에 많은 내외신 기자들이 모여 있었다.
바로 국왕을 알현하기 위해 왕궁을 찾은 기디카엠 총리를 인터뷰하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얼마쯤 있었을까 하늘에서 갑자기 후두둑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기자들의 웅성거림이 점차 커져갈 때 굳게 닫혀 있던 철문이 열리며 정장을 입은 기디카엠 총리가 우산을 펼쳐 든 비서와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자 모여 있던 기자들이 우르르 달려들어 기디카엠 총리를 둥글게 둘러싸고는 카메라와 마이크를 들이밀며 질문을 쏟아냈다.
“환율이 계속 불안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데. 여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한 말씀만 해주십시오!”
“오늘 알현 자리에서 어떤 대화를 나누셨습니까!”
“태국 경제 상황을 생각하면 바트화를 절하해야 된다는 의견이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사방에서 번쩍이는 플래쉬 세례를 받으며 경직된 얼굴로 서 있던 기디카엠 총리는 앞에 있는 방송 카메라를 보며 단호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지난번에도 밝혔다시피 바트화가 공격받고 있는 건 태국 국민들이 수년간 힘들게 쌓은 부를 빼앗아 가려는 탐욕스러운 환투기 세력들의 비열한 술책 때문입니다. 저와 내각은 이런 환투기 세력들의 공격에 결연히 맞서고 있고 결코 뒤로 물러서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러자 CNBC 로고가 붙은 마이크를 든 금발의 여기자가 큰 소리로 물었다.
“그럼 바트화 절하가 없을 거라는 말씀이십니까?”
“물론입니다. 환투기 세력들이 원하는 대로 바트화를 절하한다면 태국은 가난해질 겁니다. 이 자리에서 다시 한번 말씀드리는데 결단코 지금 취하고 있는 환율 정책을 바꾸는 일은 없을 겁니다.”
“하지만 현재 태국의 외환보유고가 얼마 없는 걸로 알려졌는데 환율을 지키는 것이 가능하겠습니까!”
“영란은행과 일본도 헤지펀드들의 공격에 무릎을 꿇었는데 태국이 정말로 버텨낼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총리님!”
기자들이 벌떼처럼 달라붙어 질문을 쏟아냈지만 기디카엠 총리는 더 이상 대답을 하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왕궁을 지키는 근위대 대원들이 열어주는 길을 따라 대기하고 있던 관용차 뒷좌석에 올라타고는 그대로 자리를 떠났다.
***
[…… 보셨다시피 기디카엠 총리는 바트화 방어에 강한 자신감을 보였습니다. 하지만 외환시장에서는 오늘도 대규모 매도 주문이 나오며 바트화 약세가 계속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태국 증시 역시 약세를 벗어나지 못한 채…….]석원이 리모컨을 들어 바트화 관련 뉴스가 나오고 있는 텔레비전을 끄자 소파 왼편에 앉아 있던 랜든이 여유로운 태도로 말했다.
“저런 말을 하는 걸 보니 아직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석원은 한쪽 다리를 꼬고 앉은 채 대꾸했다.
“위태로운 걸 알더라도 곧이곧대로 말할 수 없지 않겠어요.”
그러자 함께 있던 앤드루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위기를 인정하는 순간 증시는 물론이고 국가 전체가 패닉에 빠질 테니 그럴 겁니다.”
“하긴. 가뜩이나 불안감이 가득한데 거기다가 폭탄을 던질 수는 없겠지요.”
랜든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하지만 외환보유고가 바닥을 거의 드러내고 있으니 며칠 안 가 백기를 들게 될 거예요.”
커피를 한 모금 마신 석원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앤드루에게 시선을 줬다.
“홍콩과 나머지 두 나라 중앙은행들이 이제 바트화 매수를 완전히 중단했다고 했죠?”
“그렇습니다.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는 진즉에 손을 들었고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홍콩 역시 더는 힘에 부치는지 오늘부터 바트화 매수를 하지 않고 있습니다.”
푹신한 소파에 몸을 기댄 채 석원이 담담하게 물었다.
“태국이 얼마나 버틸 수 있을 것 같아요?”
“지금 같은 속도로 외환보유고를 소진한다면 짧으면 사흘 길어봤자 닷새를 넘기기 어려울 겁니다.”
그 역시 비슷한 생각이었기에 동의하듯 머리를 끄덕였다.
“그럼 늦어도 다음 주에는 모든 것이 끝이 나겠군요.”
랜든의 이야기에 석원이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이제부터 시작일 거예요.”
“네?”
두 사람은 의아한 표정으로 석원을 쳐다봤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랜든의 물음에 약간 가라앉은 목소리로 차분히 설명했다.
“태국 정부가 백기를 들고 항복하며 환율 밴드를 풀어 버린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 것 같아요?”
“그야 그동안 제한폭에 묶여 있던 바트화가 크게 폭락하면서 숏포지션을 잡았던 헤지펀드들이 큰 차익을 거두겠지요.”
“그건 디폴트 값이고 바트화 절하의 충격파가 태국에서 그치지 않고 주변 동남아 국가들로 급속하게 번져나가게 될 거예요.”
거기까지는 미처 생각을 못 했는지 두 사람이 놀란 눈으로 쳐다보는 가운데 석원이 계속 말을 이었다.
“말레이시아와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 비슷한 경제 모델을 가지고 있고 역시나 지난 몇 년간 호황을 누리며 버블이 잔뜩 끼어 있는 동남아 국가들도 태국처럼 위기에 처할 수 있다는 불안감이 번지지 않겠어요?”
“……!”
“그로 인해 환율이 흔들린다면 이미 태국에서 크게 재미를 본 헤지펀드들이 그걸 그냥 놓칠 리가 없겠죠.”
그제야 말뜻을 이해한 랜든이 낮게 탄성을 내뱉었다.
“홍콩과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같은 경우에는 태국을 돕느라 상당한 액수의 달러를 써 버리는 바람에 취약해져 있는 상황이니까. 더욱 손쉬운 먹잇감이 될 수 있겠군요.”
“거기다가 태국에 이어서 어디든 다른 동남아 국가가 무너진다면 불안감이 더욱 크게 증폭될 테고, 핫머니들의 투자금 회수가 일어나면서 동남아 전체가 외환 위기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가게 될 거예요.”
“공포만큼 전염이 빠른 것도 없지요.”
랜든은 진지한 얼굴로 그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그렇게 되면 헤지펀드들이 굶주린 메뚜기떼들처럼 이리저리 옮겨 다니면서 동남아 국가들을 뒤흔들어 놓을 거예요.”
“말씀대로 된다면 지금까지 없었던 정말 큰 판이 만들어지겠군요.”
앤드루가 들뜬 얼굴로 눈을 반짝였다.
태국 하나만 해도 예상되는 수익이 엄청난데 동남아 지역 전체를 양털 깎기로 털어먹는다면 전리품이 얼마나 될지 상상하기조차 어려웠다.
‘더군다나 지난 십 년간의 호황으로 다들 양털이 토실토실 쪄 있는 상태이니 더욱 군침을 흘릴 수밖에 없을 거야.’
석원은 몸을 당겨 앉은 상태로 이야기에 한껏 집중한 두 사람을 보면서 말했다.
“아마 이번 판이 모두 마무리되면 끼어든 헤지펀드들 모두 최고의 성과를 올리게 될 거예요.”
“말씀하신 대로 동남아 전체로 위기가 번진다면 정말 그렇게 되겠습니다.”
랜든에 이어 앤드루도 혀를 내두르며 감탄했다.
“저번부터 곧 큰 판이 벌어질 거라고 하신 것이 태국을 두고 하신 말씀인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훨씬 더 커다란 걸 보고 계셨군요. 역시 대단하십니다.”
두 사람의 진심 어린 찬사에 석원은 피식 웃고는 다시 표정을 가다듬었다.
“다음 차례는 필리핀과 말레이시아가 될 가능성이 높으니까. 그렇게 알고 미리 준비를 해두도록 해요.”
그러자 앤드루가 머리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바트화 방어를 돕느라 외환보유고가 많이 축난 말레이시아는 그렇다고 해도 필리핀은 이미 IMF 체제 아래 있어서 부동산이나 경제에 거품이 안 끼어 있는데. 공격 대상이 될 거라는 말씀이십니까?”
의아한 시선에 석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지적한 대로 IMF의 영향 때문에 필리핀이 보수적인 경제 정책을 펼치고 있는 건 맞지만 경상수지 적자가 GDP 대비 8%에 육박할 정도로 높아 대외 부채가 아주 크죠. 그런데 태국과 똑같이 밴드를 두고 사실상 고정 환율제를 실행하고 있으니까 충분히 공격할 만하지 않겠어요?”
잠시 곰곰이 생각해본 앤드루가 이내 납득한 표정을 지었다.
“말씀을 들으니 그렇군요.”
석원은 찻잔을 다시 들어 커피를 마시고는 내려놨다.
“이번 판은 단기전이 아니라 연말까지 아주 길게 이어질 테니까. 뉴욕 본사를 컨트롤 타워로 해서 도쿄와 홍콩 지사가 업무를 분담해 24시간 쉬지 않고 돌아가는 외환시장에 효율적으로 대응할 수 있도록 해요.”
“예.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앤드루가 대답하자 랜든이 곁에서 손바닥을 비비며 기대 가득한 표정으로 말했다.
“CDS 옵션 계약과 바트화 롱베팅으로 벌써 31억 달러나 벌었는데 이제 겨우 시작에 불과하다니. 연말까지 수익률이 얼마나 될지 벌써부터 기대가 되는군요.”
어깨를 들썩이며 낮게 웃는 모습에 앤드루도 피식 입꼬리를 올렸다.
“저도 그렇습니다.”
그런 두 사람을 보면서 석원이 살짝 미소를 지었다.
“결과는 나와봐야 알겠지만 지난 몇 년간 올린 수익을 다 합친 것보다 더 많은 돈을 벌게 될 거예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단언하자 랜든이 오오, 하고 기뻐하는 표정을 지었다.
“크흐. 생각만 해도 짜릿하군요. 그럼 보너스도 그에 걸맞게 챙겨주시겠지요?”
“염려 말아요. 대신 보너스를 받고 나서 이제 돈을 충분히 벌었으니 은퇴한다는 말만 하지 말아요.”
능청스런 말투에 석원 역시 웃으며 농담으로 받아쳤다.
“하하.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나가라고 하실 때까지 옆에 착 달라붙어 있을 테니 그런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보스 곁이 아니라면 어디서 이런 짜릿한 베팅을 할 수 있겠습니까.”
든든하기 짝이 없는 두 사람의 모습에 석원은 흐뭇하게 미소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