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lden Spoon Investment Portfolio RAW novel - Chapter (331)
금수저 투자백서 331화(331/332)
331. 이제 곧 게임이 시작될 텐데 낄 준비는 됐죠?
1997년 4월 3일.
높다란 빌딩들 사이로 하늘을 붉게 물들이며 해가 떠오르기 시작한 새벽.
은색 소나타Ⅱ 한 대가 비탈길을 내려와 이른 시간이라 텅 빈 지하 주차장에 멈춰 섰다.
운전석 차문을 열고 내린 최호근 부장이 소매를 걷어 손목에 찬 시계를 확인하자 이제 막 6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딱 맞춰왔네.”
이제 막 버스 첫차가 다니기 시작한 새벽이었지만 서울하고 2시간 시차가 나는 시드니 외환시장 개장 시간을 맞추려면 지금 나와야 했다.
드디어 오늘이 석원이 이야기했던 대로 엘도라도 펀드와 함께 헤지펀드들이 동남아에서 벌이고 있는 커다란 도박판에 끼어드는 첫날이었기에 최호근 부장의 얼굴엔 걱정과 함께 설렘이 가득했다.
사실 빅 플레이어인 엘도라도 펀드가 트레이딩 할 때 살짝 꼽사리 껴서 업혀 가는 것에 가까웠지만 어찌 됐건 대흥창투 자금운용부의 해외 무대 첫 데뷔 날이니 긴장이 안 될 수가 없었다.
거기다가 베팅할 판돈도 2억 달러가 넘었기에 더욱 심장이 두근거렸다.
‘레버리지도 쓸 거라고 하셨으니까 베팅액은 원금보다 훨씬 더 많겠지.’
물론 수백억 달러를 움직이는 엘도라도 펀드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액수였지만 지금까지 최호근 부장이 여의도에 있으면서 트레이딩 해본 것 중에 가장 큰돈이었다.
숨을 한번 크게 들이마셨다가 내뱉은 최호근 부장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할 수 있어.”
그렇게 스스로 다짐하곤 서류가방을 들고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조용한 복도를 지나 불이 환하게 켜져 있는 자금운용부 사무실로 들어가자 이미 팀원들이 먼저 출근해 있었다.
와이셔츠에 파란색 실크 넥타이를 맨 정환엽 과장이 서류를 든 채 자리에 앉아 있다가 막 들어서는 최호근 부장을 보고 고개를 꾸벅였다.
“어서 오십시오. 부장님.”
그러자 다른 팀원들도 이어서 머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오셨습니까.”
최호근 부장은 한쪽 손을 들어 올리며 가볍게 인사를 받았다.
“다들 좋은 아침이야.”
“아침이 아니라 새벽인데요.”
버릇처럼 깐죽대는 목소리에 최호근 부장은 서류가방을 책상에 올려놓으며 싱긋 웃었다.
“정 과장. 이틀 쉬면서 내 잔소리가 많이 고팠나 봐. 어디 배 터질 때까지 처먹여줘?”
“헤헤헤. 그럴 리가요.”
이틀만에 보는 건데도 주먹을 부르는 주둥아리는 여전했다.
최호근 부장이 머리를 절레 흔들며 한숨을 내쉬는데 아직 앳된 얼굴을 한 젊은 여직원이 잔뜩 긴장한 얼굴로 다가와 두 손으로 깔끔하게 철한 얇은 프린트물을 내밀었다.
“말레이시아 링깃화 관련 자료입니다.”
“아. 고마워.”
프린트물을 건네받은 최호근 부장은 여직원을 보며 물었다.
“이름이 노희원이라고 했지?”
“네.”
단발머리에 수수한 화장을 한 노희원은 올해 19살로 여자 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입사한 신입사원이었다.
미국 연수 이후 본인 희망에 따라 트레이더 일을 하게 된 홍재희를 대신해 백 오피스(Back office) 업무를 맡아 새로 팀에 합류하게 된 인원이었다.
IMF 전까지만 해도 정직원으로 고졸 신입사원을 뽑는 것이 그리 보기 드문 일이 아니었다.
특히 금융계통이 그랬는데 은행이나 증권사 창구 여직원들은 대부분이 여상을 졸업한 고졸 사원들이었을 정도였다.
그러다 보니 고졸 출신의 은행이나 증권사 지점장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물론 이것도 IMF 이후로 상황이 완전히 바뀌게 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취업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고 한번 회사에 들어가면 한 곳에서 정년까지 근무하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졌다.
그리고 인턴이나 비정규 계약직 같은 것도 없이 청소원이나 경비원들도 전부 회사 정직원들이었다.
“일은 할 만해?”
“네. 다들 잘 가르쳐주셔서 열심히 배우고 있습니다.”
최호근 부장은 신입 티가 풀풀 나는 노희원에게 너그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렵거나 모르는 게 있으면 언제든지 선배들한테 물어봐.”
다들 성격이 좋아서 친절하게 대해줄 거다, 하고 말하던 최호근 부장은 의자에 비스듬히 앉아 있는 정환엽 과장을 보곤 인상을 팍 찡그렸다.
“아니다. 괜히 이상한 물이 들 수도 있으니까 그냥 똑 부러지는 미스 홍한테 일을 배워.”
그러자 한 손으로 모나미 볼펜을 돌리면서 자료를 보고 있던 정환엽 과장이 고개를 휙 치켜들었다.
“그거 저 들으라고 하는 말씀이세요?”
“말은 더럽게 안 들으면서 귀는 엄청 밝아 가지고.”
“와. 정말 너무하신 거 아니에요. 그래도 부장님하고 저하고 같이 먹은 해장국이 몇 그릇인데!”
정환엽 과장이 상처를 받은 척을 하면서 서운하다는 표시를 했다.
“그놈의 정 때문에 아직 널 데리고 다니는 거야. 안 그러면 벌써 갖다 버렸지.”
“부장님!”
“시끄러워! 일이나 해!”
오늘도 어김없이 투덕거리는 두 사람의 모습에 유석현과 홍재희가 키득거리며 웃었지만 이런 상황이 생소한 노희원은 당황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저. 안 말려도 될까요?”
“괜찮아, 괜찮아.”
홍재희가 손을 흔들었다.
“저 두 분은 항상 저러니까 신경 쓰지 말아요.”
“맞아. 오히려 저렇게 싸우는 소리를 안 들으면 뭐 하나 빠진 것처럼 허전하다니까.”
유석현과 홍재희가 태연하게 대꾸하면서 신입을 안심시켰다.
그때 바닥을 밟는 구둣발 소리와 함께 석원이 수행비서인 한지성 대리를 대동하고 사무실로 들어왔다.
“다들 일찍 나왔네요.”
석원이 등장하자 최호근 부장과 팀원들은 하던 이야기를 멈추고 일제히 일어나 인사했다.
“어서 오십시오. 사장님.”
가볍게 인사를 받은 석원은 옆으로 다가온 최호근 부장을 보며 물었다.
“트레이딩 준비는 다 됐어요?”
“예. 엘도라도 펀드 뉴욕 본사와 홍콩, 도쿄 사무실하고 직통 전화를 설치해뒀고 거래 계좌도 터놨습니다.”
대흥 창투 계좌로 직접 트레이딩을 하면 더 좋았겠지만 여러 가지 절차와 법적 문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번에는 투자금을 엘도라도 펀드 계좌에 넣어두고 주문을 넣으면 대신 처리해주는 방식을 쓰기로 했다.
“이번에 성과가 좋으면 앞으로는 직접 트레이딩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줄 테니까. 열심히 해봐요.”
이번이 끝이 아니라 다음에도 이런 기회를 준다는 말에 최호근 부장이 눈동자를 반짝였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최 부장과 팀원들이라면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잘 해낼 거라고 믿어요.”
석원이 보여주는 신뢰에 최호근 부장과 팀원들은 의욕에 가득찬 표정을 지었다.
전폭적인 믿음을 받고 있다는 자부심과 함께 꼭 잘 해내서 기대에 부응해야겠다는 마음이 가슴 속에서 솟구쳤다.
“타겟인 말레이시아 링깃화 움직임은 어때요.”
석원이 묻자 조금 전까지 환율을 보고 있던 정환엽 과장이 빠릿하게 바로 대답했다.
“연말까지만 해도 1달러에 2.5링깃이던 것이 태국 외환위기 이후 크게 떨어져 현재는 2.8링깃에 거래 중입니다.”
최호근 부장이 자연스럽게 끼어들며 말을 덧붙였다.
“엘도라도 펀드에서 보내준 자료에 따르면 그동안 불안감을 느낀 외국인 투자금이 15억 달러 정도 유출됐다고 하는데. 낙폭이 크지 않은 걸로 볼 때 네가라 은행이 개입해 환율을 방어한 것이 분명합니다.”
네가라 말레이시아 은행(Negara Malaysia Bank)는 말레이시아 중앙은행의 이름으로 흔히 BNM이라고도 불렸다.
“하지만 불안감이 커지면서 환율뿐만 아니라 연초 1,200포인트를 찍었던 주가지수도 크게 떨어져 1,077까지 폭락한 상태입니다.”
팔짱을 낀 채 이야기를 들은 석원은 작게 머리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직 공격이 이루어지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흔들린다는 건 그만큼 외부 충격에 취약하다는 뜻이기도 할 거예요.”
“맞는 말씀입니다.”
“그럼 계획대로 시드니 외환시장이 열리는 것과 함께 엘도라도 펀드가 링깃화를 팔기 시작하면 기다리고 있다가 도쿄에서 말레이시아 종합주가지수를 매도하도록 해요.”
“알겠습니다.”
선택과 집중을 해서 헤지펀드들의 공격이 집중될 링깃화 대신 대흥창투는 환율이 흔들리면 폭락할 말레이시아 종합주가지수(KLCI)를 공매도하기로 했다.
“조금 있으면 거래를 시작해야 되는데 내가 눈치 없이 시간을 뺏었네요.”
석원이 한쪽 팔을 들어 손목에 찬 시계를 확인하더니 미안하다는 듯 말했다.
“난 이만 가볼 테니까 거래를 잘 하도록 해요.”
“예!”
“올라가십시오.”
최호근 부장과 팀원들은 일어서서 석원이 한지성 대리와 함께 사무실을 나갈 때까지 허리를 숙이며 배웅했다.
숨을 한번 들이마셨다가 내뱉은 최호근 부장이 크게 손뼉을 쳤다.
“자! 다들 사장님 말씀 잘 들었지. 중요한 거래니까 실수하는 일이 없게 정신들 똑바로 차리고 뉴욕에 있는 친구들한테 우리 실력을 확실히 보여주도록 하자고. 알겠지?”
“예에.”
석원이 떠나자마자 다시 게으른 자세로 의자에 늘어져 있던 정환엽 과장이 손가락을 풀면서 대답했다.
“어디 한 번 제대로 실력 발휘를 해 볼까.”
유석현도 의자를 끌어당겨 앉으며 의욕에 찬 목소리를 냈다.
“메이슨이 깜짝 놀라게 해주자고요.”
그리고 지원 업무에서 벗어나 트레이딩을 하게 된 홍재희는 새롭게 모니터 여러 대가 설치된 책상을 보며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래요! 저도 열심히 할게요!”
“캬. 우리 미스 홍 완전 활활 불타오르는데?”
“저도 미국 연수에서 느낀 게 많았거든요.”
“그건 아마 다들 그럴걸.”
정환엽 과장이 씩 웃으며 대답했다.
그런 가운데 와이셔츠 소매를 걷어붙인 채 자리에 앉은 최호근 부장은 수화기를 들고 뉴욕에 전화를 걸었다.
연결음이 들리고 얼마 있지 않아 헬로우하며 상대가 전화를 받자 최호근 부장이 영어로 말을 걸었다.
“메이슨. 나예요.”
[아. 미스터 최! 한국에는 잘 도착했어요?]“덕분에요.”
메이슨은 유쾌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제 곧 게임이 시작될 텐데 낄 준비는 됐죠?]은근한 도발이 섞인 말투에 최호근 부장이 입가에 짙은 미소를 지으며 자신 있게 대꾸했다.
“물론이죠.”
* * *
사장실로 올라온 석원은 컴퓨터 모니터와 블룸버그 단말기가 설치된 책상 앞에 앉아 아시아에서 가장 빨리 열리는 시드니 외환시장이 개장하길 기다렸다.
똑똑.
역시 일찍 출근한 나성미가 문을 열고 들어와 책상에 머그컵을 내려놓았다.
보통 때는 고급스러운 찻잔에 차를 가져왔지만 오늘은 긴 하루가 될 터였기에 석원이 일부러 머그컵에 커피를 진하게 타 달라고 주문한 거였다.
“고마워요.”
“다른 건 또 필요한 게 없으신가요?”
“괜찮아요.”
석원은 머그컵을 들어 입으로 가져가며 나가보라는 듯 눈짓했다.
나성미가 고개를 꾸벅 숙이고 떠나자 그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는 컵을 내려놓고 모니터에 띄워둔 말레이시아 링깃화 차트를 주시했다.
[MYR : 2.86]그때 울리는 벨소리에 책상 한쪽에 놔둔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통화 버튼을 누르자 뉴욕에 있는 랜든의 목소리가 들렸다.
[보스. 10분 뒤부터 매도를 시작할 겁니다.]“그렇게 해요.”
석원이 몸을 뒤로 기대며 짧게 대답했다.
[그럼 변동 사항이 있으면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조금 있으면 시드니 외환시장이 열리는 데다 이미 베팅을 어떻게 할 건지 계획이 다 짜여져 있는 상황이었기에 길게 이야기를 할 필요가 없었다.
휴대폰을 내려놓은 석원은 모니터를 바라보면서 느긋하게 개장 시간을 기다렸다.
그렇게 얼마쯤 있었을까.
7시 정각이 되자 멈춰있던 환율 차트가 마침내 움직이기 시작했다.
전날 네가라 은행장과 말레이시아 재무부 장관이 기자회견에 나와 환투기 세력의 공격이 있으면 총력을 다해 맞서 싸우겠다고 천명한 영향 때문인지 링깃화 환율이 하락을 멈추고 횡보하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갑자기 대규모 매도 주문이 나오며 환율이 아래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MYR : 3.00 (▲ 0.14)]느긋하게 기다리던 석원은 그걸 보고는 흰 이를 드러내고 웃으며 혼잣말을 내뱉었다.
“이제 시작됐군.”
순식간에 달러당 3링깃을 깨고 내려간 환율은 점점 더 하락폭을 크게 키우며 아래로 무섭게 곤두박질쳤다.