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lden Spoon Investment Portfolio RAW novel - Chapter (329)
금수저 투자백서 329화(329/332)
329. 지금은 절대 달러를 팔아서는 안 돼요.
“다 왔습니다.”
뒷자리에 탄 최호근 부장이 안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만 원짜리 지폐를 앞에 있는 택시 기사한테 내밀었다.
“잔돈은 가지세요.”
“아이고. 고맙습니다.”
차 문을 열고 내리자 택시 기사가 트렁크를 열어주며 짐을 내리는 걸 도왔다.
예정보다 일정이 길어진데다 이것저것 선물을 챙기다 보니 대형 캐리어 두 개에 백팩까지 짐이 많이 늘어나 있었다.
이내 택시가 떠나자 등에 백팩을 멘 최호근 부장은 양손으로 캐리어를 끌면서 살고 있는 아파트 공동현관에 들어섰다.
마침 1층에 내려와 있던 엘리베이터를 타고 위로 올라가자 평범한 복도식 아파트의 긴 복도가 나타났다.
최호근 부장은 집 현관 앞에서 발을 멈추고는 약간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벨을 눌렀다.
그러자 얼마 있지 않아 초인종 스피커에서 아내의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세요?”
“고 여사 나야.”
[어머. 당신이야?]“그래.”
황급히 달려오는 발소리가 들리더니 현관문이 벌컥 열리며 아내인 고정숙이 활짝 웃는 얼굴로 그를 맞이했다.
“어서 와요!”
현관에서부터 느껴지는 익숙한 집 냄새에 최호근 부장은 저절로 미소를 지었다.
이제야 비로소 집에 왔다는 느낌이었다.
“애들은?”
“아직 학교에 있을 시간이잖아요.”
“아. 그렇지.”
최호근 부장이 뒷머리를 긁적이며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아내가 슬쩍 눈을 흘기더니 서운하다는 듯 말했다.
“몇 달 만에 집에 오면서 애들만 찾는 거예요? 그동안 난 안 보고 싶었나 봐?”
앞치마를 한 아내가 팔짱을 끼고 서 있는 모습을 보자 유부남의 본능적인 감각이 위험경보를 알렸다.
까딱하면 귀국 첫날부터 바가지를 제대로 긁히게 생긴 최호근 부장이 황급히 아내를 달랬다.
“그럴 리가 있겠어. 우리 마누라가 얼마나 보고 싶었는데.”
“흥. 못 믿겠는데.”
속으로 식은땀을 삐질 흘린 최호근 부장은 순간 석원이 준 물건을 떠올리고 이거다 하는 표정을 지었다.
“에이. 정말이라니까. 잠깐만 기다려 봐.”
최호근 부장은 곧바로 미국에서 새로 구입한 대형 캐리어를 열고 안에 넣어둔 종이 가방을 꺼냈다.
“자. 받아.”
남편을 놀려주려고 일부러 토라진 척하던 고정숙이 구찌 로고가 큼지막하게 찍힌 종이 가방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어머! 이게 뭐야.”
바로 관심을 보이는 아내의 모습에 최호근 부장이 득의만만하게 대꾸했다.
“뭐긴 뭐야. 뉴욕에 있는 백화점에 갔다가 여보 생각이 나서 큰맘 먹고 샀지.”
“정말?”
“그럼. 그거 아직 국내에는 출시도 되지 않은 신상이라 하더라고.”
최호근 부장이 언제 눈치를 봤냐는 듯 어깨를 당당하게 펴며 말했다.
“세상에! 당신이 어쩐 일이야. 이렇게 센스있는 선물을 다 해주고.”
신이 난 아내가 종이 가방 안에서 박스를 꺼내는 걸 보면서 최호근 부장은 속으로 석원에게 사과했다.
‘사장님. 죄송합니다.’
사실은 구찌 매장에 간 적도 없고 석원이 다 챙겨준 거지만 어쨌든 아내가 기뻐하니 된 거 아닐까.
그러는 사이 아내가 박스를 열자 특유의 구찌 프린트와 금장 홀스빗 장식이 반짝이는 갈색 핸드백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머나! 예뻐라.”
두 손을 모으며 꺅하는 소리를 낸 아내는 얼른 거울 앞으로 달려가 미소가 떠나지 않는 얼굴로 핸드백을 손에 들었다가 어깨에 멨다가 하면서 패션쇼를 해댔다.
‘저렇게 좋아할 줄 알았으면 진즉에 가방 한두 개 정도는 사줄걸.’
잔뜩 들뜬 모습에 최호근 부장이 머쓱하니 서서 생각했다.
사실 최호근 부장 정도면 일 년에 한 번 정도 결혼기념일이나 생일 같은 날에 명품백 정도는 선물해 줄 경제적 능력이 충분했다.
하지만 회사 일에 치이고 아이들을 먼저 챙기느라 아내까지는 미처 신경을 쓰지 못한 게 사실이었다.
이번에 선물을 사 올 때도 아이들 물건은 부탁받은 거 외에도 이거저거 몇 개씩 더 챙겼지만 아내 선물로는 화장품만 딱 샀지 않았던가.
그래서 더 미안한 마음이 드는 것과 동시에 명품백을 챙겨준 석원한테 고마워졌다.
“이거 많이 비싸지 않아요?”
소녀처럼 눈을 반짝거리며 양 볼을 흥분으로 붉힌 아내가 가방을 품에 안고 물었다.
최호근 부장은 괜히 헛기침을 하고는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굴었다.
“좀 나가지만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지.”
“여보…….”
최호근 부장은 고개를 슥 돌려 아련해진 아내의 눈빛을 피했다.
진심으로 감격한 듯한 모습을 보니 이상하게 없는 양심이 자꾸 찔리는 기분이었다.
이내 부스럭거리며 가방을 다시 박스에 챙겨 넣은 아내가 수줍게 미소지으며 다가왔다.
“금방 씻고 나올 테니까 잠시만 기다리고 있어요.”
“응?”
배고프니까 밥이나 달라고 하려던 최호근 부장이 당황한 얼굴로 아내를 쳐다봤다.
“애들 학교에서 돌아오려면 아직 멀었으니까 지금이 기회에요.”
“아니. 나 방금 와서 피곤한데. 일단 밥부터…….”
하지만 아내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오히려 눈을 찡긋하며 윙크까지 날렸다.
“오늘 기대해요.”
기대하란 말 뒤에 핑크색 하트가 붙어 있는 듯한 환청까지 들리자 등골에 소름이 쫙 끼쳤다.
“여. 여보! 비행기를 타고 오느라 힘들기도 하고 아직 몸도 못 씻었는데.”
“그럼 같이 씻을까요?”
“……!”
사색이 된 최호근 부장이 필사적으로 고개를 흔들었지만 아내는 이미 돌아선 뒤였다.
“오랜만에 신혼 기분도 내고 그것도 좋겠네요. 욕조에 물 받아 놓을 테니까 일단 옷부터 벗고 있어요.”
그러면서 아내는 콧노래를 부르며 욕실로 떠났다.
욕실에서 물을 받는 소리가 크게 들리자 최호근 부장은 쓰러지듯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왜. 왜 이런 식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 건데.”
방금 돌아왔지만 다시 집을 나가고 싶은 마음이 한껏 솟구쳤다.
***
서울 한남동.
높다란 담장으로 둘러싸인 저택 앞에 검은색 벤츠 대형 세단이 미끄러지듯 다가와 멈춰 섰다.
수행비서가 얼른 차 문을 열어주자 박태홍 회장과 큰아들인 박진형 사장이 뒷좌석에서 내렸다.
잔디가 깔린 넓은 정원을 가로질러 본채로 들어서자 진주목걸이와 가벼운 홈드레스를 입은 조덕례 여사가 둘째인 석원과 함께 나란히 서서 두 사람을 반겼다.
“고생하셨어요.”
박태홍 회장은 머리를 끄덕이고는 옆에 있는 둘째 아들을 바라봤다.
“왔구나.”
“네. 그동안 잘 지내셨죠.”
“나야 항상 똑같지.”
박태홍 회장은 그렇게 말하며 구두를 벗고 집안으로 들어왔다.
“형도 오랜만이야.”
뒤따라오는 박진형 사장에게 슬쩍 인사를 건네자 석원의 어깨를 두드리며 반갑게 대꾸했다.
“미국에 갔던 일은 잘 끝내고 왔냐.”
“그럭저럭.”
자신이 챙겨주기는커녕 오히려 도움을 받을 정도로 혼자서도 알아서 잘 하는 동생이었기에 박진형 사장은 걱정없이 웃으며 말했다.
“너 온다고 오늘도 어머니가 음식을 한 상 가득 차리셨겠는데.”
“안 그래도 음식 해둔 거 보고 무슨 잔칫날인 줄 알았다니까.”
“하하. 그럴 줄 알고 미리 소화제를 먹고 왔지.”
다른 재벌가 형제들과 달리 사이좋은 대화를 나누며 두 사람이 함께 거실로 향했다.
잠시 뒤 식탁에 나란히 앉자 석원이 말한 것처럼 크게 한 상 가득 차려진 저녁상이 나왔다.
어쩐지 날이 갈수록 더 좋아지는 것 같은 군산댁의 요리 솜씨를 칭찬하며 화기애애하게 저녁 식사를 끝마친 박태홍 회장과 두 아들은 이후 서재로 자리를 옮겼다.
“차 드셔요.”
군산댁이 세 사람 앞에 따뜻한 차를 내려놓고 나가자 박태홍 회장이 혀를 쯧 찼다.
“커피가 좋은데 집에만 있으면 꼭 이걸 마시라고 한다니까.”
박태홍 회장은 생강차를 집어 들면서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다 아버지 기관지 건강을 걱정해서 그러시는 거잖아요.”
큰아들이 웃으며 하는 말에 박태홍 회장은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다 때가 되면 가는 것이지. 무슨 천 년 만년을 살겠다고 먹고 싶은 것도 마음대로 못 먹고 살아.”
생강차뿐만이 아니라 계피, 오미자, 대추, 도라지를 비롯해서 좋다는 차들은 다 종류별로 갖다 먹일 뿐만 아니라 가끔 냄새 고약한 한약까지도 내밀곤 하니 먹는 사람도 곤욕이긴 했다.
하지만 투덜거리면서도 커피로 바꿔오라는 말은 하지 않고 생강차를 후룩 마시는 걸 보면 역시 박태홍 회장도 어쩔 수 없는 애처가였다.
‘그래도 어머니가 하라는 건 그대로 다 하신다니까.’
어쨌건 사이가 좋아 보이는 모습에 석원도 슬쩍 미소지었다.
찻잔을 내려놓고 뒤로 몸을 기댄 박태홍 회장은 석원을 보면서 약간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며칠 전에 삼오그룹이 부도를 내고 법정 관리에 들어갔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거다.”
“네.”
삼오그룹은 식용유를 만드는 것으로 처음 시작해 목재업을 통해 사세를 불린 뒤에 해운과 특수강 사업에 진출해 대기업 집단으로 성장한 회사였다.
한세그룹에 이어 재계 서열 26위의 대기업인 삼오그룹까지 부도를 내면서 재계에는 연쇄 부도에 대한 공포가 더욱 커지고 있었다.
특히나 삼오그룹은 부산에서 유니 백화점을 운영하고 있었기에 박태홍 회장은 이번 부도가 더욱 크게 다가왔다.
“무리한 사업 확장과 특수강 경기 악화로 부채가 많기는 했지만 그래도 작년에 특수강 설비를 포항제철에 매각해 7천억이나 되는 유동성을 확보해서 괜찮은 줄 알았는데. 갑자기 부도를 내서 정말 충격이었습니다.”
큰아들의 이야기에 박태홍 회장이 작게 머리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습관처럼 탁자 위에 놓인 원목함에서 담배를 한 개비 꺼내 입에 물고는 불을 붙였다.
“다 한세그룹 부도로 인해 시중 자금이 말라붙어 버린 여파지.”
실제로 삼오그룹은 지난 2년간의 구조조정을 통해 부채 비율을 100%까지 크게 낮춘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도를 낸 한세그룹에 수조 원의 돈을 물려 버린 은행들이 대출을 조이고 만기 연장을 해주지 않자 속수무책으로 그대로 도산하고 말았다.
이렇게 될 걸 알고 있던 석원이 담담하게 말했다.
“하필이면 한세그룹하고 같은 일한 은행을 주거래 은행으로 두고 있었다는 것이 삼오그룹한테는 큰 불행이었을 거예요.”
맞은편에 앉아 있는 동생을 보며 박진형 사장이 굳은 얼굴로 물었다.
“한동안 이런 어려운 상황이 계속 이어지겠지?”
박태홍 회장도 석원의 대답이 궁금한지 손가락 사이에 담배를 끼운 채 쳐다봤다.
두 사람의 시선을 받은 석원은 진지한 얼굴로 단언했다.
“진짜는 아직 오지도 않았어. 이건 태풍이 몰아치기 전에 먼저 쏟아지는 비바람에 불과해.”
그러자 박진형 사장은 물론이고 박태홍 회장도 깜짝 놀라 눈썹을 치켜올렸다.
뒤로 기대앉아 있던 박태홍 회장이 몸을 바로 세우며 되물었다.
“앞으로 더 큰 태풍이 올 거라고 했냐?”
석원은 무겁게 머리를 끄덕였다.
“네. 유동성 위기를 겪는 기업이 이미 부도를 낸 두 그룹뿐일까요. 전 절대 아니라고 봐요. 대부분의 국내 기업들이 3저 호황을 타고 무리한 확장과 설비 증설을 해온 걸 생각하면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을 품고 있는 그룹이 한두 곳이 아닐 거예요.”
그러자 박태홍 회장도 심각한 표정으로 동의했다.
“둘째 네 말이 맞다. 당장 우리만 해도 네가 만류하지 않았다면 중국 공장을 증설한다고 부채를 크게 늘렸을 테니 말이다.”
“맞습니다. 그때 석원이의 이야기를 듣지 않았으면 지금 어떻게 됐을지 생각만 해도 아찔하네요.”
박태홍 회장 역시 그때 일만 생각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가슴을 쓸어내릴 정도였다.
만약 석원의 말을 무시하고 중국 공장 증설을 강행했다면 부채 문제 때문에 지금처럼 마음 편히 있지는 못했을 터였다.
박태홍 회장은 부드러운 시선으로 둘째 아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서 하는 이야기다만, 환율도 괜찮으니 달러로 바꿔둔 자금을 환전해서 다음 달에 돌아오는 대출을 일부 상환하려고 하는데. 네 생각은 어떠냐.”
이야기를 들은 석원이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은행에서 상환을 요구하는 거예요?”
“그런 건 아니고 일부 상환을 한다면 만기 연장을 할 때 크게 오른 가산 금리를 조금 낮게 책정해 줄 수 있다고 하더구나.”
연쇄 부도 사태로 인해 기업 대출 금리가 예전보다 크게 오른 상태였기에 솔깃할 만한 제안이었다.
하지만 석원은 깊이 생각해볼 것도 없다는 듯 강하게 대꾸했다.
“아니요. 지금은 절대 달러를 팔아서는 안 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